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화 검은 나무 원정대 - 파종 (4)
황궁 도서관의 문은 잠겨 있었다. 나는 손잡이의 문을 좀 잡아당겼다. 아닌가, 리얀은 황녀의 집무실에 있으려나. 그렇게 생각하고 발걸음을 돌리려고 할 때, 도서관의 문이 열렸다.
"와 주셨네요."
그녀는 도서관에 있었지만 핑크색 머리와 안경을 쓰고 있지 않았다. 막상 도서관에서는 리얀의 본모습을 본 적이 없어서 낯설었다.
"왜 문을 잠그고 계십니까."
"그냥요. 왠지."
우리는 아무 말 없이 사서 데스크로 갔다. 리얀은 사서 데스크 안에 앉았고, 난 바깥에 서 있었다.
"의자가 없나요?"
"괜찮아요. 곧 출정식이 있으니까요."
리얀은 사서 테이블에 앉아서 나를 올려다보았다.
"그래요, 편지는 무슨 느낌이던가요? 저를 경멸하게 되었나요?"
"별로요. 뭐, 그럴 수도 있죠. 다만 그건 좀 궁금했어요."
나는 말했다. 리얀은 눈에 띄게 긴장을 하고 있었다. 그녀의 모습은 내가 아는 리얀과는 완전히 달랐다.
"왜 그렇게 바뀐 겁니까?"
"…뭐가요?"
"불안해요, 지금의 황녀 전하는."
내가 아는 리얀은, 이지적이고 냉철한 면을 가진 사람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너무나 흔들리고 있다. 내가 그것을 지적하자 리얀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죠. 전 지금 멍청한 상태죠. 저도 저한테 많이 물어봐요. 리얀 트라프비체, 넌 뭐 하는 사람이니? 하고."
리얀은 거울을 들어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 속에는 기품 있는 아름다운 황녀의 얼굴이 비치겠지만 리얀은 다른 무언가를 볼 수도 있었다. 어쩌면 추악한 얼굴일 수도 있겠지.
"저도 제가 이렇게 급하게 바뀔 줄 몰랐어요. 전 언제나 여유롭고 싶었죠. 하지만 세상이 그렇게 놔두질 않네요."
"황제 폐하의 급작스러운 죽음이 황녀 전하를 바꾼 건가요? 그렇다기에는 황녀 전하는 성녀를 부활시키기 위해 저와 같이 움직이기도 하셨지 않습니까?"
"솔직히 말할까요? 이건 당신에겐 배신 같은 말인데."
리얀은 씁쓸하게 웃었다.
"나는 완벽한 사람이 아니에요. 완벽하게 보이려는 훈련을 한 보통 사람이죠. 봐요. 난 내 행동이 틀리다고 생각한 적이 없어요. 그래서 당신들과의 원정도 할 수 있었죠. 그게 옳은 일이라고 생각했으니까."
"그런데요?"
"하지만 결과적으로, 그건 제 목표에서 멀어지는 일이었죠. 그 한나절 동안 가테스 오라버니가 포섭한 중립 귀족이 자그마치 150명이 넘는답니다. 대단하죠? 전 그런 중요한 하루를 별 계산 없이 날려 버린 거예요, 내 자기만족으로."
그래, 그녀는 완벽한 사람이 아니다. 그건 알고 있다. 사실 그녀의 상대가 가테스가 아니라 가토스만이었어도 자신의 원정대 경력을 더 재치 있게 썼을 수도 있을 것이다.
다만 가테스가 너무 유능한 나머지 그런 경력을 쓸 만한 여지도 주지 않은 것이다. 굳이 말하자면, 리얀도 충분히 괜찮은 사람이지만 가테스의 적수로 붙기에는 부족했다고 할 수 있었다.
"솔직히 그냥 포기했을 수도 있어요. 누구한테도 제위에 관심을 드러내지 않고 그냥 황제를 보위하는, 고분고분하고 가끔 언급되는 인자한 황녀로 남아 있었을 수도 있죠. 근데 날 바꾼 게 누군지 알아요?"
"설마 그게 전가요?"
"왜 아니겠어요? 당신만큼 멋있는 사람이 어디 있다고요. 당신은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는 법이 없죠. 힘이든 지혜든 이용해서 자신만의 뜻을 관철해 나가요. 마치 이 세계라는 소설이 있다면 당신이 주인공인 것같이."
나는 멋쩍어져서 살짝 헛웃음을 터뜨렸다. 그래, 원작에서는 리얀이 제위의 욕심을 드러내지 않았지. 그런 사람인지도 몰랐고. 그건 나의 영향 때문이라.
