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5화 괴리감 (4) >
아이리와 칸나가 땀을 씻으러 샤워를 하러 간 동안, 난 리얀과 둘이 먼저 앉아 있었다. 난 딱히 땀이 안 나서 샤워할 필요는 없었다.
"어때요, 훈련은 잘 돼가요?"
"칸나는 그렇다 쳐도, 아이리가 좀 걱정입니다."
칸나는 오늘 대련을 해보니까 알겠다. 확실히 노력파에, 기본기만 갖춰주면 훨씬 성장할 수 있는 타입이었다. 많은 실전 경험 때문에 터득하는 것도 빨랐다.
다만 아이리는 기본기는 있었지만 일천한 실전 경험으로 몸이 좀 뻣뻣한 게 문제였다.
"칸나 영애랑 말을 튼 모양이네요?"
"어쩌다 그렇게 됐습니다."
"연애 사업의 일부인가요?"
차를 마실 때 그걸 물어봐서 차가 역류할 뻔했다. 난 최대한 당황을 숨기고 담담하게 말했다.
하긴, 리얀은 내 진짜 목적을 알고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지. 너무 방심했다.
"그저 말을 튼 것뿐입니다."
"그러면 됐고요."
"그나저나 뭘 도와주시게요?"
"상대방의 약점이요."
"그런 건 별로 필요 없는데요."
내가 말하자 리얀이 고개를 흔들었다.
"싸움에서 약점 말고, 그들이 가진 인간적인 약점을 말하는 거예요. 예를 들면 아일린 후작저는 저번 목화 흉작 때문에 빚에 시달리고 있고, 이프림 장군은 사생아를 따로 키우고 있죠. 뭐, 이프림 장군 따위야 당신이 이기겠지만."
리얀의 입에서 나는 이해할 수 없는 말들이 쏟아져 나온다. 그 말 자체를 이해할 수 없다는 게 아니라, 리얀을 이해할 수 없다.
내가 이들을 캐릭터로 보지 않는다고 결심을 해도 선입견이라는 건 무서운 것. 내가 아는 리얀은 이런 사람이 아니었다.
"···이렇게까지 저희를 도와주는 이유는 뭐죠?"
"그건···"
리얀의 입이 열리려고 할 때, 살짝 젖어서 촉촉해 보이는 머리를 가진 두 미녀가 들어왔다. 아이리와 칸나였다.
"아이리, 칸나. 어서 이쪽으로 앉아요."
리얀의 상큼한 목소리가 아이리와 칸나를 안내했다. 아이리와 칸나는 여전히 어리둥절하며 자리에 앉았다.
"황녀 전하, 어찌 행차하셨습니까?"
아이리가 예의바른 공녀의 모습을 해보였다. 찻잔을 들고 내리는 게 칸나와 나랑 같이 있을 때와는 다른 우아한 움직임이었다.
"그냥, 보고 싶어서 왔죠."
리얀의 두루뭉술한 말에 칸나와 아이리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난 리얀을 바라보았다. 소설 속의 리얀은 어떤 모습이었지. 그리고 다른 사람의 모습은?
- 마리나, 마리나는 참 좋은 사람 같아요.
보통 리얀의 포지션은 이런 것이었다. 독자들의 마음과 주인공의 마음을 힐링해주는 존재. 문득, 다른 사람들의 대사도 생각났다. 가테스와 가토스의 대사.
- 마리나, 나는 황제가 될 거야. 그게 내 사명이니까. 그러기 위해선, 더 노력해야 돼.
- 형님, 저는 황제가 될 생각이 없습니다.
난 갑자기 번개를 맞은 것처럼 허리와 고개를 빳빳이 들었다. 괴리감. 가토스는 분명히 황위를 노릴 생각이 없다고 가테스에게 표시했다. 물론 나중의 일이지만.
그렇다고 눈치 빠른 가테스가 그걸 몰랐을까? 그렇다면 왜 가테스는 황위에 그렇게 집착하고 열심히 했을까?
···또 다른 경쟁자가 있어서?
나는 싱긋 웃고 있는 리얀에게 물었다.
"황녀 전하."
"네?"
"황제가 되려 하십니까?"
그 말에, 모든 이들이 굳었다. 아이리가 리얀과 내 눈치를 보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무슨 소리지, 에퍼리? 황족에 대해 개인적인 질문이 허락되지 않는 걸 몰라?"
"괜찮아요. 아이리 공녀."
리얀이 아이리를 막아섰다.
"···사실이니까요."
잠시의 소강상태. 우리 넷은 그 말이 있는 다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차를 끝까지 마셨다.
차를 먼저 다 마신 리얀이 서두를 열었다.
