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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맨스판타지로 떨어진 S급 헌터-112화 (112/150)

111화 시간아, 천천히 (3)

“앉으라고 하면 좀 뭐한가?”

마리나가 입을 열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별로 쓸 일이 없었을 텐데도 전혀 갈라지지 않았다. 난 바로 앉았다. 칸나는 그냥 서 있기로 했다. 솔직히 칸나도 귀족 영애인데, 벌레들 사이에 앉히는 건 좀 그렇지. 아무리 반유령 상태라지만 말이야.

“오랜만이야.”

“그래. 들리긴 해?”

“나를 뭘로 보고. 이 제국의 희망, 성녀 아니겠어?”

마리나는 웃었다.

“공녀도 오랜만이네.”

“네, 그, 오랜만이에요. 잘 계셨어요?”

아이리는 그 말을 하고 즉시 후회하는 것처럼 보였다. 하긴, 3년 동안 이런 벌레들 틈에서 지내는 건 그녀로선 아예 상상도 못 할 일이니까.

하지만 마리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지낼 만해. 사람은 적응의 동물이잖아. 이 세 평 방 안이 내 세계라고 생각하면 전혀 문제될 건 없어.”

“그런가.”

아무리 그래도 이건 좀 심한 것 같은데. 다시 청소를 해 주고 싶었지만, 나는 그러지 못하는 몸이었다.

“뭐, 내가 해 줄 말은 딱히 없어. 열심히 해. 아니다, 이거 줘야 되는구나. 마지막에 실수할 뻔했네.”

그녀는 땅바닥에 내려앉은 머리카락을 헤집었다. 머리카락이 워낙 많아서 꽤 시간이 걸렸다. 그녀가 꺼낸 건 두 개의 목걸이였다.

그건 분명히 내 기억에도 있는 목걸이들이었다. 물이 소용돌이치는 목걸이, 불이 소용돌이치는 목걸이.

“그걸 어디서 구했어?”

“가티스랑은 친하니까 그냥 받아 왔지. 가테스는 죽었을 때 훔쳐 왔고.”

마리나는 그 두 개의 목걸이를 내게 걸어 주었다. 신기하게도 그 목걸이는 내 목에 걸쳐졌다. 무언가를 걸치는 느낌이 이렇게 낯설게 느껴질 줄이야. 역시 사람은 적응의 동물이다.

“공녀, 이리 와. 시간이 그렇게 많지가 않으니까.”

아이리가 멈칫대며 다가갔다. 한껏 꾸민 아이리, 감옥에 갇혀 3년이나 지낸 마리나. 그녀들이 한 시야에 담긴다는 건 정말로 이질적이었다.

마리나는 일어났다. 그때 난 깜짝 놀랐다. 머리카락에 가려져 있어 그녀가 옷을 완전히 벗고 있는지 몰랐기 때문이다. 그녀의 하얀 나신이 내 눈에 담겼다. 그건, 마치 조각상 같은…….

그때 아이리가 내 얼굴을 강제로 손바닥으로 밀어 돌렸다.

“보지 마!”

“뭐, 닳는 것도 아닌데.”

정작 마리나는 웃음을 지었다. 근데 왜 그럴까. 정말 난 그녀의 몸을 보고서도 흥분되거나 그러지 않았다. 3년간 감옥 밥만 먹어서 말라서 그랬을까? 실제로 그녀는 갈비뼈가 다 드러날 정도로 삐쩍 말라 있었다. 하지만 그게 아니었다.

그래, 마치 사람 외 다른 생물의 나체를 보는 것처럼. 고양이나 강아지를 본 것과도 같았다.

난 다시 마리나를 바라보았다. 마리나는 개의치 않고 자신의 할 일을 했다.

마리나는 아이리를 안았다. 마리나가 아이리보다는 키가 좀 컸다. 그것도 그렇지만, 정리가 안 돼 개털처럼 삐져나온 금발이 아이리를 감쌌다.

아이리는 당황한 듯이 보였다. 늘 까칠한 마리나였으니까. 마리나는 입을 열었다.

“당황스럽지?”

“어, 음.”

아이리는 말을 골랐다. 마리나는 웃었다.

“원래 자기도 모르게 다가온 애정이 무서운 법이거든. 난 그냥 늘 쿨하고 싶었는데, 근데 그게 잘 안 돼.”

“무슨 말이에요?”

마리나는 아이리의 되물음을 무시하고 말을 계속 이었다.

“정말 이토록 마음 놓고 막 살아 보는 게 얼마 만인지, 감이 안 와. 안고 싶은 사람을 안고, 말하고 싶은 걸 말하는 것, 행하고자 하는 걸 행하는 것, 좋아하는 걸 좋아한다고 말하는 것.”