"당신을 보면 왠지 꿈을 좇게 돼요. 그냥, 이건 내 생각이에요. 다른 사람들도 영향을 많이 받았을 거예요. 아마 아이리도 당신에게 영향을 받았기 때문에 원정대에 넣어 달라고 생떼를 부린 거겠죠. 제가 아는 아이리는 은근히 체면을 중시하는 애라서 남한테 부탁 자체를 안 하는 사람이거든요. 당신이라서 한 걸 거예요."
나는 리얀을 바라보았다. 리얀은 지금 진심을 담아서 말하고 있었다. 그 정도는 알고 있었다.
그녀는 현실과 이상 사이에서 고민하고 있었다. 현실과 타협할 생각은 충분히 있어 보인다. 당연하지만 꽤 고집쟁이로 보이는 리얀에게 그런 생각이 들었다는 건 그만큼 그녀가 현실과 멀어졌다는 것을 의미했다.
나는 사서 테이블 뒤쪽에 있는 시계를 봤다. 이제 결정을 할 때였다. 난 그녀에게 물었다.
"황제가 되고 싶으신 건 여전하겠죠?"
"그럼요."
"그러면 이번 원정대 출정식에서 저를 좀 도와주세요. 계약입니다."
나는 황금색 두루마리를 꺼냈다. 그것에는 내가 리얀의 편지 위에 덧쓴 각자의 이름과 사인하는 부분이 있었다.
"어떤 계약인가요?"
"지금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황녀 전하는 똑똑하신 분이니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아실 겁니다."
나는 일어났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리얀에게 다가가 귓속말을 전해 줬다.
"그리고 저를 한 번 더 이렇게 이용하려 하지 마시죠. 당신의 뜻대로 움직이는 건 이번 한 번뿐입니다. 전 은근히 정이 없는 사람입니다."
리얀은 에퍼리가 도서관의 문을 닫고 나가자마자 힘이 쫙 풀려 버렸다. 그는 다 눈치채고 있었다.
사실 이건 리얀이 가진 비장의 한 수였다. 그녀가 성녀 부활 원정대에 참여한 건 처음부터 하나의 목표 때문이었다. 정치적 수단? 그런 걸로 냉혹한 귀족들을 돌리려고 생각하는 건 바보였다.
그저 그녀가 원정대에 참여한 건 에퍼리라는 사람의 호감을 얻기 위한 게 전부였다. 에퍼리라는 한 사람의 호감을 얻으면 얻을 게 너무 많아 보였기에. 괜히 갈대 같은 어중간한 중립 귀족들을 수집하는 것보다 에퍼리라는 사람이 훨씬 영양가가 있었다.
"후."
또한 그는 퍽 인정에 약해 보였다. 아이리와 친하게 지내고 가티스에 대해서 걱정하는 걸 보면 그런 사람이었다.
리얀은 최대한 이상적인 황제를 꿈꾸는 사람으로 보이고자 했다. 특히 에퍼리 앞에서는 말이다. 그는 인간적인 면모를 꽤 좋아했다. 그녀는 알 수 있었다.
이렇게 흔들리는 모습까지 모두 그녀의 계획이었다. 이렇게 하면 에퍼리는 자신을 도와줄 수밖에 없을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그런 에퍼리가 대체 어디서부터 자신의 진의를 파악한 건지. 도무지 얕잡아 볼 수 없었다. 그는 심지어 자신과의 관계에서도, 출정식에서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안 알려 주면서 주도권을 가져갔다.
"대단한 사람이야."
리얀은 긴장으로 마른 입술을 혀로 잠깐 축였다. 그녀는 사서 데스크 밑에서 핑크색 가발과 안경을 꺼냈다.
"세상엔 참 훌륭한 사람이 많아요. 그렇죠, 아버지?"
그녀는 마법진을 이용해 핑크색 가발과 안경을 태웠다. 기만이 아닌 진심으로 부딪칠 만한 사람이 나왔다.
어제오늘 이틀 동안 대체 얼마나 많은 정치적인 수작질을 받았는가. 머리가 아프지만, 그렇다고 그들의 수작이 안 보일 정도는 아니었다. 난 민주주의와 자본주의의 첨단을 달리고 있는 대기업 총수들의 개수작들을 옆에서 많이 봐 온 사람이니까.
리얀이 이렇게까지 엄청난 연기를 펼치면서 나를 현혹하려 할 줄은 몰랐다. 나는 계속 의심하고 있었다. 그녀가 처음부터 발로 뛰는 정치인이 되고 싶다고 천명했을 때부터 거짓말이 아닐까 하고. 왜냐하면, 내가 아는 정치인 중에는 그런 사람이 한 명도 없었으니까.
타이밍은 기가 막혔다고 생각한다. 나가기 전, 혼란스러울 때 그녀는 자신의 이상을 천명하며 나를 흔들려 했다. 하지만 내가 알고 있는 건 리얀이 그렇게 바보 같은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눈치를 챈 건 황금색 두루마리 때부터였다. 아무런 생각도 없이 중립 귀족들에게 막무가내로 부딪친다? 내가 아는 리얀은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리얀은 은근히 가증스러운 면이 있는 사람이었다. 이건 원작이 아니라 진짜 내 개인적인 판단이었다. 그게 맞았고.
