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7화 검은나무 원정대 - 씨앗 (1) >
나에 대한 징계는 없었다. 그저 이건 대련 중에 일어난 일이었으니.
"···자네에게는 트라프비체의 예법을 좀 더 알려줄 필요가 있겠군."
가테스 역시 그렇게 말을 남기는 게 전부였다.
검성회의 몇몇 사람들은 분개를 토하기는 했지만, 그저 그것에 그칠 뿐이었다. 내가 그들을 바라봤을 때, 내 눈을 1초 이상 바라본 사람도 없었다. 난 느낄 수 있었다.
여기서 날 이길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그들도 간접적으로 느꼈을 것이다. 내가 이프림한테 심어준 공포라는 감정의 편린을. 여기서는 고작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위계서열로 사람들을 압도하지만, 내가 사람을 압도하는 방법은 사람의 본성을 건드리는 일이었다.
A급 헌터와 S급 헌터는 동등한 사람이다. 그저 능력이 다를 뿐. 그러니까 기어오르는 걸 막기 위해서는 본성인 공포를 건드는 수밖에 없었다.
그들 중에서는 처음 느끼는 감정에 혼란스러운 사람도 있으리라. 여기 있는 사람들은 이렇게 사람들을 압도하는 사람이 아니니까. 알아서 자신에게 고개를 숙이는 사람밖에는 못 봤을 테니까.
"대련의 결과는 곧 공식적으로 공지하도록 하겠다. 모두 고생했다."
그렇게 대련은 끝났다. 나는 칸나와 아이리가 있는 쪽으로 돌아갔다. 내가 뒤를 돌아본 다음에야 검성회의 날카로운 시선이 나를 쫓았다. 그렇게 뒤만 몰래 쫓으라지. 나는 뒤를 돌아봐주지도 않았다.
"아주 화끈하게 해주셨어요."
리얀은 황궁도서관의 사서 모습을 하고 내 방에 찾아왔다. 가티스의 근위기사실. 요즘 가티스는 제왕학을 공부하느라 밖에 나갈 틈도 없다고 한다. 나야 편하게 움직일 수 있으니 좋다.
"무슨 일로 찾아오셨어요?"
"정식 스카우트 제의요."
나는 시종이 갖다 준 차를 마셨다. 이렇게 나올 줄은 알고 있었다. 리얀은 처음부터 나라는 사람을 원했으니까.
"당신이 내 사람이 되면, 지금 당장 작위부터 바꿔줄 수 있죠. 영지까지 하사할 수 있어요. 황녀라는 자리는 그런 자리랍니다."
"작위, 영지라···"
그렇지. 여기서는 그게 최대의 명예일 것이다. 하지만 내 생각은 달랐다. 난 여기 사람이 아니니까.
"거절합니다."
내 담백한 말에 리얀이 눈을 살짝 내리깔았다. 어느 정도는 예상한 듯했다.
"정말 연애가 목적이라 그런 건가요?"
리얀이 말했다.
"사실 높은 위치에 있으면 연애하기가 쉽지 않죠. 정략적인 제안이 많이 들어오니까."
"아니, 굳이 그런 것 때문은 아니에요. 전 위치는 연애랑 별로 상관 없다고 생각해요."
난 내가 생각하는 내 연애관을 말해주었다.
"내가 최대한 나답게 살 때, 나와 가장 어울리는 여자를 만날 확률도 높지 않을까요?"
"그럼, 에퍼리 자작이 생각하는 본인은 무엇인지 듣고 싶네요. 그걸 채워줄 수 있다면, 응당 그리 할게요."
리얀은 그래도 나에 대한 집착을 버리지 않은 듯했다. 난 여기서 확실하게 말할 필요가 있었다.
"전 황녀님의 밑으로 들어갈 생각이 없습니다. 물론, 그 누구 밑에도 들어갈 생각도 없어요. 그건 제 성격하고 다릅니다."
