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6화 짐꾼 쟁탈전 - 해답 (1) >
내 말과 동시에 급격하게 냉각되는 황실의 분위기와 가테스의 눈. 가테스의 눈동자는 으레 있어야할 자연스러운 떨림이 없어서 마치 눈을 뜬 시체를 마주하는 것 같았다.
"이유는?"
이유는 지금 소설 시작 직전이기 때문에. 이제 슬슬 주연급 사람들의 행적은 윤곽이 잡히기 시작한다.
소설의 3화 정도에 등장하는 이 가테스라는 녀석은, 다시 국경을 돌아야 하는 상황이다. 왜냐하면 검은 나무가 여러 군데 솟고 있기 때문에, 국경이 약해졌기 때문이다.
심지어 대제의 말대로라면 검은 나무는 원작보다 더 생길 것이니, 내가 가테스를 따라다니면서 개고생을 할 필요는 전혀 없었다. 그렇다고 그렇게 말할 수는 없다.
"제 상황 때문입니다."
"무슨 상황?"
"전 지금 제2황자 근위대에서도 정규군이 아닙니다."
"···이 설명은 가토스한테서 듣는 게 빠르겠군."
가테스가 가토스를 보았다. 자연스럽게 가토스가 내 상황을 설명했다.
제안과 나의 역제안. 역제안의 내용인 공작저의 1주일과 황도의 1주일. 역시 가토스도 황자라서 똑똑했다. 그는 근 2주일 전에 한 우리의 대화 지문까지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 1주일.
- 1주일?
- 1주일 동안 번갈아서 있어보겠습니다. 제가 갈 곳이 어디인지 그 다음에 판단하도록 하죠.
- 허···
그가 2주 전의 전말을 전부 말하자 가테스는 한숨을 쉬며 가토스를 바라보았다.
"공작저와 황도를 번갈아 1주일씩 있으면서 판단하겠다라?"
가테스가 턱을 쓰다듬었다.
"황도의 명예도 명예지만, 넌 저 에퍼리라는 자를 아주 무시하고 있었구나."
"무슨 말씀이십니까? 형님."
"약속 자체가 무의미한 약속이지 않느냐.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말뿐인 약속이다."
가테스는 그리고 날 노려보았다.
"네가 말한 대로라면, 에퍼리라는 자가 이 두 진영 중에 하나를 선택한다는 얘기가 어디 있지? 그저 판단만 하겠다는 허점 투성이의 약속이다. 판단은 양자택일이 아니다. 삼자택일이지. 둘 다 선택하지 않을 판단 역시 존재하는 것이다."
이건 나도 놀랐다. 가테스는 역시 이 세계의 먼치킨답게 내 말뿐인 약속의 허점을 즉각 눈치 챈 것이다.
가토스가 그 말을 듣고 나를 배신감을 느끼듯이 바라봤다. 미안하지만 어쩔 수 없다. 영리한 토끼는 굴을 세 개 파놓는다고 하지 않는가. 나도 그래서 딱 세 개만 파놓은 거다.
지금도 그렇지만, 난 그때 이 세계에 떨어진 지 얼마 안 되어서 혼란스러웠다. 사실상 임기응변으로 역제안을 한 거지, 이 둘 중 하나를 무조건 선택해야 된다는 제약을 걸기는 싫었다.
"죄송합니다. 가토스 황자님."
"···괜찮다. 자네가 잘못한 건 없으니."
가토스는 그러면서도 살짝 한숨을 뱉었다.
"그래서, 떠날 건가?"
가테스는 내게 물었다. 어떤 미사여구도 없는 담백한 질문, 핵심을 찌르는 질문이기도 했다. 난 고개를 저었다. 가테스의 눈이 찌푸려졌다.
"아직은 아닙니다."
내가 말했다.
"해답을 찾기 전까지는."
"···해답?"
"전 찾아야 할 게 있습니다."
"그게 뭐지?"
거의 다 찾긴 했다. 내가 2주일 간 찾은 것. 물론 예프린과 칸나와의 친분도 우선 챙겨놨지만, 다른 것도 중요했다. 일단 이 세계가 원작과 얼마나 다른지에 대하여, 이 세계가 어느 시간선에 있는가에 대하여가 중요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가테스의 근본적인 질문, 그러면 나는 어디에 서 있을 것인가.
"약속대로, 이틀 안에 찾아서 말씀드리겠습니다."
