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0화 검은나무 원정대 - 뿌리 (1) >
보통 검은 고양이 같은 호칭은 로맨스판타지 세계의 독자들이 붙여준다. 여자주인공이 검은 고양이 같은 취급을 하는 게 아닌, 남자주인공이 검은 고양이 같은 행동을 보여줘야 한다. 그게 바로 판타지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는 판타지가 역전이 되어 있었다. 만약 이렇게 소설을 썼으면 나도 절대 보지 않았으리라.
여성향 소설에서는 남자들이 여자에게 매달리기 마련이고, 남성향 소설에서는 여자들이 남자에게 매달리기 마련이다. 당연하지, 그게 바로 판타지기 때문이다.
"뭐지?"
갑자기 내 눈 앞에 보여주는 진실에 혼란스러울 지경이다. 너무나 혼란스럽다. 너무나.
생각해보면, 나는 원작의 큰 전개가 맞기 때문에 그 외에는 사소한 거라고 긍정하고 생각을 덮어놨다. 지금 다시 생각해보면, 원작의 큰 줄기만을 제외하면 맞는 게 하나도 없는 것이었다.
"이 원작은 잘못됐다."
난 결론을 내렸다. 뿌리가 같다고 한들, 씨앗과 줄기와 열매와 가지가 다르면 같은 나무라고 말할 수 있는가? 아니다.
그리고 이 잘못됨의 씨앗은 당연히, 웹소설이라는 폼에 비춰보면 명약관화했다. 웹소설은 '주인공'의 이야기니까.
난 그때부터 마리나를 감시했다. 이 세계에서 가장 주의해야 할 사람이 있다면 그녀였다. 웹소설은 주인공이 바뀌면 모든 것이 바뀐다.
원작은 아직 아무런 영향을 끼치진 않는 건 아니다. 일단 주인공이라는 기둥이 살아있으니까. 물론 그게 내가 아는 문양의 기둥은 아니지만.
리얀은 애초부터 그녀를 감시하라고 했다. 그러나 난 사실 감시가 아닌 감상을 했었다. 로맨스판타지의 큰 전개는 같다고 생각해서 안심했었던 것이다. 리얀은 대체 마리나를 어디까지 꿰뚫어 보고 있는 걸까.
"가테스, 저기 쪽으로 가면 될 것 같아요."
가테스는 아무 말 없이 말머리를 돌렸다. 성녀는 검은 나무를 감지할 수 있다고 하니, 그것을 따르는 것이다.
그때, 내 하얀 검이 웅웅하고 울었다. 난 바로 마나를 주입해 진정시켰지만, 덜컹거리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내 망토 뒤에 있어서 내 검이 들썩거리는 건 아무도 못 봤겠지만, 진동이 심했다.
뭔가, 역할이 있는 건가. 나도. 대제에게 받은 검이 들썩거린다. 그저 마나전도율이 높은 검인 줄만 알고 있었는데.
"가테스, 가테스, 저기 호수가 좀 예쁘니 보고 가면 안 될까요?"
"당연히 안 되는 걸 뭣하러 말하는가? 지금 검은 나무에도 시달릴 백성들을 생각하면 지체할 시간이 없다."
내가 상황을 꿰뚫자 이 광경이 색다르게 보였다. 전에는 귀여운 로맨스판타지의 여자주인공과 좋아하지만 내색을 하지 않는 귀여운 남자주인공의 귀여운 티키타카로 보였지만, 지금은 그저 마리나가 들러붙는 것으로 보였다.
"가테스, 그냥 가자니까요? 나 안 그러면 검은 나무 퇴치 안해요."
"하··· 당신이란 여자는."
대사는 분명 비슷하다. 상황이 달라졌을 뿐. 분명 전개상으로도 지금 상황과 비슷했다. 말만 검은나무 원정대지 꽁냥거리는 원정대였지.
물론 로맨스판타지에서 성녀가 마법을 발휘해 검은나무를 퇴치하는 장면이 주가 되면 안 되기는 하다. 나는 그것을 단순히 로맨스판타지라는 장르에 필요 없는 장면을 들어내는 몽타주 기법을 사용했다고 생각했는데, 진짜 이러기만 할 줄이야.
다른 분대원들도 시시하다는 얼굴이다. 전장을 불처럼 누볐던 이들에게 연애 들러리를 서게 하는 셈이니, 지겹기도 하겠지.
"에휴."
명예고 뭐고, 다른 이들도 한숨 나오는 원정대인 건 마찬가지. 가테스는 결국 말머리를 돌려 호수를 잠깐 구경했다.
나도 안다, 이 장면. 아마 여기서 밤을 새게 되겠지. 지금은 한낮인데, 호수를 계속 거닐 것이다. 밤까지.
그리고 밤에는 파동 하나 없이 수많은 별을 온전히 담은 호수를 보며 감탄하겠지. 어쩌면 가테스는 거기서 마리나에게 마음을 열 수도 있지.
