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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맨스판타지로 떨어진 S급 헌터-93화 (93/150)

92화 공정거래 (5)

"거참, 동틀 때까지 쓰고 있네."

나는 구부린 동전으로 공기놀이를 하면서 밤을 새웠다. 물론 내 옆에서는 피를 줄줄 흘리는 쉬버리 후작이 빠른 손으로 기사를 작성해 내고 있다. 나는 공기놀이를 하면서 기사를 컨펌 했다.

창문에는 비둘기들이 왔다 갔다 했지만, 난 그것들을 모두 무시했다. 아직 다 안 썼다고. 마감 재촉하지 마.

"야, 양이 너무 많아서……."

"그래, 그래. 이해하지."

난 말없이 쉬버리를 기다려 주었다. 쉬버리는 꼬박 몇 시간을 멈추지 않았다. 죽음에 대한 공포가 각인된 그는 나와 눈을 마주치려 하지도 않았다.

"다, 다 썼습니다."

"그래."

"이, 이대로 발행하면 됩니까?"

나는 웃었다. 난 그의 발등을 밟아서 으깼다. 아직 정신을 못 차린 모양이다. 난 이 사람이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정치를 논한 걸 이해할 수 없었다.

"이봐, 그렇게 하기 전에 할 일이 있잖아. 윗대가리들한테 검사받아야 될 것 아니야."

"그, 그건……."

그는 내가 이렇게 말할 줄 몰랐다는 듯 당황했다. 난 창문을 열었다. 바로 바깥 건물에 앉아 있던 비둘기들이 들어와 머리를 움직이고 멍청하게 흔들고 있었다. 발목에는 다 각자 가문을 상징하는 스카프들을 메고 있었다.

"어차피 이런 어용 언론들은 프리미엄 구독자들이 있잖아. 내가 그것도 몰랐을까."

"그, 그렇다고 이걸 그분들한테 보낼 수는……."

음. 난 이해할 수 있었다. 갑자기 약점을 막 파헤치는 탐사 보도 수준의 기사들을 그 당사자들에게 보낸다니. 꺼려지는 것도 당연했다. 하지만 그건 그거고.

"으아악!"

나는 다른 발을 밟았다. 이제 그는 두 발로 성히 못 걸을 지경이 되었다. 빨리 치료하지 않으면 평생 목발을 짚고 살아야 될지도 몰랐다.

"빨리 보내."

"네, 네."

또 온순해진 쉬버리는 바로 스킬을 이용해 문자들을 복사해 신문처럼 만들었다. 멋들어진 황궁 소식지 미리 보기가 만들어졌다. 난 그것들을 깔끔하게 비둘기들의 발목에 묶어 주었다.

다리에 묵직함을 느낀 비둘기들은 바로 창문 바깥으로 날았다. 양이 많은 관계로 비둘기들은 날면서 비틀거렸지만, 어떻게든 목적지에 도착할 수는 있을 것 같았다.

"…이, 이제 끝입니까?"

"왜 이렇게 멍청이가 된 걸까."

나는 쉬버리를 한심하게 바라보았다.

"당연히 시작이지."

그리고 검을 들어서 검면을 닦기 시작했다. 아침 해를 반사하며 백천은 밝은 빛을 번쩍거렸다.

하이에크 공작은 한 묶음으로 가져온 기사들을 보고 눈을 가늘게 떴다. 쉬버리 후작이 힘을 오래 썼나? 그냥 가볍게 하면 될 것을.

그는 혀끝을 차면서 비둘기의 다리에 묶인 신문을 쫙 폈다. 하이에크 공작은 헤드라인부터 두 눈을 의심했다.

- 근본 없는 공작, 하이에크는 공작의 자격이 있는가?

그는 바로 신문지를 구겼다. 뭔가가 잘못됐다. 쉬버리 후작은 갑자기 이런 글을 쓸 사람이 아니다. 대체 무슨 심경의 변화가 있었지? 황궁 신문사에 무슨 일이 생기면 자동으로 알람이 오게 되어 있는 기관진식도 발동하지 않았다.

