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화 짐꾼 쟁탈전 - 공작령 (4) >
"허, 허허, 허허허···"
예라우프 라피테스가 어이없다는 듯 끊어서 웃었다. 그는 사실 처음에 이 옌시 소년의 외형을 보고 살짝 실망했었다. 딱 봐도 비실비실해 보일 것 같은 체형에, 곱상한 인상에 부드러운 손, 어느 하나 내세울 무재가 아니었다.
아이리에게도, 집사에게도, 호위무사들에게도 이 옌시 소년이 검은 나무의 가디언을 베었다는 얘기는 들었지만 그게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근데 지금 상황은 어떠한가. 거의 옌시 소년이 가지고 놀았다고 해도 될 정도의 위압이었다.
"에, 에퍼리의 승리입니다."
집사도 역시 당황했는지 한 발 늦게 승패 선언을 했다.
예라우프 라피테스는 결과인 승리에 주목하지도 않았다. 그가 감명 받았던 건 그 전이었다.
아무도 보지 못했겠지만, 라피테스는 싸움에 임하기 전 옌시 소년의 눈빛을 봤다. 가라앉았지만 싸늘하지도, 흥분하지도 않은 눈빛. 그야말로 무(無)를 담은 눈빛이었다.
완전한 평정심. 그런 것이 가능한 것인가? 라피테스 공작이 무관이 아니라 정확한 건 모르지만, 대단한 경지라는 건 눈치 챌 수 있었다.
"대단하군."
예라우프는 박수를 쳤다. 에퍼리라 불린 옌시 소년은 단순히 고개를 꾸벅였다. 그의 눈빛은 이미 싸움의 여운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었고, 승리에 도취되어 있지도 않았다.
마치 이길 걸 당연하게라도 생각했다는 듯. 당연하다면 당연하다. 이런 무위를 가지고 있으면 이길거라 생각하는 게 당연하지.
라피테스는 살짝 아쉬움이 들었다. 차라리 소드마스터인 기사단장하고 붙였으면 어땠을까, 그러면 에퍼리의 바닥을 볼 수 있었을까. 하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내가 잘못했군. 이런 자네를 시험했으니 말이야."
"괜찮습니다."
"나는 자네가 마음에 든다네. 어떤가? 공작령에서 일해 보는 건."
예라우프는 거절이란 건 생각해보지도 않았다. 당연하다. 제국의 2인자인 라피테스 공작령에서 일하는 건 엄청난 특혜다.
심지어 라피테스 공작가의 일원으로 옌시 사람이 들어온 것도 최초였다. 라피테스 공작가에는 시종도 옌시 사람이 없었으니까.
하지만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완전히 딴판이었다.
"아, 알프···아니, 집사한테 얘기 못 들으셨습니까?"
"뭔 소리인가?"
"지금은 데모버전입니다."
"데모··· 뭐?"
에퍼리는 그렇게만 말하고 등을 홱 돌렸다. 예라우프는 눈을 끔뻑거리며 집사를 쳐다보았다. 집사의 입술이 실시간으로 마르기 시작했다.
아, 웃기네. 그 철혈의 재상이라던 예라우프 라피테스가 눈을 깜빡거리는 걸 보니까 내 상상 속 이미지와 너무 맞지 않아서 웃겼다. 물론 거기서 웃었으면 곧바로 단두대로 끌려갔겠지.
"여기서 지내면 된다."
"아, 집사님. 저 때문에 고초를 겪으신 것 같던데."
"아무 것도 아니다."
근데 눈두덩이는 왜 파란데? 청인종도 있나. 하하. 하지만 집사는 역시 프로. 나한테 원망하는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나저나, 황도로 가기 전에 결정해줬으면 좋겠다고 하시는구나. 물론 공작님의 전언이다."
그게 그냥 여기로 오라는 말이랑 뭐가 다른데. 집사도 그 말의 의미는 이해하는지 살짝 민망해하고 있다.
"그래요, 알았으니 나가보세요."
"그래. 난 나가보마. 근데 손님이 더 있다."
뭔 손님? 설마 라피테스 공작은 아닐 테지. 허나 문을 슬며시 열고 들어온 건 정말 뜻밖의 사람이었다.
아이리 라피테스였다.
"아가씨, 그럼 대화 잘 나누시길. 차는 곧 올리겠습니다."
"···그래."
"공작님의 말, 잊지 마시고요."
"알았다고. 그 말만 몇 번째야."
아이리는 짜증을 내면서 집사를 손으로 내밀었다. 저, 저, 싸가지 보게. 나는 그래도 공작 영애니까 몸가짐을 바로 하고 의자에 앉았다. 그녀는 우아하게 내 맞은 편 의자에 앉았다. 우리 사이에는 작은 협탁이 있었다. 그만큼 가깝다는 뜻.
