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9화 무외 (2) >
검은 나무. 마리나의 신성력이라면 한 번에 태울 미약한 존재지만, 그 외의 방법으로는 잡기가 아주 힘든 걸로 알고 있다. 심지어 이렇게 하나의 마수 형태로 나타난 건 소설 속에서 보지 못했다.
난 직감했다. 이 검은 나무가 내가 이 세계에서 만난 것들 중에 가장 강하다고. 난 스킬을 전부 오픈했다. 몸에 과부하는 여전하다. 하지만 이 정도의 과부하는, 늘 레이드를 할 때 겪었던 일이다.
삶을 가늠하는 중요한 순간에 무리를 하지 않으면 대체 언제 무리를 한단 말인가. 내가 여기서 과부하라고 계속 생각했던 건, 원래 세상에서는 생각하지도 않았던 일이다. 이 세계가 게임처럼 보이고, 소설 속의 유희로 보이니까 그랬던 것일 뿐.
이제, 이 마음도 고쳐먹어야겠지. 이 삶을 제대로 된 삶으로 받아들여야겠다면.
"강하긴 하지만, 신성력은 없구나. 어찌 나를 이길 셈이냐?"
검은 나무가 물었다. 그렇긴 하지. 신성력은 검은 나무의 하드 카운터니까. 하지만 신성력만으로 해결할 수 있는 건 아니다. 그래야지 신성력 없는 가테스가 무위를 좀 뽐내지.
"불가능하다. 내게서 나온 몬스터들은 처리가 가능하겠지만 말이야."
"사실 나도 안 해봐서 잘 모르긴 하는데."
내가 검에 기운을 응집시켰다. 하얀 검에 마나가 흘러넘치고, 내 전신의 근육이 팽팽하게 조여진다. 언제라도 풀어지며 뛰쳐나갈 수 있는, 시위에 걸린 활처럼 진동하는 게 느껴진다.
"근데 불 몬스터도 불로 잡는 사람도 많더라. 원래라면 안 되는 건데."
"이상한 얘기를 하는 군. 마수에 속성이 어디 있는가?"
당연히 모르겠지. 이건 내 세상의 상식이니까. 헌터 세계에서는 게이트의 마수마다 속성이 있었고, 그 속성에 맞춰서 골고루 파티를 결성했다. 그런데 S급 헌터 정도 되면 상성 씹어 먹고 그냥 때려 부술 수 있었지. 난 무속성이라 딱히 상성이 없었고.
"너도 속성이 있다고 치면, 그 속성을 압도할만한 힘을 가지면 되겠지. 그건 내가 볼 땐 모든 세계에 통용되는 순리야."
"아, 넌 다른 세계에서 온 이방인이었지. 그렇지만 이 세계는 좀 다를 거다."
"내가 두 개의 세계를 살아보면서 느낀 건데, 다 비슷해. 사람 사는 게."
아이리의 호감도를 보면서 많이 느꼈지. 아이리는 공략해야 될 하나의 트로피나 히로인 후보가 아닌, 그저 아이리 라피테스라는 걸. 내가 아는 그냥 '사람'이라는 걸.
그렇다면 이 검은 나무의 핵이라는 마수도 크게 다르지 않을 거다. 그냥 '마수'라면 공략할 수 없을 리가 없다.
"여기서는 그런 개념이 없긴 하지만, 난 너희 같은 놈 전문 사냥꾼이야."
나는 곧바로 하얀 검에 마나를 불어넣고, 달려들었다. 검은 나무의 손에서는 온갖 뿌리가 쏟아져 나왔다. 뿌리가 파리지옥처럼 내 앞에서 펼쳐지고 나를 감싸려 했다.
···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내 마나의 대부분을 받아들인 검의 절삭력은 소리를 삼켜버릴 정도의 파괴력이었다. 곧, 투두둑거리는 소리가 들리고 검은 나무의 뿌리 갈래가 투두둑 떨어졌다.
"역시 범상치는 않군."
