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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맨스판타지로 떨어진 S급 헌터-103화 (103/150)

102화 S급 지휘관 (5)

칸나는 눈을 떴다. 군단의 지휘관들이 그녀를 둘러싸고 있었다. 그녀는 잠깐 이게 꿈인가 싶었다. 소령에 불과한 자신을 사단장들이 지킬 일이 뭐가 있단 말인가.

그녀가 이불 위로 눈을 깜빡거리자 사단장 중 한 명이 눈치를 챘다.

"공주님이 깨어나셨군."

칸나는 그 말과 함께 이불을 박차고 상체를 바로 일으켰다. 그녀는 좌우를 둘러보았다. 천막이 조악한 게, 간이 진영인 게 분명했다.

"여, 여긴 어디입니까?"

칸나가 물었다. 사단장들이 웃었다.

"원진영으로부터 1km 떨어진 곳이지. 우리는 군단장을 기다리고 있다네."

"그리고 우리는 군단장님의 명으로 너를 지키고 있었지."

사단장들은 껄껄거렸다. 칸나는 역시 어리둥절해했다.

"에, 아니, 군단장님이 저를 지키라고 했다고요?"

"공주님처럼 안고 왔지. 모르고 기절시켰으니 좀 지켜 달라고. 모르고 기절시켰다는 건 대체 뭔 소리인지 모르겠지만."

"그나저나 칸나, 군단장님과 개인적으로 친한 사이 아닌가?"

"원래 반말했었던 것 같은데?"

사단장들의 말에 칸나가 대답했다.

"그거야 에퍼리 후작님은 이제 군단장이고 저는 부관이니까, 반말하면 군기가 정리가 안 되지 않습니까."

칸나의 말에 사단장들은 합이라도 맞춘 듯이 야유를 쏟아 내었다.

"에이, 그건 아니지."

"칸나 소령, 에퍼리 후작 정도면 괜찮은 신랑감이야. 외모도 깔끔하고, 키가 좀 작긴 하지만, 음. 무위도 뛰어나고."

"군기 위반은 안 되지만, 청춘들의 연애는 어쩔 수 없지. 그렇고말고."

사단장들의 부채질에 칸나는 얼굴을 돌렸다. 에퍼리에게 그런 식으로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그냥, 멋있다고 생각해 본 것도 잠깐이다. 너무 무위가 뛰어났으니까. 그러나 그걸 사랑이라고 할 수는 없었다. 그냥 그는, 친한 전우였다. 하지만 뭔가 거슬리는…….

"저와 에퍼리 후작님은 그런 사이가 아닙니다."

"뭐가 그런 사이가 아닌데?"

천막 안으로 누군가가 끼어들면서 들어왔다. 바로, 에퍼리였다.

사단장들이 왠지 모르겠지만 모두 빠져나갔다. 마치 칸나와 나, 둘만의 시간을 주듯이. 나는 칸나를 보았다. 칸나는 막 기절 상태에서 의식을 되찾은 것처럼 보였다.

어긋났다. 원래라면 칸나가 의식을 되찾기 전에 돌아왔어야 됐는데.

"에퍼리."

"응."

그녀는 내 뺨을 쳤다. 두 쪽 뺨을, 두 손바닥으로. 난 깜짝 놀라서 떨었다. 칸나의 차가운 눈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넌 정신 좀 차려야 돼."

"…왜?"

칸나의 눈빛이, 내가 한낱 근위병일 때의 근위 기사의 눈빛이다. 나는 군단장이고 그녀는 부관에 불과했지만, 그녀의 눈빛은 뭔가 아래를 보는 눈빛이었다.

"너, 대체 뭔 짓을 하고 온 거야?"

"그냥, 부대 좀 휘젓고 왔어."

"그게 안 되는 거야."

칸나는 내 양쪽 뺨을 다시 한번 쳤다.

"여기서는 부관이 아니라 친구로서 얘기해 주는 거야. 너는 혼자 모든 걸 해결하려는 경향이 있어."