왜냐하면 내가 전직 S급 헌터였기 때문에. 대신, 이런 관계는 유지할 수 있다.
"거래처로 하시죠."
"···거래처요?"
"서로 요구가 있으면 들어주고, 상황이 안 되면 못 들어주는, 그런 관계요."
"이를테면 전략적인 동맹 관계네요."
리얀은 역시 똑똑하다. 내가 하고자 하는 말의 한 수는 앞서 있어 대화하기가 편했다.
"그렇죠."
"제가 원하는 걸 먼저 말해도 될까요?"
리얀이 말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에, 검은나무 원정대에 참여해주세요."
리얀의 입에서 뜻밖의 말이 나왔다. 검은나무 원정대. 마리나와 가테스가 검은나무를 사냥하는 시퀀스. 물론 검은나무는 그냥 성녀의 앞에서 손쉽게 태워지는 겉절이였고 꽁냥거리는 것이 주인 에피소드였다.
나는 속으로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왜냐하면 나도 당연히 따라가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왜냐하면 이번에 아이리가 다쳤을 때 생각해본 건데, 나의 존재가 검은나무에 영향을 끼치는 게 맞았으니 그 책임을 져야 되지 않겠는가.
"저야 좋죠."
"그래요. 그리고 마리나를 감시해주세요."
리얀의 날카로운 시선이 날 바라봤다. 이건 살짝 놀랐다. 내가 예상한 말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리얀과 마리나는 원작에서는 친밀한 관계였다.
지금도 가끔 리얀과 마리나를 먼발치에서 바라보곤 하는데, 관계가 나쁘지 않아 보였다. 딱 원작 그대로의 관계.
하지만 리얀이 마리나를 경계하고 있다라. 이건 또 원작과 다른 내용이었다.
"이유는 뭐죠?"
"이유는 묻지 마세요. 만약 에퍼리가 내 수하였으면 알려줬겠지만, 우리는 동맹 관계잖아요?"
리얀은 얼굴을 팽 돌리며 말했다. 깍쟁이긴 깍쟁이네. 리얀의 말은 옳았기 때문에 난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행동에서 뭔가 이상한 게 있다면 와서 보고해주세요."
"그러죠."
나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 세계에서 가장 원작과 다른 사람을 아이리로 꼽자면, 그녀와 쌍벽을 이룰 정도로 이상한 사람은 마리나였으니까. 나 역시 호기심이 있었다.
이제 내 차례. 난 책상 앞으로 몸을 끌어당기며 리얀과 눈을 마주쳤다.
"그러면 제가 이제 원하는 걸 말할 차례인가요?"
"뭐, 뭔데요."
리얀은 뜬금없이 옷깃을 저미며 당황스러워 했다. 너무 강렬한 눈빛으로 들이댔나 보다. 내가 아무리 미친놈이라고 해도, 리얀, 너. 이럴 생각은 없다. 난 지금 리얀이 예쁘다고는 생각하지만 '사랑'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거면 되겠어요?"
"그럴 위치는 되시잖아요."
내가 리얀에게 원하는 걸 말하자 리얀의 반응이 싱거웠다. 리얀은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뭐, 그 정도야···"
"감사합니다."
우리의 비밀 회동은 그렇게 끝났다. 리얀이 원하는 걸 얻고, 나도 원하는 걸 얻었으니. 서로 만족스러운 회의였다.
검은나무 원정대. 본격적으로 마리나와 가테스의 관계가 진전되는 큰 전개의 시작이다. 원작대로라면 마리나는 황도로 끌려오자마자 검은나무 원정대로 끌려가며, 냉철한 가테스에 사사건건 부딪치는 발랄한 매력을 뽐낸다. 당연히, 그렇게 티키타카를 하는 동안 가테스와 서서히 가까워지고.
