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60
레벨업 속도는 9.8m/s^2 260화
천사들은 사건의 전말을 알고 있었다. 차희가 전부 설명해 주었기 때문이다. 그 숭고한 희생을 어떻게 은폐하겠는가?
대천사의 장례는 이미 끝났지만, 그 위패가 모셔진 옛 카엘룸 광장의 종탑 아래에는 지금도 하루에 수십, 수백 명의 천사들이 찾아온다.
커다란 단상 위에 에어포스를 기리는 위패가 세워져 있었다. 그 앞에는 대천사의 검이 바닥에 꽂혀 있었고, 왕관이 놓여 있다.
일련의 추모 행사들이 매일같이 열렸다.
차희와 함께 그곳에 도착한 윤성은 천사들 틈에서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날 구한다고 희생했어.”
윤성이 나지막이 말했다. 차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윤성의 기억 속에서 에어포스가 윤성을 위해 무슨 일을 했는지, 그들이 어떻게 클리앙의 함정에서 빠져나왔는지 보았다.
윤성을 향한 에어포스의 마음도.
“대단한 사람이야.”
차희가 말했다.
“그리고 안쓰러워.”
그녀의 말에 윤성이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차희. 에어포스는 인간으로 평생 살아왔지만 사실 천사였다는 걸 알아서 천계로 돌아갔잖아. 대체 어떤 기분이었을까?”
“마제스티엘의 정념들이 남아 있으니 그렇게 불편하지만 한 건 아니었을 거야.”
“그래도…….”
“그래도 적응하기 힘들었겠지. 일반인이었다면 정체성 혼란으로 그대로 무너졌을지도 몰라.”
“조금도 힘든 티를 내지 않았어.”
“전쟁이 한참이었으니까.”
윤성은 단상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대천사의 검과 왕관 앞에 천사들이 두고 간 물건들이 가득하다.
“아이고오. 흑흑흑.”
어떤 나이 든 노인이 울면서 나타났다. 날개는 세 쌍.
그는 신고 있던 신발 한 켤레를 벗어서 그 자리에 두고는 절을 올렸다.
잠시 후엔 잘 차려입은 꼬마 하나가 나타나서 예쁜 지갑을 통째로 올리고 떠났다.
“천계의 의식이래. 대천사가 죽으면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소중한 물건들을 바친대.”
차희가 속삭였다.
“일종의 기부 같은 거야. 저 물건들은 다시 가난한 리베르티들한테 나눠지고.”
“그렇군.”
윤성은 랜더의 코트를 벗었다.
“이 코트, 원래 에어포스 거였어.”
“돌려주려고?”
“응.”
“잠깐만.”
차희는 광장 한쪽으로 달려가더니 곧 조그만 꽃다발 하나를 가지고 왔다.
두 사람은 랜더의 코트 위에 꽃다발을 얹어서 에어포스의 위패 앞에 바쳤다.
***
“찔러, 창!”
바토리로부터 그룬헤잘드의 영지를 하사받은 마계의 새로운 백작이자 군단장 글로디안은 병사들의 훈련에 열중이다.
‘이전의 전쟁들에서 아무런 활약도 못 했다.’
그가 분노에 이를 갈았다.
위대한 그룬헤잘드의 명예에 먹칠을 한 기분이다. 언젠가 또 쳐들어올 침략자들에 대비해 이 마계를 지켜내기 위해서 마계의 힘의 증강은 필수적이다.
“글로디안!”
갑자기 누군가 그에게 소리쳤다.
“바토리 님!”
라센 북부를 여행하던 중 잠깐 글로디안의 성에 들렀던 바토리가 그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어쩐 일이십니까?”
“이제 떠날 생각이라 인사하러 왔다.”
“좀 더 계시지 않고요?”
“긴급 소식이 들어와서 당장 떠나야 해.”
“긴급 소식?”
콰광!
갑자기 연병장 한편에 포탈이 열리더니 안에서 거대한 무언가가 고개를 불쑥 내밀었다.
“어라. 잘못 나왔군요. 실수.”
아리가 눈을 번들거리며 말했다.
“메탈로이드가 실수 같은 것도 하느냐?”
바토리가 황당한 듯 말했다.
“최근에 포탈 이동값을 재조정했거든요. 마계의 루비 무역 때문에. 아시죠?”
“쯧쯔. 이래서 마법 값을 전부 수치화해놓고 다니는 로봇들은 하등한 것이다. 무릇 마법이라면 자신의 기감에 의존해 직접 값을 잡아야 하는 법이 아니겠느냐?”
“아, 그렇게 기감 뛰어나신 분이 천계랑 무역한다고 뻔질나게 들락거리면서 헬라엘이 이번 소식 알아채기 전까지 전혀 모르셨나 보죠?”
아리가 빈정거렸다.
“그건…….”
“뭡니까? 바토리 님? 저 로봇은?”
글로디안의 젊은 부관이 앞으로 바짝 나섰다.
“바토리 님의 적이라면 제가 처치하겠습니다!”
바토리는 눈살을 찌푸리며 그를 제지하고는 말했다.
“아무래도 우리의 대화도 사람들 앞에서는 좀 조정할 필요가 있겠다. 아리.”
“동감입니다. 평화의 시대니까요. 메탈로이드는 저 혼자 통제할 수 있지만, 마계 귀족한텐 조금 힘겨워 보이는군요?”
부관이 펄쩍 뛰었다.