난 가테스가 아닌 가토스를 향해 말했다. 내가 예를 갖출 건 지금 가토스였다. 가토스는 살짝 진이 빠진 듯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불편한 분위기 속에서 황제가 자리를 파할 것을 선언했다. 우리는 아무 말 없이 서로가 있을 곳으로 흩어졌다. 나는 잠깐 넓은 황궁에서 방황했지만, 이내 곧 길을 찾아 똑바른 걸음을 유지했다.
가토스가 그 이후로 내게 페널티를 준 건 없었다. 냉정하게 말하자면, 그의 잘못이기는 하지만 나 역시 도의적인 책임이 있었다. 그렇지만 그는 그걸 묻지 않았다. 황자로서의 체면이라기보다, 원래 천성이 그런 사람이겠지.
오히려 그래서 2황자 근위대실에 있을 때는 편했다. 축제 때문에 주변의 몬스터가 씨가 말라 작전 나갈 일도 없었고, 1군단이 국경 경비에 필요한 최소한의 인원만 남겨놓고 복귀했으니 작은 작전은 그들에게 맡겨졌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거였다.
"이봐, 자네가 가티스 황자님을 꼬셔서 대제의 명예를 더럽힌 옌시 사람인가?"
이런 시비들. 내가 보통 도서관으로 공부를 하러 갈 때, 마주치는 초면인 사람들이 나를 모욕했다. 특히 오츠카 남작은 나를 도서관까지 따라다니기도 했다.
"명예를 안다면 그만 근위병을 그만 두는 건 어떤가? 옌시인이 트라프비체 근위대에 있는 것도 웃기지 않은가."
혹은.
"자네 나라로 돌아가게. 혼란스럽다지만, 자신의 나라를 버리는 명예로운 자가 어디 있지?"
이런 말들. 난 그런 것들을 한 귀로 듣고 흘리지 않았다. 그런 말들 하나하나가 내게는 내 방향을 정할 단서들이었으니까.
지금 도서관 내 자리 앞에는 오츠카 남작이 계속 나를 조롱하고 있었다.
"나를 무시하는 건가? 천한 옌시 평민이, 트라프비체 제국의 남작을?"
"무시하지는 않았습니다. 듣고 있었습니다."
"그래? 그러면 다행이고."
이건 뭐 학창시절 왕따 가해자나 할 유치한 행동이다. 난 공부를 하다가 그를 바라보았다.
"오츠카 남작령은 어디에 있는 겁니까?"
"뭐? 그런 게 왜 궁금하지?"
"그냥 궁금해서 그렇습니다."
"동쪽 지방, 첸하우스에 있지. 내 명에 의하여 너는 그쪽에 출입도 못하게 할 거다."
유치하기는. 나는 속으로 웃고 다시 공부에 집중했다. 오츠카 남작이 지독하게 날 괴롭혔지만, 어차피 그가 날 실제적으로 못 건드릴 걸 알았기에 난 그냥 가만히 도서관을 돌아다녔다.
"리, 아니, 사서님, 제국 전도는 어디에 있죠?"
"5층이요."
사서로 가장한 리얀이 친절하게 안내를 했다. 내가 등을 돌리고 5층으로 올라가려하자, 리얀이 희미하게 말했다.
"고생이 많네요."
"별 거 아닙니다."
"도서관이 좀 시끄러운 게 거슬리네요."
내가 뒤를 돌아보며 웃었다. 리얀은 입을 가리면서 호호, 웃으며 오츠카 남작을 바라보았다. 오츠카 남작은 뭐가 문제냐는 듯 리얀을 계속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지 나름에는 압박을 주려고 하는 것 같은데, 리얀의 정체를 알고 있는 나는 같잖지도 않다.
황녀인데도 남작 나부랭이한테 저런 시선을 받고 참다니, 리얀도 참 대단한 사람이야.
난 제국 전도를 펼쳐보았다. 대놓고 오츠카 남작 앞에서 동쪽 지방을 살펴보았다.
"뭐, 남작령에 관심이라도 있나?"
"꽤 요충지군요."
"동쪽 물류계의 허브지."
어쩐지 남작 치고는 치렁치렁 걸치고 있는 게 비싸보이더라. 난 전도를 닫고 다시 제 자리에 갖다놓았다.
"오츠카 남작님, 할 일이 없으십니까?"
"많지. 안 그래도 떠나려고 했다. 천박한 옌시놈."
떠나는 때까지 짜증나게 하는 오츠카 남작을 바라보며, 나는 싱긋 웃어주었다. 문제를 구성하는 첫 번째 항을 풀어냈다.
오츠카 남작, 소설에 나오지도 않는 엑스트라인 그는 라피테스 공작의 라인일 수밖에 없는 사람이었다. 이 제국의 상계는 라피테스 공작 손 안에 있으니.
