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화 황제를 위하여 (1) >
"무슨 소리인지 못 알아듣겠습니다. 폐하."
아무리 내가 건방지다고 한들, 제국의 1인자 앞에서는 뇌정지가 올 수밖에 없다. 역시 주변이 주는 압박감은 중요하다.
좌우로 나란히 서있는 대신들의 정점에 있는 사람. F급 헌터가 나를 보면 이런 기분이었을까. 글쎄.
"내가 막내에게 귀찮은 수수께끼를 던져줬지. 요즘 내가 집무하는 데 너무 방해해서 말이야."
황제가 말했다.
"나무에 관한 수수께끼였지. 답이란 건 없다만."
아, 그거. 긴급 호출 전에 매달렸던 그 꼬맹이. 그게 황제가 준 수수께끼였냐. 아, 제발. 근데 걔는 왜 자기 숙제인데 내가 말했다고 하는 거야.
"사람이라는 대답은 분명히 나올 수 있었지만, 그 아이가 하기엔 너무 노회한 답변이었어. 그런 천진난만한 표정을 지으면서 할 만한 대답도 아니었고."
황제는 계속 말을 이었다.
"그리하여 추궁을 하니, 옌시 근위병이 알려줬다는군. 그래서 자네를 한 번쯤은 보고 싶었지."
"송구하옵니다."
"송구할 것까지 없네. 내가 궁금한 거였을 뿐이니."
그렇게 긴 대화는 아니었지만 왜 이렇게 길게 느껴질까. 내가 한 사람에 대해서 압박감을 느껴진 적은 없다.
"자네는 누구인가?"
"근위병 에퍼리 션입니다."
"그건 알고 있네. 옌시의 황녀가 탈출했다는 소문이 있더군. 자네인가?"
황제는 물었다. 아주 느닷없이. 그 질문과 함께 내 몸이 꿰뚫리는 느낌이 났다. 난 마치 끌리듯 황제를 바라보았다. 황제의 눈은 원래 녹안이었지만, 지금만큼은 금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내 심장이 심하게 두근거렸다. 그때였다.
【???? : ??? ???? Lv MAX 강제 개방】
【???? : ??? ???? Lv MAX 사용 중】
내 스킬창에 갑자기 이상한 창이 떴다. 읽을 수 없는 말들. 해석이 안 돼도 스킬이 개방될 수 있는 것인가? 하지만 강제라는 단어는 알고 있다. 강제 개방이라, 이건 또 처음 본다.
신기하게도 그 스킬이 열리자마자 내 마음 안의 문이 꽉 닫힌 기분이 들었다. 가죽 안쪽에 철갑이 덧대어진 기분. 황제의 눈은 날 계속 노려보았지만, 난 다시 고개를 숙였다.
"···허허."
황제가 나지막하게 웃었다.
"신기한 자로구나."
그 말에 대신들이 움찔했다. 난 대충 이 상황을 알겠다. 황제가 내게 스킬을 건 게지. 하지만 내 강제 개방된 스킬이 황제의 스킬을 막았다.
난 그래도 대답해 줄 수 있는 질문이라고 생각해서 황제의 궁금증을 해결해줬다.
"전 옌시의 황녀가 아닙니다. 그리고 전 남자입니다."
"여인들이 혼자 대륙에 나올 때 남장은 흔한 일이지. 곱상한 얼굴이라 내 착각했나봄세."
그렇게 착각해주면 고맙고. 나는 이제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황제도 자리로 물러났다.
"대신들은 듣거라. 내 전사들에게 포상을 내릴 지어니."
황제가 의자에 다시 풀썩 앉고 근엄하게 말했다. 바로 옆에 있는 서기가 바삐 움직이는 게 보이지 않아도 느껴진다.
"칸나 대위는 소령으로 특진시키고, 근위병 에퍼리의 보상은 내 친히 보류하도록 하겠다."
보류? 보류는 또 뭐야. 그러나 모두가 침묵하는 자리에서 그걸 물어볼 수는 없었다.
"황제께 예의를 표하고 물러나라!"
다시 징이 쳐졌다. 칸나는 첫 인사와 비슷한 맺음말을 하고, 나도 복명복창하고 대전을 나왔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포상시간이 끝났다.
중요한 건 포상은 없었다는 얘기. 포상 없는 포상 시간. 괜히 이상한 스킬만 쐬었네. 칵, 퉤.
"너, 대체 무슨 짓을 하고 다니는 거냐?"
"뭐가 말입니까?"
칸나가 답답하다는 듯 제복의 끈을 헐겁게 했다.
"막내 황자님의 숙제를 대신 해줬다는 건 뭐냐?"
"아니, 도서관에서 만나서 귀찮게 굴기에."
"어허, 막내 황자님께 그게 무슨 말버릇이냐. 옌시 사람이라 한 번만 넘어가마."
