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8화 무외 (1) >
"자네는 좀 쉬어도 될 것 같은데."
앞으로 나온 내게 가테스가 말했다.
"민폐라는 말을 돌려서 하는 것은 아니시겠죠?"
"사실 그렇지. 네가 강한 건 어느 정도 알겠다. 아주 던전을 뒤집어놨더군. 근데 지금은 상황이 달라. 이렇게 큰 던전은 우리처럼 합을 맞춘 채로 차근차근 공략해 가야 하지."
"공녀님의 눈은요?"
"공녀의 눈보다, 이 많은 사람들의 생명이 중요하지. 그렇다고 내가 등한시하고 있는 건 아니네. 난 최선의 선택을 할 뿐."
"이해합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가테스가 갸웃했다.
"자네가 이렇게 쉽게 물러날 사람이 아닌데."
"선택의 범위는 능력에 따라 달라지니까요. 황자님은 이 군단을 이끌 의무가 있으니까, 어쩔 수 없죠."
"무슨 소리인가?"
"전 대충하면서 가겠습니다. 시간이 없어서. 뒷정리만 해주세요."
"뭐?"
난 자유인이니까, 이런 점에서는 자유롭거든. 힘도 어느 정도 되찾았겠다. 나는 이제 내가 알아서 판단하련다. 왜 이 큰 세계를 내 조그마한 눈으로 가늠하려 했는지 난 알 수 없다.
원래 세상 안에서 난 너무 조그만 존재이고, 난 그저 더듬으며 나아갈 뿐인 그런 미약한 존재일지 언데. 그저 원작의 흐름을 알고 있다고 내가 이 세계의 신이라도 된 듯 행동했다.
내가 바보같이 혼잣말을 많이 하고 다른 데 신경을 썼던 건, 내가 아닌 소설을 너무 믿었던 거다. 오히려 예전처럼 나를 믿으니까 편안하다. 더듬으며 갈지언정 내 발의 방향성과 튼튼한 몸을 믿으니 거칠 것도 없다.
"먼저 갑니다."
난 그 말만 남기고 지하를 부쉈다. 지하를 부수는 거야 황궁도서관 던전에서 질리도록 한 일이다.
지금까지 몽둥이로 썼던 검에 하얀 빛무리가 퍼진다. 마나가 미세하지만 빠르게 떨린다. 이제 이건 전기톱만큼의 절삭력을 가진 검이 됐다.
"원래 나는 1인 레이드가 맞는 사람이었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난 대물량전보다는 대인전에 적합한 헌터다. 보스사냥에 특화된 사람. 이제 내가 제대로 보인다. 소설에 떨어진 에퍼리란 그림자에 가려진 주환영이라는 사람을 또 다시 깨닫는 느낌이다.
"대충 큰 애들만 정리해주고 가야겠다."
나는 던전을 계속 내려가면서 위험하다 싶은 놈들만 제거했다. 마나로 둘러진 검에는 피 한 방울 묻지 않았고, 내 몸에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난 깔끔한 레이드를 추구하는 사람이어서.
"···생각보다 더 미친놈이었군."
가테스는 차근차근 내려가면서 기사단과 경악했다. 그는 던전에서 가장 강한 몬스터만 죽이고 내려가는 방식을 선택했다. 몬스터에겐 저항한 흔적조차 보이지 않았다. 한 수만에 빅 파파버드를 잡았다라.
빅 파파버드는 A급 마수. 민첩성에 관해선 거의 S급에 도달한다고 알려진 마수다.
"이봐, 기사단장."
"네. 황자 전하."
"빅 파파버드를 한 방에 잡으려면 어느 정도는 되어야 할 것 같나?"
"···잘 모르겠습니다."
기사단장 호치 대령 역시 소드마스터 1에 해당하는 강자. 그도 모르겠다라.
"에퍼리 남작의 뒤를 좀 캘 수 있겠나?"
가테스가 조용히 그에게 말했다. 이런 일을 시킬 수 있는 사람은 얼마 되지 않았다. 호치는 가테스가 믿는 몇 안 되는 사람 중 하나였다. 그는 바로 고개를 숙였다.
"최대한 해보겠습니다."
"···그래."
소드마스터 1인 사테 장군을 쉽게 잡을 때도, 놀랐었지만. 이 정도의 경지일 줄이야. 물론 소드마스터부터는 1과 2, 2와 3의 격차가 크기에 아예 다르지만.
"소드마스터 3은 된다는 말인가. 일단 허언증은 아니었군."
이런 괴물같은 사람은 어디서 나타난 것이란 말인가. 하늘에서 뚝 떨어지기라도 했단 말인가. 명철한 그의 두뇌로도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가테스는 한숨을 쉬며 다시 전진했다.
어쨌든 핵심은 그때 마더 트리를 처치했을 때와 다르지 않다. 검은 나무의 핵을 제거하면 된다. 이 정도는 소설에서 얻은 지혜다. 적당히 내려온 다음 초감각을 이용하니 핵이 어디서 나오는지는 금방 파악할 수 있었다.