"공작님, 대전 아침 회의에 나가셔야 합니다."

"…오늘은 개인 사정으로 결근이라고 황궁에 전하라."

하이에크 공작은 이를 꽉 깨물었다. 누가 했는지는 대충 감이 온다. 안 봐도 에퍼리 후작이겠지. 근본도 없는 옌시 촌놈이, 한자리 차지하게 될 것 같으니까 천둥벌거숭이같이 나대는 거다.

천박하기는. 하이에크 공작은 자신의 지하 방으로 들어가서 유리구슬을 켰다. 그리고 뒤쪽에 움푹 들어가 있는 곳을 꾹 눌렀다. 유리구슬이 붉게 빛나기 시작했다.

비상소집이었다.

"이렇게 대놓고 도발하다니. 얼마나 자신감이 있기에."

하이에크는 고개를 흔들었다. 그가 소드 마스터인 것 정도는 안다. 물론 그것만으로도 놀랄 일이지만, 소드 마스터가 그렇게 대수라고는 여기지 않았다.

곧 하이에크 공작의 비상소집에 2황자 라인의 귀족들이 유리구슬에 모두 등장했다. 모두 아침 대전 회의에 가기 전 준비를 마친 모양새였다.

하이에크 공작은 짧게 말했다.

"각자 소드 마스터 이상의 근위 기사를 대동하고 황궁 신문사 쪽으로 모인다."

중과부적. 그 말을 하이에크 공작은 깊게 믿고 있었다.

황궁 소식지를 만드는 후미진 건물. 언뜻 보면 폐가라고 생각될 정도지만, 이곳에 얼마나 수많은 기관진식이 있는지 상상할 수도 없다. 아직도 하이에크가 궁금한 건, 이 기관진식을 어떻게 에퍼리가 모두 파훼했냐는 것이다.

"들어가자. 기관진식은 내가 알고 있으니."

폐가에 제국에서 내로라하는 고수들과 귀족들이 일렬로 서서 들어간다. 하이에크 공작은 문 안쪽에 서자마자 오른손을 번쩍 들어 뒤로 쾅 쳤다.

스위치가 눌리는 감각이 났다. 이제 문 앞의 기관진식은 작동이 해제 됐을 것이다.

"가자."

하이에크 공작이 그렇게 말하는 순간, 뒤에 있던 소드 마스터가 하이에크 공작의 머리를 누른 다음 날아오는 무언가를 강하게 쳤다.

철그렁.

부메랑처럼 날아오던 도끼가 하이에크의 발치에 무겁게 떨어졌다.

하이에크 공작은 눈을 끔뻑거렸다. 이런 기관이 있었나. 그럴 리는 없었다. 분명 기관을 멈춰 놨을 텐데? 몸을 비틀어 위를 바라보니 스위치는 분명히 눌려 있다.

"뭐, 뭐지?"

황궁 소식지 기관은 미로와도 같았다. 하이에크 공작은 몇 번의 죽을 위기를 넘겼다. 만약 근처에 소드 마스터가 없었다면 목숨이 세 개라도 부족했을 것이었다.

자신이 아는 스위치는 모두 그대로였지만, 어느새 기관은 모두가 바뀌어 있었다. 에퍼리 후작이 기관진식에도 능했단 말인가? 하지만 그런 정보는 전혀 없었는데.

"모두 일단 경계 태세를 강화하라. 소이 장군, 내 앞에 서게."

대놓고 고기 방패로 쓰겠다는 하이에크의 말에 소이 장군의 눈살이 살짝 찌푸려졌다. 아무리 공작이라지만 너무한 것 아닌가.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어차피 기관진식을 모른다면 그냥 돌파하는 것도 나쁘지 않습니다. 소드 마스터가 지금 20명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기관진식이 우리를 해하기는 쉽지 않을 겁니다."

소이 장군을 포함한 소드 마스터들이 고개를 끄덕였지만, 하이에크 공작을 포함한 귀족들은 고개를 단호히 저었다.

