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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맨스판타지로 떨어진 S급 헌터-73화 (73/150)

73화 노을의 숲 (6)

콰득.

내가 요정왕의 실드에 칼을 부딪치자 난 소리였다. 어차피 부딪쳐 깨질 거란 생각은 하지도 않았다. 난 가속을 붙여 요정왕을 밀었다.

난 그대로 내 검에 체중을 실었다. 요정왕과 내 칼이 맞닿은 채로 요정의 숲을 횡단했다. 요정왕이 뿜어내고 있는 열기와 우리의 속도 때문에 나무에 불이 붙었다. 우리는 곧 하늘로 올라갔다. 하늘로 올라가서 숲을 뒤돌아보니 우리를 꼭짓점으로 하여 삼각형 모양으로 숲이 타고 있었다.

"강하구나, 인간치고는."

"그래?"

"이 많은 요정이 내게 들어왔는데, 대치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너의 강함이다. 그것만큼은 인정하마. 하지만 거기까지인 것 같구나. 인간이 아무리 높게 뛰어도 새보다 높게 날 수는 없단 걸 알지 않는가."

요정왕은 그렇게 말하고 점점 몸에 빛을 내 갔다. 그리고 점점 커졌다.

"이렇게 외곽까지 몰아 준 걸 고맙게 생각한다. 나도 내 터전을 다시 복구하는 건 귀찮거든."

요정왕의 몸에서 여러 갈래 찬란한 빛이 나며 쾅 하는 폭발음이 들렸다. 그 풍압에 난 뒤로 살짝 밀려났다.

요정왕은 하얀 빛의 날개를 한 거대한 형상이었다. 몸 주변엔 빛이 끊임없이 불처럼 타오르고 있었다. 때마침 나도 상태 이상이 풀렸다. 이제 상관도 없다. 오히려 다행이었다.

【상태 이상: 소형화 해제】

소형화가 해제된 이상 나는 좀 더 원활하게 싸울 수 있다. 당연하다. 난 내 몸에 최적화되어 있으니까.

"인간이여, 격이 느껴지지 않는가?"

요정왕은 갸웃거리며 물었다. 내가 몸이 정상으로 돌아왔음에도 불구하고 요정왕은 컸다. 한 5m 정도는 되는 듯했다. 슈퍼 노을이의 2배 정도는 되겠네. 그의 날개는 느리게 너울거렸지만, 한 번씩 움직일 때 마다 밑의 나무들이 하나둘씩 꺾여나갈 정도로 풍압이 강했다. 또한 공간이 일그러져 갔다.

"대체 여기서 말하는 격이 뭐냐?"

"격은 본능적으로 느끼는 거지. 넌 본능이 좀 손상된 사람이구나. 그렇다고 내가 고쳐 줄 의무는 없겠지. 인간이야 항상 꾸득꾸득 나오는 존재니까."

난 헛웃음을 지었다. 격이라는 게 대체 뭐기에. 난 솔직히 말하면, 이길 자신도 없고 질 자신도 없다. 그냥 요정에게 느껴지는 바가 없었다. 요정의 기도는 내게는 아예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래, 내가 개미를 보는 것처럼.

"난 격을 느낀다기보다, 감정을 느껴."

"무슨 감정을 얘기하는 건가? 슬픔? 기쁨?"

"아니, 그것보단 좀 복잡한데."

나는 말했다.

"네가 개씹새끼라는 감정? 이걸 뭐라고 표현해야 돼?"

"분노?"

"분노도 좀 있고, 안쓰러움도 좀 있고. 하여튼 좀 순수한 분노와는 좀 달라. 근데 널 죽이는 건 변함없을 거다."

"격을 못 느끼는 건 네 최대의 결함이겠구나."

요정왕은 날개를 퍼덕이며 올라갔다. 점점 공간이 왜곡되기 시작한다. 여기는 작은 요정들이 사는 마을. 거기서 5m짜리 거구가 나타났으니 공간의 결계에 이상이 생기는 것도 무리가 아닐 터였다.

