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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맨스판타지로 떨어진 S급 헌터-48화 (48/150)

< 48화 검은나무 원정대 - 씨앗 (2) >

"검은나무 원정대장은 나, 성녀는 편제에서 외적인 존재지만 원정대장과 준하는 대우를 해라. 당연하겠지만."

새벽 황궁의 연무장. 마리나는 하품을 하며 가테스 옆에 붙어있다. 가테스 앞에는 나를 포함한 원정대원들이 오와 열을 맞추고 비장하게 서있었다.

본격적인 원정대가 조직된 것이다. 50명도 안 되는 인원이었지만, 이 원정대는 거의 황궁 전력의 절반이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온갖 강자들이 있었다. 나와 이프림 장군의 싸움을 구경한 검성회의 일원도 몇몇 껴있었다.

물론 마리나는 무력을 쓰는 사람이 아니라 이들의 기도를 느끼지 못해서 그냥 아저씨 1, 2, 3 정도 인 줄 알았겠지만. 내가 보기엔 최소 소드 스페셜리스트 5 정도는 되는 사람들로만 구성되어 있다.

여기서 가장 눈에 띄는 건 칸나의 존재였다. 칸나는 고작해야 소령이고, 소드 엑스퍼트 5도 방금 땄다. 여기 사람들의 면면을 보니 나보다 칸나가 뽑힌 게 이질적이었다.

물론 원작에서도 같이 가긴 했지만, 그때는 칸나가 듬직한 호위병 정도로 보였는데 알고 보니 제일 짬이 안 되고 실력도 부족해서 귀여운 존재였다. 대체 왜 그녀가 뽑혔는지 이해가 안 될 정도.

"10명씩 한 분대로 정하고, 1분대부터 5분대까지 편성한다. 1분대장은 아쉬르 후작, 2분대장은 슬리그 장군, 3분대는 베네스트 장군, 4분대는 사테 장군, 5분대는 에퍼리 자작."

가테스의 말을 침착하게 듣고 있던 사람들이 마지막 마디에 눈을 크게 뜨며 날 바라보았다. 난 이제 다음 대사를 예상할 수 있을 것만 같다. 그건 가테스도 마찬가지라서 미리 선수를 쳤다.

"에퍼리 자작은 소드마스터 3의 등위를 딴 사람이다. 불만 있으면 그와 대련하도록."

가테스의 말에 내가 소드마스터인 줄 몰랐던 몇몇 사람들이 눈을 크게 떴다. 안타깝다. 여기서 몇 명 참교육 들어가야 나중에 잡음이 안 생길 텐데 말이다.

"자, 출발하자. 우리는 성녀를 따라다니면서 호위하는 역할이다. 검은나무는 성녀가 담당한다. 우리는 성녀만 호위하면 된다. 괜히 전선 이탈하지 말도록."

가테스의 당부 아래, 새벽에 조용히 검은나무 원정대는 출진했다. 연무장 구석에 배치된 50마리의 최고급 말과 안장을 타고, 연무장 중앙의 문으로 빠져나갔다.

모두 숙달된 승마 스킬을 가지고 있어서 이 조용한 새벽에도 말이 뛰어다니는 소리는 거의 나지 않았다. 아니, 한 명 빼야겠다. 마리나는 승마 스킬이 없는지 가테스의 앞에 앉아있었다.

마리나는 뒤를 돌아보며 가테스와 조잘거리고 있었다. 가테스는 여전히 무표정이었지만, 그게 마치 로맨스판타지 소설 표지와도 같았다.

"에퍼리 자작, 자네가 소드마스터 3이라고?"

내가 뒤를 힐끗 보며 말을 달리자, 옆의 내 분대원 중 하나인 중년 남성이 말을 살짝 붙였다. 여기 있는 사람들 중 내가 흘리는 위압에 위압될만한 사람은 없었다.

그게 문제였다. 난 분대장이었지만 그건 임시 직책이었고, 내 작위는 자작이었으니까. 허리춤에 찬 녹색 솔을 봤을 때, 이자는 백작이었다.