"마기가 짙다 못해 거의 뿜어져 나오는 수준이네."
나는 소매로 얼굴을 가렸다. 구린 냄새마저 난다. 여기서 마기란 썩은 마나가 변이를 일으킨 것. 모든 썩은 것들은 냄새를 풍기기 마련이다.
목표가 정해지면, 목표가 최우선이다. 그게 내 레이드 방식이다. 어차피 검은 나무의 핵심을 부수면 몬스터들의 사기는 떨어질 거다.
가테스는 모든 이의 생명을 지키고, 난 아이리의 눈을 지킨다. 난 시간을 단축시킬 의무가 있었다.
안일하게 원작에서 아이리가 눈을 다치지 않았다는 묘사가 없었다고, 지체할 수는 없다. 그건 삶을 대하는 방식이 아니니까. 소설을 대하는 방식이지.
애초에, 내가 구하지 않았다면 그 무리는 몰살됐을 것이 분명했다. 이미 원작은 나로 인해서든 뭐든, 완전히 신뢰할 수 없다는 게 증명이 된 상태다.
"카아아아악!"
"퀘에에에엑!"
난 이 방에 있는 몬스터들을 모두 정리했다. 갑자기 나타난 내 모습에 그저 죽을 때의 비명이 전부였다.
이제부터는 멈춤 없이 간다. 가속도가 붙으면 더 좋고. 내 검이 내 두 손 위에서 휘둘러지며 검풍을 불어낸다. 검풍 때문에 사방의 벽에 흠집이 나고, 균열이 난 곳에서는 먼지나 돌덩이가 떨어지기도 한다.
검에도 가속력이 붙었고 검풍의 핵심인 내 몸에도 중압감이 쌓인다. 나는 바로 대각선으로 검을 휘두르는 걸 멈추지 않고 내려간다. 사각형의 벽이지만 이제 검풍은 내 몸을 완전히 감싸고 있어, 내 발길을 막을 수는 없다.
검풍이 벽을 수백갈래로 나누고 내가 발을 딛는 곳이 곧 길이 되고 계단이 된다.
콰콰콰콰콰쾅!
벽이 뚫리고 내 발에도 가속도가 붙는다.
【스킬 : 고속이동 Lv 8 사용 중】
【스킬 : 선풍 Lv MAX 사용 중】
【스킬이 감응합니다. 】
이건 또 뭔 소리야. 나는 스킬창을 끄려고 했지만 스킬창에 뜬 두 개의 문자열이 합쳐지며 무지개빛을 냈다.
【고유스킬 : 환영전차 Lv 6 개방】
고유스킬에 꼭 내 이름 붙는 이유는 뭘까. 구린 작명센스는 덤으로. 어쨌든 참으로 신기하다.
스킬은 여신이 내려준 은혜라고 했다. 스킬창이 내 이름을 알고 있다는 거니까. 역시 이 세계에서 여신은 전지전능하다. 그게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이 마음속까지 읽고 있는 건 아니겠지.
쿠구궁.
쿠궁.
내가 검은 나무에 가까워질 때 검은 나무도 방어를 준비하는 듯하다. 벽에서 검은 나무의 뿌리가 창처럼 찔러 들어온다. 하지만 내 검풍, 아니, 이제 환영전차라고 해야 할 내 스킬에 뿌리들은 갈기갈기 찢어져 펄떡거렸다.
벽이 부서지고, 벽 안에는 점점 강한 몬스터가 마기가 뭉쳐져서 태어난다. 하지만 검은 나무의 대처는 늦는다. 왜냐하면 마물이 되기 전에 슬라임 같이 뭉쳐지는 마기덩어리들을 내가 깨부수고 다니니까.
퍽, 퍽 하는 소리와 함께 점액질로 된 마기가 내 몸에 묻기도 한다. 검풍 사이로 들어와 내 몸에 갇힌 것이다. 찝찝하기 그지 없었다.
"이 방 다음이네?"
쾅!
난 마치 검은나무가 사람이듯 대했다. 검은나무는 생각을 할 수 있는 나무다. 생각할 수 있으면 사람과 다를 게 없지. 난 마수들을 대할 때도 항상 사람과 싸운다는 생각으로 임한다. 그래야 변칙성을 줄일 수 있으니. 내가 아는 한, 가장 변칙성이 많은 종족은 사람이니까.
"크흐흐흐흐흐흐."
내가 검은 나무의 방 들어갈 때, 웃음소리인가 울음소리인가 헷갈리는 소리가 들렸다. 검은 나무의 검은 공 모양이었다. 그 검은 공 모양 머리 위에는 사슴의 뿔 마냥 검은 나무의 털 달린 뿌리들이 치솟아있었고, 불쾌하게도 사람의 얼굴 모양이 있었다.
"자네는 이방인이로군."
검은 나무의 말은 통신 품질이 낮은 전화기에서 들리는 것처럼 지직거렸다. 나는 검은 나무가 말을 할 수 있다는 것도 처음 알았다. 왜냐하면 성녀인 마리나는 검은 나무의 뿌리를 정화하면 핵까지 바로 타버리니까.