가까이서 보니까, 역시 악역영애···가 아니고 더럽게 예쁘네. 사실 외모로 치면 주인공과 비견되어야 할 포지션이니 이 세계관에서도 엄청난 미인 축에 들 것이다.
"무슨 이유로 오셨는지요?"
"할 말이 있어 왔지."
그건 나도 알아. 뭔 할 말이냐고. 아이리는 계속 우물쭈물 거리다가 결국 차가 올라올 때까지 아무 말도 못했다.
근데 집사는 왜 차 내왔으면 얼른 내려가지 왜 문에 붙어있으면서 엿듣고 있는지 모르겠다. 일단 모른 척 해줘야지.
"차 좀 마시면서 진정 좀 하시지요."
"뭔 진정? 내가 긴장이라도 된 것 같아? 참나."
응. 그래 보여. 아이리는 차를 마시면서도 몸을 부르르 떨었다. 차도 아니지. 아이리 거는 핫초코로 보였는데. 결국 차가 써서 그런 건 아니라는 이야기.
"그럼 말씀하세요."
"그래, 간다···"
뭔 에네르기파라도 쏘나. 그녀는 한참 기를 모으는 듯이 말끝을 끌어올리더니 아주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고마워."
"네?"
"구해줘서 고맙다고!"
내가 못 들은 척을 하자 바로 아이리는 비명을 지르면서 말했다. 귀에서 피 날 것 같네.
"아, 미안. 고마워. 정말."
다시 개미가 기어가는 목소리를 내는 아이리. 악역 영애가 악역처럼 행동하지 않으려니까 지치지. 나는 땅바닥에서 숨 쉬는 게 쉬워도, 물고기한테 뭍에서 숨 쉬라는 게 쉽냐고.
"너, 공작가 오지 않을래?"
"그거 얘기하려고 오신 겁니까?"
"응. 솔직히 너는 마음에 안···이, 입이 잘 안 떨어지네. 너 같은 인재를 포섭하려니까."
이성과 본성의 피할 수 없는 한판승부. 심지어 공작에게 한 소리를 들어도 저 삐뚤어진 입은 고쳐지지 않으니 정말 안타까운 본성을 타고났다 하겠다.
"넌 아마 내 호위무사가 될 거야. 내가 사실 소문이 좀 안 좋기는 한데, 그거 다 부풀려진 거고 내 사람은 잘 챙기거든."
네가 소설 속에서 뭐했는지 하나하나 읊어주고 싶다. 물론 일어나지도 않은 미래지만 정말 끔찍한 일이 많았어. 그래도 마리나가 화장실에 있는데 구정물 붓는 건 좀 고전적이면서도 잔인한 일 아니었냐?
"생각해보고요. 그건 아직 결정 난 일이 아닙니다."
내가 단호하게 대답하자 아이리의 몸이 떨렸다. 아마 모욕감에 떠는 듯하다. 그렇겠지. 그녀가 누구에게 거절당할 게 뭐 있겠어. 특히 나 같은 짐꾼 위치에 있던 사람한테.
"넌 그냥, 내 말만 들으면 되거든? 네가 아버지 총애라도 받는 줄 아나보지?"
결국 아이리 내면의 싸움은 보통 사람이 그렇듯 본성이 이기고 말았다.
그 말과 동시에 문이 벌컥 열렸다. 아, 집사는 날 감시하던 게 아니고 아이리를 감시하고 있었던 거구나. 알프레도가 엄한 눈으로 바라보자 아이리가 움찔했다.
아마 라피테스 공작은 아이리에게 나를 예의 있게 응대하라고 지시한 것 같다. 하지만, 라피테스 공작. 딸을 몰라도 너무 모르는 거 아닌가.
"아가씨, 방에서 쉬시지요."
"아, 잘할 수 있는데."
"이미 늦었습니다. 미안하군, 에퍼리."
아이리는 투덜거리면서 방에서 나갔다. 참나, 어이가 없으려니까. 넌 앞으로 의전은 하지 마. 그냥 받기만 해.
어차피 난 여기 너 때문에 온 것도 아니니까. 아이리가 나한테 무슨 감정을 느끼는지도 상관없다.
아이리가 나가고, 나는 그냥 드러누워 쉬고 싶었다. 그래서 알프레도에게 축객령을 내렸다. 내가 볼 때는, 그래도 이 집안에서 그나마 만만한 게 알프레도 집사다.
"집사님, 좀 나가주시겠어요?"