"…그런가?"

"응."

그녀의 부드러운 손이 내 뺨을 벗어나는 감각이 비단이 스치는 것 같다. 난 거기서 죄책감을 느꼈다. 난 지금, 사랑의 단면을 본 것 같았다. 내가 좇아온, 잘못된 사랑의 단면을. 칸나는 알고 있을까? 내가 잘못된 욕구로 이 세계에서 일생을 살았다는 걸.

"칸나, 삶의 목표가 연애인 건 어떻게 생각해?"

"한심하지."

헐. 칸나는 가차가 없다. 하긴, 내가 굳이 말하는 것도 웃기지만, 여기서 마음에 들었던 아가씨들은 칸나, 리얀, 아이리 세 명이었다. 솔직히 웃기다. 내가 뭐라고 이 셋을 저울질하는 건지.

난 그냥, 연애가 목표라서 여기에서 사는 건가. 그렇게 생각하면 칸나의 말마따나 한심하기 그지없다.

"너는 누군가와 연애하는 게 목표야?"

"…맞아."

거짓말을 해도 됐다. 하지만 왜 칸나 앞에서는 거짓말을 못 할 것 같은지. 처음에 설정된 지휘관과 부하의 관계 때문에 그럴까. 왠지 그녀는 나보다 누나 같았다.

"너는 그러면 잘못된 삶을 살고 있는 거야. 누군가와 연애하려면 자신을 먼저 사랑해야지. 네가 사랑하지 않는 자신을, 네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넘겨줄 수 있어?"

칸나의 말에 나는 생각을 골똘히 해야 했다. 근데, 왜 다른 S급 헌터들은 그런 걸까. 나와 비슷한 S급 헌터들은 다 비슷하게 연애하던데.

"난 말이야. 내가 사랑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해. 많은 사람에게 미움을 받았거든."

난 말하고 후회했다. 그녀는 말해도 못 알아들을 얘기들이었으니까. 난 언론에 너무 많이 시달렸고, 그 언론에 민감한 사람이었으니까. 하지만 그게 칸나한테는 절대 못 알아들을 얘기로 들릴 게 뻔하니까. S급 헌터가 사회적으로 주목을 받고 이런 건, 이 세계의 사람은 이해 못 할 것이니까.

"아냐, 넌 괜찮은 사람이야."

칸나는 말했다. 난 그것만으로도 깜짝 놀랐다.

"난 너를 기억해. 넌 황궁 근처 검은 나무 사태 때 나와 특공대를 조직해 근위대 모두를 구했지. 그것뿐만도 아니야. 성녀님을 살린 다음 제국의 검은 나무를 모두 제거했잖아. 그래서 넌 많은 사람한테 사랑받고 있잖아."

"하지만 그건, 내가 말했잖아. 잠깐일 뿐이야. 쉽게 떠오른 것처럼, 쉽게 져 버려."

난 부정적인 말을 하면서 또 후회했다. 그냥 넘어가면 안 됐던 걸까. 하지만 그녀는 뜻밖에도 웃었다.

"넌 그런 점이 문제라는 거야. 맞아, 모든 사람한테 사랑받을 수는 없어. 귀족들한테는 그런 게 아주 평범해. 왜냐하면 귀족들은 라인이 갈리면 누군가를 아무 이유 없이 뒷담화하는 경우도 허다하니까. 하지만 널 사랑하는 사람 몇 사람만 기억하면 돼."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내가 미개하다고 생각했던 이 귀족들과 계급제. 따지고 보면 지구에서도 계급제는 뻔히 있었던 것이다.

S급 헌터, A급 헌터, B급 헌터를 포함해 F급 헌터까지. 각각 누리는 복지가 달랐으니까. 심지어 헌터의 등급은 선천적인 것이었다. 그렇게 따지면 지구의 헌터도 결국 계급제가 아니었을까? 난 왜 이렇게 이 세계를 미개하다고 생각했던 걸까.