검은 나무의 목소리에서 아픔은 섞이지 않았다. 그저 몸 외부의 종기 같은 것으로 공격했다는 거겠지.
"궁금한 거 하나 물어봐도 되냐? 이렇게 대화를 오래 한 마수는 처음이라. 좀 친해졌잖아."
"또 뭔 헛소리를 하고 싶은 거냐?"
"왜 처음부터 강한 공격을 쓰지 않는 거지?"
나는 바로 그리고 그의 밑으로 파고들었다. 검은 나무의 눈코입이 정상적으로 어깨 위에 달려있었다면, 사각이었겠지만 아쉽게도 그의 얼굴은 배꼽에 달려있어서 난 그의 못생긴 얼굴과 마주하게 되었다.
"처음부터 최선을 다하지 않으면, 최선을 보여주기는 커녕 아무 것도 못할 수도 있어."
"훈수를 두는 구나."
검은 나무의 하얀 테두리 얼굴이 안쪽으로 움푹 파였다. 얼굴이 있던 곳에는 검은 구멍이 생겼고, 그 안에 보라색 마기가 소용돌이치며 빛을 만들어냈다.
빛이 점멸하는 순간, 내게 광선이 쏟아진 건 눈 깜빡할 사이의 일이었다. 하지만 나는 고작 눈 깜빡하는 속도보다는 빠르다. 난 바로 검은 나무의 뒤를 잡았다.
"흐흐. 재밌구나. 사람의 몸은 이렇게 재미있어."
검은 나무는 그렇게 말하고 자신의 팔을 등 부분으로 꺾었다. 사람은 무슨. 얘는 사람이 아니니까 관절이 없다. 그러니 이런 짓도 가능한 거지. 나도 이놈을 너무 사람처럼 대했다. 내가 생각이 짧았다.
검은 나무의 두 팔이 배배 꼬아진 다음 그 안에서 가시들이 기관총처럼 발사됐다. 난 검풍을 일으켜 내 앞의 공간들을 베었다.
투두두두두두두둑.
난 그것들을 어떻게든 전부 쳐내려 했지만, 차마 얼굴 부분을 피하지 못해 볼이 찢어지고 말았다. 상처에서 잔해 마기들이 부식되어 타는 소리와 냄새가 난다. 반사신경으로 피하기는 했지만 지근거리에서 쏟아지는 기관총을 막을 민첩성은 아무리 나라도 없다.
"괜히 도발했다고 생각하지 않는가?"
"원래 사람은 부딪치면서 배우는 종족이지."
"아주 뻔뻔하기 짝이 없구나."
나는 뜯겨진 볼을 아예 내 손에 마나를 일으켜 지져버렸다. 당장은 더 아플지언정, 응급처치가 우선이다.
부딪치면서 배우는 게 있다. 이놈, 위험하다. 굳이 내 기준으로 하자면, S급 마수 급이다. 이제 대충 파악했다.
원래, 이건 몸에 무리가 많이 갈 것 같아서 최대한 아껴두고 있었는데.
【고유스킬 : 환영그림자 Lv MAX 사용중】
【고유스킬 : 환영검술 Lv 7 사용중】
【스킬이 감응합니다. 】
최대한 이건 감응시키지 않으려고 했다. 지금까지 나는 움직임과 검술이 통일되지 않은 상태였다. 하지만 이제는 다르겠지.
【고유스킬 : 환영살인마 Lv ??? 개방】
"너는 왜 최선을 다하지 않았지?"
내 변화를 느낀 검은나무가 날 비웃었다.
"괜히 다치기나 하고 말이야."
"난 최선을 다한 거야."
이놈은 날 죽이는 게 목표였지만, 난 이 놈을 죽이는 게 목표가 아니다. 왜냐하면 이놈이 먼저 말해줬다. 자신은 죽어도 죽는 게 아니라고. 당장 불가능한 건 목표가 아니다.
