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화 검은 나무 원정대 - 열매 (2)
원정대가 출전한 직후 대제전은 아수라장이었다. 가토스는 무릎과 머리가 꿇린 채로 포박이 되고, 제2황자파 귀족들은 들고 일어났다. 그들 역시 제2황자와 비슷하여 온순한 사람이 많았지만, 뻔히 보이는 수작질에도 가만히 있지는 않았다.
"가테스 황자 전하, 이 무슨 잔학무도한 짓입니까?"
당황한 얼굴로 하이에크 공작이 대제전 앞으로 나왔다. 하이에크 공작은 제2황자파의 수장이었다.
"하이에크 공작, 지금 이 상황은 황족들의 일이다."
"제왕의 명예는 강제력으로 쟁취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하이에크 공작은, 그러면 이게 내 자작극이라는 건가?"
가테스가 말했다. 사실, 하이에크 공작은 그렇다고 생각했다. 다른 이들의 생각도 마찬가지일 것이었다. 하나 그렇게 말하는 건 가테스 황자를 고발하는 것에 다름없었다.
'당했군.'
하이에크 공작은 외통수에 걸렸다는 걸 알았다. 이건 너무나 뻔한 수작이었지만, 그만큼 확실했다. 황자라는 절대적인 위치를, 가장 효과적으로 사용할 수 있었다. 물론 명예는 떨어질지언정.
사실상 여기서 가테스 황자는 쐐기를 박으려는 것이었다. 이미 가테스 황자가 중립 귀족들을 다 자신의 편으로 돌려 놨다는 건 익히 알고 있었다. 아마 중립 귀족들은 가토스 황자 측이 더 날뛰기를 바랄 것이었다.
황족에게 선을 넘어서 처형이 되거나 작위를 박탈당한다면 그 자리는 온전히 중립 귀족들의 것이 될 테니까.
"가토스를 가둬라!"
가테스의 명령에 하이에크 공작은 눈을 감았다. 끝날 만한 싸움이 끝났다. 사실, 어쩔 수 없었다. 가토스 황자는 유했고, 가테스 황자는 냉정했다. 이 싸움은 누가 봐도 가테스의 승리였다.
"오라버니, 정말 이렇게까지 하셔야겠어요?"
그때 뜻밖의 사람이 나왔다. 제위에는 전혀 관심이 없어 보였던, 리얀 트라프비체 황녀였다. 가테스와 리얀의 눈이 맞붙었다.
"…아버지가 보시면 굉장히 슬퍼하실 거예요."
"리얀, 무슨 소리냐? 나는 지금 할 일을 하고 있는 것뿐이다."
"아직 가토스가 했다는 증거가 없어요."
"엑시 장군이 했다는 게 증거다."
갑작스러운 리얀의 등장에 모든 귀족이 웅성거렸다.
리얀의 가슴이 두근거렸다. 에퍼리가 상황을 정리하지 않고 간 이유는 명확했다. 황제가 되고 싶다면 직접 증명하라는 것이었다. 황제의 재목인지 아닌지.
에퍼리는 대단한 사람이었다. 이 정도의 판단을 빠르게 할 수 있는 걸 보면, 분명 이러한 권력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정확하게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심지어 그는 힘을 가지고 있어도 쓸 곳과 안 쓸 곳을 알았다. 가테스를 힘으로 몰아붙일 수 있음에도 자신에게 맡겼다. 계약 관계란 이런 것이었다. 에퍼리가 단순히 해 주는 것만이 아닌, 자신이 해야 하는 것도 있었다.
"제가 황제의 자리를 탐했다면 저도 이렇게 무릎을 꿇렸을 건가요?"
리얀이 말했다. 그 말에 모두가 얼어붙었다. 리얀의 선전포고였다. 가테스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이해할 수 없구나, 리얀. 왜 그런 말을 하는 거지?"
"이건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이에요."
리얀은 가테스를 노려보았다.
"이번 사건의 조사관은 제가 맡고, 가토스의 간수 역시 제가 맡을 거예요. 오라버니에게 이 일을 전부 맡길 수는 없습니다."
리얀은 가테스와 눈을 계속 마주쳤다. 가테스의 시선이 자신의 몸에 얼음을 쑤셔 넣는 것 같았다. 하지만 피하지 않았다. 피할 수도 없었다.
이 상황에 집중해야 했다. 긴장의 끈은 놓지 않되 감겨 졸리면 안 되었다.
"…리얀 황녀 전하의 말이 응당 옳습니다. 저는 지지합니다."
하이에크 공작이 뒤에서 리얀의 부담감을 줄여 주었다.
"…그래. 리얀, 너에게 이 사건의 조사를 맡기마."
"네."
리얀은 속으로 주먹을 불끈 쥐었다. 제일 위험한 관문은 통과했다. 리얀은 가테스의 마음이 바뀌기 전에 최대한 빨리 움직였다. 사심이 없어 보여야 한다. 아직 발톱을 드러내기엔 이르다.
