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5화 가테스 트라프비체 (3) >
"자네가 말하던 페어가 가티스였다니. 이건 좀 놀랍구나."
가테스가 날카로운 턱선을 슬쩍 쓰다듬었다. 저 손짓, 알고 있다. 살짝 당황했다는 느낌. 마리나는 그걸 보고 많이 놀렸었지. 물론 나는 불가능한 놀림이다.
비단 놀란 건 가테스뿐만이 아니다. 황제, 칸나, 칼 카라모프 대령, 사테 장군, 오츠카 남작 등 모두 똑같은 눈을 하고 있다. 의외로 침착한 건 리얀 황녀다. 그런 설정이 있었지. 리얀은 언제나 상냥하고 웃는 상이라고.
"어쨌든, 제물의 질이 중요한 거 아닐까요?"
리얀이 어수선한 분위기를 정리했다. 그녀가 첫 번째로 공적인 발언을 하는 순간이었다. 그녀 역시 조용히 있었지만 황족은 황족. 남을 다스리는 카리스마는 DNA로 가지고 있다.
"그, 그래. 일단 뭘 잡아왔는지 보자꾸나. 가티스?"
당황해서 체면 떨어지게 혀를 씹은 황제가 가티스를 바라보았다. 가티스는 당당하게 가죽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저건?"
"···뭐, 뭐야?"
병사들의 웅성거림이 들린다. 단상 위의 황족들도 웅성거린다. 왜냐하면, 그의 손에 든 건 영혼이 빠져나간 토미의 보자기였으니까.
"뭐야, 장난···하는 건 아니시겠지."
"야, 가티스 황자님은 어린 애야. 저럴 수도 있지."
"근데 그럼 저 근위병은 왜 저렇게 나댄 거야?"
마치 자신의 놀란 가슴을 이자까지 붙여 증오로 갚으려는 사람들의 눈빛. 뜨거웠던 대제전의 분위기가 의문의 의문을 더해가며 혼란스러워졌다.
그때 유일하게 표정이 침중해진 건 다름 아닌 가테스였다.
"···가티스. 그건 여기서 꺼낼 물건이 아닌 것 같다."
가테스가 한 번 눈을 감았다가 떴다. 그의 흑안이 황금색 눈으로 바뀐다. 이제 저 스킬을 대략 알 수 있다. 거짓을 꿰뚫어보는 눈.
"가티스, 대답해라. 너, 지하 던전에 갔다 왔느냐?"
단상 위에서만 나지막하게 울리는 말에 단상 아래 사람들은 말을 듣지 못하고 웅성거림만 키울 뿐이었다. 가티스의 입이 필사적으로 닫히려고 하지만, 이내 곧 열리려고 했다. 그 오물거림이 왠지, 띠꺼워서 내가 가테스의 시선을 가로막고 섰다.
"···뭐하는 짓이지."
가테스가 차갑게 말했다. 그와 동시에 가티스의 입이 크게 벌려지면서 깊은 한숨이 토해졌다. 고백하기 1초 전이었네.
내가 가테스에게 무릎을 꿇고 예를 표했다.
"황자 전하, 저희가 어떻게 무엇을 가져왔든, 대제님이 평가하실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말이 맞다. 가테스."
황제가 우리 사이를 중재하고 나섰다. 단상 아래는 무언가 심상찮은 분위기를 눈치채고 오히려 소란을 잠재우고 있었다.
"대제님이 평가하실 일이다. 저게 무언지는 몰라도, 너는 아는 모양이구나. 대제전에 올리면 알겠지."
"올리면 안 됩니다."
"이유를 알려줄 수 있겠느냐?"
황제가 묻자, 가테스가 고개를 떨궜다. 도대체 무슨 일인지 나는 감이 잘 안 온다. 어차피 대제가 가져가는 거면 토미를 바치는 게 얼마나 의미 있는 일인가. 가테스는 분명 이것이 토미의 잔해라는 걸 알고 있을 터.
"···따로 말씀하시지요. 지금 얘기할 자리는 아닙니다."
가테스는 그리고 가티스를 보았다. 가티스가 내 뒤로 숨어서 내 옷깃을 잡았다.
"가티스. 난 너를 책하려는 게 아니다. 단지, 내가 그것이 무엇인지 알기 때문이다. 너도 알고 있다면 이야기는 편하다."
가테스가 뜻밖에도 상냥하게 말했다. 가티스를 살짝 보니 막 울기라도 할 작정이다. 괜히 나 때문에 이런 고초를 겪는 것 같아서 마음이 쓰였다. 내가 막는 것도 그 이유가 가장 컸다.
내가 가티스의 앞을 지키고 있자, 가테스는 한숨을 쉬었다.
"아버님. 이번 제단 의식의 우승자는 가티스와 근위병 에퍼리입니다. 그렇게 발표하시죠. 저것에 관한 건 나중에 설명 드리겠습니다."
황제가 그 말에 살짝 당황했다. 하지만 곧 얼굴이 굳어졌다. 그도 주인공은 아니지만 황제. 남들을 휘어잡을 정도의 카리스마가 있다.