큰 전개는 원작을 따라간다는 전제 하에, 원작을 아예 무시할 수는 없으니 원작과 다른 점만을 조금 짚어볼 필요가 있었다.
첫째, 마리나는 원작보다 일찍 황도에 도착했다.
둘째, 마리나는 가테스와 이미 친분이 있다.
셋째, 마리나는 환생자고, 조금 이상한 꿍꿍이가 있어 보인다.
물론 그 이외에도 세세하게 다른 부분이 정말 많지만, 이상하게도 큰 전개는 비슷하다는 점이 내게는 걸리는 요소다. 그런 점에서,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큰 전개인 검은나무 원정대에 참가하는 건 그걸 더 정확하게 알기에 좋은 기회였다.
원래라면 안 나갔겠지. 연애만을 생각했던 나라면. 하지만 지금의 나는 어쩌다 얽힌 것들이 있다. 나라는 이방인의 존재와 검은 나무의 상대성, 그것에서 생긴 의무.
"검은 나무 원정대라. 잘 갔다와."
나는 오랜만에 가티스와 독대를 하고 있었다. 가티스는 요즘 꽤 힘들어 보인다. 수업이 많아서 그런가. 근위기사인 내가 활동할 것도 없었다.
"하나밖에 없는 근위기사인데 별로 감흥이 없으신 것 같네요."
"네가 가고 싶어 하는 것 같던데."
"눈치가 빠르시네요."
가티스는 흐흐, 웃었다. 원래 꼬마들은 자신을 띄워주면 다 좋아하기 마련이다. 아니, 모든 인간들이 그렇지. 어른이 되면 그걸 감출 줄 아는 거고.
"내가 그저께 꿈을 꿨어."
가티스가 턱을 괴고 내게 심각하게 말했다. 갑작스럽게 심각하게 변하는 것도 아이들의 특성인가.
"커다란 괴물이 있었어. 커다란 괴물 앞에, 형이랑, 마리나가 있었지. 거기서 마리나는 괴물의 촉수에 심장이 찔려."
"불길한 소리하지 마세요."
"그래서 너한테만 해주는 거야. 원래 마리나한테도 얘기해주려 했는데. 좀 그렇잖아."
난 말하다가 뭔가 이상한 점을 눈치 챘다. 언제부터 가티스가 마리나를 이렇게 친근하게 불렀지.
"성녀님이랑 친해지셨어요?"
"마리나? 친하지. 과자도 몰래 갖다 주고. 좋은 애야. 걔는 내 꿈 얘기를 좋아해."
"꿈 얘기요?"
"응. 과자 하나에 꿈 얘기 하나."
이건 또 원작대로 친해졌네. 가티스랑은 금세 친해졌다고 했으니까. 허나 꿈 얘기는 들어있지 않았다.
"최근엔 무슨 꿈 얘기를 했는데요?"
"음, 은발의 공녀가 복도 앞에서 멋있는 말을 하는 장면이었어. 형이 그걸 듣고 칭찬했지."
난 잠시 그 말에 얼었다. 생각할 게 급속도로 너무 많아져서. 그건 실제로 있었던 일이잖아.
"언제 얘기한 건데요?"
"2주일 전쯤?"
무도회 전이네. 완벽하게 들이 맞는다. 나는 가티스에게 생각나는 꿈을 전부 말해보라고 했다. 가티스는 내 위압에 살짝 당황하면서 모든 것을 말했다.
심지어 나를 처음 만났을 때도, 그는 나를 꿈에서 먼저 봤다고 했다. 그리고 내가 그의 방에 몰래 들어왔을 때의 꿈도. 어느 정도 은유적인 꿈도 있었지만 다 해석이 가능한 수준이었다.
그렇다면, 결론은 하나로 귀결된다.
가티스는 예지몽을 꾸는 사람인 것이다. 마리나는 그 사실을 알고 있었던 거고. 이는 원작에 나오지는 않았던 사실이다. 그저 마리나와 가티스가 친했다는 사실만 기록됐을 뿐.