"에퍼리, 네가 어떤 걸 겪었는지 몰라. 그냥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해. 이렇게 말하는 내가 너무 야속하다고 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근데, 내 입장에서는 최선으로 해 줄 수 있는 말이었어. 난 네 과거를 잘 모르니까."

"그래."

"나, 난, 부관으로서 할 말을 했을 뿐이야. 지휘관이 중심을 잡아야 되니까. S급 지휘관이 되려면 자기의 중심이 필요하니까."

"그래."

난 칸나의 말에 솔직히, 이렇게 말하면 창피하지만, 눈물이 나올 뻔했다. 지금까지 이렇게 말해 준 사람이 없었으니까. 어쩌면 지구에서 내 연애를 포함한 모든 생활도 이렇게 말해 줄 수 있는 사람이 한 명이라도 있었으면 달라지지 않았을까.

"…칸나, 고마워."

"고마울 게 뭐 있어."

그녀에겐 아무 말도 아니었던 걸까? 그래도 상관없다. 지구에 있었던, 같은 동료라고 생각했던 사람들 7명을 썰어 내고 더러워졌던 내 마음이 치유받았으니.

지원군이 도착한 건 나도 알림을 못 받았다. 당연하지, 반나절 동안 부대의 지휘를 비우고 있었으니. 사단장 중 한 명이 내게 지원군이 도착하게끔 되어 있었다며 언질을 줬기에 당장 어색한 상황을 피할 수 있었다.

"지원군, 어, 에퍼리 군단장입니다."

"군단장님, 말 놓으시죠."

"아, 군단장이다."

사단장이 내게만 들리는 귀띔을 해서 난 바로 말투를 바꿨다. 한 개 여단 정도 되는 지원군이라고 했다. 난 원래 별로 관심 없었다. 나 혼자 제논 왕국의 부대를 해치울 생각을 하고 있었으니까.

그런데 칸나의 말을 듣고 조금 달라진 게 있다. 그래도 뭔가 다른 사람들과 교류를 하면서 해야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들.

"이번 지원군 대장 샤프 대령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에퍼리 중장입니다."

내가 내 계급을 이렇게 말한 적은 처음인데. 난 여단장이 데리고 온 병사들을 바라보았다. 한 천 명은 되는 것 같았다.

쭈뼛쭈뼛 서 있는 사람들을 보니 귀여웠다. 근데, 그중에서 누군가 나를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는 사람이 있었다. 난 그 사람을 바라보았다.

"…어."

그녀는 은색 머리가 허리까지 닿아 있는 아름다운 사람이었다. 예쁘게 땋아 놓은 폭포 머리도 풀어져 있다. 말해서 뭐 하랴. 그녀는 바로 아이리 라피테스였다.

"왜 쟤가 저기 있지."

"무슨 말씀이십니까, 군단장님?"

"아닙니다. 아니, 아니다."

내가 존댓말을 하자 옆에서 눈초리를 치켜뜨는 사단장 때문에 강제로 반말을 해야 했다. 지구에서는 존댓말만 해야 했단 말이야. 난 그것보다 아이리를 찾아가야 했다.

지원군으로 온 여단이 짐을 풀고 천막을 치기를 난 기다렸다. 그들이 천막을 다 치자마자 난 아이리를 찾아 나서기 시작했다.

"여기, 아이리 라피테스 공녀 있습니까?"

"헉, 군단장님."

내가 주변 천막을 들추고 다니자 병사들이 꼿꼿이 섰다. 미안한데. 이렇게 압박을 주려던 건 아니었는데. 난 병사들이 알려 준 천막으로 다가갔다.

"아이리?"

"아, 여기 있습니다."

내가 한 천막을 들추고 말하자 바로 누군가가 말했다. 아이리는 군장을 정리하고 있었다. 내 얼굴을 보자마자 그녀는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바로 나왔다.

"이리 와요."

