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화 별장을 태우다 (4)
가슴이 꿰뚫린 마리나의 녹안은 빛이 바래지 않았다. 그녀는 순식간에 신수를 불꽃으로 태워 버렸다. 어째서인지는 몰라도, 검은 불꽃이었다. 리바이어던과 베히모스는 순식간에 타서 재가 돼 버렸다.
곧 그녀의 가슴에도 불이 붙었지만, 그 불은 이내 꺼졌다. 하지만 그녀의 뚫린 가슴은 피를 울컥거리며 쏟아 내고 있었다.
난 바로 마리나에게 다가가 지혈과 응급처치를 했다. 이곳의 마법이라면 살릴 수 있지 않을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마리나가 얼굴을 돌리고 내장이 섞인 피를 뱉을 때 난 직감했다. 그녀는 죽을 것이라고.
"야, 왜 이런 짓을 한 거냐."
나는 입술을 깨물고 물었다. 그녀는, 죽으면 안 되는 사람이었다. 이 세계의 기둥과도 같은 존재다. 주인공이니까.
"아… 글쎄?"
마리나는 쿨럭거렸다. 아파하기는 했지만 전혀 두려워하는 얼굴은 아니었다. 괴상했다. 수많은 사람의 죽음을 봤지만 이렇게 죽음 앞에서 의연한 사람을 처음 봤기 때문이다.
"너 이런 사람 아니었잖아. 여기서 단물만 다 빼먹고 도망가려는 비겁한 애였잖아."
"말하는 꼬라지 봐."
마리나는 웃으며 말했다. 내가 몰랐던 그녀의 면이 있었던 걸까. 나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난 그녀를 완벽하게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아닌가, 난 또 오만했던 걸까. 그녀도 복잡한 사람 중에 하나였는데.
"내가 그런 년인 건 맞긴 해."
"근데?"
"단물은 쉽게 질려. 게임이 콘텐츠가 많아야지. 안 그래?"
"그래서 일부러 죽는 거야?"
"설마. 네가 내 명성 떨어뜨리려는 수작질을 했을 때 내가 어땠을 것 같아?"
나는 말문이 막혔다. 마리나가 그걸 알아차리고 있었구나. 하긴, 너무 뻔히 보이는 수작질이기는 했다.
"후회? 아니, 그건 삶에 몰입한 사람이나 하는 일이지. 난 허무함을 느꼈어. 그냥, 아이템 후득 한 느낌 비슷했지. 그래서 나한테 남은 게 아무것도 없다 생각했어."
마리나는 웃었다.
"적당히 내가 살던 세계와 달라야지 적응을 하지. 네가 말했지, 나는 마리나의 얼굴을 닮고 싶은 정연서라고. 그 말이 맞아. 내 영혼이 들어갈 곳은 정연서라는 사람의 허름한 몸이야. 이런 귀하디귀한 성녀의 몸이 아니라."
"왜, 왜 그런 생각을 하는 거야?"
보통 다른 인생을 받았다고 생각하잖아. 나도 얼마나 설렜던지. 내가 이기적인 걸까. 그녀는 대체 왜 이랬을까?
이 세계가 소설인 걸 몰라서? 이 세계가 2000년대 지구에는 없던 마수로 가득 차 있어서? 그런 건 핵심이 아니었다.
중요한 건, 나는 나로 떨어졌지만 그녀는 마리나로 떨어졌다는 것이다. 난 그제야 그녀를 이해할 수 있었다.
"정연서라는 몸이 내 영혼의 본가면, 마리나라는 몸은 별장 같은 곳이지. 언제든 태워도 되는 곳이야. 적어도 난 한 입으로 두말은 안 해. 이해하는 듯한 눈 하지 마. 난 이 세계가 여전히 병신 같다고 생각하고, 그래서 죽는 것도 안 무서워. 너 같은 씹덕은 내가 죽는 걸 보고 진짜 죽는 거라 생각하겠지?"
"마지막까지 지랄이네."
"그래도, 내가 널 더 오래 봤으면 갱생시켜 줬을 텐데. 삶에 몰입하는 것도 재미있겠지만, 관조하는 것도 그것 나름의 재미가 있더라고."