"맞아요, 난 황제가 되고 싶어요. 그게 뭐 잘못됐나요?"
"아뇨. 그냥 놀랐을 뿐입니다."
"전 딸이라서 제위 계승 3서열이지만, 황족의 모든 사람들은 알고 있죠. 가토스가 황제 자리에 관심이 없다는 걸요."
리얀이 말한다.
"그렇다면 전 2서열이 아닐까요? 이 정도면 노려봐도 되잖아요?"
리얀은 거의 마지막에는 울분이 섞인 듯한 말투였다. 3서열부터, 2서열까지. 이건, 진짜다. 그녀의 제위에 대한 열망은, 진짜였다.
"그렇지만 전 제 세력이 없어요."
"그래서, 저희가 황녀님 세력의 첫 시작인 건가요?"
"그렇죠. 이렇게 대놓고 들킬 줄은 몰랐지만요. 사실 근시일내에 말하려고는 했어요."
리얀의 말에 아이리와 칸나는 여전히 입을 살짝 벌린 채 아무 말도 못하고 있었다. 당연하다면 당연하달까. 트라프비체 제국에서 여자가 황제가 된 경우는 단 한 번도 없었으니. 그건 법으로 지정된 것도 아니지만, 남자가 황제가 되는 건 너무도 당연한 것이었다. 리얀이 황제를 꿈꾼다는 건 그녀들로서도 충격적인 사실일 것이었다.
"어떻게 생각해요? 아이리, 칸나. 내 사람이 된다는 것에 대해서."
이제 들통나버린 리얀이 노골적으로 물어보기 시작했다. 리얀은 황궁도서관 사서, 연구원, 뭐 하나 인맥을 가질 수 없는 직위만을 가지고 있다.
가테스가 등위심사평가위원장, 검성회의 부회장 등의 직위를 역임하고 있는 걸 보면 정치적인 힘이 많이 차이 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전, 전 그런 쪽으로 생각해 본 적이 없어서···"
먼저 칸나가 더듬으며 입을 열었다.
"그리고 저는 한낱 소령일 뿐입니다. 백작도 아니고요. 어찌 제가 황녀 전하의 힘이 되어드릴 수 있단 말입니까."
"전 직위나 그런 걸로 사람을 판단하지 않아요."
리얀이 칸나를 뚫어지게 보았다.
"사람을 보고 판단하죠."
리얀이 뿜어내고 있다고는 생각할 수 없는 불같은 눈빛에 칸나가 고개를 숙였다.
아이리 역시 의문을 표하는 건 마찬가지였다.
"황제를 꿈꾸신다면, 저희보다 중립에 있는 대신들을 잡는 게 맞지 않을까 싶습니다. 아시다시피, 저희 아버지는 가테스 황자 전하와 긴밀한 관계입니다. 제가 황녀 전하의 편을 들어드린다 한들, 공작가의 힘이 황녀 전하께 갈 일이 있겠습니까."
그나마 정치 사정에 밝은 아이리가 입을 열었다. 리얀은 고개를 저었다.
"라피테스 공작은 낙마시키면 됩니다."
"···네?"
이건 또 무슨 소리일까. 리얀의 말은 아주 담담했다.
"어차피 아이리 공녀와, 라피테스 공작은 사이가 좋지도 않잖아요?"
리얀이 이번엔 아이리를 바라봤다.
"만들어드릴게요. 공작."
"···조금 당황스럽습니다. 황녀 전하. 저는 솔직히 아버지와 사이가 좋은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이렇게 척질 정도로 나쁘지도 않습니다."
"미워하고 있잖아요?"
아이리가 부정했지만, 리얀이 말했다.
"예프린 라피테스, 당신의 동생. 정확히 말하자면 당신의 여동생이죠. 그녀를 당신에게서 뺏어간 사람이 라피테스 공작 아닌가요?"
"···무슨 소리신지."
아이리는 간신히 부정을 했지만 떨리는 목소리는 참을 수 없었다. 나는 그것이 진실임을 곧 알아챘다. 내가 아는 사실과도 부합했다. 아이리가 가장 좋아하는 사람은, 여전히 예프린 라피테스였으니까. 지금도 그랬다.
그렇다면, 진짜 아이리는 라피테스 공작을 싫어했던가? 공작저에서 보기로는, 같이 식사도 했었던 것 같은데.
하지만 라피테스 공작의 면모를 생각해보면 딸과 친하지 않을 거라는 건 예상했다. 뭐든지 이익과 손해를 계산하는 그의 성격. 딸에게도 그러한 태도를 취했다면, 당연히 친하지 않겠지. 그렇다고 싫어할 줄은 몰랐다.