황제는 곧 단상으로 나아갔다. 단상으로 나아가자마자 조금이나마 웅성이던 단상 아래는 순식간에 조용해지고 오와 열이 갖춰졌다.
"용사들. 오늘 대제님께서 아주 흡족해하실 성과를 많이 보았다. 대제님께서도 만족스러우실 축제였을 거고, 나 역시 만족스럽도다."
그 말에 단상 위에 일은 아무 것도 못 봤다는 듯 들리는, 만세 소리.
"모두들 당황스러운 말을 해야겠다. 이번 제단 의식의 최고 영광은, 제3황자 가티스와 제2황자 근위대 근위병 에퍼리 페어에게 돌아가게 되었다. 저 물건은 대제님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는 물건으로, 황실이 찾던 아주 귀한 물건이었다. 어찌 찾아왔는지는 영문을 알 수 없으나, 그것은 우리가 판단할 바가 아니다."
황제의 말에 모두가 침묵했다. 분명 웅성거림이 일어날 법도 한 말이었지만 모두가 조용했다.
"그리하여 우리는 저 물건을 태우지 않고 보존도 할 것이다. 이번 의식은 이렇게 마치도록 하겠다."
"만세, 만세, 만만세!"
그 말에 앵무새처럼 울리는 소리. 다른 병사들은 가티스를 향해 엄청나다는 눈빛을 보내고 있었고, 날 향한 시선들은 가지각색이었다.
시기, 질투하는 시선들이 대부분이었고, 믿을 수 없다는 시선이었다. 아니, 페어인데 누구는 신뢰하고, 누구는 신뢰하지 않고. 물론 칸나만큼은 날 보며 대단하다는 눈빛을 했지만. 그러면 됐지.
그렇게 제단 의식은 성대하게 마쳐졌다. 하지만 우리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가테스가 단상 위에 있는 사람들을 대제전 안쪽 황실로 이끌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황족이 아닌 건, 나 하나뿐. 호랑이 굴에만 들어가도 정신만 잘 차리면 산다. 난 그 생각을 가지고 악어의 아가리처럼 벌리고 있는 황실의 문을 뒤따라갔다.
황실로 들어온 건 지금이 두 번째였다. 첫 번째는 황제의 전(殿), 지금 두 번째는 황제의 개인적인 공간, 황제의 집무실이다.
단언컨대, 근위병 신분으로 여길 들어온 사람은 내가 최초일 거다. 황제의 집무실은 생각보다 화려하지 않았다.
역대 황제들의 초상화가 벽면에 걸려있고, 고풍스러운 나무나 탁자가 대기업 회장실을 연상케 했다.
"다들 앉아서 얘기해볼까. 먼저, 가테스가 운을 띄워야 할 것 같군."
황제는 나에게도 자리를 권했다. 우리가 앉은 곳은 역시 대기업 대회의실에 있는 것 같은 직사각형의 긴 천연무늬목 오크 브라운색 나무 책상이었다. 난 가티스 옆에 맨 끝자리에 앉았다. 살다살다 황제 집무실에도 앉아보네.
"일단 가티스. 토미, 아니, 토미였던 걸 꺼내라."
역시, 가테스는 이게 토미인 걸 알고 있었군. 가티스는 이제 울음기를 그치고 다시 내가 아는 당당한 가티스로 돌아와 있었다. 그래, 어린이는 빠르게 성장하는 거지.
황제의 집무실 테이블에 토미가 올라온다. 모르는 사람이보면 영락없는 그냥 해진 보자기다.
"···이게 토미군요."
먼저 입을 연 건 뜻밖에도 리얀 황녀였다.
"누나, 토미 알아?"
"책에서만 봤지. 대제실록 비사에 적혀있는 부분이야. 고어로 되어 있어서 잘 모를 거야."
역시 황녀. 똑똑하고 침착해. 리얀의 표정은 그저 웃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손은 정반대로 바로 옆자리에 앉은 가티스의 볼을 늘렸다.
"언제 도서관에 침입한 거니? 응?"
"아아아아아악! 아파! 누나!"
리얀도 황족이라 도서관 던전의 존재는 알았던 모양이었다. 그녀는 웃으면서 날 바라보았다.
"에퍼리? 어떻게 들어간 거죠?"
여기서 말하긴 좀 그런데. 근데 가티스는 볼이 너무 아팠던지 냉큼 주머니에 있는 철사를 끄집어냈다. 리얀은 그제야 가티스의 볼에 잡은 손을 떼고 철사를 집어 바라보았다.
"···고작 이런 걸로 내 공간을 헤집어놨다라."
"누나, 진짜 미안해!"
"아니, 넌 좀 혼나야겠어."
리얀이 냉정하게 말했다. 무서운 건 여전히 웃고 있는 모습이라는 거. 그리고 그 웃는 모습이 나를 바라볼 때, 난 이 세상에 와서 처음으로 섬뜩함을 느꼈다.
