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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맨스판타지로 떨어진 S급 헌터-81화 (81/150)

80화 검은 나무 원정대 - 파종 (1)

이번 원정대는 전보다 훨씬 간소했다. 왜냐하면 지금은 외적, 제논 왕국의 침입도 준비를 해야 했기에 예전처럼 군단장급 되는 인물들이 모두 참여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사실 그 아저씨들은 원래 필요 없었다. 전의 원정도 내가 효도 관광 시켜 준 거라고 생각한다. 하는 것도 없었지. 검은 나무를 처치하는 데는 마리나와 나면 충분하다. 아이리가 낀 건 의외였지만.

"근데 출정식은 무슨 말이냐고요."

"가테스 오라버니가 지금은 아버지께서 하신 일을 모두 담당하고 있으니까요. 지금은 제국의 최종 결재자죠."

"황녀 전하는요?"

"음, 모르겠는데요."

리얀은 생글거리기만 했다. 이 사람은 대체 황제가 될 생각이 있다고만 하고, 무슨 꿍꿍이를 가졌는지 모를 일이다. 리얀이 황제가 되나 가테스가 황제가 되나 나는 별로 관심이 없다. 아직까지는.

"심지어 원래 가테스 황자 전하가 하셨던 일은 가토스 황자 전하한테 넘어갔다면서요?"

"그렇지."

"날로 되는 건 하나도 없습니다, 황녀 전하."

"날먹 아니야."

뭐지. 아무리 이 세계가 고증이 안 됐다고 해도, 이런 은어를 써도 되는 건가 싶었다. 내가 잠시 멍해 있자 리얀이 말을 이었다.

"요즘 성녀 입버릇이 그거야, 날먹. 날먹에 혈안이 되어 있는 사람 같아. 뜻을 물어보니까 날로 먹는 걸 날먹이라고 한다더라고. 꽤 좋은 삶의 지혜 같아."

"…별로 같습니다."

걘 대체 뭐 하기에 이딴 쓰레기 같은 말을 전파하고 다니는 걸까. 그래도 이 배경으로 글을 쓴 작가인 만큼 이 세계에 대한 애정이 생겼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착각인 모양이다.

"황녀 전하, 제위에 대해 여전히 관심은 있으신 겁니까?"

"그럼요?"

"뭐, 전 사실 상관없습니다. 그냥 물어본 겁니다."

리얀이 후후 웃었다. 난 그녀가 이렇게 맹한 사람이라고 절대 생각하지 않는다. 경험상 날카로운 사람이 맹한 척을 할 때 제일 조심해야 했으니까.

"그래서 원정대 출정식은 언제인데요?"

"내일이에요."

"가깝네요."

"아직 공식 발표는 안 났어요. 미리 말해 주는 거긴 해요."

"왜요?"

"음. 에퍼리 후작이 좀 바쁠 거거든요. 이번 원정대장은 그쪽이니까."

나는 살짝 얼굴을 찡그렸다. 뭔가 귀찮을 것 같은 느낌이 강하게 풍겨 온다.

"제가 바쁠 이유가 뭐가 있죠? 원정대라고 해 봤자 세 명인데."

"아마 이런 이유 때문일걸요."

리얀은 곱게 말린 황금색 두루마리를 내게 건넸다. 난 두루마리를 받아서 펼쳤다. 그것에는 참으로 신기한 내용이 적혀 있었다.

"계약서?"

나는 리얀이 준 두루마리의 내용을 쭉 읽어 보았다. 계약서답게 뻔한 소리들이 어려운 단어로 작성되어 있었다. 이럴 때는 마지막 문장만 보면 된다.

"…뭐야."

나는 마지막 문구로 바로 눈을 돌렸지만, 그 짧은 문구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말이 되나, 이 문장이.

- 에퍼리 션은 리얀 트라프비체의 꿈을 이뤄 줘야 한다.

- 리얀 트라프비체는 에퍼리 션의 꿈을 이뤄 줘야 한다.

- 모든 계약 조건의 우선순위는 에퍼리 션에게 있다.

난 두루마리를 거꾸로 든 다음 팔랑거렸다. 제정신으로 쓴 계약서가 아니다. 이건 내가 그냥 갑도 아니고 슈퍼 갑인 계약서였다.

"저보고 이렇게 쓰라고 해도 못 썼을 것 같은데. 양심에 찔려서."

"그래요? 그러라고 쓴 거긴 한데."

"이 계약서의 저의가 뭡니까?"

난 공정한 계약만 해 와서 이런 노예 계약서는 처음 봤다. 심지어 내가 작성한 것도 아니고, 계약의 부조리성을 덤터기로 받는 당사자가 써 온 이 계약서.

"그냥, 이제 정식으로 내 사람으로 만들고 싶다고요."

"전 어디 묶여 있는 사람이 아닌 걸 아시지 않습니까."

"그래도, 원하는 걸 서로 채워 준다면 얘기가 다르잖아요?"

리얀은 자신 있게 말했다. 근데 리얀에게도 말했을 텐데, 내가 원하는 건 사랑 내지는 연애라고. 나는 그냥 그녀에게 두루마리를 돌려주려고 했지만 리얀은 받지 않았다.