오늘도, 원작에서 교묘하게 배제된 내용을 하나 알아내었다.
"일단 감사합니다."
"그래, 뭔 도움이 됐는지는 몰라도."
가티스는 얼떨떨하게 말했다. 나는 가티스의 방에서 나오면서 내게 물었다. 근본적인 질문이었다. 이 세계는, 무엇인가, 하고.
"칸나, 이번에 검은나무 원정대에 차출됐다며?"
"네."
아이리와 칸나, 나는 이렇게 종종 모이게 됐다. 그냥 같은 위기를 헤쳐 나온 사람들로서 당연한 결과라고 해야겠다.
나만 해도, 던전의 레이드를 할 때마다 단체 메시지방이 생겨서 총 200개 이상의 메시지방을 가지고 있었으니까.
"칸나, 조심해. 아무리 성녀님이 있다고 하더라도 자기 몸은 자기가 챙겨야지."
"네. 아가씨는 황도에 계속 계신다고요?"
칸나와 아이리의 호칭도 살짝 경칭으로 바뀌었다. 아이리가 몇 살 어리기는 하지만, 이 세계는 작위가 곧 나이인 시대. 애초에 얼굴만 보면 또래처럼 보여서 그렇게 이상하지도 않았다.
"일단 눈이 다 나을 때까지는 황도에 있으려고. 의료 시설은 황도가 좋으니까. 그리고 아버지의 말도 있었어. 황도에서 좀 사교계를 많이 다니라고. 이런 눈으로 사교계를 다니면 더 이상해질 수도 있지만."
여전히 안대를 낀 아이리는 농담을 하며 웃었다. 미소녀는 안대를 껴도 미소녀니까 괜찮다. 아이리야 사교계의 제왕이니까 알아서 잘할 것이다. 수도에는 별다른 위협도 없을 거다.
"에퍼리도 뭐, 이제 정식으로 소드마스터가 됐으니까 큰 작전에 참여하는 건가보네."
아이리가 말했다. 난 고개를 저었다.
"정식은 아니에요. 검성회에 등록 안 되어 있으니까. 아는 사람들만 아는 소드마스터인 거죠."
"아, 그때 무슨 그림자, 뭐시기 했었지. 나도 알아봤어. 그거 엄청 비밀리에 숨겨져 있던데, 그런 집단은 어떻게 알고 비집고 들어간 거래."
"다 아는 수가 있죠."
도서관에서 괜히 살았겠어. 난 이 세계를 모르니까 더욱 알 방법이 필요했고, 그 방법 중에 하나가 운이 좋게 걸려든 것뿐이다.
"어쨌든 원정대장인 가테스 황자 전하가 알고 계셔서 에퍼리는 분대장을 맡을 겁니다."
"칸나는 에퍼리 분대인가?"
"편제가 그렇게 됐네요. 세상 참 몰라요. 제가 근위병으로 데리고 있던 친구가, 제 부대장이 되다니. 뭔가 이상한 느낌···"
칸나는 그 말을 하면서 뭔가가 원망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봤다. 나도 뭔 느낌인 줄은 대충 알겠다. 머리로는 인정하고, 이해하지만 심적으로는 살짝 자존심 상한다는 얘기겠다.
"원정은 내일부터야?"
"네."
"그래. 다들 다치지 말고."
아이리의 마지막 말에 난 아이리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왜?"
"아니에요. 의외로 따뜻한 말을 해주시네요."
"그럼, 뭐, 꺼져. 이럴까?"
나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이리도 마주 웃었고, 칸나도 따라서 웃었다.
이 대화는, 내게 다시금 확신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 세계는, 뭔가가 왜곡되어 있다고. 진실을 일부러 숨기려는 듯. 그건 큰 전개인 검은나무 원정대에서 더욱 노골적으로 드러날 수밖에 없음을, 나는 예감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