"대충 원한 건 얻어낸 것 같은데? 어때요?"
어느새 내 뒤로 온 리얀이 내게 물었다. 도서관에는 아무도 없었다. 난 바로 예를 갖췄다.
"한 행을 해석했을 뿐인데, 시를 어찌 다 알았다고 하겠습니까?"
"그렇긴 하죠. 대략 몇 행이 남은 것 같아요?"
"솔직히 모르겠습니다."
난 그러면서 스킬창을 확인했다. 이제 내 스킬창은 거의 모든 부분이 열려있었다. 이제 나는 스킬과 고유스킬이라는 단어를 알기 때문에 어느 정도 열렸는지 파악할 수 있었다.
고유스킬이 안 열린 건 몇 가지, 스킬은 거의 열려있다. 그렇지만 이건 진짜 뭔지 모르겠다.
【??? : ???? ???? 】
이건 고유 스킬도 아니라는 건데. 대체 언제쯤 알는지. 나는 고개를 저었다. 리얀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가티스는 또 다시 멋진 황제의 의자에 앉아있었다. 주변에 선 대신들은 과자들이 아니었고, 평범한 인간들이었다. 그의 머리에 올려진 왕관의 무게가 무거웠지만, 그보다도 누구보다 높은 곳에 앉아있다는 느낌이 만족스러웠다.
황제가 되면 하고 싶은 말이 있었다. 그는 최대한 목소리를 깔며, 아버지를 흉내내며 말했다.
"여기서, 나를 위해 목숨을 바칠 자 누구인가?"
그때, 어떤 시종장처럼 보이는 자가 가티스에게 소근거렸다.
"누군가가 오고 있습니다."
가티스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자신도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어디선가 바람이 불어왔다. 차가워서 몸을 움츠렸다.
곧 대전(大殿)의 문이 열렸다. 그곳에는 화려한 빛이 감싸진 사람이 있었다. 빛에 가려져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그는 당당히 걸어서 자신 앞에 온 다음, 절도있게 무릎을 꿇었다.
"가티스 황자님."
무슨 소리지. 자신은 지금 황제가 아닌가.
"일어나시지요.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일어나라고? 가티스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아닌가, 황제가 누군가의 말을 듣는 게 말이나 되는 소리인가. 하지만 어쩐지 그 말에는 힘이 있어서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잘 하셨습니다."
빛에 감싸인 그가 속삭였다.
"이제는 눈을 뜨시면 됩니다."
가티스는 눈을 감았다가 떴다. 그때, 자신의 스킬창에 무언가가 떴다.
【고유스킬 : 제왕안 Lv 1 개방】
【고유스킬 : 제왕안 Lv 1 사용 중】
옌시라는 사람의 배척은 날로 심해져갔다. 비단 악연이 있는 오츠카 남작의 괴롭힘이 심해진 건 아니다. 그저 2황자 근위대 이외의 거의 모든 사람들이 날 보며 혀를 찼다.
그건 아마 내가 대제 제단 의식에서 최고의 영광을 가져간 것에 대한 질투일 것이다. 일개 근위병이 어린 황자와 페어를 맺어 최고의 영예를 가져간다? 그것도 외지인이?
트라프비체 사람들은 그걸 용납하지 못했다. 내게 닿지는 않았지만, 나만 보면 침을 뱉는 사람들도 있었다.
"너, 최대한 바깥에 돌아다니지 마라."
칸나는 내게 조용히 근위대장 집무실로 불러 이렇게도 말했다.
"제가 잘못한 게 없는데 어찌 제가 피해야겠습니까."
"그래도 사람은 숙여야 될 때가 있는 법이다."
"걱정 감사합니다. 대장님."
난 그리고 경례를 한 다음 근위대실로 돌아가지 않고 복도로 향했다. 저 멀리서 또 다시 나를 잡아먹으려고 드는 하이에나 무리들이 웅성이었다.
하이에나 무리 안에는 오츠카 남작이 있었다. 나는 도서관으로 가지 않고 방향을 바꿔 그들이 있는 곳으로 갔다. 그들의 시선이 내게로 집중됐다.
"잠깐만 지나가겠습니다."
촘촘히도 서있는 그들의 사이를 난 지나갔다. 그들과 그렇게 가까이 부대낀 건 처음이었다.
그들 사이에서는 또 유치한 말 공작이 시작되었다.
"옌시놈. 냄새나게도 생겼군."
"저리 짤막해서 어디 쓰겠어."
"발로 한 번만 차면 다리가 부러질 것만 같군."
같잖지도 않다. 내가 그들을 확 노려보았다. 그들의 팔 옆에는 부대마크가 달려있었다. 로마자 숫자로 IV라고 적혀 있다. 4군단이라는 뜻이겠지.