"에퍼리 남작은 어떻게 생각해요? 사실, 제가 생각한 인물 중, 가장 당신이 매력적이랍니다."
"무슨 근거입니까?"
"강하고, 트라프비체에 얽매어있지 않고, 라인도 딱히 없죠. 그 라인이 없다는 것도, 독자적인 노선을 추구하고 싶다는 말이잖아요? 이번에 검성회의 그림자 자리를 달라는 것도 그렇고. 전 당신의 자유를 충분히 존중할 거예요."
"그게 가능한 일입니까?"
"전 제가 황제가 되면 당신을 놓아줄 수도 있어요. 물론 제가 황녀일 때도 당신을 부려먹지는 않을 거고요. 당신은 기브 앤 테이크 정신이 충실한 사람이잖아요?"
리얀의 캐릭터성은 확실하다. 말을 아끼지만, 일단 하는 말은 거의 사실에 가깝다는 점. 리얀이 보는 눈이 있다는 것이겠지. 조연급이라 가테스에 비해 그런 특성이 드러나지는 않지만, 내가 도서관에서 봤을 때 황족 눈의 스킬도 가테스보다 높았으니 그런 능력은 가테스보다 더 뛰어나다는 거겠다.
"일단, 생각만 해보세요. 제가 일단, 당신들을 돕고 싶다는 건 사실이니까. 정보는 남겨두고 갈게요."
리얀은 자신의 품속에서 작은 책 한 권을 꺼냈다. 가슴의 포켓에도 들어갈 만큼 작은 크기의 책이었다. 글자도 안 보일 것 같은 크기다.
그 책은 리얀이 어떤 스킬을 발현했는지, 곧 제 크기의 책으로 커졌다.
"이게 도움이 될 거예요. 그럼 이만."
칸나와 아이리는 부랴부랴 일어나서 리얀에게 예를 표했다. 나 역시 일어나서 예를 표했다.
문 앞까지 나서려 하자 리얀은 나서서 말렸다. 우리는 결국 다시 리얀과 같이 앉았던 협탁에 다시 앉았다. 아이리와 칸나는 앉자마자 동시에 한숨을 쉬었다. 난 한숨을 쉬는 대신 그 책을 펼쳤다.
그 책에는 관심이 있는지 아이리와 칸나가 얼굴을 들이밀었다. 방금 샤워를 마쳐서 좋은 냄새가 나는 건 둘째 치고, 내용은 경악할만한 내용들이었다.
칸나의 대련자로 내정된 사람은 물론이요, 내게 짧게 언급했던 대련자들의 개인적인 약점, 정치적인 입지 등이 나와 있었고, 어떤 식으로 전투하는 것까지 세밀하게 묘사되어 있었다.
그것보다 충격적인 건 다른 대신들의 온갖 약점들이었다. 그곳에는 어떤 장군이 홍등가를 다니는지, 어떤 성벽이 있는지, 어떤 병환이 있는지, 어떤 성격적인 결함이 있는지까지 전부 묘사되어 있었다.
이건 전부 리얀이 작성한 것이겠지. 그리고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책이기도 할 것이고.
"···진심이시군. 황녀 전하는."
아이리가 관자놀이를 짚었다. 갑자기 이런 식으로 이야기가 전개될 줄은 몰랐는데. 나도 물론 모든 캐릭터한테 괴리감을 느끼고 있었고, 리얀에게 특히 많은 괴리감을 느낀 건 맞다. 그렇지만 황제를 노리고 있었을 줄이야.
나는 마치 사람을 유혹하는 마도서를 읽는 것마냥 정신없이 책장을 넘기는 칸나와 아이리를 저지하고 책을 덮었다.
"일단, 우린 우리 할 것을 합시다."
"뭔데?"
"수련이요. 지금 당장 스트레칭 하고 주무세요. 그리고 새벽 4시에 나오세요. 그때가 마나가 제일 짙을 때니까, 수련을 하기 제일 좋은 시간대거든요."
나는 그녀들에게 통보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리얀에 대해 생각하며. 생각보다 많이 무서운 여자였다.
"···허억, 이제 다음 날이네요."
"···그흐으러게."
칸나와 아이리가 눈을 반쯤 감은 채로 대자로 뻗어있었다. 오늘은 마지막 날이라 더욱 강도 높은 훈련을 했다. 쉬지 않고 2:1 대련을 했으니, 정신이 나갈 만도 할 것이었다.
"이제 모든 훈련은 끝났네요."
책까지 참고하며 그들의 대련자 검술까지 맞춰서 강의했으니. 그보다도 그녀들의 기본기가 엄청나게 늘었다.
이제, 우리는 내일을 기다리기만 하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