그렇다면 난 나 때문에 많아질 검은 나무의 역량을 확인할 의무가 있었다. 그리고 그 목표는 방금 달성한 것 같다. 볼의 상처정도면 꽤 싸게 얻었다.
【고유스킬 : 환영살인마의 레벨이 산정되었습니다. 】
【고유스킬 : 환영살인마에 하위 스킬이 통합됩니다. 】
【고유스킬 : 환영전차 Lv 6이 통합됩니다. 】
【스킬 : 위압 Lv MAX이 통합됩니다. 】
【스킬 : 협상 Lv MAX이 통합됩니다. 】
【스킬 : 신속한 움직임 Lv MAX이 통합됩니다. 】
【스킬 : 정신집중 Lv 9이 통합됩니다】
···
【스킬 : 소검 마스터리 Lv MAX이 통합됩니다. 】
【스킬 : 사고 가속 Lv 8이 통합됩니다. 】
【스킬 : 고속이동 Lv 8이 통합됩니다. 】
···
【고유스킬 : 환영살인마 Lv 4 개방】
내가 가진 모든 스킬들이 통합됐는데 Lv이 4밖에 안 되네. 그래도 스킬들이 통합되면서 내 몸이 가벼워졌다. 이참에 모든 스킬들을 개방하니, 여는 스킬마다 환영살인마에 통합이 되었다.
【고유스킬 : 환영살인마 Lv 5 업그레이드】
【고유스킬 : 환영살인마 Lv 6 업그레이드】
Lv 6까지는 만들었네. 이 스킬에는 나라는 사람이 오롯이 담겨 있다. 그러니, 나는 이제 지금 내가 발휘할 수 있는 최대의 힘을 발휘하는 중이다.
그 말은, 곧 끝날 때가 됐다는 뜻이다.
"이제 됐다. 다음에 보자."
"뭐?"
그 순간에 검은 나무의 몸이 몇 백 갈래로 찢어졌다. 다시 검은 나무의 몸이 합쳐지려고 했지만, 난 그 사이에서 아주 좁쌀만큼 크기의 핵을 발견했다. 내 검은 그걸 놓치지 않고 찔렀고 바닥에 박아버렸다.
"킥킥. 그래, 다음에 보자."
갈라진 얼굴들은 연결된 신경을 가지고 있는 듯 움직였다. 굳이 조각을 합쳐서 보지 않아도 웃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너를 경계하마."
가테스는 검은 나무가 사라진 걸 느낄 수 있었다. 땅 밑에서 진하게 뿜어져 나오는 마기가 순식간에 사라진 것이다. 지금은 뿜어져 나오는 마기가 아닌, 남아있는 잔향이었다. 몬스터들이 눈에 띄게 약해졌다.
"정녕 검은 나무의 핵을 혼자 처치했다라···"
"작은 검은 나무일뿐입니다. 성녀님을 대동하지 않으신 것도 그 이유가 아닙니까."
"검은 나무는 산발적으로 나타나는 경우가 많기에, 황궁을 지키라고 남긴 거다."
가테스는 말을 덧붙였다.
"또한, 이 근방의 던전을 모두 합쳤다면 검은 나무의 힘 역시 던전의 마기를 받아 더 강해졌을 터. 심지어 뿌리가 전부 들어갔다. 검은 나무의 마인화까지 이겼다는 거겠지."
호치 대령은 던전의 마지막 남아있는 몬스터를 베고, 자신의 의문을 말했다.
"에퍼리 남작은 어느 정도까지 가있는 겁니까?"
"최소 소드마스터 3이겠지."
"···말이 됩니까?"
"나도 스물 하나 때 소드마스터 3을 땄으니 신기한 일은 아니지."
가테스가 무심하게 말했다. 당연히 호치는 납득할 수 없었다. 가테스라는 사람도 다시 볼 수 없을 괴물일 줄 알았는데, 그런 사람이 한 명 더 있다니.
"일단 이 던전을 빨리 클리어하는 게 목표다. 에퍼리 남작이야 금방 황궁에서 나갈 것 같진 않아."