마리나는 계속 아이처럼 웃었다. 그 미소는 정말 너무 아름다웠다. 그래서인가, 점점 그녀가 사람에게서 멀어지는 기분이었다.

“공녀, 미안해. 예프린은 원래 너를 떠나갈 예정이었어. 그래야 이야기가 진행되니까.”

“네, 네? 그건 무슨 말씀이세요?”

“사과할 게 정말 많은데, 언젠가 다시 얘기할 수 있는 기회가 오면 좋겠다. 지금은 시간이 많지 않거든.”

그 말을 마침과 동시에 마리나의 온몸에서 빛이 뿜어져 나왔다. 바닥에 가라앉은 금빛 머리카락이 빛을 뿜으며 서서히 떠오른다. 그 빛은 부유하며 떠돌다가 아이리의 온몸으로 들어갔다. 내가 느끼기에도 엄청난 힘이었다. 아이리는 입술을 앙다물었다. 그 힘이 아이리에게는 버거운 모양이었다.

“좀만 참아. 내 신성력이 공녀에게 전부 가고 있으니 힘든 것도 무리는 아니야. 그래도 신성력을 단련하려고 노력했구나. 그렇지 않았으면 기절했을 거야. 지금까지 잘했어.”

마리나는 아이리의 귓전에 대고 상냥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렇게 상냥할 줄도 아는 사람이었나.

“에퍼리, 여신한테 검은 씨앗은 잘 뿌리고 왔겠지?”

“…응? 응.”

얜 그걸 어떻게 알고 있지. 마리나는 당연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은 여신이 날 보고 있지는 않겠네. 검은 나무도 꽤 여신한테 증오가 쌓여서, 떼어 내려면 좀 시간이 걸릴 거거든. 그렇다고 시간이 많은 건 아니야.”

“좀 풀어서 설명해 줘.”

“빨리 말해야겠다. 난 3년 동안 굶었어. 원래라면 죽어도 이상하지 않아. 아마 신성력이 다 떨어지면 이 몸은 사라지겠지.”

갑자기 터진 그녀의 폭탄 발언에 나는 어안이 벙벙할 지경이었다. 확실히, 벌레가 많이 꼬이는 이유가 있었나. 저 방구석에는 그녀가 엎은 것으로 보이는 쟁반과 벌레가 가득했다.

“난 지금껏 너무 많은 인생을 살아왔어. 너는 모르는, 몇천 번의 삶을 말이야.”

“아니, 잠깐만. 몇천 번?”

내가 알기로 그녀의 삶은 세 번째다. 하지만 지금 그녀의 말은 아예 다르다.

“몇천 번. 왜, 안 믿겨?”

“믿기겠어?”

“그러면 내가 지금까지 싸가지 없이 굴었던 것도 여신을 속이려고 했던 행동이라는 걸 못 믿겠네?”

“…할 말이 없다.”

“섭섭하네. 넌 고작 한 번 봤는데도 질렸는데, 그걸 실제로 몇천 번 한 연기자는 어떤 느낌이겠어?”

난 대체 무슨 말을 듣고 있는 걸까. 마리나는 계속 말했다.

“누구 탓을 하려는 건 아니야, 다름 아닌 내가 그랬으니. 내가 시간을 돌렸어. 결말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네가 시간을 돌렸다고?”

“나는 지금 신에 가까운 사람이야. 네가 시침 뗀 엘파힘의 심안이라는 기술이 무슨 작용을 하고 있는 건지도 알고 있지. 난 네 생각보다 많은 걸 할 수 있어.”

마리나는 그렇게 말하고 감옥 천장을 바라보았다. 아무것도 없는 천장에 갑자기 서리가 끼더니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정말, 말도 안 되는 신기였다.

“솔직히 말하면, 너희를 체스 말처럼 움직인 것도 사실이야, 내 결말을 위해서. 그건 솔직히 쉽지 않은 일이었어. 온갖 개변이 들어가야 하는 일이었으니까. 에퍼리, 넌 내 체스 판의 퀸이었어. 그리고 가테스를 죽인 것에 대해서 취해서 그랬다고 생각하지 마. 내가 너한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한 감정 개변이 가테스를 죽이게 하는 것이었으니까.”

하늘이 보이지 않는 공간의 바닥에 눈이 쌓이는 걸 난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래, 난 지금 생각해 보면 가테스를 그렇게 급하게 죽일 생각이 없었다. 이미 노을이로 분한 귀족들도 섭외해 놨고 다음 플랜들도 다 있지 않았는가.

