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화 공정거래 (1)
원정대를 축하하는 연회가 원래는 펼쳐져야 했지만, 이런 판에 무슨 연회는 연회겠는가. 리얀은 제위를 노리겠다고 선언했고, 나와의 연애도 같이 선포했다. 물론 나는 그 뒤가 더 충격적이지만.
결국 원정대의 무사 귀환을 기념하는 개선식은 정치 싸움으로 유야무야되고 말았다. 가테스는 자리를 파했다. 모두에게 좋은 결정이었다. 서로 아무 준비가 안 된 상태에서 과열되는 건 약점만 드러낼 뿐이니까.
마리나는 밖으로 나오면서 투덜거렸다.
"하, 술이나 먹을랬드만. 정치인들 더러운 건 세상이 세 번 바뀌어도 똑같냐. 지들 말하느라 이런 영웅들도 안 챙겨 주고."
"네가 뭐 했어? 나 혼자 다 했는데."
"내가 레이더 역할 해 줬잖아. 오히려 버스충은 공녀님이지."
"좀 알아듣지 못하는 말 하지 마."
대체 얘는 지구에서 뭘 하면서 살았기에 이렇게 구사하는 언어가 구려졌을까. 그녀는 내가 속으로 흉을 보든 말든 정치인들 욕을 계속하고 있었다.
"정치인들 다 죽었으면 좋겠다."
"어허. 청렴한 사람도 많다."
"네가 뭘 알… 넌 알 만하구나."
내게 시비를 걸려고 했던 마리나는 바로 수긍했다. S급 헌터가 정계와 연관이 되어 있다는 사실은 암만 집에 박혀 있었어도 아는 사실일 터였으니까.
"너, 정치 좀 알아? 나 요즘 정치학 공부하고 있는데."
아이리가 물었다. 뭐라고 대답해야 하지. 사실 청렴한 사람이 많다는 건 거짓말이었는데.
"정치학은 모르고, 정치질은 알아요."
"…뭔가 나쁜 말 같네."
아이리가 골똘하게 있자 마리나가 끼어들었다.
"쟤 정치질 잘해요. 이미지 만드는 것 보면 선수라니까."
"야, 야,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가서 잠이나 자라."
내가 그렇게 답하자 마리나는 무슨 말이냐는 듯 얼굴을 갸우뚱했다.
"왜?"
"야, 뭐 하나 끝나면 술 마시는 건 규칙이잖아."
"어디 규칙?"
"그, 산악회에서 등산 끝나면 산 밑 가든에서 막걸리 한잔하잖아. 그거랑 비슷한 것 아니야?"
"…대체 뭔 소리예요, 성녀님?"
"좀 정신이 이상한 사람입니다. 신경 끄세요."
이세계, 그러니까 지구 얘기가 나오면 정신 이상한 사람 취급을 해야 정신 차릴 것 같다. 마리나는 내가 정신이상자 취급을 해도 그저 술 타령을 하고 있었다.
"…술은 좀. 내일 바쁠 것 같은데."
왜냐하면 이제 정국이 형성됐잖아. 리얀이 본격적으로 제위 다툼에 끼어들었으니까, 정치 싸움이 시작될 거다. 아무래도 거기에 나도 연관된 듯하니 나도 제 컨디션을 유지해야겠지.
"뭐, 어때요?"
그 대답을 한 사람은 마리나도 아이리도 아니었다. 우리가 동시에 뒤를 돌아보자 리얀이 이미 술병을 들고 있었다. 이 양반은 대체 뭐 하는 거야, 여기서. 지금 정치판의 핵심인 사람이.
"한잔하셔야죠. 저번에 나 빼고 아이리랑 둘이서 술 먹었다면서요?"
"그, 라피테스 공작이랑 세 명이서 마셨습니다."
"라피테스 공작은 그냥 낀 거라면서요. 변명은. 나랑도 마셔 줘요. 나도 마음고생 많이 했다고요."
그렇긴 하지. 사실상 형제의 목을 친 사람이니까. 물론 살려 주기도 했다만. 그녀는 확실히 지쳐 보였다. 그리고 이런 아름다운 여자한테 말하기는 그런데, 좀 전 내도 나는 것 같고… 아, 이건 그 냄새인데.
"혹시, 담배 피우세요?"
"어? 어떻게 알았어요?"
"흡연자들은 자기한테서 냄새 안 나는 줄 아는데, 다 납니다."
리얀은 자신의 드레스 소매를 들어 킁킁 맡아 보았다. 그녀는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마시긴 마셔야겠네."
아이리가 상황 정리를 했다. 그건 맞는 말인 것 같다. 솔직히 나도 오랜만에 땡기네.
"리얀, 그, 진짜, 궁금한데, 그 물어보고 싶은 게 있거든?"
어느 정도 술자리가 무르익었을 때였다. 실없는 얘기만 하고 있을 때 아이리가 머뭇거리며 말을 꺼냈다. 여기서 주량은 나 다음에 마리나와 리얀이 비슷한 정도로 강했고, 아이리가 제일 약해 보였다.