"여기서 좀 쉬다가요. 가테스. 말도 물 먹일 겸, 좋잖아요."
"···그래."
막무가내인 마리나에 가테스는 체념한 듯 말했다. 결국 얼마 행군하지도 않고 우리의 행군은 다시 끝났다. 가테스와 마리나는 계속 붙어있었다.
내가 만약 엘파힘의 심안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 가테스가 마리나를 쫓는 것으로 생각했겠지. 참 인식이란 무서운 것이었다.
그나저나 어느새 내 하얀 검의 진동은 멈췄다. 나도 이제 이 하얀 검의 용도를 조금 더 정확하게 알아야 될 것 같았다. 지금은 마나를 감싸서 쓰고 있으니 일반 검과 다른 점이 없었는데.
"그래, 여기서 짐을 풀고 쉽시다."
"황자 전하, 이건 좀 아닌 것 같습니다."
"어차피 성녀의 말을 따르는 원정대다."
누군가의 불만도 가테스가 무시했다. 마리나는 그 불만을 못 들은 척하고 호수 쪽으로 나아가서 탄성을 표했다.
가테스는 어쩔 수 없겠지. 이해한다. 그녀의 막무가내성은 가테스가 훨씬 잘 알 것이다. 마리나를 많이 보지 않은 나도 그녀가 마이페이스라는 걸 알 수 있을 정도니까.
하지만 나도 이래서는 안 된다는 걸 안다. 미안하지만 나도 마이페이스니까.
난 우리 분대원들을 모이게 했다. 그들은 역시 날 아니꼽게 보고만 있었지만 적어도 내 지휘에는 따르고 있었다. 내게 맞은 소프 대령 역시.
"지금 상황, 제안 드릴 게 있네요."
"말해보게. 분대장."
"주위 정찰이나 좀 합시다. 검은 나무는 없어도 타락한 나무라도 발견할 수 있고, 이 정도 전력이면 빠르게 해결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내 제안에 모두가 서로를 서로 바라본다. 그리고 고개를 끄덕인다.
"마음에 드는 제안이군. 귀족이라면 이렇게 나태하게 움직이면 안 되지."
"생각보다 명예를 아는 친구군."
뜻밖의 평판 세탁을 하고 나는 바로 가테스에게 갔다. 분대원들은 자연스럽게 내 뒤를 우루루 따라왔다. 따라오라고 한 적 없는데.
"무슨 일이지?"
"주위 정찰을 하게 해주시지요. 타락한 나무라도 발견하면 처리하겠습니다. 검은 나무를 없애는 건 결국 평민들의 안온을 위한 것, 저희들의 발걸음 하나하나가 이렇게 낭비되어서는 안 됩니다. 작은 타락한 나무라도 없애야 합니다. 이 정도 전력이 노는 건 제국 입장에서도 엄청난 낭비입니다."
내 말에 뒤의 분대원들이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만 우리는 성녀의 호위가 우선이다."
"그러니까 저희 분대만 나가겠습니다. 무선 호출 장치도 있지 않습니까. 30분 이내에 돌아올 수 있는 반경까지만 정찰하겠습니다."
"그러세요, 그럼."
우리에게 허락을 한 건 가테스가 아니었다. 가테스 뒤에 몸을 숨기고 있던 마리나였다. 나는 마리나가 있으면 내 제안을 허락할 줄 알았다. 그녀는 가테스와 같이 있고 싶고, 주변에 들러리들은 적으면 좋으니까.
그리고 내 예상이 맞다면···
"이제야 이 명마가 좀 좋아하는 군. 거의 말이 걸어 다녀서 일반 걷는 것과 비슷하더군."
누군가가 시원한 듯이 말했다. 행군 속도가 느려진 것도 마리나가 엉덩이가 배긴다며 계속 칭얼대서 그랬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런 싸움꾼들을 싸움하지 않게 놔두는 건 오히려 독이다. 이들은 기본적으로 전사들이고, 헌터들과 같다.
헌터들은 매일 입에 은퇴라는 말을 달고 살지만, 정작 은퇴를 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왜냐하면 레이드의 짜릿함을 한 번 맛보면 잊을 수 없기에. 헌터들과 비슷한 이런 전사들은 묶어놓는 게 아니라 이렇게 풀어놔야 한다.
우리는 그들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말을 계속 정면으로 달렸다. 이제 커다란 호수도 눈에 보이지 않았다. 그때, 누군가가 내 곁으로 말을 붙였다.
"분대장."
"···소프 대령."
뜻밖에도 내게 붙은 건 소프 대령이었다. 그는 내게 조용히 말을 건넸다.
"아니, 이번만큼은 에퍼리 자작이라고 불러도 되겠나? 분대장에 대한 무례를 용서한다면 말일세."
"그 정도 예외는 필요하죠. 언제나."