"지금은 못 나가겠군. 들어오실 분이 있어서 말이야."
이건 또 무슨 소리야. 대충 감은 오지. 집사가 극존칭을 쓸 사람이 이 집안에서 많이 있지는 않으니까. 그 중 한 명은 방금 나갔으니 해당 안 되고.
난 막간을 이용해서 궁금한 점을 물어보기로 했다.
"본명이 뭐예요?"
"나? 라임이네. 라임 언더."
"아하."
알프레도 아니었네. 그나저나 세르게이도 아니었단 말이야? 시무룩.
곧 내가 예상한 그 사람이 중후한 발걸음으로 들어왔다. 역시, 예라우프 라피테스 공작이었다.
아마 집사는 내 문에 붙어있으면서 공작에게 계속 보고를 한 듯싶다. 아니, 근데 진짜 묻고 싶다. 딸이 그럴 줄 몰랐는지.
"아직 교육이 더 필요한 아이네."
"네."
"너그럽게 생각해주게. 잘 보면 귀여운 구석이 있는 아이야."
라피테스 공작은 집사가 새로 따른 차를 휘휘 저었다. 당신 자식이니까 그렇게 보이겠지, 라고 말하고 싶지만 목이 날아 갈까봐 참는다.
"아이리의 호위무사는 힘들겠군."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달리 생각하는 바가 있나?"
나는 고민하는 척을 했다. 가장 원하는 건 원하지 않는 것처럼 보여라. 협상의 기본 원리지. 과연 이 노회한 공작을 상대로 내가 속일 수 있을 것인가.
"집사에게 듣기로, 막내 도련님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 분의 호위를 맡으면 어떨까 싶습니다."
"예프린을?"
그가 의외라는 듯 눈을 움찔거렸다. 그리고 내 눈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협상의 절정기에 접어들고 있는 느낌이다.
"예프린은 아이리보다 더 다루기 어려운 아이일세."
"그래도 좋습니다. 전 아이리 영애와 맞지 않습니다."
"무언가 알고 하는 얘기인가?"
"제가 어찌 알겠습니까."
그런데 어찌 모르겠냐. 예프린은 마리나의 절친 중 한 명인걸. 나는 여기서 허접하게 살다 갈 생각이 없다.
적어도 주, 조연들과 엮이면 그들이 꼬리를 쳐주는 귀족 영애와 연애를 하는 걸 바라고 있다. 그런 점에서 예프린은 내 연애의 교두보라고 할 것이다.
"예프린은 공작가를 이어받아야 할 아이지만, 너무 숫기가 없어. 그 아이는 평안히 명상을 하는 걸 좋아하더군. 물론 그것도 공작에게 필요한 덕목이기는 하나, 나는 조금 더 그 아이가 성장했으면 좋겠다네"
공작은 재상. 이 세계에서 많은 협상을 해온 자. 사실상 내 계획을 꿰뚫어본 듯하다. 물론 내 진심까지는 모르겠지만.
"혹시 일주일동안 편히 쉬다 가려는 거면, 고용주로서 그런 마인드는 용납 못하지."
그래, 이렇게 헛다리를 짚게 되어 있지. 물론 공작은 자신에게 주어진 정보 안에서 최선을 다했다. 다만 내가 가진 정보가 비상식적으로 많을 뿐이다.
"그러면 제가 예프린 도련님을 바꾸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무슨 속셈이지?"
공작이 물었다. 이제 그의 정보가 바닥이 난 거지. 성질을 부리는 순간부터 협상은 진 거다.
"제게 주어진 임무라면, 전 따르고 완수할 뿐입니다. 고작 일주일이라고 할지라도."
"16년 동안 그렇게 살았던 아이네. 그걸 고작 일주일 안에 해결할 수 있다고?"
"공작님께도 해 볼만 한 도전일 것입니다."
공작은 미심쩍은 얼굴로 날 쳐다보았다. 난 짐짓 여유로운 표정을 지어보였다. 공작은 이제 정보가 바닥나서 그의 주관적인 입장에서 나를 판단하는 수밖에 없다.
그가 생각하는 나는 어떠한가. 그는 나를 얼마나 바라고 있는가. 마지막 협상의 승패를 가를 척도는 이거다.
공작의 입이 느리게 열렸다.
"허가하지."
"감사합니다."
"다만, 꽤 힘든 길을 선택했다는 걸 알려주고 싶군."
공작이 일어나자 나도 따라 일어나서 트라프비체의 예법을 따랐다. 공작은 본능적으로 자기가 협상에서 밀렸다는 건 아는지, 쓴 웃음을 짓고는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