그게 마리나의 인지 개변 때문이었다니. 그렇다면 마리나가 정말 자신이 죽였다고 말하고 다닌 것도 이해는 된다. 다만 왜 죽였는지는 아직도 모르겠지만. 그리고 몇천 번 살았다는 말도.

“네가 시간을 돌려서 몇천 번 살았다. 그리고 일관되게 행동한 건 여신의 눈길을 피하기 위해서다?”

“그래.”

아이리는 여전히 정신이 없어 보였다. 그래도 다 듣고는 있겠지. 칸나는 옆에서 얼이 빠진 표정이었다. 그녀가 듣기에는 너무 중간이 생략된 얘기들일 테니까.

“왜?”

“결말이 마음에 안 들어서. 작가의 고쳐 쓰기라고 보면 돼.”

무슨 결말? 가테스가 자신을 찼다는 거? 아니, 그러면 말이 안 된다. 가테스는 내가 죽이지 않았는가.

난 원작을 읽고 손아귀에서 사람들을 굴리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정말 손아귀에 사람을 놓고 살았던 건 마리나였던 거다. 나는 그때 소름이 돋았다.

“잠깐, 지금 내가 여기까지 도달한 횟수를 말해 줘.”

“응?”

마리나가 살짝 당황했다. 갑자기 그런 질문을 하고 싶지 않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런 답 들어서 뭣 하랴 하는 생각이었다. 난 머리를 세차게 저었다. 방금 내가 했던 생각은 논리 구조를 갖춘 질문이었다. 답을 안 들을 이유가 없다. 난 마리나를 째려보았다. 마리나는 상큼하게도 웃었다.

“두 번째 개변. 봐줘, 어차피 안 통했네.”

“빨리 말해.”

“381번째.”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난 마리나의 시간 속에서 몇천 번을 같이 살았다. 그리고 내가 여신에게 검은 씨앗을 뿌릴 것도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내가 여기까지 도달한 적도 있다는 것.

“이 상태로?”

“음, 뭐. 그렇지.”

“근데 내가 네 말을 들어줘야 하는 이유가 있어?”

“믿어 줘. 그것밖에 할 말이 없어. 난 모두의 행복을 위해 이러고 있는 거니까. 몇 명만 행복한 엔딩은 충분히 만들 수 있었어, 지금까지 기회도 있었고. 하지만 모두가 행복해야 돼. 그게 내 신념이야.”

마리나는 날 보았다. 나는 그녀에게 물어볼 게 너무나도 많았다. 시간이 부족한 건 알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네가 죽는데 결말이 중요한 거야? 네가 죽음으로써 얻는 게 뭔데?”

“이 세계에서 죽는 게 죽는 거야? 넌 대충 알고 있잖아. 내가 떡밥 하나 던져 줄까? 우린 다시 만나게 돼. 물론 네가 잘했을 때의 얘기지만. 이것 역시 빌드 업의 차원이라는 걸 알아 둬.”

마리나가 말했다.

“너도 모든 사람이 행복하기를 원하잖아, 이 작품의 팬으로서.”

나는 여전히 주저했다. 뭘 어떻게 해야 하지. 이런 생각뿐이었다. 지금까지 온 나도 똑같은 생각이었을까. 그때의 나는 지금의 나와 다를까? 지금의 나는 어떤가?

“난 널 믿어. 넌 몇천 번의 삶 동안 가장 일관된 모습을 보여 줬으니까. 마치 하나의 삶을 사는 것처럼. 그래서 네가 내 퀸이 된 거야.”

어느새 눈이 그쳤다. 이미 우리 발목까지 눈이 덮였다. 뭔가 신기한 광경이었지만, 이 상황이 더 신기했다. 마리나는 아이리에게 말했다.

“공녀, 다 듣고 있었지? 칸나도. 자, 공녀가 감옥에 들렀는데 감옥에 있는 제국의 중죄인이 죽었어. 괜히 조사받고 구금되어 있을 시간이 없어. 바로 옌시로 가. 지도는 알레프가 줬을 거니까.”

마리나는 아이리를 품에서 떼어 내며 쓰러졌다. 순식간에 그녀의 숨이 가빠졌다. 아이리의 몸에서 신성력이 가득한 게 느껴졌다. 마리나의 신성력이 아이리에게 모두 전해진 게 느껴졌다. 아이리도, 칸나도, 나도 당황해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마리나는 눈밭과 머리카락 속에서 몸을 덜덜 떨며 웅크렸다.

“추워. 이왕이면 따뜻한 꽃을 돋아나게 할걸.”

마리나는 웃었다.

“권리의 진정한 근원은 의무야. 다들 알지?”

그리고 그녀의 눈에서 빛이 사라졌다. 난 바로 아이리와 칸나를 데리고 바깥으로 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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