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화 짐꾼 쟁탈전 - 황도 (5) >
바리트 소령은 몬스터들의 기가 죽은 게 느껴졌다. 이건, 전형적으로 마기의 핵심인 타락한 나무가 사라졌을 때 나오는 일이다.
"특공대가 성공했군."
바리트가 중얼거렸다. 그럴 수는 있다고 생각했다. 마더 트리는 베테랑이라면 어떻게 공략해야하는지 알고 있을 테니까. 실수만 안 저지르면 잡기 쉬운 게 마더 트리였다.
그러나 이렇게 빨리 성공할 줄은 몰랐다. 수레바퀴 진을 둘러싼 나무들에서 더 이상 열매가 열리지 않고, 가지가 시들시들해져갔다.
"트라프비체의 불!"
바리트가 외쳤다. 바로 근위병들이 뇌관이 터진 수류탄처럼 전방위로 확산해갔다.
트라프비체의 불은 트라프비체의 투척 무기로, 얇은 유리에 폭발하는 불의 마나를 담아 만든 무기였다. 그야말로 마나 수류탄.
"모두 죽여라! 나무가 없으면 이들은 약하다!"
바리트도 역시 수레바퀴의 핵, 진의 중심에서 벗어나 몬스터들을 학살해나갔다. 방어 위주로 움직였던 근위병들이 공격적으로 움직이자 주변이 마나의 사출로 화려해지고 대기가 떨렸다.
몬스터들은 추풍낙엽으로 쓸려갔고, 나머지 몬스터들은 도망쳤다. 어차피 도망쳐봤자 진원지기인 마더 트리가 사라졌으니 그들은 자연사하거나 맹수에게 잡아먹힐 것이었다.
그들이 진영을 다시 정비하고 있을 때, 저 멀리서 두 명의 신형이 보였다. 키가 비슷한 두 사람은 그림자를 멀리도 드리우며 느리게 걸어왔다.
모두가 그들을 알고 있었다.
"모두 차렷!"
바리트가 진영을 움직이느라 부산한 근위병들을 멈췄다.
"선봉을 맞이하라!"
근위대의 모든 병사가 허리를 꼿꼿이 펴고, 등허리에 묶인 작은 화승총을 꺼냈다. 사거리는 얼마 되지 않지만, 근거리 무기로는 유효한 피스톨이었다.
"발사!"
모든 피스톨이 하늘로 발사되었다. 회색 연기와 불꽃이 하늘에 퍼졌다.
"참나, 소령님도 별 걸 다해주시는군."
칸나가 저 멀리 피어오르는 작은 불꽃들을 보며 머쓱하다는 듯 웃었다. 난 이게 뭔지 모른다.
"트라프비체 군대의 예지. 위험한 임무에서 돌아온 사람을 위한 경례라고 해야 하나."
"별로 안 위험했는데요?"
"그건 네가 있어서 그렇지."
칸나가 말을 멈추고,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너의 그 힘은 너무 드러내지 마라."
"그런가요?"
"네 길이 결정되면, 그때 힘을 드러내. 네 힘은 이용될 여지가 많다."
"제 길은 정해져있습니다."
"뭔데?"
연애. 근데 이렇게 말하면 경멸하겠지. 나는 대신 다른 걸 물어보기로 했다.
"칸나 대위님은 이상형이 어떻게 되십니까?"
"갑자기? 음, 글쎄?"
"그냥 멋지다고 생각한 사람 있습니까?"
"멋진 건 가테스 황자님이 멋지시지. 먼발치에서만 봤는데 말이야."
하. 뭐야, 결국 힘을 다 드러내야 되잖아. 그만큼 부와 명예를 얻으려면 힘을 다 드러내지 않고 배기겠냐고. 결국 칸나, 너도 똑같구나.
"하지만 이상형은 아니야."
"그렇습니까?"
"내 이상형은 좋은 사람이지, 멋진 사람이 아니거든."
"좋은 사람이란 뭡니까?"
"어렵구나. 질문들이."
칸나는 얼굴을 붉히며 피했다. 하긴 칸나의 나이는 고작 20대 초반이거나 중반일 것이다. 진지하게 생각해 봤을 리가 없지. 일반 영애도 아니고, 기사니까.
"지금 어려운 걸 생각할 때는 아닌 것 같다."
"그렇습니까?"
파팡···
다시 우리들만 볼 수 있는 작은 불꽃놀이가 펼쳐졌다.