저번에도 한 번 넘어간다며, 두 번째 넘어가는 중이네. 든든하다, 옌시 방패. 한 번도 가본 적 없지만 고향 같은 포근한 이 느낌.
"그러면 뭡니까. 어차피 전 상도 못 받았는데."
"넌 보류라는 뜻이 뭔지 모르나?"
"기억나면 주고, 아니면 씹겠다는 뜻 아니겠습니까?"
외상, 보류, 유보. 뭐 다 비슷한 말이잖아. 하지만 칸나는 내 시니컬한 말투에 기함을 했다.
"누가 들을까봐 겁나는 말만 하는구나. 제발 말을 조심하려무나."
"아, 네. 근데 보류가 뭐 특이한 겁니까?"
"황제님이 너를 위한 생각을 따로 하신다는 거 아니냐."
"그게 뭡니까?"
"귀중하고 지엄하신 황제님 생각의 일부가 되는 것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일이냐. 이미 거기 있는 대신들도 널 눈여겨볼 거다."
아, 장난하는 것도 아니고. 난 자본주의 사회에서 온 사람이라 실물 아니면 안 믿는다고. 명예도 눈이 보이는 트로피가 있어야 믿는 사회, 내가 키우던 애완동물의 이름보다는 주소가 중요한 사회, 등본에 적힌 배우자만 사랑으로 인정하는 사회에서 나왔다고.
"영광으로 알아라. 이건 다른 근위병들에게 말하면 깜짝 놀랄 거다."
"아, 네."
감흥이 없다, 감흥이 없어. 마치 강한 파도를 헤치고 보물섬에 도착하니, 보물상자 속에 '여기까지 온 너의 용기가 곧 보물'이라는 종이를 본 것 같다.
"난 네가 더 부럽다."
"그렇습니까? 칸나 소령님."
"아직 소령 진이다. 대위라고 불러라."
칸나는 그래도 그 호칭이 기분이 좋은 듯 씩 웃었다. 마리나가 처음 칸나를 부를 때, 칸나는 이렇게 대답했었지.
- 칸나, 칸나 카라모프 소령입니다. 칸나 소령이라고 부르시면 됩니다. 성녀님.
내가 칸나의 소령을 조금 앞당겼을 수도 있겠지만, 그건 아주 조금일 뿐일 터.
이제 소설의 시작이 얼마 남지 않았다.
내게 이미 미운털이 박힌 황제는 이 상황으로 더 생색을 내고 싶은 모양이었다. 시종들이 다시 달리며 게시물이 붙는다. 모든 황도 근위병들을 위한 파티를 한다며.
"황제님이 아주 우리를 생각하시는군."
"황제님의 성은이 온 천지에 퍼지는구나."
아주 염병들을 한다. 난 그 게시물과 반응들을 보고 쓰게 웃었다. 내가 의뢰사무소를 차렸을 때, 가끔 법인카드를 주면 소속 헌터들이 그렇게 말하곤 했기 때문이다.
당연히 그들은 내게 농담 식으로 말한 것이다. 그때도 낯간지럽다고 하지 말라고 했지만, 이들은 지금 진심으로 그런 오글거리는 말들을 하는 것이다. 이게 로맨스판타지의 감성이었다.
물론 난 이런 낯간지러운 감성을 좋아해서 로맨스판타지 소설을 좋아하는 거긴 하지만, 그 광경을 오감으로 느끼는 건 또 다른 얘기였다.
"황제님, 만세, 만세, 만만세."
내가 농담으로 외치자, 병사들이 내 어깨를 끌어안았다.
"이거, 황제님의 성은을 직접 받은 사람이라 아주 트라프비체 신민이 다 되었군!"
"누가 황제님을 직접 알현한 에퍼리를 옌시인이라고 하는가!"
한 번 얼굴 본 거 가지고, 내 평판이 아주 바뀌었네. 내가 특공대로 마더 트리를 처리하고 와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 오히려 그때 스포트라이트는 칸나에게 있었지.
"근데 파티라면 회식 같은 겁니까?"
"웬 회식? 그런 건 우리끼리 해야지. 어찌 우리 같은 미천한 사람들이 황족과 겸상을 한단 말인가."
그럼 뭔데.
"뭐, 아마 병사들이 다 참여할 거라면 그것 밖에 없지 않을까?"
"그렇지. 그것 밖에 없지."
"그것?"
내가 묻자 다른 사람들이 정말 모르냐는 듯이 쳐다봤다. 아, 고구마. 그냥 말해주면 되지. 뭘 그것이라고 지들끼리 낄낄거리고 있어.
"그것은 아주 재미있지."
"그것은 아주 명예로운 일이야."
"그것은 자네의 인생을 바꿀 수도 있어."
이 자식들. 진짜 일부러 이러네. 나는 그냥 열 받아서 빠져 나왔다. 어차피 곧 알게 될 테니.
