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화 황제를 위하여 (5) >
대제 석상의 육중한 몸이 움직인다. 하지만 전혀 무겁지는 않다. 마치 태생부터 거인으로 태어난 듯 가볍고 유연하다. 천 년이라는 시간을 잠들어있던 석상이라고 볼 수 없다.
"자네는 이 세계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있는가?"
"생각보다 더 알고 있을 겁니다."
"그래, 세상에는 신기한 것도, 신기한 사람도 많은 편이지. 어차피 난 들어도 이해하지 못할 거네. 자네가 내게 이방인이듯, 나도 자네에게 이방인이겠지."
대제가 말했다.
"그러나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건, 자네 역시 이 세상을 전부 알고 있을 리는 없다는 거지."
"그렇겠죠."
그러고 보니까 지금 내 무기가 구린데. 아무리 장인이 장비를 탓하지는 않는다고 하지만, 장비는 좋으면 좋을수록 좋지.
"혹시 후인의 검을 잠시 빌릴 수 있겠습니까?"
"그럼."
곧 잠을 자듯이 누워있는 가티스의 허리춤에서 검이 빼어져 나온다. 어린이용 검이라 그렇게 길지 않지만, 내가 헌터 때 쓰던 검과 비슷하다. 난 소검(小劍)을 주로 쓰던 검사였으니까.
"난 느낄 수 있다네. 이 세상의 마나 농도가 짙어졌군. 아마 사람들은 많은 스킬을 가지고 있을 거야. 나 때는 말이야, 10개만 가져도 엄청난 고수였지."
으, 그놈의 나 때는. 하긴 천 년을 격한 사람이니까 이 정도는 인정해줘야겠지.
"마나의 농도가 짙어졌다는 건, 곧 몬스터도 강해졌다는 것. 이 세계는 그러한 질서로 움직이고 있지. 오묘한 균형이라고 할까."
"그렇겠죠."
웹소설 세계니까. 균형이 안 맞으면 밸런스 붕괴잖아. 작가님이 세계관 잘 만드셨네.
"그러나, 나는 균형 외의 존재였지. 그래서 한 번도 내 전 힘을 내본 적이 없다네."
"무섭군요."
나는 웃었다. 그의 몸에서 위압감이 풍겨져 나오니, 단순한 허세가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래서 웃긴 거다. 나도 천생이 싸움꾼이라, 강한 사람을 보면 좀 재밌거든.
"공교롭게도, 이 세계에서는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재밌구나."
석상이 검을 들었다. 본격적으로 기세가 퍼진다. 제국을 상징하는 황금빛 아우라다. 나도 맞춰 기세를 피어 올렸다.
"자네도 어디 한 부분에서는 극의를 통달했군."
그런가. 스킬의 맥스가 극의라면, 난 그렇다고 치지 뭐.
【고유스킬 : 초감각의 레벨이 산정되었습니다. 】
【고유스킬 : 초감각 Lv MAX 사용 중】
【고유스킬 : 환영그림자 Lv MAX 사용 중】
【고유스킬 : 환영검술 Lv 7 사용 중】
【스킬 : 사고가속 Lv 8 사용 중】
이 정도만 해도 내가 싸움에 쓰는 스킬들은 거의 개방했겠지. 내가 스킬을 하나씩 킬 때마다 석상의 기세도 심상치 않아진다.
"와라."
그 말 안 해도 이미 가고 있다.
쾅!
난 뛰어 천장을 딛고 지대공 미사일처럼 그에게로 쏟아져 나왔다. 지금 그와 나의 신장과 몸의 크기 차이는 크다. 그건 일장일단을 가지고 있다. 그는 파괴력에서 앞서겠지만, 나는 민첩성에서 앞설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공간을 잘 이용하는 수밖에. 가티스에게서 뺏어온 소검이 그의 어깨로 벼락같이 내려쳐진다. 그의 육중한 검은 빠르게 어깨를 막았다. 한 손으로.
남은 한 손이 있다는 얘기. 내가 정면을 바라보자 성문을 뚫는 충차 같은 주먹이 내게 밀려온다.
"흡!"
나는 곧바로 공중에서 몸을 회전시켜서 그의 손목 부분을 긁었다. 석상 손목에 내 검이 패인 자국이 났다.