하긴 갓 스무 살이 된 아이니. 술이 약할 수도 있다. 중간부터는 그래도 좀 반 잔 좀 안 되게만 따라 줬는데도 혀가 꼬인 느낌이다.
"뭔데?"
리얀이 물었다. 리얀의 그 대답에도 아이리는 여전히 우물쭈물했다. 그때 마리나가 탁상을 쾅 쳤다.
"빨리빨리 말해요. 뭐 대단한 일이라고. 내가 여기서 제일 오래 산 사람이니까 말해 주자면, 그렇게 끌어서 좋을 거 하나 없어요. 괜히 사람들 이목만 집중시킬 뿐이라니까?"
"거, 왜 애 기를 죽여."
"공녀가 네 애야?"
마리나는 시시껄렁한 농담을 하면서 낄낄 웃었다. 아이리는 더 위축되어 버렸다. 난 아름다운 여성 셋과 술자리를 한다기에 사실 좀 설렜던 것도 사실이다.
근데, 마리나는 완전 아저씨 같은 말에 섹드립도 심심치 않게 하는 미친 사람이었다. 인생을 아예 놔 버렸다는 게 적절한 표현인 것 같다. 리얀은 품격 있기는 했지만 언제부터 배운 건지 줄담배를 피워 댔다.
"콜록, 콜록."
결국 여기서 제일 정상인 아가씨, 아이리만 손해 보는 판이었다. 담배 연기 뿌옇고 걸걸한 소리가 나오는 이 술판이 진정 로맨스 판타지 세계관의 술자리인가. 그냥 동네 노래방 3번 방에 있는 것 같은 느낌인데.
나는 마나를 이용해 아이리 주변의 공기를 환기해 주었다. 아이리가 내게 붉어진 눈으로 감사의 눈인사를 보냈다.
"그래서 아이리, 하고 싶은 말이 뭐야?"
"뭐 별건 아니야……."
"별거 맞구만."
"좀 조용히 해, 마리나."
마리나는 또 아이리를 놀리고 큭큭거렸다. 아이리는 마리나를 아예 무시하기로 작정한 모양인지 마침내 입을 열었다.
"진짜 사귀어? 둘이?"
"뭔 소리… 아."
리얀이 날 보더니 터졌다. 뭐야, 그 웃음은. 너 따위가? 하는 웃음인가. 모태 솔로라 느는 건 피해망상이지.
"어떻게 그렇게 생각하셨지?"
"나도 좀 묻고 싶다."
나와 리얀이 동시에 아이리를 바라보았다. 아니, 너무 뻔한 것 아닌가. 내가 리얀하고 뭘 안다고 연애를 해, 하기는. 딱 봐도 정치적 수작질인데.
"…왜? 사귄다며?"
"사귀는 거 아니었어? 구라야?"
뭐야. 마리나도 모르고 있었네. 그때 난 퍼뜩 뭔가가 떠올랐다. 마리나는, 가테스를 사랑한다는 사실. 지금 우리와 같이 술을 마시고는 있지만, 그녀는 리얀파가 아닌 가테스파가 아닌가.
"누가 봐도 연인인데. 티가 안 나요?"
나는 리얀의 손을 잡았다. 그때 리얀도 뭔가 눈치챈 모양이었다. 그녀 역시 연기의 선수. 바로 할 일을 했다. 심지어 그녀는 내 손을 고쳐 잡아 깍지까지 꼈다.
"좀 오래되긴 했는데. 사실 에퍼리가 좀 멋있잖아. 그래서 내가 먼저 사귀자고 했지. 황녀인데 좀 그런가."
"…그, 그래?"
아이리가 당황한 듯 대답하다가 술잔을 떨어뜨렸다. 술잔이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깨졌다. 아이리는 그걸 맨손으로 만지려 하다가 손가락을 베이고 말았다.
"아얏……."
"괜찮아요? 이런 걸 맨손으로 왜 만져요."
내가 바로 손을 잡으려 하자 아이리는 손을 뺐다. 우리 사이에 순간 어색한 기류가 흘렀다. 아, 이건 좀 그랬나. 하지만 아이리는 도리어 내게서 잘못한 듯 눈을 돌렸다.
"…괜찮아."
"…괜찮으시면 됐고요."
피가 철철 나는 게 괜찮지는 않은 것 같은데. 지금은 어쩐지 그냥 괜찮다고 말해야 할 것 같았다. 뭔가, 그 아이리의 모습이 애처로워 보였다. 그때 마리나의 손에서 흰빛이 번쩍거렸다.
바로 아이리의 상처가 아물고 피가 멈췄다. 저 이상한 모습에 자주 까먹곤 하지만, 마리나는 성녀였다.
"그런 걸 왜 손으로 만져요. 사귄다는 게 그리 충격이었나."
"그런 것 아니거든요?"