여의도 배 위에서 바라본 것보다 훨씬 화려하네.
"칸나 대위님, 잠깐 멈춰도 되겠습니까?"
"왜?"
"잠시, 잠시만 생각할 게 생겼습니다."
저 멀리서 우리를 기다리는 사람들. 뭔가, 그것이 의뢰를 마치고 우리를 환호하려는 사람들과 겹쳐보였다. 내가 만약 리바이어던을 잡았으면 이보다 더 멋지진 않겠지만, 화려한 축하를 받았겠지.
난 이 소설의 결말을 모른다. 허나, 작가님의 전작이 피폐하게 끝난 만큼, 이번 작품의 결말도 내게는 불안하기 짝이 없다. 사실 이 작품은 로맨스판타지인데도 죽는 인물들이 나온다. 그것까지는 내 알 바가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이제는 아니다.
"에퍼리?"
칸나가 불안한 음성으로 물었다.
- 주환영, 주환영, 주환영!
옛날 방송에 그랬던 적이 있었지. 나는 그냥 예능 프로그램인 줄 알고 나갔는데, 내가 구한 사람들이 전부 방청객에 앉아서 나를 놀래게 하는 쇼가 있었지. 그때, 얼마나 울컥하던지.
나는 칸나를 바라보았다. 작가가 결말을 어떻게 냈는지는 모른다. 그러나 이 사람들이 행복했으면 좋겠다.
물론 나도 연애를 하면서 더 행복해져야겠지.
"생각 끝났습니다."
"어디를 갔다 온 것만 같구나."
"가고 싶지만, 갈 수 없는 곳을 갔다 왔습니다. 이제는 더 이상 못 가겠죠."
내가 이 세계를 바꿀 수 있을까. 그럼, 물론이지. 난 모든 사람이 세상을 바꿀 수 있는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고 믿는다. 그 공식에서 나를 제외하면 안 되지.
나도 이 소설의 전개가 최대한 망가지지 않으면 한다. 하지만 몇몇 전개는 내가 바라는 전개가 아니다. 물론 소설이란 건 독자의 예상을 배반하면서 나와야 재밌는 것이긴 하지만 말이야.
여기는 소설이 아니라 내가 사는 세계가 됐으니까. 난 내 세계를 내 입맛대로 맞출 필요가 있다.
내 목표가 정해진 순간이었다.
"칸나 대위님."
"응?"
"이제부터 많은 게 바뀔 것 같습니다."
"뭐가?"
"제가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칸나는 내 말을 못 알아들었다. 난 피폐물 전문인 작가님의 로맨스판타지가 아닌 곳에서 살고 싶다. 조금 더 부드러운, 양산형 로맨스판타지를 만들 거다.
다행스러운 건 동쪽 문에서만 마더 트리가 있었다는 것이었다. 북쪽, 서쪽, 동쪽 모두 타락한 나무가 나타났지만 모두 동쪽의 마더 트리가 뻗은 것이었다.
북, 서, 남쪽은 마더 트리와 멀어서 몬스터들도 우리보다 훨씬 약했다고 한다. 그리하여 사상자도 없었다.
"잘 해주었구나. 칸나 대위."
"과찬이십니다."
가토스가 우리를 반겼다. 그는 우리의 보고를 전부 들은 상태였다. 마더 트리가 있었고, 함정이 있었지만 특공대를 만들어 깨부순 우리들의 이야기를.
특히 수레바퀴진을 굴리지 않고 특공대를 만들어 마더 트리를 직접 부수는 판단을 한 칸나는 큰 칭찬을 받았다.
"에퍼리, 넌 뭐하는 놈이냐?"
"글쎄요?"
난 주변 근위병들이 물어보는 걸 전부 물렀다. 여기서 S급 헌터였고, 전직 세계 상위 0.04%였습니다. 이런 것도 웃긴 노릇이겠지. 믿어주지도 않을 테고.
"이번 상황에 군단장님이 포상을 내려줄 수도 있다고 하는 군."
"황제님 포상까지 나오는 거 아니야?"
"야, 그건 거의 국난 상황 아니면 안 나와."
근위병들은 긴장이 풀려서 낄낄거렸다. 그래, 싸움 후 휴식은 노가리로 풀어야지. 나도 그들의 생리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나도 그렇게 그들이 농담하기에 그런 줄 알았지. 근데 제국의 배포는 내 생각보다 컸다.
