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화 스페셜포스 (2)
"안녕하세요?"
"…네, 안녕하세요."
성문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건 뜻밖의 사람이었다. 핑크색 머리의 봇짐을 싸맨 사서 복장의 사람이었다.
성문을 통과하는 많은 상인과 재건을 위한 잡부들이 오가는데도 그녀에겐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물론, 그녀의 정체를 아는 사람만이 그녀의 존재감을 확인할 수 있었다.
"…황녀 전하."
"네."
"왜 여기 계십니까?"
"저도 이 특공대에 참여하고 싶어서요."
"허락은 받고 나오신 거죠?"
"제가 황녀인데 누구 허락을 받나요?"
아, 그런가. 괜히 질문해서 민망해졌지만, 내 본뜻은 그게 아니었다. 난 바로 리얀과 나만 대화할 수 있게 차폐막을 쳤다. 마나가 쑥 올라갔다.
"악!"
깜짝이야. 난 비명 소리가 들린 곳을 바라봤다. 아이리가 어깨를 문지르면서 나를 원망스러운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차폐막을 올리면서 아이리의 어깨를 친 것 같았다. 또 뭐라 뭐라 말하고 있었는데, 입 모양을 보면 그렇게 좋은 소리는 아닌 듯했다. 의외로 아이리가 내게 가까이 있었구나. 차폐막을 없애면 미안하다고 해야겠다.
"황녀 전하."
"네, 말씀하세요. 무슨 말씀을 하시려고 차폐막까지 치셨는지는 모르겠지만."
"제위에는 관심 없으십니까?"
내 말에 리얀이 입을 다물었다. 사실 지금 순간이 리얀에겐 굉장히 중요할 터였다. 황제 자리는 공석. 이 중요한 상황에서 내정을 벗어난다면 그녀가 황제에 오를 확률은 0에 가깝다. 애초에 기반이 있는 사람이라면 모를까. 리얀에겐 못 할 말이지만, 황제가 공석인 이 상황은 그녀에게는 기회였다.
"오라버니나 저나 제국을 생각하는 마음은 똑같아요. 다만 방식이 다를 뿐이죠. 전 오라버니의 방식이 마음에 들지 않아요."
"그런데 왜 이렇게 나오셨습니까?"
"이게 제 방식이에요. 제국을 위해 직접 움직이는 것. 전 아직도 제위를 꿈꾸고 있어요. 전 이게 제가 황제가 될 수 있는 길이라고 믿어요."
"불가능합니다."
난 딱 잘라서 말했다. 발로 뛰는 정치인? 그런 건 못 봤다. 정치인이 발로 뛸 때는 선거 기간뿐이었다. 진짜 발로 뛰는 사람들은 공무원이지. 지구에서 수많은 정치인을 만나 보았지만, 발로 뛰는 사람은 한 명도 보지 못했다.
역으로 말한다면 정치인은 발로 뛰면 안 되는 것이 아닐까? 그들에겐 그들의 역할이 따로 있는 건 아닐까? 이렇게 생각해 본 적도 있다.
"이건 제 방식이에요."
"네. 그건 존중합니다만."
"그럼 됐어요."
나는 리얀을 존중할 수는 있었지만 이해할 수는 없었다. 이건 또 다른 느낌의 불가지였다.
그리고 알 수 없어도, 이해할 수 없어도 어쩌랴. 황녀 전하가 친히 행차하신다는데, 내가 막을 방법은 없었다.
난 차폐막을 걷었다.
"야, 너……!"
아이리가 내게 화난 말투로 말할 때 리얀이 말을 끊었다.
"요정의 숲으로 가시는 거죠? 아, 미안해요, 아이리 공녀."
"…아닙니다."
나이스 타이밍, 리얀.
"어떻게 아셨습니까?"
"신성력을 어떻게 다루시는지는 몰라도, 신성력이 자연 상태에서 존재하는 곳은 요정의 숲밖에 없거든요. 요정의 숲에 들어갔다 나오셨다는 건 오라버니께 들었어요. 무슨 일을 하셨는지는 아무리 물어도 대답을 들을 수 없었지만……."
아무리 가테스라고 해도 곱등이를 타고 요정의 숲을 난도질했다고는 얘기 못 하겠지. 난 목소리를 큼 하고 가다듬고 주제를 돌렸다.
"그럼 같이 갈까요?"
차폐막 안에서는 진지했던 리얀이지만 지금은 안경을 슬쩍 내리며 화사하게 웃었다. 아름다운 녹안은 핑크색 머리에도 잘 어울렸다. 칸나와 아이리 역시 황녀를 막을 재간은 없었다.
"네, 네……."
"편하게 하셔도 돼요. 전 도서관 사서로서 나가는 거니까."
"아니, 이미 황녀 전하신 걸 알고 있는데 어떻게 그게 됩니까."
아이리가 불퉁하게 대답했다. 자신의 말을 끊은 것에 여전히 앙심을 가지고 있는 듯했다.