"드디어 왔네."
"지각인데."
내가 간이로 만든 원정대의 대기실로 들어가자 마리나와 아이리가 반겨 주었다.
"가자."
내가 말하자 아이리가 내 소매를 살짝 잡았다. 그런 아이리를 보고 마리나는 여지없이 비웃어 줬다.
"살짝 떨리는데."
"쫄보시구나."
"쫄보는 또 뭐예요?"
"됐어요."
결국 둘은 대제전 앞으로 나가기 직전까지 투닥거리면서 싸웠다. 물론 나가자마자 다른 사람들의 함성에 투닥거리는 것도 멈출 수밖에 없었다.
마리나는 귀찮다는 표정이었지만, 아이리는 이런 환호성을 처음 들어서 압도된 모양이었다.
내가 맨 앞에 서고, 마리나와 아이리는 한 발짝 뒤에서 좌우로 나를 따라왔다. 좌우에 엄청난 미녀들을 끼고 있으니까 정말 내가 대단한 사람이 되었다는 느낌. 물론 이런 기분에 취해 있을 때는 아니다.
단상 위에서는 가테스가 인자한 표정으로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의 영웅들이 왔군."
"만들어진 영웅이죠."
"그런 말은 자제하도록 하라. 좋은 날이니."
그래서 너한테만 들리게 말해 줬잖아. 가테스는 그런 싸늘한 말을 하면서도 인자한 표정을 풀지 않았다. 황족이란 것들은 다 연기를 잘하나 보다.
"지금부터 원정대 출정식을 거행하겠다!"
가테스의 외침과 함께 다시 함성이 터져 나왔다. 난 시끄러워 눈을 살짝 찌푸렸다.
대개 한 단어 끝에 '식'이라는 게 붙으면 재미가 없다. 개인차가 있겠지만, 난 특히 남의 결혼식이 재미없었지.
출정식은 내가 주인공인데도 참으로 재미없었다. 가테스가 우리를 한껏 띄워 주고 거기다가 제국의 위상이라는 숟가락을 얹는 식으로 연설을 했다. 우린 그저 그 앞에서 한쪽 무릎을 꿇은 채로 비장한 척을 하는 게 전부였다.
난 그냥 가테스의 길고 긴 연설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고 있었다.
"…야."
"…뭐 해?"
뒤에서 마리나와 아이리의 목소리가 들려 난 뒤를 돌아보았다. 바로 앞에서 시선이 느껴졌다. 가테스의 불같은 시선이었다.
"…올라가라잖아."
"아, 벌써 그렇게 됐나."
나는 투덜거리며 무릎을 폈다. 그래도 원정대를 기념하는 축제니 나도 할 일이 있었다. 이런 건 내가 전문이기는 하다, 얼굴 빌려주는 거.
단상으로 올라간다. 이제 시작된다, 이 출정식의 하이라이트가.
"원정대장 에퍼리 션입니다."
그 말과 함께 내게 화살과 검이 날아왔다. 마리나와 아이리는 깜짝 놀랐다. 가테스가 막을 새는 없었다. 내가 칼을 휘둘러서 모든 것을 쳐 냈으니까.
투두둑 하는 소리와 함께 암기와 화살들이 떨어졌다. 순간 천장에서 검은 옷을 입은 사람들이 떨어졌다. 원래 이런 건 유치해야 제맛이지.
그들은 생각보다 꽤 고수였다. 소드 마스터 2 정도는 되는 사람. 힘 좀 썼네. 나는 그의 검을 쳐 낸 다음에 그의 어깨를 잡아 바닥으로 메쳤다.
"뭐, 뭐야?"
웅성거리는 다른 사람들. 괜찮다. 내가 볼 때는 다 쇼다. 난 솔직히 여기까지가 쇼의 끝인 줄 알았다. 이 정도면 됐잖아.
난 가테스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가테스는 눈짓을 했다. 아직 안 끝났다는 눈빛이었다.
내게 메쳐진 그는 크게 악다구니를 쓰며 내게 달려왔다. 그의 몸에서 커다란 마나의 맥동이 느껴진다. 난 곧장 마나로 나와 내 뒤편에 있는 아이리와 마리나를 막았다.
그가 폭사하면서 외친 말은, 좌중을 얼어붙게 하기에 딱 좋은 말이었다.
"가토스 황자 전하, 제 목숨을 바칩니다!"
쾅!
그리고 그의 시체가 강력하게 폭발하며 비산했다. 깔끔했던 단상이 피와 내장으로 얼룩졌다. 환호성과 기대감으로 가득 찬 대기에 혈향이 무겁게 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