그녀의 판단. 리얀은 가토스를 용의자로 취급하며 최대한 사심 없는 움직임을 보여 줬다. 가테스 황자 측의 귀족이 따라오려고 했지만, 리얀은 뒤를 돌아 차갑게 말했다.
"이 사건의 조사관은 제가 전부 배정합니다. 오라버니는 신경 쓰지 마세요."
리얀은 자신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한기를 풍겼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가테스의 눈은 여전히 자신의 뒤통수를 좇고 있었다.
리얀은 하이에크 공작을 포함한 가토스 황자 측의 수없이 많은 투서를 받았다. 어떻게든 가토스의 결백을 밝혀 달라는 것이 편지들의 골자였다.
지금 리얀은 가토스가 갇혀 있는 지하 감옥에 혼자 있었다. 이 공간은 조사관을 자처한 리얀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못 들어오게 되어 있었다.
쿵, 쿵, 쿵.
가토스가 갇힌 방에서 요란한 소리가 들린다. 아마 입과 눈이 막혀 있는 상태에서 엄청난 공포를 느끼고 있음에 틀림없었다.
리얀은 근위병에게 받아 온 담배를 하나 물었다. 첫 담배였지만, 거리낌은 없었다. 조금이라도 안정에 도움이 된다면 마약이라도 했을 것이다. 리얀은 가토스 황자 측에서 보낸 편지들을 전부 불태운 다음에 그 편지들로 하여금 담배에 불을 붙였다.
"후욱."
밀폐된 간수실에서 연기가 짙게 뿜어져 올라왔다. 불이 붙은 편지들이 남긴 재 역시 방구석에 날렸다. 머리가 몽롱했다. 눈이 풀리는 게 느껴졌다. 이 시간은 그녀에게는 지옥과도 같았다.
눈을 감자 몽롱함이 멀미가 되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것을 버텼다. 담배 연기가 자욱한 곳에서, 그녀의 폐가 빠르게 적응하고 있었다.
"올라가야지."
오늘은 3일 차. 조사 결과를 발표하는 날이었다. 조사를 하면서, 리얀은 가테스가 얼마나 대단한 적인지 실감했다. 증거 하나하나가 가토스를 가리키고 있었으니까. 즉흥적으로 벌인 일처럼 보이지만, 꽤 오래전부터 계획된 일이었던 거다.
쿵, 쿵, 쿵.
지하 감옥이 다시 울렸다. 리얀은 가토스가 있는 방을 보았다. 창문도 없는 지독한 방이었다. 밑에 음식을 넣어 주는 작은 공간만이 있을 뿐.
"미안해, 가토스."
리얀은 담뱃불을 벽에 튕겨서 끈 다음 조용히 계단을 올라갔다. 계단 옆에는 리얀이 걸어 놓은 화려한 복장들이 있었다. 자신에게는 맞지도 않고 불편하기만한 복장들.
그녀는 계단을 올라가면서 편한 옷을 벗고 옆에 걸려 있는 옷들을 챙겨 입었다. 불편했지만 어릴 때부터 입던 옷이라 올라가면서도 입을 수 있을 정도였다. 계단을 다 올라서 지상으로 나간 리얀은 황녀의 모습 그 자체였다.
"황녀 전하, 오셨습니까."
"조사 결과는 어떻게 나왔습니까?"
"조사관은 누구를 쓰셨습니까? 역시 칸나 소령입니까?"
복도를 걷자마자 각 라인의 끄나풀들이 먼저 정보를 수집하려고 달려들었다. 리얀은 한숨을 쉬었다.
"물러나세요. 대제전에서 밝힐 거니까. 아니면 황녀라는 지위가 우습나요?"
리얀이 주변을 째려보자 귀족들이 모두 얼었다. 자신은 지금까지 너무 유하게 귀족들을 대했다. 물론 미안한 마음은 있지만, 지금만큼은 그래서는 안 됐다. 에퍼리와의 계약이 있었으니.
대전으로 들어가자 모든 시선이 그녀에게 집중됐다. 그녀는 그들 중 아무도 쳐다보지 않고 오만하게 자신을 내려다보는 가테스 앞으로 향했다.
"조사관 리얀 트라프비체, 보고할 준비가 됐습니다."
"보고하라."
가테스가 말했다. 리얀이 느끼기에, 그는 오만함을 띠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럴 만했다. 그는 모든 증거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으니까.
"엑시 장군의 저택 내에서 유서가 나왔습니다. 개인적인 내용도 쓰여 있어 그대로 낭독할 수는 없습니다만, 가토스 황자의 사주를 받았다는 게 확인됐습니다."
"말도 안 됩니다!"
리얀의 말을 끊고 나선 건 가토스 황자파의 수장인 하이에크 공작이었다. 가테스가 뭐라 하기도 전에 리얀이 하이에크 공작을 노려보며 말했다.