마리나는 또 웃었다. 진짜 즐겁다는 웃음이었다. 난 그녀의 그런 웃음을 처음 봤다. 정말 삶이 즐거울 때 웃는 그 웃음. 그때 가테스가 비척거리며 다가왔다. 그는 차가운 말투로 말했다.
"성녀, 무슨 생각으로 그런 짓을 한 거지?"
"뭐가요."
"왜 자신을 희생한 거냐."
"아, 지겨워. 주, 아니 에퍼리, 대신 좀 말해 줘."
가테스는 역시 소시오패스였다. 자신을 위해 희생한 사람에게 이렇게 차갑게 말할 수가 있나.
"너의 잘못된 선택 때문에 제국은 검은 나무의 밭이 되겠군."
"지랄 좀 그만해요, 내 알 바 아니니까. 당신 제국이지 내 제국이야?"
마리나가 욕을 뱉었다. 그 말에 가테스가 눈을 살짝 크게 떴다. 가테스가 직접적으로 욕을 들은 건 아마 처음일 것이다.
"진짜 마지막까지 띠껍네. 미친 새끼."
이제 마지막이라고 마리나는 아예 가테스에게 욕을 퍼부었다. 이럴 줄은 몰랐다는 듯 가테스는 침묵했다. 나도 할 말이 없었다.
"꺼져요, 당신하곤 볼일 없으니까. 에퍼리, 이리로 와 봐."
마리나는 가테스를 윽박질러 쫓아냈다. 가테스는 헛웃음을 짓고 물러났다. 자신이 미움받는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그녀는 내게 손을 느리게 저었다. 다가오라는 뜻이었다. 난 고개를 그녀의 입에 갖다 대었다.
"웃지 말고 들어. 쪽팔리긴 한데……."
마리나가 말했다.
"아까 하던 얘기를 마저 하자면, 아무것도 없다 생각했었지. 근데 아니었어. 내가 가테스를 사랑하고 있더라고. 아마, 네가 나한테 가테스를 왜 좋아하냐고 물어봤을 때부터 신경이 쓰인 것 같은데."
"…변태야?"
방금 전까지 욕을 박다가 사랑한다는 고백을 하니까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몰랐다. 나는 모태 솔로였고, 사랑의 형태가 어떻게 생겼는지 모르는 사람이었으니까.
그리고 애초에 틀린 말이 있다. 내가 엘파힘의 심안으로 봤을 때 그녀는 가테스를 이미 사랑하고 있었으니까. 다만 그녀가 인정하지 못했던 거다. 어쩌면 내가 인정하게 해 준 건가.
"좀 병신 같은 건 아는데, 가테스가 날 제일 정연서처럼 대해 준 사람이었거든. 나도 이런 세상 속에서 사랑을 찾을 줄 몰랐지. 나도 모르겠다, 왜 사랑이라는 감정을 느꼈는지."
"그래서 희생한 거냐?"
"희생 아니라니까. 별장을 태운 거지."
그녀는 웃었다. 숨이 점점 옅어지고 있었다. 그녀의 숨이 경각에 달했다. 그래도 조금은 남았다고 생각해서 급하게 물었다.
"가테스한테 말해 줘?"
"…너, 모솔이야?"
마리나는 마지막으로 날 경멸하는 표정을 짓고 숨을 거두었다.
…그래, 사람의 숨이라는 건 감히 사람이 예상하지 못하는 것이었다. 하늘이 닫혔다. 난 하늘을 바라보았다. 원망스럽게.
어쩌면, 내가 마리나와 더 얘기를 했어야 했나. 그런 후회가 내 이를 딱딱거리게 했다.
마리나의 죽음은 은폐되었다. 가테스의 판단이었다. 리얀, 가토스, 나 정도만 알았고, 칸나는 몰랐다. 그야말로 수뇌부만 아는 1급 기밀이었다.
"성녀의 죽음을 발표하면 제국에는 득이 하나도 되지 않는다. 혼란만 가중할 뿐."