"말했잖아요, 당신들은 내 사람으로 생각하고 있다고. 여기서 내 사람으로 완전히 만들 생각이에요. 그러려면 먼저 마음을 터놓고 편하게 얘기해야죠. 안 그런가요?"
"…네."
리얀은 아예 작정을 한 듯 말했다.
"이번 임무 때만은 리얀이라고 불러요. 에퍼리도. 이게 제 마지막 황녀로서의 명령이에요."
그 말에 나를 포함한 모두가 불편한 기색을 드러냈다. 내가 볼 때는, 저건 100% 즉흥적인 제안이다. 리얀은 따뜻한 것 같지만 안에 불을 품고 있는 사람이라고 느껴졌다. 가테스와 정반대에 있는 사람이지. 의외로 기분파다.
"…그건 좀 그렇습니다."
칸나가 먼저 조심히 발언했다. 어떻게 보니 내가 후작이 된 이상 칸나가 황녀라는 직위에서 더 먼 사람이 되었다. 그런 걸 떠나서도 그녀는 상하 관계를 중시하는 사람이니까 더 불편할 거다.
"칸나, 명령 불복종인가요?"
"아니, 아닙니다만, 황족에게 말을 놓을 수는 없습니다."
"그 황족의 명령인데요?"
리얀의 자연스러운 갑질에 칸나는 작은 입을 오물거렸지만, 할 말이 없어진 듯했다.
"자, 불러 봐요, 리얀이라고. 아, 칸나 영애가 지금 몇 살이었죠? 스물하나였나?"
"네, 그렇습니다."
"전 스물넷이니까, 언니라고 부를래요?"
"그냥 리얀이라고 부르겠습니다."
칸나의 딱딱한 말에 리얀이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그래도 리얀은 칸나가 못내 귀여운 표정이다. 내가 볼 때는, 칸나는 모두에게 귀여움을 받을 사람이다. 솔직히 칸나는 못 참지. 음.
"그럼 리얀이라고 부르면 되지?"
그때 아이리가 치고 나왔다.
"응, 아이리. 오랜만에 날 이름으로 불러 주네."
"뭐, 어릴 때야 그냥 반말한 거지. 지금 하니까 좀 어색하다."
아이리는 배시시 웃었다.
"아, 두 분은 어릴 때도 친분이 있으셨군요."
"그럼. 보통 황녀는 아무하고나 친구를 하지는 않으니까. 공녀랑 많이 친교를 맺고는 하지."
어쩐지, 그래야 아이리가 사서 상태의 리얀을 아는 게 설명이 되지. 어쩐지 친해 보이더라니.
"자, 그럼 호칭 정리도 했고. 가자."
"아니, 아직 안 됐는데."
"에퍼리가 날 아직 안 불러 줬잖아."
리얀이 날 호기심 섞인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마치 날 시험하는 것 같다. 너도 이건 좀 불편하지 않을까? 하는 눈빛. 미안하지만 난 전혀 불편하지 않다.
"그냥 빨리 가. 쓸데없는 걸로 시간 끌지 말고."
"와. 이런 대우 처음 받아 봐."
"이 정도면 만족해, 리얀?"
리얀은 상쾌하게 웃었다. 솔직히 방금 멘트가 괜찮았던 것 같다. 칸나는 여전히 불편한 모양새였지만, 우리는 그렇게 성문 바깥으로 나갔다.
수업을 제대로 듣지 않으면 시험 문제를 놓치게 된다. 인생도 마찬가지다. 매 순간 제대로 살지 않으면 어이없는 데서 막히게 된다.
지금, 내가 탄탈로스 숲에서 방황하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뭐 해?"
"응, 숲이 좀 예뻐서."
"굉장히 당황하는 걸로 보이는데?"
리얀과 칸나와 아이리가 날 바라본다. 하하. 솔직히 말하자. 멀쩡한 숲을 30분 동안 구경하고 있었으니까.
"문이 어디 있는지는 아는데, 못 들어가겠다."
"왜?"
"소형화 마법으로 들어갔었거든."
"아, 장난해?"
아이리가 내 쪽으로 흙을 차서 내 바지 밑단에 낙엽을 뿌렸다. 솔직히 할 말이 없다. 말하는 게 창피해서 30분 동안 괜한 산책을 시켰으니까.
"뭐야. 그럼 진작 말하지."
"왜?"
"나 소형화 스킬 있어서. 잠깐만, 이건 마나 좀 많이 쓰는 거라."
리얀이 자신의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그녀는 뾰족한 돌 하나를 세워서 들더니 땅에 무언가 이상한 진을 그리기 시작했다. 이게, 이게 판타지 세계인가. 스킬과 마법의 조화라니. 어쩌면 내가 이 세계를 많이 활용하지 못하는 걸 수도 있겠다.
"이런 이차적인 행동이 동반되는 스킬은 고급 스킬이라고 해."