'이번 상황에 참여한 모든 병사들에게 금화 10개를 지급한다.'
시종들이 여러 군데에 뭔가를 붙이고 다니기에 본 게시물. 그러니까, 모두에게 백만원씩 준다는 얘기네. 그것만으로도 근위병들의 사기는 끝까지 올라갔다.
"황제 폐하, 만세, 만세, 만만세!"
"이게 제국의 품격이다!"
엄지 척을 하는 병사, 게시물에 반절을 하는 병사. 아주 가지각색이다. 근데 난 별로 감흥이 없다. 왜냐하면 내 가죽주머니에는 백금화 하나가 있거든.
그러고 보니까, 심지어 백금화 하나 받고 난 예프린의 가출에 도움까지 줬다. 이건 좀 미안한데. 1주일 끝나고 공작가 가야 하나.
"에퍼리. 잠깐 이리로."
내가 재미있게 그 사람들을 구경하고 있자 뒤에서 누군가 툭 쳤다. 뒤를 돌아보자 칸나가 있었다.
"왜 그러십니까?"
"넌 군대에서 토 좀 달지 마라."
딱딱하기는. 나는 게시물에 정신이 팔린 병사들을 남겨두고 칸나의 방으로 따라왔다. 칸나의 집무실은 그녀의 성격처럼 단정했다. 장신구도 없고, 장식품도 없고. 그저 군대에서 쓰는 교본 같은 것만 깔끔히 정리되어 있었다.
"아마 너와 내가 포상을 받을 것 같다."
"이미 제국에서 포상은 내리지 않았습니까?"
"아니, 그건 병사들 모두에게 주는 거고."
"더 있습니까?"
"그렇다더라."
칸나의 모습은 기쁜 듯 하면서도 살짝 머쓱한 느낌이었다. 왜, 포상 받으면 좋지 왜.
"사실 네가 다 했는데, 나도 같이 받는 것 같아서 좀 그렇구나. 난 분명히 너의 공적에 대해서 보고했다."
"그렇습니까?"
"그래도, 무슨 네가 공동(空洞)을 만들었다느니 이런 말들은 안 했어. 괜히 너한테 부담될까봐. 내 판단이 아마도 맞을 거다."
배려 봐. 이게 내가 아는 칸나 카라모프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저 혼자 한 게 아니기에 너무도 당연한 포상입니다."
"그렇게 말해주면 고맙고."
칸나가 싱긋 웃었다.
에구, 예쁜 것!
트라프비체의 제복은 불편하기 짝이 없었다. 소매에 솔은 왜 이렇게 달려있어. 무슨 닭벼슬도 아니고 말이야. 단추는 또 왜 이렇게 많아. 이러니까 중세시대 옷이 지랄맞다고 하지.
차라리 어차피 근대 군대의 편제마저 섞인 거, 옷은 그냥 좀 간편하게 만들어주면 안 되나?
아니. 어림도 없지. 로맨스판타지 소설들의 표지를 보라. 모두 불편한 옷을 입고 있지 않느냐. 이건 내가 선을 넘었다. 로맨스판타지의 국룰인 것을.
"나도 이렇게 대전에서 받는 포상은 처음이라 긴장되는구나."
제복과 모자까지 갖춰 입은 칸나의 모습은 멋진 여전사 그 자체였다. 솔직히 바로 고백할 뻔했다. 근데 아직은 아니다. 난 더 멋진 사람이 될 거다. 아니, 칸나에게는 좋은 사람.
"누가 내리는 상입니까?"
"몰라, 나도. 사단장님인가."
이 정도면 군단장 상은 줘야지. 한 부대의 전멸을 막았는데. 이 정도면 육탄2용사로 동상까지 만들어주고. 어? 나랑 칸나가 얼마나 고생했는데.
내가 왼쪽에 서고, 칸나는 오른쪽. 군대에서도 이랬던 것 같은데. 난 물론 군대 안 나왔다. 스무살 때 S급 재능 각성해서 면제다. 하하. 그래도 4주 교육은 받았으니까.
"들어가자꾸나."
칸나의 마지막 말에 한숨이 섞인다. 그녀도 긴장이 되는 모양이었다. 나도 긴장된다. 뭔가, 뭔가 그래. 이 나라의 가장 웅장하고 위엄있는 곳에서 상을 받는다니.