일합이지만 서로가 서로를 알았다. 나와 대제는 자연스럽게 거리를 두었다.
"신기한 움직임을 쓰는 구나."
"다들 그렇게 말합디다."
"마치 유령과 같구나. 에퍼리 션이라는 이름은 가명이지만, 아주 잘 지었어."
"칭찬 감사합니다."
성문기본영단어가 해냈네. 그래도 난 이 일합에서 조금 억울한 게 있었다.
"원래 손목 베이면 실전에서는 끝인데. 석상이라 동맥이 없는 건 반칙 아닙니까?"
"내가 석상이 아니었으면 그렇게 주먹을 날리지도 않았겠지."
"자존심이 강하시네요."
"대제의 자존심은 제국의 자존심, 나는 약해질 수 없는 사람이다."
나도 자존심은 강하니까 자강두천이네. 물론 이 말은 말해도 못 알아들을 테니 안 한다.
"저도 자존심이 강한 사람입니다."
"강한 사람은 자존심이 강할 수밖에 없어."
이번엔 대제가 내게 달려온다. 쿵, 쾅, 쿵, 쾅. 가볍게 걸어오는 것 같은데도 무슨 코끼리가 달려오는 듯한 무거움이다. 그는 검을 높이 들어 이 넓은 공간을 완전히 장악했다. 내게서 Y축을 뺏겠다는 의미겠지.
그가 위에서 아래로 정석적인 검로를 따른다. 하지만 그 검은 내가 빠져나갈 수 없는 공간을 모두 짓누르고 있었다.
"막을 수 있겠느냐?"
"못 막죠. 이걸 어떻게 막습니까."
그는 위에서 아래로 내리찍던 검로를 회전하여 뒤로 돌렸다. 왜냐하면 내가 뒤에 있었기 때문에.
난 이미 그가 걸어올 때부터 뒤에 있었지만, 앞에 잔상을 좀 길게 남겨놨을 따름이다. 나름의 술수라고 해야겠지.
하지만 뒤튼 검로에 뒤쳐질 정도로 내 속도는 느리지 않다. 나는 아래에서 위로 올라가면서 그를 나선형으로 칼집을 냈다. 그는 막을 생각도 안 하고 몸에 모기처럼 붙어있는 나를 잡으려고 검을 휘둘렀다.
나는 성급하게 쫓아오는 그의 검면에 착지해 다시 그의 얼굴로 도약했다. 내가 일직선으로 그의 눈을 향해 지르자, 그는 고개를 숙이고 검을 놓은 다음, 두 팔로 나를 감싸려고 했다.
착!
마치 모기를 잡는 듯한 그의 손뼉이 내 바로 발밑에서 들린다. 도약을 좀 더 길게 하지 않았으면 진짜 모기처럼 찌부러질 뻔했다. 나는 몸을 구른 다음 땅바닥에 착지하고는, 다시 달려들었다. 검을 들기 전이 기회다.
대제는 꽂힌 검을 뽑을 생각을 안 하고 그곳에다 마나를 불어넣었다. 바로 내 앞에 지면이 올라와서 강한 마나를 실은 돌조각들이 내 앞에 뿌려진다. 나는 그것들을 쳐냈지만, 모두 쳐낼 수는 없어서 몇몇 곳에 생채기를 입었다.
"반칙!"
"싸움에 반칙이 어디있느냐?"
대제가 허허 웃었다. 대제는 아예 이제 검을 뽑아 천장에 반달형의 검기를 날렸다. 천장이 무너졌다. 본격적으로 공간을 지배할 생각인 듯했다.
그래, 싸우기엔 너무 깔끔한 지대이기는 했지. 나는 차라리 그 돌벼락으로 들어가서 디딤돌이 될 만한 돌을 밟고 그에게로 쏘아져 들어갔다. 대제 입장에서는 돌벼락에서 갑자기 나온 것처럼 보일 것이다. 그는 황급히 검을 들어 내 검을 막았다.
"검면으로 검끝을 막으신다고요?"
"낭패로군."
대제는 석상이라 표정 변화가 없을 뿐이지, 씁쓸한 표정을 짓고 있을 거다. 왜냐하면 그건 고수들의 싸움에서는 안 되는 거거든.