그래서 마리나의 시체는 황궁 비고에 썩지 않게 하는 마법에 걸린 채로 누이게 되었다. 그 판단은 마음에 안 들어도 존중할 수밖에 없었다. 가테스의 말이 맞았으니까.
"황궁의 복구는 얼마나 걸릴 것 같지, 가토스?"
"두 달이면 됩니다."
"경계를 모두 조용히 물려라. 한 사람의 병사도 남기지 않고. 분명 제논 왕국이 쳐들어올 것이다."
"맞서지 않는단 말입니까?"
"내부에는 검은 나무, 외부에는 제논. 검은 나무를 제거할 성녀조차 없다. 지금은 우리가 지킬 곳만 지켜야 한다."
가토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가테스는 지금 임시 황제 역할을 맡고 있다. 황제의 사망 발표 시기도 정할 게 많았고, 듣기만 해도 엄청나게 머리가 아팠다. 난 그저 그 비밀을 알고 있다는 것만으로 이 수뇌부 회의에 참여하고 있었으니까.
"공석인 1군단장은 에퍼리 자작으로 한다."
"뭐요?"
난 바로 반발했다. 갑자기 깍두기처럼 놔두다가 가테스가 발언한 것이다. 가테스는 무시하고 발언을 이었다.
"가토스, 모든 군단에게 전파하고 가테스 황제 대행의 명이라고 하라. 불만이 있으면 목숨을 내놓을 생각을 하라고 하고."
가토스도 이건 좀 하는 얼굴이었다.
"에퍼리 자작의 신위는 들었지만, 작위가 자작입니다. 분명 반발이 심할 겁니다."
"그러면 후작으로 임명하지."
완전 막무가내다. 가테스는 즉흥적으로 생각한 게 아니라는 듯 후작 패와 후작을 상징하는 칼을 내게 떠넘기듯 맡겼다. 나는 이 급전개가 얼떨떨했다.
"갑자기 웬 군단장입니까?"
"너만큼 강한 사람이 없으니까."
가테스는 담백하게 말했다.
"또 1군단 예하 지휘관들과 안면이 있으니 네가 맡을 직책은 그것밖에 없다."
가테스는 아주 내가 트라프비체 사람인 줄 아는 모양이다. 난 옌시 사람도 아니고 지구 사람인데.
나도 냉정하게 생각할 필요가 있었다. 트라프비체 제국은 거의 무조건 망한다. 성녀가 없으니 악마가 곧 나타날 것이다. 그 와중에 경계가 무너진 걸 아는 옆 왕국의 침공이 시작될 거고.
그래도, 칸나와 아이리… 그녀들의 얼굴이 내 머릿속에 스쳤다.
차라리 걔들만 빼내서 다른 왕국으로 도망칠까? 아니, 칸나와 아이리는 분명히 거절할 게 분명했다.
내가 고민을 하고 있을 때, 가토스는 가테스의 명을 받아 다른 군단들에게 전달을 하러 집무실을 빠져나갔다.
난 그제야 궁금한 걸 묻기로 했다. 이 질문은, 듣는 사람이 적으면 적을수록 좋으니까.
"황자 전하."
"뭐지."
"제국이 멸망하지 않겠습니까?"
그 바람에 리얀과 가테스의 얼굴이 모두 굳었다. 나는 이 세계에 대한 상식이 부족한 편이지만, 그래도 내 질문이 거의 반란죄에 가깝다는 건 안다.
나라고 조선 시대, 고려 시대를 모르는 건 아니니까. 하나, 가테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멸망하지 않는다."
"근거가 뭡니까?"
"경계를 물리고 병사들을 응집할 거다. 국민들도 다 황도 근처로 불러들인다. 그렇다면 트라프비체 제국 전역의 검은 나무는 침투하는 제논 왕국의 몫이 되겠지."
"그렇습니까?"
"검은 나무는 나와 에퍼리가 처치할 수 있으니 괜찮다. 들어오면 들어올수록 검은 나무가 제논 왕국의 발목을 잡을 거다. 그들은 후퇴할 수밖에 없다. 물론 제국이 좀 황폐화될 걸 걱정해야 하긴 하지만, 그 정도는 복구할 수 있다."