"네. 알겠습니다."
가테스와 호치 대령이 기사단을 독촉했다. 마기의 핵인 검은 나무가 사라진 던전이다. 속도를 올려야 했다. 저기, 뒤에 있는 아이리 공녀의 눈에서 피가 끝없이 흐르고 있었으니까.
"던전의 마기가 옅어지고 있네."
던전이 클리어 되고 있다는 증거. 나 역시 이 던전의 회오리가 지형을 많이 변화시켜놔서 어디로 떨어질지는 모른다. 아이리의 상태를 생각하면 황도 근처에 떨어지는 게 베스트다.
나도 밑에서 위로 올라가면서 마수들을 잡고, 검은 나무가 빚어낸 던전의 보스 방에서 가테스 기사단과 마주쳤다.
"···다쳤군."
가테스가 내 볼을 봤다. 내 볼은 벌어진 걸 억지로 붙였기 때문에 흉해보일 것이다.
"고작 그거밖에 안 다쳤다니."
더 다치기라도 했어야 되는 모양. 난 그냥 그에게 간략한 인사를 하고 아이리에게 갔다. 아이리는 날 보자마자 놀랐다.
"너 얼굴이 왜 그래?"
"아가씨 얼굴보단 낫죠."
"그런가."
그녀는 쉽게 수긍했다. 어쨌든 자신의 눈이 다쳤는데도 남의 얼굴을 걱정해주다니. 나름 감동이네. 저 싸가지 없는 가테스와는 다르게.
"사실 네가 다치는 건 예상 못했는데."
"이 정도면 흉 안 지게 고칠 수 있어요. 대신 아가씨 눈이 걱정이네요."
"어떻게든 되겠지."
아니, 굳이 내가 황족이 아니라도 그게 거짓말이라는 건 알 수 있다. 그녀는 공녀라는 위치 때문에 의연한 척을 하는 것뿐이다. A급 헌터들도 눈을 다치면 멘탈 아웃이 오는데, 공작저에서만 자란 공녀가 어찌 버티는지 신기할 따름이다.
"대단하네요. 아가씨."
"뭐가?"
"저도 눈이 다쳤다면 그렇게 의연하게는 못 있을 걸요."
"사실 엄청 무서워. 흉이 질까봐, 내가 애꾸가 될까봐."
그건 이미 알고 있었지. 내가 대단하다는 건 다른 얘기였다.
"그 두려움을 감추는 건 용기입니다. 제가 대단하다는 건 그것 때문이었어요."
"그래?"
"두려움을 없애는 저만의 방법이 있어요. 저도 두려운 적이 많았거든요. 그 방법을 알려드릴까요?"
S급 헌터로서의 의무감과 주목, 그 중압감 때문에 공황장애 약도 먹고 정신과도 참 많이 다녔었는데.
"뭔데?"
"용기를 없애세요."
난 이런 조언은 웬만하면 안 한다. 사람마다 다 다르기 때문이다. 용기가 필요한 사람도 있다. 하지만, 내가 볼 때 아이리는 강한 사람이었다. 분명 버틸 수 있을 것이었다.
"···해볼게."
곧, 아이리가 눈을 감았다. 그녀는 눈을 내가 볼 때 눈을 계속 뜨고 있었다. 왜냐하면 눈을 감을 때의 검은 화면이 두려울 거였거든. 그녀의 눈은 그래서 충혈이 되어 있었다. 난 그게 안쓰러울 뿐이었다.
가테스의 보스 사냥은 빠르게도 끝났다. 적어도 2합안에는 끝난 것 같았다. 던전이 부서진다. 과연 이 던전은 어디서 출구를 열어줄 것인가.
던전의 벽들이 모두 부서지면서 천장으로 올라갔다. 모두의 몸이 살짝 부유했다. 난 위를 봤다. 황궁도서관의 던전에서 봤던 것처럼, 빛의 소용돌이가 퍼졌다. 난 아이리를 봤다. 아이리는 그 빛 앞에서도 눈을 감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