나는 바로 검 끝에 마나를 끝까지 불어넣어 검면을 박살낸 다음 다시 질러서 들어갔다. 허나 대제가 물러나고, 검면을 부수느라 힘을 다 쓴 내 내지르기는 그의 가슴에 생채기밖에 못 내었다.
"그래도 무기는 부쉈네요."
"허허. 그건 한낱 돌이었을 뿐이다."
대제는 땅을 손바닥으로 짚은 다음 느리게 들어올렸다. 곧 흙에 반원형 구덩이가 파지며 그의 손바닥 중심에서 흙이 검의 형상을 갖춰갔다. 다시 그의 손에는 흙으로 만들어져 마나로 엉겨진 검이 생겼다.
"자연파괴를 좋아하시는군요."
"자연을 사랑하는 거지."
대제가 검을 한 번 허공에 휙휙 휘둘러보더니 검을 살짝 깎아서 덜어냈다. 무게중심부터 확인하는 것 보니까 S급 헌터급 맞네.
"자네는 내가 본 사람 중 가장 강하군."
"옛날에는 마나 농도가 낮았다면서요."
"그러니까 말이야."
대제는 살짝 흥이 난 듯했다. 나도 좀 흥이 난다. 이런 S급 헌터급끼리 대련할 기회는 잘 없으니까.
"이제 내 손주도 슬슬 깰 시간이고, 한 방에 끝내는 건 어떤가?"
"그러세요. 그럼. 제가 장유유서 해야죠."
"허허. 고맙네. 젊은이여."
한 천 살은 차이 나는데, 이 정도는 해줘야지. 난 딱히 한 방은 없지만 말이야. 그래도 기를 최대한 끌어올렸다. 대제도 마찬가지였다. 기의 충돌이 던전에 울려 천장에서 흙이 떨어졌다.
우리는 아무 말도 없이 합을 맞췄다. 하나, 둘, 셋. 이런 유치한 구호는 필요 없다. 대제에게는 눈빛도 호흡도 없었지만, 난 그를 읽을 수 있었다. 눈빛과 호흡이 있는 나를 그는 진작 읽었을 거다.
"나를 부술 각오로 임해라."
대제는 그 한 마디를 마지막으로 남기고 내게 달려들었다. 나 역시, 달려들었다. 최대한 빠르게. 가속도라도 붙지 않으면 그의 파워에 대항하기는 무리다.
그는 정직하게 일직선으로 찔러 들어왔고, 나는 그의 검을 완벽히 감싸는 나선형 검로를 펼쳤다. 대제의 검로를 최대한 저지시키고, 내 검 끝을 가장 날카롭게 할 수 있는 방법이었다. 나는 그의 일직선 검이 내 몸에 닿기 직전에 높이뛰기 선수처럼 가슴을 위로 하고 뛰었다.
하지만 소검은 짧아서 그의 가슴에 닿기는 역부족이었다. 그때, 당연히 대검이 위로 올라왔다. 그는 이미 내 행동을 예측했다. 나도 그의 행동을 예측했다. 나는 몸의 무게중심을 바로 잡은 다음에 그의 검날 끝에 무당처럼 선 다음 검날을 달려 나갔다.
발바닥이 대제의 마나 때문에 뜨겁기 짝이 없다. 열기에 부서질 것만 같다. 내가 여기서 버티냐, 마냐의 싸움인데.
그때, 그의 검날에서 마나가 고래의 등에서 나오는 분수처럼 솟아올랐다. 막을 수 없다. 그렇다면, 나는 검에 마나를 잔뜩 담아서 그의 가슴에 날렸다.
쾅!
나는 마나에 부딪쳐 천장에 부딪치고, 땅바닥으로 풀썩 떨어졌다. 벌떡 일어나서 다시 몸을 점검했지만, 역시 움직일 수 있는 상태는 아니다.
대제의 석상을 내가 간절한 마음으로 바라본다. 그래, 나이스. 그의 가슴팍에는 내 검이 깊게 박혀있고, 아직도 내 마나가 파직거리고 있었다.
"허허."
"잘 싸우시네요. 전성기셨다면 제가 졌겠습니다."
"이상한 예의가 있군. 그것도 그 세계의 예인가."
바로 알아보네. 원래 우리나라 같은 경우는 이런 겉치레가 좀 많아서. 물론 이 나라도 겉치레가 많지만, 자신의 명예를 깎아먹는 겉치레는 하지 않는다.