"어떤 기관진식이 있을 줄 몰라. 물론 단순하고 허접한 기관진식이지만, 이걸 근일 내에 바꿔서 설계했다는 점에 있어서는 천재다. 절대 앞서 나가면 안 돼."

하이에크 공작은 그렇게 말했지만, 소이 장군을 포함한 소드 마스터들은 모두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무인들이 요직에 있는 가테스 라인과 달리 제2황자의 주축은 대개 중앙에서 업무를 보는 귀족들이었다. 소드 마스터들이 보기에는 한없이 나약한. 이런 명령도 그런 나약함에서 온 것이 아닐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사람들이 자기를 지휘하는 것에 소이는 불만을 느꼈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저 갈 수밖에.

"가자."

결국 아침 대전 회의를 빼먹은 중신들과 장군들은 한 건물을 오롯이 돌았다. 차라리 소이 장군의 말대로 빠르게 부수고 나갔다면 체력과 정신력이라도 덜 빠졌을 것이었다.

하지만 하이에크 공작의 명령 때문에 그들은 느리게 갈 수밖에 없었고, 어디서 날아올지 모르는 함정에 감각을 곧추세우고 있다 보니 소드 마스터들은 벌써 피곤해지고 말았다.

"조금만 빨리 가면 안 되나?"

"아까는 천천히 가라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설상가상으로 그들은 신경전을 하기까지 했다. 가토스 황자 라인은 가토스 황자에게 감화되어 모인 사람들이 아니었다. 이미 단단하게 형성된 가테스 라인에서 자리를 못 차지할 것 같으니 기회주의자처럼 라인을 옮긴 것에 불과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결속력은커녕 서로를 향한 유대감도 없었다.

그들은 서로의 부서진 유대감을 확인하면서 목적지까지 도착했다. 소드 마스터들이 많아서 아무도 다친 사람은 없었다.

"…쉬버리 후작?"

어두운 방에서 하이에크 공작이 입을 열었다. 일부러 불을 끈 듯했다. 하이에크 공작이 나서려 하자 소이 장군이 하이에크 공작을 막았다.

"앞에 누군가 있습니다."

소이 장군은 어둠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의자가 끌리는 소리와 함께 누군가가 어둠 속에서 나왔다. 누군가는, 하이에크 공작과 무리가 생각도 못 한 사람이었다.

"생각보다 늦었습니다."

웃으며 나온 사람은 쉬버리 후작도 에퍼리 후작도 아니었다. 나온 사람은 뜻밖에도, 리얀 황녀였다.

그녀가 나오자마자 방의 불이 전부 켜졌다. 자세히 보니 리얀이 밟은 타일 하나가 움푹 눌려 있었다. 저걸로 불을 킨 모양이었다.

하이에크 공작은 그제야 이 건물에 있는 기관진식을 누가 수정했는지 알 수 있었다. 황궁에서 기관진식에 능통한 사람이라면 누구라고 말할 것도 없이 당연히 리얀이었으니까.

불이 켜지고 본 중앙에는 테이블과 의자들이 준비되어 있었다. 리얀은 자연스럽게 앉은 다음 담배를 하나 물었다.

"와서 앉아요."

"이 무슨 무뢰배 같은 행동이십니까, 황녀 전하."

하이에크 공작을 포함한 다른 사람들이 리얀의 반대편에 앉았다. 리얀은 아무 말 없이 담배에 불을 붙였다. 곧 방에 담배 연기가 뿌옇게 찼다.

"…무뢰배라. 나한테 언론으로 장난친 건 생각을 안 하시나 보네."

리얀이 담배 연기를 하이에크 공작에게 뱉었다. 흡연자가 아닌 하이에크 공작은 얼굴을 찌푸리며 콜록거렸다.

"내가 뭐 임신을 했다느니, 중절을 했다느니, 몇 명하고 잤다느니 그런 기사는 그럼 왜 내셨나요."

"전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하이에크 공작은 발뺌을 했다. 리얀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뭐, 그것을 책하려고 온 건 아니에요. 정치에 뛰어들 때 어느 정도 각오한 거니까."