내가 청와대에서 무궁훈장 받을 때도 이렇게 떨리지는 않았는데, 이게 계급사회의 힘인지. 대통령은 선출된 사람이지만, 우리에게 상을 주는 사람은 선택받은 사람일 테니까.
"포상자는 들어오라!"
그와 함께 울리는 징소리. 나는 입술을 한 번 물고 대전으로 들어갔다. 이것 때문에 어제 제식도 밤새서 했다고. 칸나와 같이. 물론 좋은 시간이었다.
"대신들은 모두 일어나서 전사들에게 예를 표해라!"
징을 든 사회자 같은 사람이 외쳤다. 우리에게 대전으로 들어오라고 한 목소리였다.
대전의 초입. 명품 가운 같은 중세 귀족의 옷을 입은 사람들이 나란히 사열되어 있다. 품격들이 최소 백작급 이상들이네. 아마 저 징을 치는 사람도 어느 정도는 되는 사람이겠지.
그리고 제일 중요한 사람. 저 끝에 의자에 누가 앉아있었다.
응? 앉아있다고?
원래라면 의자 앞에 서있어야 되는 것이 아닌가.
저기는 황제의 자리니까.
"전사들은 황제께 경례하라!"
미친. 진짜 황제였네. 곁눈질로 보지 않아도 알고 있다. 칸나의 몸이 떨리는 걸. 심장이 두근거리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리는 것 같다.
"지고하신 황제님을 뵙습니다! 제2황자부 소속 근위기사 칸나 대위입니다!"
"근위병 에퍼리입니다!"
그냥 이렇게만 하라고 했어. 황제님께 두 번 인사하면 안 된다고. 대표자만 인사하는 거라고. 그래서 이 한 마디만 어제 밤에 몇 번을 연습했다.
"너희들이 마더 트리를 해치운 특공대로구나."
팔걸이 한 쪽에 몸이 쏠려있던 황제가 의자에서 몸을 바로 했다. 난 그걸 멍하니 보고 있다가 고개를 얼른 숙였다. 아, 맞다. 황제랑 눈 마주치면 안 된댔지.
쫄지 마. 난 대한민국 대통령하고 눈까지 마주치고 악수한 사이잖아.
대전에는 이제는 고요한 공기만이 가득하다. 숨소리마저 황제의 허락을 받아야 되는 느낌이다. 움직임이 느껴진다.
분명 이 여유로운 움직임, 허락받지 않아도 되는 움직임은 황제의 것이다.
"전사들은 고개를 들라."
낮은 황제의 음성이 들렸다. 칸나와 내가 동시에 고개를 쳐들었다. 헉, 황제가 생각보다 가까이 있었다.
"내게 예를 갖추는 걸 허락하마."
황제는 그리고 손바닥을 내밀었다. 뭔데, 난 이건 어제 안 배웠는데.
칸나는 똑바로 손을 잡고는 허리를 꼿꼿이 폈다.
"칼 카라모프의 딸, 칸나 카라모프가 황제를 뵙습니다!"
어, 나도 저렇게 하면 되나? 황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의 공헌을 치하한다. 칸나 카라모프 대위."
"감사합니다!"
황제와 칸나의 예법은 그렇게 끝났다. 황제는 내게도 손을 내밀었다. 근데, 당황스럽다. 칸나에게는 악수하는 것처럼 손을 내밀고, 내게는 손등을 내미는 것이었다.
뭐야, 평민하고 귀족하고 예가 다른 것 같은데? 근데 난 이거는 어제 안 배웠는데? 두뇌 풀가동! 내 뇌 속에서 「장미꽃이 흩뿌려진 침대」의 스킬북 뷰어가 사르륵 지나간다.
캐치 완료. 마리나가 황제를 처음 만났을 때를 생각해보자.
나는 바로 한쪽 무릎을 꿇고 황제의 손등에 입맞춤을 했다. 휴, 다행이다. 뇌정지 올 뻔했다. 마지막 한 마디도 잊지 말아야지.
"고귀하신 옥체를 미천한 제게 허락해주심을 감사드립니다."
"자네로군."
황제가 뜬금없는 말을 뱉었다. 내가 무슨 소리인가 싶어 황제를 쳐다보았다. 너무 뜬금없어서 쳐다보면 안 되는 것도 잊었다.
황제는 나를 똑바로 쳐다보면서 웃고 있었다.
"내 막내아들의 숙제를 가로챈 자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