대제가 가슴팍에 있는 검을 꽂고 내게로 던졌다. 이런 건 내 입장에서는 이해 안 되는 예의다. 서로 이해할 수 없는 예의를 한 번씩 주고받았다.
대제가 말했다.
"자네는 목표가 뭔가?"
"저요? 연애요."
석상한테까지 숨길 필요는 없지. 난 당당하게 나가기로 했다. 대제는 잠깐 말문이 막혔다.
"연애라. 우리 세상에서는 그렇게 만만한 게 아니지."
"그런가요?"
"물론 귀족에 한해서네. 귀족들은 대개 정략결혼을 많이 하니까."
"저는 귀족과 연애하고 싶은 데요?"
"음, 그건 안 되는데?"
뭐라고? 이 자식아, 그게 무슨 소리야.
"내가 법령으로 평민과 귀족의 결혼은 금지해놨거든. 아마 유지되고 있을 거야."
"이런 구시대적인···!"
"구시대의 사람이니까 이해해주게."
내가 분노를 토하자 대제는 자연스럽게 흘려 넘겼다. 이게 연륜의 태극권인가.
"굳이 말하자면, 귀족과 평민의 교육 수준은 많이 차이 나네. 범적인 공교육을 하기에는 나라의 현실적인 사정이 안 돼. 교육을 하려면 교육자는 교육을 받은 귀족이어야 될 터, 하지만 귀족들은 대개 군인의 신분을 하고 있지. 그렇지 않으면 외국의 군사력을 감당할 수 없어. 또한 모두가 교육을 받는다면, 누가 농사를 짓고, 누가 세계의 하부를 담당할 것인가?"
대제가 말했다.
"또한, 사람의 정념은 본디 이기적인 것이라 교육을 받으면 그 이기심을 교묘하게 활용할 것이 분명하네. 그러한 이유로 평민과 귀족의 경계를 막아놓은 게야."
"어쩌라고요."
우리는 공교육이 활성화된 곳이라서 그런 사정까지 이해해 줄 필요는 없잖아. 삼권분립도 안 되는 이런 미개한 세상 같으니라고.
"그래도 능력이 있는 사람은 귀족으로 하게끔 해놓았지. 그래서 자네가 만약 연애가 목적이라면 귀족이 되는 것부터 우선일 터야."
"아, 그렇습니까?"
그러면 인정이지. 계급 사회가 싫다고는 해도 귀족이 되는 게 껄끄럽긴 해도, 뭐. 그건 내가 평민이었을 때 얘기지. 하하.
"우선 귀족과 연애할 때는, 프러포즈가 중요하다네."
"프러포즈요?"
내 귀가 확 트인다. 그래, 내가 바라던 지식은 이런 거였다. 상대방과의 플라토닉적 교감, 이런 거 말고. 실제적으로 도움 되는 팁말이야.
"난 탄탈로스 숲의 요정반지를 그녀에게 줬다네. 요정반지는 '사랑스러움'을 자극시키는 효능이 있거든."
"와, 진짜 도움 되는 내용입니다."
탄탈로스 숲 요정반지? 확인, 확인. 내가 신나하자 대제는 허허 웃었다.
"혹은 명예결투를 할 수도 있지. 자네가 진짜 바라는 여자가 있다면, 명예를 걸고 전투를 하는 거지. 귀족이라면 그 싸움을 거절할 이유가 없다. 명예는 중요한 거니까."
"아, 그렇군요. 명예결투, 명예결투."
나는 아예 스킬북을 띄운 다음 그곳에 필기까지 했다. 하이테크놀로지 처음 써보네. 명예결투와 탄탈로스 숲의 요정반지라.
필기를 하고 있던 와중, 대제가 입을 열었다. 그의 목소리가 어쩐지 급격하게 약해졌다.
"나도 도움을 줬으니 자네에게 부탁 하나만 해도 되겠나?"
"뭐, 제가 할 수 있는 선에서라면."
이 정도 꿀팁을 줬으면 나도 해줘야지. 대제의 입이 천천히 열렸다.
"더 강해지게."
"네?"
"자네는 강하지만, 아직 뭔가 구멍이 나있어. 그걸 난 느낄 수 있네."