"에퍼리. 당신은 내가 사정까지 봐줬던 걸로 기억하는데, 이런 식으로 뒤통수를 칠 줄은 몰랐어요."
"네? 무슨 사정 말씀이십니까?"
"근위병 되기 전에, 도서관 이용하게 해줬잖아요."
리얀이 싱긋 웃으며 말했다. 내가 여전히 어리둥절하자 그녀는 어딘가에 손을 집어넣었다. 손이 쑥 들어갔다. 아, 판타지 세계에 흔히 나오는 마나 주머니라는 거겠지.
그곳에서 나온 건 핑크색 가발과 뺑뺑이 안경이었다.
"···사서님?"
"그래요. 이제 알아보겠어요?"
리얀이 그걸 장착하고 난 다음에야 난 나에게 흔쾌히 도서관을 허락해줬던 사서를 기억해냈다. 너무 인상이 흐릿해서 기억도 안 났었는데.
그녀는 다시 그걸 벗고 마나 주머니 속에 던져 넣었다. 하긴, 이렇게 빡센 황실의 규율에 널널한 사람일 때부터 알아봤어야 하는데.
"리얀,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다. 던전 마지막 층에 있는 토미는, 내가 볼 때까지만 해도 살아있었다."
"···오라버니도 갔다오셨군요."
리얀이 여전히 웃으면서 가테스를 바라보았다. 가테스는 그 눈빛을 받고도 당당했다.
"그래. 기연이 있을 것 같아서 갔다 왔지. 역시 있더군. 네가 탐내던 목걸이도 거기서 가져왔다."
"당당하기 그지없으시군요. 도서관은 엄연히 제 공간이랍니다?"
"도서관 밑 던전은 황족의 공간이다."
아, 그게 뭐가 중요하냐고. 형제끼리 싸우는 건 일상다반사라지만 너희는 로맨스판타지의 사람들이야. 제발 현실성을 보여주지 마.
"그만! 그래서 가테스, 하고 싶은 말이 뭐냐?"
"토미가 죽었다는 건, 천 년을 이어졌던 황족의 비밀 던전이 클리어 됐다는 의미입니다. 맞나? 에퍼리?"
가테스는 나를 쳐다보았다. 갑자기 나한테 묻냐.
"가티스가 토미를 처리하지는 않았을 것 아닌가."
"처리한 게 아닙니다. 스스로 생명을 다한 것뿐이죠."
"대제님의 혼을 토미가 머금고 있는데, 그게 어찌 가능하단 말인가."
우리의 대화에 주변 사람들이 모두가 놀란다. 심지어 가티스도. 가티스는 중요한 장면은 기절해있었으니 못 봤겠지.
"대제님의 혼이 빠져나간 뒤, 대제님은 준비한 기연을 모두 해소하셨다면서 올라가셨습니다. 이제 구시대의 사람은 지켜보기만 하겠다는 말씀을 남기셨습니다.
"정녕 그러한가···"
가테스가 천장을 보고 한숨을 쉬었다. 난 최대한 사실을 말했다. 이방인이라는 정보는 숨겨야 된다. 지금 나는 안 그래도 경계 받고 있는 입장. 더 경계 받을 수는 없었다.
"억지로라도 이해할 수는 있겠군."
"그럼 저도 하나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내가 가테스에게 물었다. 황제와 리얀이 날 흥미진진하게 바라보고, 가토스는 놀란 듯이 바라보았다. 일개 근위병이 질문할 줄은 몰랐겠지.
"허락한다."
"토미임을 알고 계셨다면, 어찌 제단에 바치는 걸 허락하지 않으셨습니까? 대제님께 가장 적합한 제물이 아닙니까."
"···듣고 나서 비밀을 유지할 자신이 있으면 들어라."
가테스가 싸늘하게 말했다. 나는 곧장 고개를 끄덕였다.
"준비가 되었습니다."
"그건 내가 그냥 제국의 사기를 진작시키기 위해 인위적으로 만든 제단이기 때문이다."
역시. 내 예상이 맞았어. 하긴, 대제의 혼이 그렇게 잡아먹는 게 말이나 돼? 몬스터의 등급을 나누면서.
"용사들의 사기도 진작시키고, 몇몇 시각적인 효과까지 있으면 장병들을 다루기 좋지. 실제로 이런 행사가 있으면 주변의 몬스터들이 정리되기 때문에 수도는 한 동안 평화롭다."
"알겠습니다."
"자네에게 이렇게 쉬이 말해준 이유는, 단 하나 뿐이라네."
가테스가 말했다.
"내 근위병이 되게. 이건, 명령이네."
나는 눈을 살짝 굴렸다. 황제, 가테스, 가토스, 가티스, 리얀이 보인다. 다 지엄하고 높으신 황족들이다.
근데 내 성격이 부탁은 들어주고, 협박은 안 들어주는 사람이라. 거기다가 안 할 이유마저 명확하다면 거리낄 것도 없었다.
내 입이 천천히 열렸다.
"싫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