보통 귀족들의 예복을 보면 알지만, 이렇게 전투복을 입을 때는 각자 작위를 알려주는 솔을 다는 게 필요하다고 한다. 왜냐하면 귀족들도 다른 귀족들의 얼굴을 모르니.

공작은 붉은색, 후작은 검은색, 백작은 녹색, 자작은 노랑색, 남작은 파랑색이다. 그러니, 내 허리춤에는 노랑색 솔이 달려있는 거다.

"네."

"고작 자작이? 등위 평가가 정확한 건 아니라지만, 조금 의심되는 군."

나는 그를 빤히 바라봤다. 이럴 거면 연무장에서 말하지. 그때는 성녀와 가테스가 있으니까 깽판을 칠 수 없었다, 이건가.

"난 분대장이니까 말을 높이시죠? 여기는 저잣거리가 아닌데요."

굳이 오는 신경전을 막을 필요는 없다. 또한 이런 신경전은 최대한 빨리 끝내야 했다. 이런 서열정리가 되지 않으면 전장에서 위험하게 작용하기 때문이다.

"오만하군."

"분대장의 말을 따르시오. 소프 대령."

뜬금없이 누군가가 우리들 신경전에 끼어들었다. 그는 4분대장 사테 장군이었다. 아, 익숙한 얼굴이다. 내가 라피테스 공작 앞에서 두드려 준 그 사람이다.

내가 그를 바라보자 그는 눈을 돌렸다. 아직 맞은 데가 욱신거리는 모양이었다. 이를테면 자존심이라든지.

그나저나 사테 장군이 내 편을 들어준 건 의외였다. 문득 사테 장군의 위치가 생각났다. 라피테스 공작 라인이니 이 장군도 가테스의 라인인 거다.

아마 그의 판단으로는 가테스가 내게 5분대장 역할을 맡긴 것을 밀어주려는 것으로 보는 것 같았다. 내가 볼 때는 이것 역시 나라는 칼을 들고 춤을 추는 것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내 분대가 가장 강하고, 성격파로 보이는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에. 그들은 분명, 문제를 일으킬 것이었다. 나는 내 뒤의 분대원들을 돌아보았다. 모두 불만이 조금씩은 있는 표정이었다. 방금 사테 장군에 의해 저지된 소프 대령의 얼굴은 대놓고 불만이었다.

이들을 얼마나 빨리 정리할 지가 우리 분대의 생존율을 좌우할 것이다. 이미 분열의 씨앗은 그들의 분노라는 물과 자존심이라는 양분을 흡수해 흔들리고 있었다.

우리를 불안하게 바라보는 건, 붕 뜬 칸나였다. 내 분대에 최말단 소속되어 있는 칸나는 그저 저 멀리서 나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녀를 챙겨주고 싶었지만, 그럴 시간이 없었다.

가테스는 자신의 분대원을 살피는 에퍼리를 바라보았다. 아마 저 외계에서 떨어진 존재 같은 녀석은 자신의 목적도 이미 눈치를 챘을 거다.

"가테스, 엉덩이가 너무 아픈데요?"

"조용히 좀 해라. 작전 중이다."

승마 스킬이 없으니까 엉덩이가 아프지. 가테스는 마리나를 한심하게 바라봤다. 얼굴만 예쁘지 도저히 마음에 드는 구석이 없는 여자였다.

"그러니까 승마 스킬을 좀 배우라고 하지 않았나. 남는 시간도 많았으면서."

"그런 건 배우기 싫어요."

"하, 자네라는 사람은···"

가테스는 한숨을 쉬었다. 여기서 유이한 골칫거리가 있다면 저 멀리 5분대를 이끌고 있는 에퍼리 션 자작과, 자신의 바로 앞에 있는 마리나 스미노프였다.

둘 다 이 원정대의 핵심적인 전력이라 뭐라 할 수도 없었다. 에퍼리는 자신이 일부러 집어넣었지만. 정말 꺼려지는 사람이지만, 적어도 이 사람의 한계를 봐야겠다는 오기마저 들었다. 소드마스터 2도 아이 다루듯 두들겼다면 소드마스터 4 정도는 될 거다.