나는 말을 잠시 멈췄다. 이미 분대원들은 소프 대령에게서 무슨 말이 나올 줄 아는 모양이었다. 아마 같은 1군단 사람들이니 친하기도 하겠지. 소프의 말은 1군단 모든 사람들과 협의된 내용이라는 거겠지.
"내 자네가 우리를 지휘할 역량이 없다고 생각했지만, 그건 내 오판이었네. 솔직히 말하면, 우리 분대원들의 모든 생각이야. 지금 이런 상황에서 가테스 황자 전하께 간언을 할 계획을 하고, 평민들을 안온하게 하는 선택을 하고, 그걸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간언하는 자네는 충분히 분대장의 자격이 있다네."
"다들 같은 생각이신가요?"
내가 주변을 둘러봤다. 분대원들은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서 나보다 나이가 적은 사람은 없었다. 하긴 S급 헌터 때 파티장을 맡았지만, 대개 나보다 나이 많은 사람들이었지.
"저도 사과합니다. 소프 대령님. 전 이 부대를 확실히 바로잡는 게 중요하다 생각해서 당신에게 모욕을 주고 말았습니다."
"그거야, 내 잘못이었지. 엎어져있을 때 자네의 말을 듣고 있었는데, 맞는 말이라서 엎어져 있으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네."
"아파서 주억거린 거 아니었나? 소프 대령?"
농담들에 분대원들이 모두 웃었다. 나는 그저 권위로 분대를 누르려 했지만, 뜻밖에 이들이 먼저 숙이고 들어오니 내가 막을 필요가 없었다.
"저에게 말을 높일 필요는 없습니다. 분대장이라고 해도 나이는 한참 어리니까요."
이들이 물러서니 나도 물러설 필요가 있었다.
무력으로 사람들을 휘어잡는 것도 효과가 있지만, 그것보다 중요한 건 사람들이 날 진심으로 따르는 것이다. 그런 파티가 레이드의 효율도 더 좋다.
"이제 그럼 명령을 해도 될까요?"
"그래, 분대장."
분위기는 확실히 부드러워졌다. 확실히 여기 있는 사람들은 지휘관. 상황에 대한 빠르고 정확한 판단이 필요하다. 그들은 판단을 한 것이다. 내가 분대장감이라고. 그건 내게는 기분 좋은 일이었다.
"말 머리를 돌립니다. 호수를 삥 돌아갑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왔던 곳으로 다시 갑시다. 확인할 게 있어요."
그들은 내 말에 모두 말머리를 돌렸다. 그들 입장에서는 의아한 명령일 테도 불구하고, 군인이라면 상관의 명령을 아무 말 없이 따라야 하는 법.
우리는 돌아간다. 호수가 보이지 않게. 가테스 눈치 채지 않게 멀리 가서, 우리가 왔던 곳으로 말을 달린다. 명마는 달리고 말발굽이 닿는 곳에 먼지가 일었다.
우리는 1시간도 채 되지 않아 우리가 온 곳으로 돌아왔다. 하얀 검이 다시 울었다. 난 주변을 계속해서 돌았다.
"···"
내가 아무 것도 안 하고 돌기만 할 때도 분대원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만약 내가 공포로만 다스렸다면 여기서 불만이 터졌을 수도 있다. 그 전에 봉합이 된 건 내게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어차피 분대원들이 불만이 있었어도 나 혼자 갔겠지만. 그래도 분대원들이 있는 게 나로서도 좋았다. 이들은 쓸 만한 전력들이었으니까.
난 돌아다니면서 알았다. 서쪽으로 가면 갈수록 하얀 검이 더 심하게 떨린다는 것을.
"서쪽으로 갑시다."
"이러면 반경에서 벗어날 수도 있다네."
"책임은 분대장이 지는 거죠."
"그렇긴 하지. 병사에게는 책임이 없다네."
영관급과 장성급으로 이루어진 병사, 그걸 다루는 지휘관이 고작 자작이라니. 내가 생각해도 웃기다.
난 피식 웃으며 말머리를 서쪽으로 돌리고 갔다. 계속 달렸다. 이미 내가 가테스에게 말한 반경은 벗어났다. 어차피 지킬 생각도 없었다. 난 머지않아 말라비틀어진 땅을 봤다.
하얀 검이 너무 떨어서 내 등 뒤에서 떨어진 다음 부들부들 떨었다. 난 말에 내려서 그것을 잡고 마나를 주입해 진정시켰다. 그리고 땅을 바라보았다. 뒤에 있는 분대원들은 사색이 되어 있었다.
"이건···"
"···검은 나무."
그곳에는 검은 나무의 촉수가 흔들거리며 털이 있는 뿌리를 막 뻗어내고 있는 참이었다. 당황한 말들이 울음소리를 내며 앞발을 들어댄다.
내 예상대로였다.
난 고개를 돌려 반대편을 바라보았다. 동쪽, 호수가 있는 쪽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