"사슴이 호랑이를 보면 도망치는 건 당연한 것. 그럼으로써 사슴은 목숨을 부지할 수 있지. 네가 그런 격을 못 느끼는 건 결함으로 가득 찬 인간이라 그렇다. 그렇기 때문에 죽는 것이고."

"결함이라고 생각 안 해. 난 그냥 하고 싶은 대로 사는 사람이라."

난 바로 요정왕의 뒤를 잡았다. 그의 몸에서 풍압이 강하게 흘러나오지만 내가 뚫는 힘에 비할 바는 아니다.

"그리고 네가 나라는 사람을 모르는 게 죽는 요인이라고는 생각 안 해 봤냐?"

"웃기는구나."

요정왕의 얼굴이 등 뒤에서 나왔다. 하얗게 타오르는 신성력 사이에서 얼굴의 윤곽이 흐릿하게 보였다.

"네가 나를 인간이라 생각하는구나. 그러니 뒤라는 개념이 있는 거지. 난 뒤라는 개념이 없단다, 아이야."

요정왕은 나를 두 손으로 박수를 치듯 뭉개 버리려고 했다. 왼쪽에서는 극빙의 한기가 나오고, 오른쪽에서는 극열의 화기가 날 잡아먹으려 하고 있었다. 난 순식간에 위로 올라갔다.

뒤로 빠지는 건 좋은 선택이 아니다. 이 싸움은 체스와도 같다. 무작정 빼는 건 좋은 선택이 아니다. 후퇴와 방어는 다르다. 방어는 공격을 동반하면서 해야 한다.

물론 그 능력이 되면 하는 거지만. 지금의 나는 전성기보다 강하다. 느낄 수 있다.

【고유 스킬: 환영살인마 Lv. 8 업그레이드】

수많은 곱등이의 죽음이 내게 힘이 되어 주었다. 곱등이들이 내 힘의 일부가 됐을 때, 난 그제서야 그들을 내게 의미로 인정하게 되었다.

왜 그랬을까?

처음부터 그랬으면 안 됐던 걸까?

그들은 이미 나에게 과분할 정도의 의미를 부여하고 있지 않았던가?

어째서 나는 이렇게 어리석은 걸까?

"인간치고는 강하군. 인정하마."

"다 인간치고는 강하대. 너희는 다 병신들이야."

난 어쩌면 부조리한 분노를 쏟아 낸 걸지도 모르겠다. 나에 대한 분노를 이 요정왕에게 쏟아 내는 것이었다. 그래도, 얘는 띠꺼움의 결정체였다.

요정들이 직관적인 띠꺼움이라고 한다면, 얘는 복합적인 띠꺼움이랄까. 요정이 인간을 반 수 아래로 보고 있다면, 이 요정왕이라는 작자는 인간을 다섯 수는 아래로 보고 있었다.

미안하지만 나도 한 세계에서는 최강자였던 사람이다. 쉽게 질 수는 없다.

"그 묘한 신성력이 아직 다듬어지지는 않았구나."

요정왕은 아주 재수 없게 말했다. 분하지만 맞는 말이었다. 지금 나는 움직임과 방어, 공격에서 그의 능력을 완벽하게 상회하고 있었다. 문제는, 유효타를 못 날린다는 것이었다.

그에게는 일반적인 공격이 통하지 않았다. 꼭 신성력을 섞은 공격이어야만 했는데, 난 곱등이들에게서 받은 신성력을 어떻게 써야 할지 어색해했고, 그 신성력은 요정왕에 비하면 조막만 했다.

이렇게 되면 승부의 향방은 사실상 명확해진다. 왜냐하면, 나도 사람이기 때문에 체력이 있고, 체력이 곧 달리면 요정왕에게 타격을 허락할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 난 선택을 해야 했다. 신성력이 어느 때보다 필요한 시점이었다. 대체, 어떻게, 어떻게 해야 하지. 난 요정왕의 공격을 피하면서 고민했다.

저 멀리 보인다, 웅장한 요정왕의 본체가. 이렇게 빠른 시간 내에 어떻게 저 끝까지 갔을까, 아이리는 생각했다. 요정왕이 흩날리는 풍압이 여기까지 느껴졌다.