"지금은 조사관이 발언하는 중입니다."
"계속하도록."
가테스는 흡족한 미소를 짓고 리얀을 독촉했다. 리얀은 자신이 얻은 증거를 계속 읊어 나갔다. 무엇 하나 가토스를 가리키지 않는 증거가 없었다. 근위병의 증언부터 엑시 장군 측근 병사의 말들까지, 모두 가토스를 가리키고 있었다.
그에 따라 가토스 황자파의 귀족들의 얼굴도 사색이 되어 가고 있었다. 이렇게 증거가 많을 줄 몰랐기 때문이다.
리얀은 계속 발언했다.
"마지막으로, 가토스 황자의 집무실에선 이러한 일기가 발견됐습니다. 가테스 황자가 검은 나무를 추종하는 검은 무리와 결탁하고 있는 것 같다는 의심이 깃든 일기 말입니다."
"잠깐, 그건 무슨 소리지?"
가테스가 끼어들었다. 리얀은 종이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연극은 아직 끝나지 않았기 떄문이다. 자신은 조사관의 역을 맡은 사람이었다.
"조사관이 발언하는 중입니다."
하이에크 공작을 무른 명분이 계속되자 가테스도 할 말은 없었다. 그저 리얀의 말을 기다릴 수밖에.
"그러나 가토스 황자는 황궁 의원에서 우울증, 피해망상 등의 병력으로 처방받은 경력이 있었습니다. 그에 따라 이 증거의 신빙성이 의심되는 터입니다. 혹시 가테스 황자 전하가 검은 무리와 결탁하고 있다는 것에 언질을 받은 대신이 있다면 여기서 발언해 주기를 바라는 바입니다."
리얀은 좌중을 바라보았다. 아무도 말을 하지 못했다. 그녀는 말을 이었다.
"가토스 황자의 의혹은 둘째 치고서라도, 자신의 수하인 엑시 장군이 제국의 영웅이 될 에퍼리 후작을 암살하려 했다는 점은 변하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가토스 황자에게 책임을 물어 사형을 권고하는 바입니다."
"잘하고 있으려나."
"뭐가?"
내 등에 찰싹 달라붙어 있어서 혼잣말도 들을 수 있는 아이리가 물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이건, 리얀과 가토스, 나만의 비밀이니까.
"이제 황도네."
"뭔가 시끄러워 보이죠?"
2km는 떨어져 있어도 대제전에 사람이 모여 있는 건 보인다. 대대적인 행사가 진행되고 있겠지. 내가 아는 그 행사가 맞을 터다.
난 황도 바깥에서 알파튜러스를 내려놓았다. 알파튜러스에게 보이기에는 너무 잔인한 광경이라서. 물론 아이리나 마리나에게도 그렇지만.
"잠깐 여기 있으실래요?"
"왜?"
"아마 지금 가면 못 볼 꼴을 보게 될걸요."
내 말에 아이리가 골똘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눈치를 보다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마리나는 애초에 내 말에 관심이 없었다. 알파튜러스의 푹신한 등에 몸을 굴리고 있었다. 천생 백수는 3번 태어나도 어쩔 수 없는 모양이다.
"그래. 대신 데리러 올 거지?"
"그럼요. 얼마 안 걸려요."
나는 그렇게 말하고 대제전으로 쏘아 갔다. 내가 낼 수 있는 한 최대의 속도로.
얼마 지나지 않아 대제전으로 들어갔다. 사람이 빽빽한 곳에서도, 난 사람 한 명 끼일 곳의 빈 곳을 찾을 수 있었다.
내가 빈자리를 찾았을 때 커다란 북이 크게 울렸다. 내가 처음 본 건, 처형대에서 눈과 입, 귀가 막혀 있는 가토스가 버둥거리고 있는 장면이었다. 그와 동시에 칼날이 떨어지고 가토스의 목이 잘렸다. 그의 목이 처형대 아래서 데굴데굴 굴렀다.
"…윽."
누군가는 고개를 돌리고, 누군가는 눈을 감았고, 누군가는 눈물을 흘리고, 누군가는 환호성을 질렀다.
난 리얀을 바라보았다. 리얀은 가토스의 굴러떨어진 목을 바라보고 있었다. 형제의 목을 떨어뜨린 심정은 어떨까. 나라면 아마 못 했을 거다.
그때, 대제전의 관객석에 큰 그림자가 드리웠다. 알파튜러스가 날고 있었다. 모두가 알파튜러스를 쳐다보았다.
"…마수다."
"무, 무슨 마수지?"
근위병들이 움직이기도 전에 알파튜러스는 몸을 돌려서 황도 밖으로 날아갔다. 그 바람에 대제전에 깔려 있는 모래 먼지가 올라왔다. 모든 귀족이 켁켁거렸다. 리얀은 소매로 얼굴을 가리고 하늘 바깥으로 사라지는 알파튜러스를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볼 건 다 봤다. 난 대제전 바깥으로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