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화 이방인들 (3)
의외로 나를 음해하는 전단지는 찾기 쉬웠다. 정말 전 대륙에 인쇄해서 뿌린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길거리에 날아다녔으니까. 우리가 있는 부대 쪽만 제외하고. 근데 그걸 찾는 건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리얀이 처음 마력구에서 보여 준 쪽지에서는 세세한 내용까지는 보이지 않았는데, 막상 찾아서 보니까 내용이 아주 가관이었다.
내 본명과 나이, 지구에서 출생했다는 사실, 거의 모든 개인 정보가 나와 있었다. 그리고 내가 안 좋은 구설수에 휘말렸던 것들 전부. 예를 들면 재벌 회장과의 유착이라든가, 암살이라든가, 불륜이라든가, 내가 하지도 않은 일들.
지구에 있을 때는 그저 유명세라고 하고 받아들였지만 이 대륙에 다시 퍼뜨리는 건 조금 달랐다. 이건 순수한 악의 그 자체였으니까.
"병사들이 거의 가로막지 않는군요."
"그러게요."
요동치는 내 마음과는 달리 진군은 안정적이기 그지없었다. 이렇게만 가면 군량을 포함한 군수품도 떨어지지는 않을 터다.
난 정말 지금이라도 수도로 달려가서 대체 얼마만큼의 지구인들이 와서 날 음해하는지 보고 싶었다.
그때 우리 군의 첨병들이 복귀했다는 소식을 알렸다. 아무래도 우리는 군단이고, 앞에 무엇이 있는지 정도는 좀 알아야 해 운용하던 부대였다. 원래 잘 쓰진 않았지만, 앞에 큰 성이 있어 몰래 잠입시켜 놓은 첨병들이었다.
"군단장님, 선발대 복귀했습니다."
"응. 뭐, 특이 동향이라도?"
그는 나도 이미 알고 있는 객관적인 데이터들을 줄줄 읊었다. 성에 몇 사람이 있고, 몇 명 단위의 병사들이 있고 그런 데이터들. 이런 걸 조용히 들어 주는 것도 군단장의 할 일이니까. 굳이 내가 안다며 애 기를 죽일 필요는 없다.
"그리고 이상한 책자들이 왕궁에서 나오는 것 같았습니다. 아마 대대적으로 뿌리는 것 같습니다."
"무슨 책자?"
또 날 음해하는 책자들인가. 그렇게 어렵게 구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던지 그는 작은 녹색 책자를 내게 두 손으로 건넸다.
난 그걸 바로 펴 봤다. 첫 페이지에는 어처구니없는 문구가 적혀 있었다. 이 세계에서는 절대 볼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던 단어.
- 제논민주공화국 발간.
제논민주공화국? 제논 왕국이 아니라? 난 헛웃음을 터뜨리며 책자를 훑어보았다. 그것에는 딱 정치인들이 선거를 할 때 나눠 주는 팜플렛처럼 정책에 대한 내용이 담겨 있었다. 목차를 구성한 것부터 표와 차트를 활용한 데이터까지, 딱 현대식 책자였다.
"뭔 개소리지?"
"저희도 읽어 봤는데, 조금 낯선 단어들이 많이 나와서. 죄송합니다."
"아니, 아니. 질책하는 게 아니야. 혼잣말이야."
괜히 쫀 병사 한 명을 달래 주고 난 계속 읽어 보았다. 목차 전에는 거창한 문구들이 박혀 있었다.
- 제논 왕국은 혁명을 통해 제논민주공화국으로 다시 태어났습니다. 이제 우리에게 족쇄였던 계급은 없으며, 평등한 시민만 있을 뿐입니다.
음, 결국 골자는 이 중세 시대에서 민주주의를 실현하겠다는 말인 것 같다. 난 계속 읽어 보았다. 그들의 목적은 뻔히 보였다. 테라포밍. 근데 그건 알겠는데, 그렇게 해서 그들이 얻게 되는 건? 굳이 날 배제하고자 하는 건?
아직은 알 수 없었다. 우리는 계속 진군할 따름이었다. 문제는 확실히 있었다. 성을 거쳐 가야 한다는 것. 성을 안 거쳐 가면 산맥을 돌아야 하는데, 그 산맥은 군단이 오르기는 어려웠다.
"그렇다면 정면 돌파지."
난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 칸나를 불렀다. 저 성을 함락하기 위해서는 두 명이면 됐으니까.
나는 군단을 성 바로 바깥에 배치해 놨다. 아예 진영도 만들었다. 성에는 칸나와 둘이만 들어가기로 했다. 솔직히 말하면 무력시위의 느낌을 의도한 것도 사실이었다.
한 나라의 격변이라는 건 그렇게 쉽게 되는 게 아니다. 이 지방까지 혁명의 여파가 다 도달하지는 못하지 않겠느냐, 난 그렇게 생각했다. 어쩌면 무력을 쓰지 않아도 이 성을 통과할 수 있지 않을까.