빛 가루, 얼음 가루, 불티, 어둠의 편린, 안 날아오는 게 없었다. 오히려 너무 잡다하니까 덜 멋있는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그때, 아이리는 눈을 커다란 바늘로 찌르는 것 같은 통증을 느꼈다.

"아악!"

갑작스러운 무너짐에 옆에 있던 리얀과 칸나가 달려들었다.

"아가씨!"

"아이리!"

아이리는 금방 일어날 줄 알았다. 요정의 숲에 처음 들어왔을 때의 고통과 비슷한 느낌이었으니까. 그러나 이건 완전히 달랐다. 너무나 고통스럽다. 눈 안쪽에서 뭔가가 시신경을 갉아먹고 틔우는 느낌이었다.

"으흐으……."

엄청난 고통에 몸부림치며 침까지 흘리는 아이리를 보며 리얀과 칸나는 어찌해야 할 바를 몰랐다. 리얀은 여러 가지 큐어 스킬을 발동했지만 아이리에게 통하는 건 없었다.

"안대를 벗겨라."

그때, 2m짜리 곱등이가 그녀들에게 다가왔다. 그 역시 에퍼리가 요정왕을 밀어내는 속도에 감히 따라가지 못한 것이다.

"지금 이럴 때 안대를 벗으면 빛 때문에 실명될 수도 있어요."

리얀은 곱등이를 노려보며 말했다. 곱등이는 앞다리 칼날로 리얀을 무시하고 아이리의 안대를 잘랐다. 그와 함께 그녀의 오른쪽 눈에서 하얀 빛이 폭발해서 뿌연 안개를 만들었다.

"뭐, 뭐, 뭐야!"

놀란 리얀이 칸나와 아이리의 어깨를 흔들었다. 아이리는 고통으로 이미 기절해서 눈을 까뒤집은 상태였다.

"원래라면 자연스럽게 빠져나갈 힘이었거늘. 괜히 안대를 해서 힘이 안에서 맴돈 것이다. 안대부터가 특수한 재질로 되어 있는지 용케도 이 힘을 막고 있었군."

하긴, 그건 리얀이 직접 주문 제작 해 준 안대였다. 온갖 마법 방어 스킬이 내재되어 있는 안대긴 한데, 그게 어떻게 힘을 막은 작용을 했는지는 해박한 그녀도 잘 몰랐다.

"아아아아악!"

다시 깨어난 아이리가 고통으로 다시 비명을 지르다가 기절했고, 다시 깨어나고 기절하고를 반복했다. 그녀의 눈으로 빛의 안개들이 다시 흡수되면서 들어갔다. 모든 빛 가루가 그녀의 눈으로 다시 들어가자 그녀는 움찔했다.

모든 걸 찢어발기는 고통에 아이리는 귀족인데도 불구하고 온몸을 쥐어뜯느라 옷가지를 풀어헤쳤고, 꼬집은 피부에 멍이 들 정도였다. 칸나는 조용히 기절한 아이리의 옷매무새를 정돈해 주었다.

"이제 도움이 되겠군."

곱등이는 아이리에게 다시 안대를 씌우고 한쪽 팔에 그녀를 끼웠다. 칸나와 리얀은 바로 대경실색했다. 에퍼리의 편이라는 건 알겠지만, 아이리 정도의 미소녀가 벌레의 옆구리에 껴 있는 건 조금, 납득하기 어려운 광경이었다.

"왜, 어디, 어디를 가려고?"

칸나는 당황하면서 곱등이에게 말을 걸었다.

"당연하지 않은가?"

곱등이가 다른 팔로 요정왕이 있는 쪽을 가리켰다.

"내 주인이 있는 곳으로 간다."

"…그렇다면."

"같이 가시죠."

리얀과 칸나가 비장하게 말했다. 곱등이는 웃었다. 그리고 그녀들이 탈 정도로 등을 낮췄다.

"타라."

슬슬 지친다. 솔직히 최대한 힘을 비축해 나가면서 많은 경우의 수를 생각해 보고 있다. 만약 요정이 근처에 있었다면 썰어서라도 신성력을 비축할 텐데, 이 요정의 숲에 있는 요정은 이 요정왕이라는 놈이 다 먹은 모양이다.