내가 그걸 신기하게 보고 있자 칸나가 내 어깨를 붙잡으며 얘기했다. 왠지 그 말투가 아이를 대하는 것 같아서 그만 거짓말을 해 버리고 말았다.
"아, 알거든?"
"모르는 눈빛이어서."
칸나가 웃었고, 난 얼굴을 홱 돌렸다. 너무 예뻐서 계속 보면 얼굴이 빨개질 것 같아서.
내 얼굴이 돌려진 곳에서 다른 예쁜 사람, 아이리가 날 한심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진짜 아는 게 뭐지, 얘는."
"아, 조용히 해."
"야, 내가 너한테 반말하라고 했어?"
아이리가 눈살을 찌푸렸다. 아, 맞다. 리얀만 말 놓는 걸 허락했지. 요즘 가테스한테도 반말하고 리얀한테도 반말하니까 반말이 입에 붙었다.
"아이리, 뭐 그런 걸 딱딱하게 따지고 그래. 둘이 친하잖아?"
"뭐, 뭐가 친해? 옛날에 내 밑에 있던 애인데. 하여튼 버릇이 없다니까."
"일주일을 뭘 밑에 있었다고 표현해."
리얀의 말에 아이리가 눈을 감고 부르르 떨었다. 리얀은 그사이에 날 살짝 보면서 찡긋했다. 귀엽네.
그런 촌극이 오가던 와중에도 리얀은 진을 완성한 듯했다.
"자, 다들 들어가. 아, 생각보다 작게 그렸네."
그녀가 그린 진은 네 명이 들어가기엔 좁았다. 결국 우리는 몸을 비비면서 들어갈 수밖에 없어.
"리얀, 좀 왼쪽으로 가 봐."
"에퍼리, 좀 오른쪽."
"칸나, 발. 진에서 넘어갔다."
"아이리, 에퍼리랑 좀 더 붙어."
아이리, 칸나, 나, 리얀이 서로 곡소리를 냈다. 비비고 자리를 다시 선정하다 보니 네 명이서 꼭 껴안는 모양새가 되었다.
"리얀, 빨리 스킬 발동해!"
아이리가 외쳤다. 솔직히 나도 좀 창피하다. 지금 아이리가 내 정면에 있어서 이마가 거의 붙어 있다시피 해서 부끄럽기 때문이었다. 난 그냥 아무 말도 못 했다. 아이리, 칸나, 리얀의 부드러운 몸에서 느껴지는 매혹에 질식할 것 같았다.
"좀만 더 안고 싶은데?"
"헛소리하지 말고!"
"황녀, 아니 리얀, 빨리……."
칸나가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볼 때는 여기서 부끄럼을 안 타는 건 리얀밖에 없었다.
리얀은 우리를 한껏 놀리면서 소형화 스킬을 썼고, 우리는 뿅 하고 작아졌다. 작아지니 바로 요정의 문이 크게 보였다.
다행히 리얀의 마법은 요정만큼 우리를 초소형으로 만들지는 않았다. 그때는 개미가 거의 거대한 괴물처럼 보일 정도로 초소형이었는데, 지금은 딱 키가 30~50cm 정도 되는 소형화였다. 이 정도면 뛰어서 올라갈 만하지.
"여기가 요정의 숲 입구구나. 그림으로만 봤었는데."
그 영롱한 빛이 회오리치는 곳을 바라볼 때 리얀은 감탄사를 뱉어 냈다. 칸나와 아이리 역시 그 문의 화려함에 홀린 듯했다.
"가자."
"잠깐. 너무 높다, 나한테는."
아, 리얀은 무인(武人)이 아니지. 내가 볼 때 아이리도 이 정도는 올라갈 수 있었다. 일반 건물 2층 정도의 높이였으니. 하지만 리얀은 힘들겠지. 난 리얀을 안았다.
"엇?"
리얀은 놀란 건지 당황한 건지, 이상한 소리를 냈다. 나는 왠지 민망해져 아이리와 칸나에게 따라오라는 말을 하고 바로 요정의 숲 입구로 뛰어들었다. 저 뒤에서 칸나와 아이리가 따라오는 게 느껴졌다. 우리는 거의 동시에 요정의 숲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우리는 폭, 앉았다. 그곳은 푹신했다. 이상한데.
풀숲은 아닌데? 밑을 바라보자 이상한 갈색과 검은색의 주름이 있었다.
"으, 으……."
"와… 악……!"
"…으?"
난 아직 파악하지 못했는데, 아이리, 칸나, 리얀의 이 틈으로 말의 형태가 아닌 소리가 새어 나왔다.
"아아아아아아악!"
그녀들의 합주하는 비명 소리에 우리는 퐁! 하고 뛰어올랐다. 난 떨어질 것 같은 그녀들 세 명을 동시에 낚아채고 바닥에 딱 붙었다.
저 앞에 흔들리는 갈색 더듬이를 보자 알 수 있었다.
우린, 지금 곱등이의 등에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