난 칸나와 둘이 들어갔다. 어차피 여기서 나를 막을 사람은 없다고 생각했다.
칸나는 내 옆에서 긴장한 얼굴로 서 있었다. 우리는 현재 제국의 군복을 입고 있는 상태였다. 성문 앞에 도달하니 성을 드나드는 제논 왕국의 평민들이 줄을 서 있었다. 수레를 끌고 온 사람들, 약초 주머니를 어깨에 멘 사람들, 말을 타고 온 지방 귀족들.
우리는 그들의 뒤에 붙어 섰다. 신기한 건, 그들은 아예 우리를 인식하지 못하는 듯 행동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 봐라.'
내 계획은 이 성주에게 권고하는 것이었다. 이 백성들 다 살리고 싶으면 그냥 성문 열고 통과시키라고. 내 입장에서는 최대한 젠틀 한 방식이었다.
분명 이 성에 있는 사람들은 우리가 들이닥친다는 걸 사전에 알고 있었을 거다. 군단이 몰려오는 걸 모르는 멍청이들은 아니겠지. 이건 사전에 계획된 행동 지침 같은 것들이겠지.
우리는 조용히 차례를 기다렸다. 많은 백성이 성의 보초병에게 검사를 받고 들어가고 있었으니. 소지품 검사, 몸 검사 같은 것들이었다.
드디어 우리 차례가 되었다. 난 칸나의 앞으로 나서서 그들을 바라봤다. 그들은 우리를 못 본 척했다. 그저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가 지나치길 기다리고 있었다.
"지나가자, 칸나."
"음……."
난 칸나의 손을 잡고 지나쳤다. 뒤를 돌아보니 다시 제대로 된 검사가 진행 중이었다. 유치하기도 해라.
누구 하나 우리에게 초점을 맞추는 사람은 없었다. 마치 유령이 되어 도시를 떠다니는 느낌이라면 이럴까. 칸나는 뭔가 그 기운에 압도된 것 같았다.
성은 모두 일반적으로 돌아가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물건을 사는 주부, 파는 상인, 길거리를 정처 없이 돌아다니는 청년, 아이를 데리고 온 아버지 등. 트라프비체 제국과 크게 다르지도 않았다.
보통 다른 나라라면 문화나 식습관이 달라서 좀 다를 법도 한데, 여기는 완전히 제국과 같았다. 너무 똑같은 곳이라 기시감이 들 정도였다.
"뭔가, 기괴한 느낌이야."
"나도 느끼고 있어."
도심까지 들어와 보니 알겠다. 하지만 확인할 게 있었다. 우리는 근처 가까운 여관으로 들어갔다. 여관 주인은 당연히 우리를 못 본 척했다.
난 무시하고 빈방처럼 보이는 곳을 열었다. 하지만 그곳은 빈방이 아니었다. 남자와 여자가 반나신으로 침대에 늘어져 있었다.
"엇."
칸나는 모르고 소리를 냈고, 난 바로 문을 닫고 칸나에게 웃어 주었다.
"미안."
저 사람들한테도 미안하고. 칸나는 말이 없어졌다. 그녀의 얼굴에서 나온 열기가 내게 느껴질 정도로 그녀는 부끄러워하고 있었다. 하긴, 똑 부러진 여기사님에게는 자극적인 광경이었겠지. 사실 나한테도 자극적이었다.
나도 부끄러워서 미치겠다. 인기척이 아예 안 났는데. 어떻게 그럴 수가 있을까. 난 퍼뜩 다른 생각이 들었다.
"칸나, 잠깐만."
난 칸나를 복도에 놔두고 방으로 들어갔다. 칸나가 뒤에서 약한 비명을 질렀다.
침대 앞에서 내가 그들을 바라본다. 그들은 널브러져서 음어를 서로 나누고 있었다. 난 그들을 지긋이 침대맡에 서서 바라보았다. 뚫어지게.
그들은 날 보지도 않았다. 난 그제야 그들의 동공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동공은 불수의근이다. 아무리 못 본 척을 하려고 해도 내가 앞에서 쇼를 하면 곁눈질이라도 할 수밖에 없기 마련이다.
그들의 동공은 서로만을 쭉 보고 있었다. 물론 헌터들은 불수의근도 조절한다. 그래서 심장을 잠시 멈춰 가사(假死) 상태를 조절하기도 하고. 하지만 이들은 일반인이다.
그러니, 난 하나의 결론에 도달할 수밖에 없다.
"진짜 안 보이는구나."
어떻게 그런 게 가능할까. 그렇다면 이 도시 전체가 함정이라는 얘기인가? 나는 생각을 깨우치고 문을 바로 박차고 칸나에게 나갔다.
"왜 그렇게 급하게 나와?"
칸나는 여전히 부끄러운 얼굴로 당황해하고 있었다. 난 칸나를 바로 꽉 안아 버렸다.