대제는 내 스킬이 전부 개방되지 않았다는 걸 눈치 채고 있었다. 그런데 이쯤 되면 충분히 강한 것 같은데. 마더 트리도 한 번에 부쉈고.
"내가 말했지. 이방인이 나타나면 세계에 위험이 찾아온다고."
"네."
"내가 지금 느낄 수 있는 이방인만 두 명이야. 한 세대에 이방인 두 명은 유례없는 일이라네."
이방인? 나랑 비슷한 사람이 또 있단 말이야? 대제의 말에 내 머릿속이 꼬여갔다. 그렇지만 이런 설정은 이 소설에 나온 적이 없다.
"어쩌면 이 세계가 힘들어질 수도 있겠어. 염치없는 말이지만, 도움을 구하는 바이네."
이 세계가 힘들어진다라. 내가 무슨 짓을 안 해도 바뀐다는 건가. 이 세계의 '균형'이라는 것 때문에?
"하나 물을 게 있습니다."
"마지막일 걸세. 신중히 질문하게."
"이방인 중에서도 잠적한 사람이 있다고 하셨죠. 그때의 세계는 어땠습니까?"
"멸망 직전까지 갔었지. 혼란스러웠어."
이런 미친. 그럼 내 존재 자체가 이 세계를 안 좋은 쪽으로 변화했다는 거잖아. 가뜩이나 피폐물 결말로 낸 작가님의 전적도 전적이고, 나까지 끼었으니 이러면···
내가 할 일은 최대한 이 세계의 혼란을 막는 것이겠구나. 그래야 연애를 할 수 있겠어.
"내가 그래서 자네에게 부탁하는 걸세."
대제가 여전히 혼란스러운 내게 트라프비체의 간략한 예를 갖췄다. 그거에 당황할 틈도 없이 곧 대제의 발바닥부터 석상이 부서져 나갔다. 목소리가 약해진 이유도 이것이었군. 이제 그에게 허락된 시간이 다 됐다는 뜻이었다.
"내 말을 기억해주게."
"당황스럽지만, 뭐. 알겠습니다."
"그렇다면 다행이군."
대제는 곧 가슴까지 부서졌다. 흐릿해진 토미가 대제의 곁을 맴돌았다. 대제는 토미를 바라보았다.
"토미에게 고마울 따름이네. 나를 천 년 동안이나 지켜줬네. 나는 그를 한 순간만 지켜줬을 뿐인데."
"누구에게 어떤 순간은 영원과도 같죠."
"그렇게 말해주니 고맙네."
그는 목을 돌려 자고 있는 가티스를 바라보았다.
"가끔 내가 생각나면 내 아이들과 함께 내 무덤 위에 앉아 쉬어주게. 유일한 바람일세."
"그러죠."
대제는 그리고 곧 부서지고 완전한 돌조각이 되었다. 그건 대제도 아니고, 그냥 파편들이었다. 대제의 영혼은 하늘로 올라갔다. 아마 그의 무덤으로 가겠지.
토미는 그의 영혼이 사라지자 눈에 빛을 잃고 그저 보자기가 되어 지면으로 하늘하늘 떨어졌다. 레이스 퀸이 천 년을 산다는 얘기는 듣지 못했다. 대제쯤이나 되는 영혼을 간직하고 있었으니 살고 있었던 것이겠지.
파편 안에는 흰색 검이 하나가 있었다. 이게 나그네, 나를 위한 보상인가. 나는 일단 그걸 챙겼다. 위도, 아래도 날이 없는 요상한 검이었다. 그래도 뭐라도 되겠지.
던전의 마기가 급격하게 미약해지는 게 느껴진다. 던전 보스인 토미를 잡았으니 레이드를 한 셈이 되었다.
나는 토미였던 보자기를 챙기고, 가티스를 옆에 비껴들었다. 그리고 파편을 향해 대련이 끝난 상대에게 하듯, 한국식으로 인사했다. 가벼운 목례.
"수고하셨어요."
그 다음, 100층을 격한 포탈이 강한 흡입력을 내면서 던전 안에 있는 모든 것을 흡수해간다.
나는 빨려가는 와중에 위를 보았다. 100층의 어둠과 남아있는 몬스터들이 소용돌이치면서 포탈 안쪽 빛 안에서 부서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