"마리나, 에퍼리에 대해서 아는 거 있나?"

"알아도 안 알려줄 건데요?"

마리나는 뒤를 바라보며 싱글거렸다. 가테스는 고개를 숙이고 한숨을 쉬었다. 이 여자한테 물어본 게 잘못이지.

그렇지만 소프 대령이 일단 신호탄을 날리기는 했다. 이건 단순히 무력으로 꺾을 수는 없을 것이다. 소드마스터 5 이상, 사실상 명예직과도 같은 그랜드 소드마스터라도 이렇게 많은 소드마스터를 상대할 수는 없을 테니까.

애초에, 정말 에퍼리는 신기한 사람이었다. 뒷조사를 시켰는데도 정말 아무 것도 나오지 않았다. 기록은 아무 것도 없었다. 정말 세계 바깥에서 떨어뜨린 사람처럼. 소드마스터 급의 강자가 정말 이렇게 기록이 없을 수가 없었다.

과연, 에퍼리는 누구일까. 가테스의 궁금증은 커져만 갔다.

여기 있는 사람들은 모두 싸움의 경력이 긴 사람들이다. 지금 이렇게 분대가 단합이 안 된다면 모두의 생명이 위험하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다는 사람들이다.

부대의 재정비는 빠르게 이뤄졌다. 분열이든, 통합이든. 먼저 기선을 잡은 건 소프 대령이었다. 그것도 아주 빠르게. 첫 날 저녁 시간이었다.

"황자 전하, 부대의 편제를 다시 해주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이유는?"

가테스는 천연덕스럽게 물어봤다.

"저희는 대개 1군단의 최소 연대장을 맡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저도 검성회의 일원에게 에퍼리 자작의 실력은 들었습니다만, 지휘와는 다릅니다. 저는 에퍼리 자작이 우리들을 지휘할 정도로 리더십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나는 여기서 새로운 사실을 들었다. 어느 정도 의도와 컨셉이 있는 부대라고는 생각했지만 자신이 지휘하는 1군단의 사람들을 모두 집어넣다니.

여기서 이질적인 사람은 칸나와 나밖에 없었다. 다행히 칸나까지 딴지를 걸지는 않는다. 백작 영애이고, 유망주이니까 봐준다는 경향이 짙다.

1군단의 사람들은 1군단이라는 게 중요한 게 아니다. 같은 군단 사람들이라는 것이 중요하다. 같은 부대의 지휘관들이니 작전도 많이 해봤을 것. 그들에게 있을 유대감은 곧 자존심과 같았다. 그걸 나라는 한낱 자작이 깎아먹고 있는 것이다. 심지어 자신들 위에 군림하는 분대장으로서.

"어떻게 생각하지. 에퍼리 자작?"

가테스는 밉살맞게 물었다. 내가 궁금한 건 알겠는데 슬슬 귀찮아지려 한다.

"뭘 어떻게 생각합니까? 황자 전하가 어떻게 생각하시는지가 중요하지."

"자네가 여기 5분대의 분대장 아닌가. 고충 처리는 분대장을 거쳐야지."

"음, 그렇습니까?"

체계를 고지식하게 따지는 건 여전하다. 난 그런 스타일은 아니지만. 위급할 때 체계가 어디 있는가. 난 가끔 레이드가 위급하다 싶으면 모두에게 반말을 하라고 한 적도 있었다. 존댓말을 하면 말이 길어지게 되니까.

"체계를 갖추지 않고 보고한 소프 대령을 군기 위반으로 처벌하겠습니다."

내 말에 1군단, 그러니까 5분대 사람들은 분노했다. 여기 있는 사람들은 최소 연대장이라니까 백작급은 되는 사람.

"미안하지만, 그건 안 된다. 제국법 7조 4항. 하관(下官)은 상관(上官)을 처벌할 수 없기 때문이다."