"그럼 왜 오신 겁니까?"

"당신, 생각 바꿔 먹으라고요."

리얀이 말했다.

"나를 기선 제압 한 다음 꼭두각시로 삼아서 개인의 영달을 이루고 싶은 모양인데요. 절대 그러지 못할 테니까."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대체 무슨 말씀이십니까?"

"내가 왜 그 기사들을 안 내고 먼저 보여 줬는지 알아요? 내 사람이 될 수도 있으니까 그런 거예요."

하이에크 공작이 웃었다. 그는 황녀가 뭘 믿고 이렇게 움직이는지 몰랐다. 에퍼리 후작? 그래 봐야 소드 마스터 한 명이다. 이미지가 좋긴 하지만, 그건 중앙 정치와 별로 상관없었다.

"황녀 전하, 이렇게 된 거 그냥 노골적으로 말씀드리죠. 저희가 말하는 대로 움직이시죠. 저희도 가테스 황자파와 맞붙을 힘이 있습니다. 저희만 흡수하신다면 황녀 전하도 가능성이 있습니다."

"결국 몸값을 올리기 위한 수작이었다고 자백하는 건가요?"

리얀이 싸늘하게 웃었다. 하이에크 공작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패는 다 까발려졌다. 하이에크 공작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때 리얀이 의자에서 목을 뒤로 꺾었다.

"아. 에퍼리, 못 하겠어요."

갑자기 불이 꺼졌다. 하이에크 공작은 스킬을 이용해 바로 손에 빛나는 구체를 띄웠다. 어느새 의자에 앉아 있는 사람이 바뀌어 있었다.

에퍼리 후작, 그가 싸늘한 표정으로 거만하게 앉아 있었다.

"당신들이 욕심을 좀만 줄여도 되는 문제인데 말이야. 리얀은 사실 대등한 관계기만 해도 그냥 넘어가려 했단 말이야. 난 안 된다고 말렸지만."

나는 검을 철컥 들었다. 소드 마스터들도 검을 들었다. 그들 중 긴장한 사람은 없었다. 난 좌중을 돌아보았다.

"아, 여기 있는 사람들 중 내가 싸우는 걸 본 사람이 없구나."

"자네가 강한 건 알고 있지만, 자네는 어리고 한 명일 뿐이다. 설마 이 많은 사람들을 상대할 건가?"

"응, 뭐 그건 그렇고."

난 진심을 담아서 경고했다. 제발 이 경고가 닿기를 바라면서.

"내가 너희에게 할 짓이 그렇게 좋은 행동이 아니거든? 그러니까 그냥 닥치고 우리 밑으로 들어오면 사람답게 살게는 해 줄게."

"허허. 어디서 저잣거리 싸구려 협박이구나."

그렇게도 들릴 수 있겠지. 근데 내가 할 행동이 워낙 싸구려라, 어쩔 수가 없다. 소드 마스터들이 내게 전부 달려왔다. 그때 천장이 뒤집어지면서 무언가 우수수 쏟아졌다.

"뭐, 뭐야?"

"우왓, 벌레다!"

그들은 귀족들이라 그런지 자신의 고귀한 몸에 벌레가 붙는 걸 용납하지 못하는 듯했다. 하지만 어떡하랴. 이제 한 몸으로 살아가야 될 텐데.

곧 귀족들의 몸에 붙은 벌레들에게서 흰색 실 같은 것들이 뿜어져 나왔다. 그 실은 가차없이 사람의 피부를 파고들었다. 소드 마스터들의 강건한 피부를 뚫을 정도로 그 실들은 강력했다.

"으아아아아악!"

온몸이 생으로 꿰뚫리는 감각을 맞으며 사람들은 모두 비명을 질렀다. 난 이걸 리얀이 안 봤으면 하는데, 리얀은 아마 보고 있을 것이다. 은근히 고집이 센 사람이라서.

나는 그보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와 인사했다. 천장에 여전히 붙어 있는 단 한 마리의 벌레. 그는 거꾸로 뒤집혀 있으면서 나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오랜만이다, 노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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