"가지고 있으세요. 생각 좀 더 해 봐요."

"…음."

좀 불편한데. 그래, 뭐 가지고는 있지. 리얀은 웃으면서 내 방을 떠나갔다.

결국 내가 왜 바쁠지는 얘기를 안 해 줬네… 하고 생각할 때쯤이었다. 하지만 난 30분도 채 지나지 않아 리얀의 말뜻을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었다.

"…웩."

난 이런 서류들이 싫다. 정말로 너무 싫다. 헌터 때도 난 계약서를 많이 쓰지는 않았다. 보통 그냥 구두계약으로 주고받았지. S급 헌터인 나를 상대로 떼어먹으려는 짓은 당연히 못 했으니까.

근데 이건 세계가 다르다. 전자 계약서가 보편화된 지구와 달리, 이 세계는 모두 수기로 작성되는 곳이니까. 심지어 계약서도 아니다. 그냥 수필 내지는 연애편지 같은 거다.

- 에퍼리 후작, 이고르 후작일세. 저번에 아이리 공녀 연회장에서 내 딸인 엘리자베스가 인사했다 하더군. 그 연으로 자네를 다과회에 초대하고 싶은데 어떻게 생각하는가?

- 에퍼리 후작, 혹시 무기가 필요하면 제국 최고의 공방인 우리 공방에서 무기를 쓰는 건 어떠한가? 물론 무료로 대여해 줄 수도 있다네. 관심이 있다면 이 인편으로 답장을 보내 주시게나. 원정대 출정식에서 우리 공방의 제품을 써 주면 정말 영광이겠네.

- 에퍼리 후작님, 이런 편지를 보내는 것을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 에퍼리 후작님…….

"다 태우고 싶다."

이런 인기를 바라지는 않았다. 애초에 난 소소하게 연애를 하고 싶었다고. 사회적으로 이렇게 주목을 받는 건 헌터 때에도 충분했으니까.

이건 사실상 협찬이거나 동맹 제의 아닌가. 어떤 이는 노골적으로 자신이 속한 당파를 옹호하고는 했다.

- 저는 가테스 황자 전하를 보위하는 사람입니다. 에퍼리 후작도 가테스 황자 전하와 연이 있는 사람으로 알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이런 거. 난 누구 당파에 속할 생각이 요만큼도 없는데. 헌터 때도 난 자유인에 가까웠고, 내 계파를 만들어 본 적도 없다. 그냥 개인적으로 가까우면 술 한잔하는 정도였지.

그러나 이런 중세 사회에서는 사회적인 인맥이 필수불가결적인 것일까? 내 앞 책상에 쌓여 있는 쪽지들에 난 그런 생각을 하게 됐다.

그러나 제일 거슬리는 건 맨 밑바닥에 걸린 황금색 두루마리였다. 이게 밑바닥에 깔린 이상, 난 어떤 쪽지에도 답장을 해 줄 수 없었다.

리얀은 영악하게도, 내게 황금 두루마리를 맡기는 것만으로 내 선택에 부담을 주고 있었다. 심지어 리얀은 나에 대해 더 잘 알고 있었다.

다른 귀족들의 애매한 '친교', '연회' 이런 것과는 달리, 간단하게 우리 관계를 '계약'으로만 정리했으니까. 그게 확실히 내 스타일이기는 했다.

"머리 아프네."

나는 머리를 산발로 흐트러뜨린 다음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럴 때는 좀 걸어야 했다. 만날 사람도 있었고.

"칸나, 잘 있었어?"

"응, 안녕."

복도에 있는 테이블에서 책을 읽고 있던 칸나가 인사했다. 그녀는 지금 내가 원래 맡았어야 할 가티스의 근위 기사를 하고 있었다. 특별히 내가 주문한 것이기도 하다.

내가 알기로 칸나만큼 주변에 있으면 힐링되는 사람도 없었으니, 가티스한테도 힐링이 필요할 것 같아서.

"가티스 황자 전하는?"

"안에 계시지."

"만날 수 있을까?"

"힘들 것 같은데. 나도 안 뵌 지가 꽤 돼서."

칸나는 굳게 닫힌 문을 착잡한 눈으로 힐끗 쳐다보았다. 가티스의 상태는 어느 정도 알고 있다. 자신의 아버지가 죽은 걸 눈앞에서 봤다지. 그 밝았던 아이가 이렇게 방구석에 틀어박혀 있는 것도 이해가 되었다.

"그럼 내가 한번 해 보지, 뭐."

"…할 수 있겠어?"

"그럼."

나는 칸나가 가티스에 대해서 모르는 부분을 알고 있으니까, 충분히 가능할 거라고 생각한다.

"내가 할 일인데."

"그런 게 어디 있어. 그냥 할 수 있는 사람이 하는 거지."

"그럼 나는 잠깐 자리를 비켜 줄게."

칸나는 책을 덮고 일어났다. 그녀는 진심으로 가티스를 걱정하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자리를 비켜 주는 것일 터였다. 의무와 인정이 가득한 너라는 사람은 대체.