"여기는 몇 사단입니까?"
"알아서 뭐하게? 넌 어차피 여기로 전입 못 온다. 만약 오면 내가 흠씬 패줄 거거든."
"아, 네. 그래서 여기가 몇 사단입니까?"
"17사단인데? 알아서 뭐하게?"
알아서 뭐하긴. 이미 알고 있었는데 확인 한 번 더 해본 거다.
"사테 사단장님께 안부나 전해주십시오."
"근위병 나부랭이가 사단장한테 안부를 전해달라고? 아주 미쳤군."
그래, 그래. 알았어. 나는 그들을 무시하고 그들을 빠져나와 돌아가서 도서관으로 갔다. 빠져나가는 동안 유치한 놈들은 발을 걸거나 뒤통수를 때리거나 하려고 했지만 다 피했다. 적당히 유치해라.
내가 더 유치해지기 전에.
"공작님, 쪽지가 왔습니다. 오츠카 남작에게서입니다."
"음."
라피테스 공작은 미소를 지으며 봉인을 뜯었다. 준비가 됐다는 말이 간단히 적혀 있었다.
오츠카 남작은 믿을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도 상계의 사람. 라피테스 공작은 트라프비체 제국의 상계의 신이었고, 물류의 공급자이자 중간 유통자였다. 동쪽 물류의 허브인 오츠카 남작은 당연히 자신의 라인으로 꽉 붙들고 있었다.
자신의 라인들이 기대대로 움직여 준 모양이었다. 가티스 3황자와 에퍼리가 대제 제단 의식의 최고 영광을 가져갔다는 말을 듣고는 얼마나 웃었던지.
가테스가 아니라 가티스라고? 몇 번이고 집사에게 물어도 집사는 가티스라고 답했다.
"황제님이 깜짝 놀라셨겠군."
라피테스 공작은 작은 창문 사이로 보이는 흰색 첨탑을 보았다. 황궁이었다. 이곳은 라피테스 공작가가 비밀리에 사들인 안가(安家)였다.
"슬슬 움직이자고. 밤이니까 역사가 만들어지기 좋은 시간이네."
누가 봐도 공작이 살 것 같지 않은 허름한 집에서, 정예 근위 기사 몇 명과 라피테스 공작이 말을 타고 나왔다.
"오츠카 남작, 어디 있지?"
"네, 여기 있습니다."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어두운 숲에서 걸어 나온 그는 오츠카 남작이 맞았다.
오츠카 남작이 말했다.
"어쩐 일로 부르셨습니까?"
"뭐?"
라피테스 공작이 황당하게 되물었다. 그와 동시에, 숲에서 어떤 거한이 나타났다. 역시 라피테스 공작의 라인인 사테 장군이었다.
"공작님, 어쩐 일로 부르셨습니까?"
라피테스 공작은 아무 말 없이 의문에 가득 찬 사테 장군의 얼굴을 보았다. 갑자기 온 몸에 소름이 돋았다. 어둠 속에서 누군가가 자신을 지켜보고 있는 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이건, 함정이다. 각자에게 발신자를 속이고 보낸 쪽지. 이런 유치한 정치 공작에 걸리다니. 자신한테 이런 수작질을 할 거라곤 생각도 못 했던 게 방심이었다. 그것도 황도에서 말이다.
"근위 기사, 방진을 펼쳐라."
소드 마스터 1급과 소드 스페셜리스트들이 포진된 근위기사가 아무 말 없이 공작의 모든 방위를 점했다.
"공작님? 어쩐 일로 부르셨습니까?"
"공작님, 옌시 놈에 대해 할 말이 있으시다고."
오츠카 남작과 사테 장군은 사태 파악을 하지 못하고 자신의 할 말들을 했다. 라피테스 공작은 얼굴을 험악하게 일그러뜨렸다. 아직도 이렇게 상황 파악이 안 되는 자들이 자신의 라인이라니 답답하기 짝이 없었다.
그 표정에, 사테 장군과 오츠카 남작은 그제야 공작의 심기를 눈치 채고 입을 꾹 다물었다.
곧, 바람 소리와 함께 나뭇잎이 부대끼는 소리가 났다. 어둠 속에서 낙엽들을 부서뜨리며 한 사람이 걸어왔다.
그 사람은, 라피테스 공작이 어쩐지 직감한 사람이었다.
"···에퍼리."
당장 저번 주만 해도 공작령 소속 호위무사였던 그. 에퍼리 션이 고개를 깔고 눈을 치켜들며 자신을 노려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