나는 그녀의 손을 잡고 군영 바깥으로 빠져나갔다. 아이리는 그저 쭐레쭐레 따라왔다. 난 그녀를 다 끌고 오고 나서야 물었다.

"왜 왔어요?"

"왜, 오면 안 돼?"

"공작님이 잘도 허락해 주셨네요?"

"몰래 나온 건데?"

"허."

난 그녀의 말에 탄식했다. 이런 골칫덩이 딸을 뒀으니 얼마나 힘들까. 갑자기 아이리는 내 옆구리를 푹 찔렀다.

"다 너 때문이야."

"왜요?"

"너는 왠지 혼자 두면 안 될 것 같아. 그래서 온 거야."

아이리는 은발을 머리를 묶어 올렸다. 그녀의 머리 밑쪽의 목덜미가 하얗다. 마치 베어 물고 싶을 정도로. 그녀는 나를 이렇게 매혹하고 있는 걸 알고 있을까.

"아가씨, 난 군단장이에요. 계속 반말하실 겁니까?"

"뭐, 군단장이랑 병사랑 엮일 일이 뭐 있어."

아이리는 내게 손가락을 가리켰다.

"넌 말이야. 지휘관의 몫이 못 돼. 난 너를 오래전부터 알아 온 사람이야. 넌 사소한 것에 너무 민감하지."

"그래요?"

어째 칸나와 비슷한 말들을 한다. 그녀들이 보기에 내가 너무 뻔한 행동들을 한 건지 다시 생각해 본다.

"지금 너, 나를 특별 대우 하겠다고 생각하고 있다면 날 아주 잘못 생각한 거야. 난 그런 대우를 받으러 온 게 아니니까."

"그럼 뭐 하러 온 건데요?"

"…그건 말할 수 없고."

뭐야. 가장 중요한 부분에서 식네. 아이리는 그저 머리를 매만지고 있었다.

"그럼 내가 해 줄 수 있는 말은 하나밖에 없어요."

"뭔데?"

"몸 잘 지키시라고요."

나는 말했다. 머리를 긁적거린다. 뭔가 그녀에게 말하는 게 간지럽다. 아직 그녀와 황도를 걸었던 잔향이 내 몸 구석구석에 남아 있는 것 같다.

아이리는 에퍼리가 떠나고 나서 가슴에 손을 얹고 한숨을 쉬었다. 혹시, 내 마음을 들키지는 않았겠지. 그녀는 계속 생각했다. 그래, 최대한 퉁명스럽게 했다. 너무 퉁명스럽게 한 감이 있나? 그녀는 그것 때문에 고민스러웠지만 어쩔 수 없었다.

에퍼리는 자신이 볼 때 너무 불안한 사람이었다. 그 부분이 자신이 뭔지는 몰랐다. 그게 너무 짜증 났다. 그걸 자신이 채워 줄 수만 있다면. 그녀는 그런 생각을 했다.

"에퍼리… 사랑해."

아이리는 아무도 없는 숲속에서 그렇게 한숨과 함께 뱉어 냈다. 아무도 없는 곳에서 말했는데도 부끄러워 죽을 지경이었다. 심장이 조이고 팔과 다리가 오므려졌다.

언젠가, 그에게 이 마음을 전달할 수 있을까. 그녀는 기준을 정해 놨다. 적어도, 여기서 에퍼리와 함께 같이 전장을 누비며 에퍼리라는 사람에게 걸맞은 사람이 되도록.

그녀가 천막으로 돌아오자마자 전 병영에는 비상이 걸려 있었다.

"아이리! 빨리 군장 챙겨라! 군단장님이 출진하신다!"

아이리는 허겁지겁 군장을 다시 챙겼다. 그녀는 챙기면서도 다른 생각을 했다. 이러면 안 되는데. 에퍼리가 천막을 열고 나오면서 자신의 이름, '아이리'를 불러 준 것이 처음이었던 것이다. 어째, 집중이 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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