"에, 에퍼리?"
"아니야."
난 순식간에 정신을 차리고 칸나를 놔주었다. 칸나도 살짝 당황했다. 난 칸나를 순간에 잃어버린 줄 알았다. 그건 순전히 내 피해 의식이었다.
"일단 빈방으로 가자."
"그, 그래. 근데, 둘이 한 방을 쓰는 거야?"
"응."
난 단호하게 말했다. 그게 부끄러운 말이고 어떤 의미로 들릴지도 알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이런 도시에서 칸나를 혼자 놔둘 수는 없으니까.
"그, 그래."
"걱정하지 마. 정말, 난 아무 짓도 안 해."
"그 정도는 믿어."
칸나는 얼굴에 손 부채질을 했다.
"그래도, 뭔가 부끄러운 건 부끄러운 거야."
"…그래."
난 옆방의 문을 천천히 열고 사람이 없는 걸 확인한 뒤, 칸나를 먼저 방 안으로 들인 다음 나도 같이 들어갔다.
우리는 여기서 철저한 이방인들이었다. 마치 유리된 세계인 듯, 우리는 이 도시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배고파서 가판대에서 음식 하나를 빼먹어도 주인은 뭐라 하지 않았고, 그녀의 옷가지가 필요하면 길거리 옷걸이에서 하나 빼 주면 되었다.
"이, 이래도 되는 거야?"
"예쁜데 뭘."
솔직히 칸나에게 미안한 게 지금은 더 많았다. 이런 수상쩍은 도시면 나 혼자나 올걸. 그렇지만 다 결과론적인 생각이었다.
이미 칸나는 내게 연애 상대고 아니고를 떠나서 내게 중요한 사람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성에 나 혼자 왔으면 부대에 혼자 있는 칸나를 걱정했을 것이었다.
"그래도 돈은 다 주고 가네?"
"봤어?"
난 그래도 옷이든 음식이든 테이블 위에 다 돈을 얹어 두고 왔다. 돈이 부족한 것도 아니고, 칸나는 그런 행동을 싫어할 테니까.
나는 칸나와 이리저리 쏘다녔다. 이 동네에서 우리를 알아보는 사람은 없었다. 정말 도시에서 둘만의 데이트를 즐기는 것 같았다.
"뭔가 이러니까 데이트 같은걸."
갑자기 칸나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왔다. 난 칸나를 바라보았다. 난 웃어 주었다.
"그래."
성은 하루 만에 다 돌아볼 수 있을 정도로 작았다. 이제, 할 일은 다 했다. 칸나는 나와 같은 방에 들어왔다.
또 어제처럼 어색한 시간이 되었다. 누가 먼저 씻느냐의 싸움. 내가 아무리 생각을 안 하려고 해도, 칸나가 같은 방 화장실에서 씻는다고 생각하면 의식할 수밖에 없었다. 이건, 정말 이성으로서 거부할 수 없는 마력과도 같은 거였다.
"네가 먼저 씻을래?"
"응, 아니……."
좋다는 거야, 안 좋다는 거야. 내가 여기서 당황하면 안 되겠다 싶어 난 바로 화장실로 들어가기로 했다.
"나 먼저 씻을게, 그러면."
"…그래."
난 물을 틀었다. 그래도 화장실 같은 건 중세인데도 은근히 현대 같았다. 마법이 있는 세상이라 이건가. 어차피 고증 신경 쓰면 지는 거다. 난 그냥 느끼기로 했다.
마법진이 그려진 벽에서 물이 쏟아져 나왔다. 난 거기에 머리를 댔다. 마법진에 손을 2초 동안 대고 있었더니 물이 냉수로 바뀌었다.
차가운 물이 내 온몸을 타고 흐른다. 정신이 번쩍 드는 느낌이다.
나는 샤워를 마치고 화장실 안에서 옷까지 다 입은 다음에 바로 소파로 가 누워 잠을 청했다. 화장실 안에 있는 칸나를 위한 배려라고 해야 하나. 그녀의 씻는 소리를 듣는 것도 부정하게 느껴졌다.
그렇게 나는 의식을 차단했다. 헌터는 이렇게 강제로 잠에 들 줄도 알아야 한다.
검은 안개가 내게 끼는 것 같다.
얼마나 지났을까. 난 안개 속에 계속 서 있는 느낌을 받았다. 그곳에서 서늘한 칼날이 갑자기 안개를 뚫고 날아왔다. 난 눈을 번쩍 떴다.
그리고 두 손바닥으로 내 목 앞에 있는 칼날을 잡았다. 내 앞에서 부들거리는 칼날이 보인다. 그리고 칼자루를 잡고 있는 칸나의 부들거리는 손도.
"칸나."
난 칸나를 나지막하게 불렀다. 칸나는 날 보고 있지 않았다. 그저 칼날에 계속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그녀의 떨어지는 백금발에 비치는 달빛이 서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