"나를 죽여도 소용은 없다네. 검은 나무들은 모두 연결되어 있지. 살아도 산 게 아니지만, 죽어도 죽은 게 아니지. 일장일단이 있다고 해야겠어."
그건 알고 있었는데. 뭔가 소설의 설정을 풀어서 설명해주는 빌런이라. 익숙하지만 낯선 느낌이다.
"살아도 산 게 아닌 게 장점인가, 죽어도 죽은 게 아닌 게 장점인가?"
난 궁금한 걸 물었다. 검은 나무는 또 크흐흐, 하고 울듯이 웃었다. 아니, 웃듯이 우는 건지.
"그건 각자 다른 대답이니까 내게 들어도 의미는 없을 거고."
검은 나무의 눈, 코, 입에서 뿌리들이 한 번에 쫙 뻗어져 나와서 자신의 얼굴을 감싼다. 마치 미이라나 싸이코 연쇄살인마의 가면을 보는 기분이었다.
나는 잠시 멈춘 하얀 검의 마나를 다시 일으켰다.
"그래, 그건 의미 없어."
"그래. 본인에게 의미 있는 행동을 하도록."
빌런의 훈수라. 난 그걸 흘려들을 생각이 없었다. 삼인행 필유아사라고 했거늘. 어디서든지 나의 스승은 나타나는 법이다. 방금은 빌런 치고는 좋은 말이었어.
난 그 의미 있는 행동이라는 걸 알고 있었으니까.
"난 네 핵을 없앤다. 그게 내 목표야."
"이유는?"
"너는 내가 불러일으킨 것 같거든. 결자해지라고 해야 하나."
원작은 큰 전개만을 내게 알려주는 지침서 같은 것이다. 아이리 같은 주연이 다치거나 죽었다면 분명히 원작에서도 그것이 언급되었겠지. 그런데 아이리는 죽을 뻔했다. 내가 아니라면.
그렇다면 이 검은 나무도 원작에는 없었다는 얘기가 된다.
"그게 이유인가? 내가 너로 인해 생겨났다고? 하긴, 이방인이 생기면 나 역시 많아지기는 하지. 그건 오래된 규칙이었다."
"그렇다면 너 역시 내가 할 일을 알 것 같은데?"
"맞다."
머리 위로 뻗어진 검은나무의 뿌리들이 그에게로 흡수된다. 마치 모든 뿌리들을 회수하는 듯하다. 나는 가만히 기다려주었다. 이건 원작에는 없던 묘사라서. 내가 원작과의 괴리에 대한 지식이 필요하거든.
검은나무가 뿌리를 전부 회수하기는 꽤 시간이 걸렸다. 지금까지 던전에 뻗은, 몬스터들을 생산하는 뿌리들을 전부 회수하려니까 시간이 좀 걸리겠지.
"자신이 있나 보군."
검은나무가 이번엔 확실히 웃었다. 내가 기다려준 걸 보고 말하는 것 같았다. 그는 이제 동그란 원만 남았다. 검은 원에 하얀색 테두리의 눈, 코, 입이 달려 있는 이상한 형상.
내가 아무 말도 안 하자 그의 형태 모든 부분에서 종기 같은 게 크게 부풀고 터졌다. 그건 지독한 냄새를 풍기면서 점액들을 땅바닥에 쏟아냈다. 턱에서 터진 커다란 종기 부분은 다리가 됐고, 광대쪽에서 터진 종기는 팔이 됐고, 정수리 쪽에서 터진 종기는 어깨가 됐고, 등 쪽에서 터진 종기는 피막을 가진 날개가 됐다.
"크흐흐. 이 모습을 한 것도 얼마만인지."
모든 종기를 터뜨린 검은 나무의 모습은 어깨 위에 목이 없는, 완전한 인간의 형상이었다. 대신 그의 하얀 테두리의 눈, 코, 입은 배꼽 즈음에 달렸다.
"진짜 더럽게 생겼네."
"나 정도면 잘생긴 개체다. 크흐흐."
"미의 기준이 너무 심각하게 다른데?"
우리는 서로 웃었다. 내가 볼 때는 잘생긴 개체 아닌데, 그냥 농담한 것 같다. 농담할 여유도 있고, 좋네.
"이봐, 대체 무슨 자신감으로 나를 기다린 거지?"
검은 나무가 물었다. 내가 대답했다. 만약 내가 아이리가 다치지 않았다면 그냥 검은 나무를 족치고 말았겠지만, 지금은 다르거든.
내가 이 사람들을 다치게 할 수 있는 만큼, 나한테는 더 많은 정보가 필요하다. 여전히 난 해피엔딩을 바라고 있으니까.
"여기서 내가 죽을 것 같지는 않거든."
"호, 대단한 자신감이군. 자신감은 도가 지나치면 화가 되는 법인데."
"그건 나도 알아. 그래서 난 자신감을 안 키워."
"뭔 모순적인 말이지?"
모순적인 말은 아니다. 이 말이 붙으면.
"대신 두려움이 없을 뿐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