대연무장. 모든 병사가 가득 찰 수 있는 아주 큰 공간이었다. 그곳에는 군악대와 좌우로 깔린 북, 대신들이 일자로 모여 있었고, 높은 계단 위에는 화려한 의자에 황제가 앉아 있었다.
"자랑스러운 트라프비체의 용사들이여, 오늘 내 자네들을 격려하고자 작은 영광을 준비했다네."
"만세, 만세, 만만세!"
"만세, 만세, 만만세!"
이거 다 오늘 아침에 교육 받은 거다. 황제님의 말이 끝나면 외치면 된다고. 난 그냥 립싱크했다. 뭐가 예쁘다고 해주냐.
"현재 상황은 어느 정도 알고 있을 것이다. 곧 백성들에게도 공표할 것이지만, 검은 나무의 새순이 돋기 시작했고 성녀는 아직 못 찾은 상황이다."
황제가 말을 이었다.
"현재 제국의 임무는 성녀를 찾을 때까지 천 년 역사의 제국을 보전하는 것. 1대 황제 트라프비체 트라프비체 대제께 누가 되지 않기 위해, 짐도 노력할 것이다. 물론 그건 짐 혼자 하는 것이 아니라, 용사들의 용기가 뒷받침 되어야 비로소 가능한 것이다."
"만세, 만세, 만만세!"
정말 이런 교장선생님 훈화같은 말씀으로 사기진작이 된다니. 대단한 중세시대야. 나는 중간까지 듣고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다.
차라리 이 시간에 공부를 하는 게 낫지. 난 다시 스킬북을 열어 아이리가 준 책과 성문기본영단어 사전으로 공부를 해나갔다.
"···곧 대제께 제사를 드리는 대제축일이다. 그때 제사에 쓸 제물이 필요하다."
음. Collapse라는 단어는 붕괴와 쓰러짐, 쇠약 이런 뜻이 있군. Inherent는 고유라는 뜻이 있고 말이야.
【고유스킬 : 붕괴 저항 Lv MAX 사용 중】
갑자기 이게 열렸네. 내가 저항이란 단어 뜻을 이미 알고 있어서. 근데 개방이 아니라면, 이미 개방이 되어있었다는 거지. 가장 최근에 미지에 강제개방된 그 스킬이리라는 유추가 가능하다. 내가 황제 앞에서 붕괴될 뻔 했다는 말이지. 저런 씁. 더 보기 안 좋아지네.
?? 스킬 앞에 붙는 ?? 도 알아냈다. 고유라는 뜻이었네. 좀 알려주든가 해야지. 하긴 지구에서 누가 1+1=2라고 중얼거리며 다니겠어. 인생 혼자 사는 거지.
【고유스킬 : 환영 검술 Lv 7 사용 중】
"···용사들이 마수의 목을 가져오면, 그 중 하나를 선정해서 제물로 선정하도록 하겠다."
"와아아아아아!"
갑자기 큰 함성소리가 들려서 깜짝 놀랐다. 뭐야, 듣고는 있었는데 이게 그렇게 함성을 지를만한 일이야? 결국 몬스터 잡으라고 뺑뺑이 돌리는 거잖아.
"내 대에 대제님께 제물을 바칠 기회가 생기다니···"
"만약 된다면 가문의 영광이겠지. 물론 황자님께서 가져가시겠지만."
병사들의 중얼거림도 들린다. 아냐, 너희들 속고 있는 거야. 이게 제국주의가 너희를 부려먹는 방식이라고. 하긴 자본주의가 더 더럽게 부려먹기는 하지. 그러고 보면 세상사는 거야 다 비슷한 것 같애.
"각자 페어를 짜도 좋고, 단독으로 해도 좋다. 다만, 무리는 하지 마라. 용사들은 용사의 목숨이 아니다. 바로 짐의 것이다."
"만세, 만세, 만만세!"
네 삶이 곧 네 것이 아니라고 하는 데도 만세를 외치네. 실존주의와 모더니즘은 어디로 갔는가. 사르트르 선생님. 그립습니다.
내가 스킬북에서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를 빼서 읽는 동안, 그렇게 황제 만세, 만세, 만만세 시간이 끝났다.
어쨌든 페어가 된다라. 내 페어는, 여기서는 지금 한 명 밖에 없는 걸.
나는 우리 부대가 있는 곳 맨 앞을 지긋이 바라보았다. 칸나가 시선을 느꼈는지 홱 돌아보며 날 쳐다보았다. 난 시선을 돌리지 않고 웃어주었다. 칸나는 바로 내 시선을 피했다.
"만세, 만세, 만만세!"
누군가가 대연무장에 빠져나오면서도 소리를 질렀다. 마치 콘서트장에서 빠져나왔지만 흥이 덜 빠져서 지하철에서까지 떼창을 하는 사람을 보는 것 같았다.
극혐이네, 진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