"고마워."

"나중에 나한테도 좀 알려 줘. 가티스 황자 전하와 좀 친해지고 싶거든."

"그래."

칸나가 복도의 골목을 돌아 사라지자 나는 조용한 복도를 노크 소리로 울렸다.

똑, 똑.

"황자 전하, 전 근위 기사가 왔습니다."

당연하지만, 문 안쪽에서 대답은 없었다. 하지만 난 느낄 수 있다, 그가 깨 있다는 걸. 호흡 소리가 불규칙한걸. 지금 시간은 오후 4시 정도. 이 시간에 가티스가 이렇게 무력하게 있는 건 전 근위 기사로서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교육을 빼먹고 도망가면 도망갔을 애였는데. 하긴,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잃었다. 이렇게 되는 것도 어쩔 수 없겠지.

하지만 지금 가티스는 이러고 있으면 안 된다. 그건 황족의 피에게 주어진 가혹한 의무였다. 그렇지 않으면 가티스는 더 괴로워질 게 분명했다.

"황자 전하."

여전히 불러도 아무 대답도 없었다. 괜찮다. 시간이 많은 건 아니지만, 가티스에게 쓸 시간은 많았으니까.

그때, 문이 벌컥 열리고 작은 인영이 내 품으로 확 들이닥쳤다.

윽.

가티스는 내 명치를 한 번 지르고 원망스럽게 나를 올려다보았다. 날 보니 다시 감정이 격해진 듯했다.

"…너, 너."

가티스가 목멘 목소리로 말했다.

"왜, 왜 그때 없었던 거야. 네가 있었다면, 아빠가 살아 있을 수도 있는데… 넌 강하잖아, 지켜 줄 수 있었잖아?"

나는 알고 있다, 내가 과거로 돌아갔어도 기억이 없다면 황제를 구할 수 없었을 거라는 걸. 그만큼 나에게는 정보도 없었고, 황제에 대한 관심도 없었다.

어찌 한 사람이 모든 사람에게 시선을 드리워 두고 살까. 내가 구하지 않은 사람에 대해서는 죄책감을 가지지만, 구하지 못했던 사람에게까지 죄책감을 가질 수는 없었다.

그건 내가 S급 헌터로 사회생활을 하면서 얻은 자구책이었다. 아니면, 정말 내가 무너질 수도 있을 것 같아서.

그러나 난 그렇게 차갑게 말할 수 없었다. 이 이치에 맞지 않는 말을 하는 어린아이에게 그런 말을 해 줄 수는 없었으니까.

「이름: 가티스 트라프비체

나이: 8

호감도: 62

가장 사랑하는 사람: 헨리 트라프비체.

키워드: ???」

지금만큼은 그럴 수도 없었다. 나는 사람의 감정 안에 떠다니는 게 보였다. 이해하는 것과 직접 보는 건 차원이 다른 문제였다.

이 엘파힘의 심안이 스킬이 아니고 원죄인 이유를 난 잠시나마 엿본 것 같았다. 누군가의 감정을 선명하게 볼 수 있다는 건, 어쩌면 생각보다 더 힘들 수 있는 일이라는 것. S급 헌터 때 애써 외면했던 것들이 살아나는 느낌이다.

"죄송합니다."

"으윽, 으으윽……."

가티스는 지금 자신이 틀린 말을 하는 걸 알고 있었다. 내게 책임을 돌리는 게 얼마나 말도 안 되는 일인지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가티스는 눈물도 흘리지 않으려, 참으려는 모습이었다. 그 아이가 할 수 있는 최선은 눈물을 참는 것뿐이었다. 난 그냥, 가티스를 안아 주었다. 어린아이의 부조리함을 참아 주는 것도 어른의 역할이라고 생각했기에.

"그냥 우셔도 됩니다."

내 말에 가티스는 내 허리춤에 얼굴을 묻었다. 내 허리 쪽에 곧 뜨거움이 넘쳐흘렀다. 내가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뜨거운 이 느낌.

이런 유족에게 안기는 경험은 처음이 아니었다. 어떤 헌터가 죽은 던전을 내가 클리어 하면 유족이 내게 안겨서 울고는 했으니까. 난 최대한 그들과 감정을 유리했다. 그렇지 않으면 살 수 없었다. S급 헌터란 그런 족속들이었다.

하지만 여기서는 도무지 그럴 수가 없었다. 왜, 내가 이렇게 바뀐 것일까.

가티스의 눈물이 자신의 아버지에 대한 사랑을 담고 있다면, 이렇게 내가 견딜 수 없이 뜨거운 것도 이해할 수 있었다. 난 여전히 사랑에 서투른 모양이었다.

"…구해 줘."

그때, 가티스가 울먹거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누구를요?"

"둘째 형……."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에, 나는 가티스를 떼고 어깨를 잡았다. 가티스의 눈은 그새 펑펑 울어서 완전히 부어 있었다.

"…무슨 꿈을 꾼 거예요?"

"히끅."

가티스가 살짝 위압을 느꼈는지 딸꾹질을 했다. 아무래도, 내가 적기에 찾아온 모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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