"그렇습니까?"
"그래."
리얀은 가테스와 나의 눈치를 보았다. 난 그저 턱을 쓰다듬으며 생각하고 있었다. 그때 리얀이 내게 다가와 무릎을 꿇었다.
"황녀 전하?"
"도와줘요, 에퍼리. 사실 이 모든 것은 당신이 있어야 가능한 일이예요. 우리는 자체적으로 검은 나무를 추적할 수 없어요. 당신처럼 강한 사람도 없고요."
"리얀, 일어서라. 황족이 어찌 외인에게 무릎을 꿇는가."
가테스가 지엄하게 말했지만 리얀은 가테스를 도리어 노려보았다.
"오라버니, 생각이 있으신 건가요? 지금 에퍼리가 없으면 우리 제국은 정말 멸망해요. 사실 있어도 모르죠."
"나라의 경계선은 여신이 정해 주신 것. 검은 나무는 우리에게 분명 도움이 될 터다."
그때 가토스가 급하게 문을 열고 들어왔다. 노크도 없었다. 그의 얼굴은 붉게 물들어 있었다.
"무슨 일이지, 가토스? 예의가 없구나."
"형님, 트라프비체의 국경선에서부터 내륙까지 화산이 퍼지고 있습니다. 제논의 업입니다."
"…뭐라고?"
난 바로 이 상황을 눈치챘다. 여신이 뭐 하는 년인지는 몰라도, 이 나라의 국경을 축소한 것이다. 난 도대체 이 세계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성녀가 죽어서, 이 모든 곳을 지킬 수 없다고 판단한 건 아닐까?
그래도 그건 인간의 몫인데, 왜 여신이 판단을 할까? 난 내 나라가 아님에도 부아가 치밀어 올랐다.
리얀은 여전히 무릎을 꿇고 있었다.
"에퍼리… 우리를 도와줄 건가요?"
지금만큼은 그 오만한 가테스도 입을 열지 못했다. 국경이 축소된 건 그만한 충격이었나 보다. 성녀가 죽은 것보다 더. 자신의 아버지가 죽은 것보다 더.
지금 생각해 보면, 정말 가테스가 죽었어야 했다. 가테스는 성녀가 살릴 수 있으니까.
근데 살릴 수 있는 성녀가 오히려 죽어 버렸으니, 이 제국은 정말 희망이 없었다. 어쩌면 내가 판단을 잘못했던 걸까. 신성력이 있는 사람이 없으니.
아니, 잠깐. 난 생각을 고쳐먹었다. 신성력을 가진 것? 한 사람이 있다. 아니, 한 검이 있다.
성녀는 신성력으로 가테스를 살렸다. 그렇다면 내 검, 백천에 모인 신성력으로도 살릴 수 있지 않을까?
이건, 나한테도 도전이었다. 나 혼자 살아남아도 다른 사랑은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이런 무모한 선택을 하는 건, 역시 트라프비체에서 얻은 인연이 눈에 밟히기 때문이었다.
도전해 볼 가치는 있었다. 또 마리나를 살려야 할 이유는 명확했다. 이 세계를 게임으로 봤음에도 사랑을 했던 그녀라면, 사랑을 내게 더 정확히 알려 줄 것임에 분명했다.
"해 보죠, 리얀."
"…고마워요!"
리얀이 갑자기 눈물을 흘리며 내게 폭 안겼다. 그녀의 부드러운 몸을 느끼기보다, 내가 누군가를 이토록 안심시켰다는 점이 더 뿌듯했다.
"그러면 제가 원하는 대로 좀 해도 되겠습니까?"
"또 불안하게 무슨 소리지?"
가테스가 말했다. 그래도 가테스도 자신의 상황을 아는지 고압적인 느낌은 많이 사라졌다.
"성녀를 한번 살려 보죠."
"…뭐?"
내 황당한 발언에, 가테스와 가토스는 물론이고 리얀의 얼굴까지 얼어붙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