아이리가 벌컥 화를 내며 자리를 쾅 박차고 일어났다. 그 급작스러운 화에 리얀도, 나도, 마리나도 잠깐 얼어붙었다.
갑자기 분위기가 싸해진다는 게 이런 말이겠지.
"술이 너무 취한 것 같네요. 성녀님, 죄송해요. 치료도 해 주셨는데. 먼저 들어갈게, 리얀, 에퍼리."
"아, 네. 안 데려다줘도 괜찮겠어요?"
"…그럼."
아이리는 뒤를 돌아보지도 않고 문을 닫고 나갔다. 아이리가 나가자마자 마리나는 술을 들이켰다.
"공녀도 성격 있네."
"그러니까 왜 건드려."
"네가 건드릴 땐 가만히 있다가 내가 말로 뭐라 하니까 바로 지랄하는 것 봐. 저게 고양이 같은 매력인가 뭔가 하는 그거냐."
"넌 개소리하니까 개 같은 매력이라고 해야 하냐?"
다행히 마리나는 다시 웃으며 술을 따랐다. 얜 멘탈이 좋은 건지 나쁜 건지 모르겠단 말이야. 멘탈이 아예 없어 보인다고 해야 하나.
그나저나, 난 아이리가 나간 문을 바라보았다. 괜찮을까? 뭔가 당혹스러워 보였는데.
아이리는 공작저로 돌아가면서 왜 눈물이 나오는지 몰랐다. 술김에 그렇다기엔 발이 비틀거리지도 않았다. 그냥, 쉴 새 없이 나왔다.
자신이 느끼는 이 감정도, 이 눈물도 너무 낯설기만 했다. 눈물이 너무 많은 감정을 담았는지 무겁기도 했다. 대체 이 많은 감정은 어디서 나온 것일까.
일단 아이리가 생각할 수 있는 감정은 창피함이었다. 오랜 친구, 새로 사귄 친구… 라고 해야 하나, 좀 이상한 관계인 에퍼리 그리고 그렇게 달갑게 보이지 않는 성녀 앞에서 그런 추태를 보이다니. 심지어 성녀는 자신의 손을 치료도 해 주었는데.
"에이, 창피해."
그녀는 그 혼잣말로 눈물을 닦아 냈지만 눈물은 그칠 생각을 안 했다. 왜 이렇게 눈물이 나올까. 마치 눈물에 섞인 감정을 다 알아내지 않으면 절대 그치지 않겠다는 듯. 다른 감정은 무엇일까.
아이리는 눈물을 흘리면서도 머리를 휘저었다. 하지만 묵은 감정은 머리를 흔든다고 떨어져 나가지 않았다. 오히려 떨어져 나가지 않겠다는 듯 그녀의 마음을 꽉 조였다.
사랑인 걸까?
아이리는 다시 고개를 저었다. 이제, 인정할 때가 되었다. 너무 오래됐으니까, 그를 향한 마음은.
처음에는 그랬다. 그냥 짐꾼 1이었지만 갑자기 자신을 휘둘러 대고 멋대로 구해 주기까지 했다. 사실, 그때부터였다, 그에게 눈길이 간 건. 그래서 자신은 그에게 괜히 퉁명스럽게 대했다.
자신은 공녀였고, 그는 단순한 옌시의 짐꾼이었으니까. 그런 사랑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물론 지금 그가 후작이라 사랑을 인정하는 건 아니었다. 그는 항상 이상한 말을 했고, 이상한 광경을 보여 줬으며, 신기한 결과를 냈다.
그래, 자신은 그런 그를 멋있다고 생각했고, 사랑하고 있었다.
그 마음을 인정하자 그녀의 눈물이 신기하게 멈췄다. 뭔가, 이렇게 시원하구나 느꼈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걸 인정하는 건.
"…후우."
그녀는 마른세수를 했다. 눈물로 세수하니 눈가가 짰다. 인정을 하니 어째 더 답답한 느낌이었다. 왜냐하면, 그는 리얀과 사귀고 있었으니까.
분명 어울리는 상대였다. 아니, 어울리는 건가. 자신의 콩깍지였을 수도 있지만, 에퍼리는 엄청난 영웅이었으니 누구와도 맞는 상대가 없을 것 같았다. 솔직히 말해서 에퍼리가 아까웠다. 리얀이 참으로 아름답기는 하지만. 아니, 이건 질투다. 오히려 격으로 따지자면 리얀이 자신보다 위였으니까. 아름다운 것도. 그녀는 그렇게 생각했다.
"집에 가서 술이나 더 먹어야지."
"무슨 소리예요. 아가씨, 그렇게 안 봤는데 진짜 알코올 중독이시네."
누군가가 어둠 속에서 슬쩍 나왔다. 아이리는 굳이 자세히 안 봐도 그가 누군지 알 수 있었다. 자신을 이제 아가씨라고 부르는 사람은, 이 세상에 단 한 명뿐이었으니까.
왜 여기 있는지는 몰라도, 에퍼리가 눈앞에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