곱등이도 마찬가지다. 곱등이는 이미 요정왕의 힘에 다 썰려 갔다. 그 신성력을 내가 받긴 했지만, 어쨌든 요정왕을 상대하기엔 미약하다. 이 정도면 거의 마리나급 신성인 것 같은데, 요정왕을 내가 물리칠 수가 있나 회의감이 들었다.

"힘든가? 체력은 인간에게 주어진 불쌍한 제약이지. 신성력은 마르지 않는 샘과도 같다. 여신님이 인간을 싫어한다는 증거지."

요정왕은 계속 마법을 쏘아 대며 나를 압박해 가고 있었다. 그도 알고 있었다, 나를 정통으로 맞히지 못할 거라는 걸. 그래서 최대한 많은 움직임을 유도하려고 작은 마법들을 수없이 많이 쏟아 보냈다. 뻔히 보이는 전략이었지만, 그건 내게 짜증 나게도 유효했다.

"진짜 죽이고 싶네, 이 새끼."

근데 내 공격이 먹히지 않는 타입이라니 이렇게 억울할 데가. 여기는 공정한 세상이 아니다. 공작부터 남작까지 계급이 정해져 있으며, 인간과 요정이라는 종족이 있다.

이게 요정왕이 말하는 격이라는 걸까? 난 정말 인정하기 싫었지만, 이해라는 영역은 불행하게도 무의식적으로 되는 것이었다.

"죽이지 못한다는 걸 깨닫지 않았느냐? 왜 인정하지 못하는 거지? 넌 어지간히 결함체구나."

"지랄하지 마."

"욕설부터 참아라. 인간은 그게 문제다. 태생부터 저급한 것."

"욕설은 인간의 본능이야. 아니, 모든 이의 본능일걸."

"하등한 것."

그때 저 멀리서 무언가 점이 날아왔다. 난 한숨을 쉬었다. 그럴 줄 알았다. 슈퍼 노을이었다. 그 정도로 충성심을 가진 놈이 안 쫓아올 리가 없지.

"아, 근데 저놈이 미쳤나."

난 슈퍼 노을이가 자세히 보이자 바로 요정왕에게 지적당한 욕을 내뱉었다. 내가 본 건 기절한 아이리와 등에 똥 씹은 표정으로 타고 있는 칸나와 리얀이었다. 아니, 올 거면 혼자 오지 왜 신경 쓸 게 많은 세 명이나 데려오냐고.

"괜찮다. 난 인질이나 잡으면서 노는 하등한 존재가 아니다. 그런 추잡한 걸 걱정하는 네놈이 하등한 거지."

"고맙다, 개새끼야."

그래도 요정왕의 멍청한 허세가 처음으로 도움 되는 순간이었다. 하나, 우리의 친구들은 그 허세마저 받아먹을 생각이 없나 보다.

슈퍼 노을이는 순식간에 내게 아이리를 물건 던지듯이 던졌다.

"야, 이 미친놈아!"

나는 욕을 하면서 아이리를 공중에서 캐치 했다.

"안대를 벗기십시오!"

뭐? 여기가 무슨 게릴라 콘서트장이야? 나는 그 생각을 하면서도 반사적으로 아이리의 안대를 벗겼다. 그녀의 몸이 부르르 떨리며 눈에서 커다란 빛 안개가 뿜어져 나왔다. 난 단박에 느낄 수 있었다. 이건, 신성력이다.

난 그녀의 눈에 내 손바닥을 대었다. 신성력이 내 온몸에 깃드는 게 느껴졌다. 신성력이 충만해지면서 내 힘과 섞이며 물결치는 게 느껴진다.

그 힘을 최대한 다스리느라 눈을 감았다. 앞에는 내 힘을 이용한 방벽을 쳐 놨다. 이 정도면 요정왕도 함부로 공격 못 할 것이었다. 지금 내게 들어오는 힘이 무지막지 했으니까.

대체 아이리가 왜 눈에서 신성력을 쏟아 내는지는 몰라도, 일단 주는 건 받아먹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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