가테스가 말하자 5분대의 사람들이 기세등등해지고 분노가 좀 더 거칠어졌다. 이제 내가 그들을 처벌할 근거가 없으니 아예 들이받을 수도 있다는 식이다.

"제가 지금은 상관 아닙니까? 이들의 분대장인데."

"이건 임시직일뿐이다. 제국법에서 상하는 언제나 작위를 의미한다."

가테스는 내가 어디로 빠져나갈 줄 알았다는 듯 바로 구멍을 막아버렸다. 이제 가테스가 원하는 상황이 만들어진 것이겠다. 이런 위기 상황에 대처하는 법을 보고 싶다 이거겠지.

"어디 자작 따위가 특수부대에 들어와서 물을 흐리는지."

"황자 전하가 총애하는 건 알겠지만, 너무 오만하군."

이건 무력을 시험하는 게 아니다. 이미 우리 분대에도 내가 이프림 장군과 싸웠던 걸 본 검성회의 일원들이 있으니까. 그들은 더 분노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내가 이프림 장군을 사람이 아닌 북과 장구처럼 두드렸으니까. 같은 검성회의 일원이 그런 게 모욕적이고, 귀족적이지 못했다고 생각했을 거다.

하지만 난 귀족의 솔을 걸치고는 있지만 내 스스로가 귀족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저 필요에 의해서 이 작위를 받은 것 일뿐.

"그렇다면 제가 물러나면 해결되는 문제입니까?"

"그렇게 쉽게 물러날 건가?"

가테스 황자는 슬슬 내게 거슬리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단순한 호기심이라고 해도, 누군가를 평가하고 시험하는 것이 너무 오만하다. 로맨스판타지의 남자주인공이니 응당 그럴 수 있다고 이해해주는 것도 한계가 있다.

이제 이 자가 남자주인공이 아닌, 하나의 사람으로 바라보니까 생긴 변화였다. 그래도 그건 일단 뒤로 미뤄두고. 난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아니지만요."

가테스가 웃었다. 이번엔 무슨 일을 내가 꾸몄는지 검사하는 선생님과 같다.

"소프 대령이 분위기를 망치는 건 맞습니다. 체계를 어긴 것도 맞습니다."

"다만 하관은 상관을 처벌할 수 없지 않은가?"

"가테스 황자 전하가 처벌할 생각이 없으신 것 같으니, 이번엔 특별히 제가 처벌하겠습니다."

난 그리고 곧바로 소프 대령으로 달려가 명치를 내질렀다. 소프 대령도 어느 정도 실력자라 한 번에 명치를 내지르진 않았고, 얼굴로 주먹을 날리는 환상을 보여준 다음에 명치를 찔렀다. 그래서 소프는 두 허리에 팔꿈치를 붙이고 가드 자세를 붙인 자세로 푹 쓰러졌다.

"뭐하는 짓이지?"

가테스의 당혹스러운 말투에 난 품에서 하나의 패를 꺼냈다. 리얀에게 받은 금색 패였다. 그걸 알아본 사람들의 표정이 모두 변했다.

나도 이제 소설 속에 있는 설정으로만 싸울 수 없었다. 소설 바깥에 있는, 세계에 있는 사실로 싸워야 했다. 나도 그래서 사실을 많이 공부했다.

바로 특별지위인 '군사감찰관'이 있다는 것을. 군사감찰관은 군인의 계급이 아닌, 황궁의 행정부에 속해있는 직위였다. 그야말로 외부에서 군사를 감찰하는 사람.

"제국특별법 3조 9항에 의하여, 군사감찰관은 군기 감독을 임시로 할 수 있으며, 즉결 처분도 가능하다. 제국특별법 3조는 제국법 7조 사항에 우선한다."

내 말과 함께 소프 대령이 애벌레처럼 몸을 움찔움찔 떨었다. 난 마지막으로 가테스를 바라보며 한 마디를 남겼다.

"더 이상 제가 군사감찰관의 직위를 이용하지 않게 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황자 전하."

씨앗이 뿌리가 되지 않게 하려면 그냥 밟아버리는 게 아닌, 찢어놔야 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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