“감히 지금 우리 앞에서 바토리 님을 욕보이는…….”
“아오. 가만히 좀 있어.”
바토리가 그의 팔을 잡아 뒤로 당겼다.
“너희가 떼로 덤벼도 당해낼 상대가 아니다. 그리고 적도 아니야. 내 친구다.”
“캬아.”
아리가 감탄했다.
“바토리. 오글거려서 아침에 먹은 윤활액을 토할 거 같습니다. 그런 기능은 없지만요.”
바토리의 얼굴이 약간 붉어졌다.
“아무튼. 다들 훈련하고 있어라. 글로디안 말 잘 듣고.”
그녀가 말했다.
“잠깐 천계에 다녀오마.”
그녀가 차원문을 만들었다. 그 안으로 발을 디디자 아리도 차원문을 만들어 이동했다.
“안주인님!”
아리가 문 너머에서 가장 먼저 발견한 것은 차희였다.
“잘 지내셨습니까?”
“그럼. 너도 잘 지냈어?”
차희가 아리의 어깨를 툭툭 쳤다.
“뭔가 좀……. 바뀐 거 같네?”
“버전이 바뀌었습니다. 부품도, 소프트웨어도, 이것저것 업그레이드했죠.”
콰광!
차원문이 또 하나 열리면서 용제가 들어왔다. 인간형으로 변신한 상태였다. 실렌티가 뒤따랐다.
“어라. 오늘 미팅은 관리자들만 올 수 있는데요.”
아리가 실렌티를 가로막자, 실렌티는 입을 쩍 벌렸다.
혀가 용제처럼 금색으로 변했다.
“수행 중이다.”
실렌티가 말했다.
“그 아이에게 용관을 넘겨줄 생각이다.”
용제가 말했다.
“자, 이제 모두 모였나? 미들로드는?”
그러자 그늘진 구석에서 고양이 한 마리가 확 튀어나왔다. 고양이는 벌떡 일어서며 몸이 커지더니 미들로드로 변신했다.
“한참 전부터 여기 와있었다. 반푼이들. 시간 없으니 빨리 끝내자.”
“퀸이 없어.”
바토리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콰과광!
차원문이 또 하나 열렸다.
“퀸인가?”
“아냐, 바토리. 저 차원문은…….”
차희가 빙그레 웃었다.
차원문 너머에서 윤성이 모습을 드러냈다.
“다들 모였어?”
“퀸이 없다.”
용제가 대답했다.
“퀸은 이미 사당 안에 들어갔어. 요즘 알 낳는 시기인데 모성 같은 게 엄청 강해져 가지고.”
윤성이 말했다.
“엘리지아로 치면 유체 정도 되는 어린애가 혼자 있다고 그랬더니 안절부절못하면서 자꾸 발을 동동 구르기에 그냥 먼저 들어가 있으랬거든.”
“그럼 다 모였네.”
차희가 말했다. 그녀는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대천사의 사당으로 다가갔다.
왈칵!
문을 열자 안에는 퀸이 꼬리를 흔들며 무언가를 꼭 안아 어르고 있었다.
“애 기절하겠다.”
미들로드가 인상을 쓰며 다가갔다.
“내려놔라, 퀸. 네 얼굴 보면 나도 가끔 깜짝깜짝 놀라는데 애한테 얼마나 충격이 크겠냐.”
“이 행성에서 가장 많은 수난을 겪은 애야. 이렇게 예쁜 애가…….”
퀸이 말했다.
“이번엔 절대 죽게 두지 않겠어.”
콰앙!
퀸의 꼬리가 사당 바닥을 한 번 후려쳤다. 그녀는 이빨을 드러내며 그르렁댔다.
“내 생각에 전에는 인계로 내려가서 문제가 됐던 거야. 다음엔 여차하면 엘리지아계로 오라고 해야 해. 내가 확실히 보호해 줄 자신이 있으니까.”
“다른 계로 망명하는 상황 자체가 일어나면 안 되지. 멍청아!”
미들로드가 참을 수 없다는 듯 역정을 냈다.
“이제 괜찮을 거야, 퀸.”
차희가 다가갔다.
“그 누구도 대천사를 해칠 수 없어.”
그녀가 퀸의 품을 향해 손을 뻗었다.
불과 다섯 살 남짓한 소녀가 퀸의 팔뚝 사이에서 차희를 얌전히 쳐다보았다.
순수하고 청아한 피부.
정의롭고 따뜻한 눈빛.
누구나 알 수 있다. 찬란하게 빛나는 이 마력은 분명히 마제스티엘이다.
천계의 관리자가 환생했다. 모든 관리자를 한데 모은 빅뉴스가 바로 그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큰 증거가 있다.
화악!
아이의 몸이 떠올랐다.
“비행?”
바토리가 깜짝 놀랐다.
“에어포스 때보다 훨씬 이르잖아? 천계라서 그런가?”
“와아.”
관리자들이 감탄했다.
천계의 관리자는 공중을 천천히 유영했다.
마치 한 줌의 배꽃이 하늘거리는 것 같았다.
모두가 홀린 것처럼 그 모습을 바라보는 가운데, 아이는 차희와 바토리를 슬며시 지나쳐서 윤성의 품에 쏙 안겼다.
“어…….”
차희가 약간 표정이 굳었다.
“쟤, 아직 각성 안 한 거 맞지?”
그녀가 아리에게 물었다.
“에어포스 때의 감정은 없는 거지?”
“이론상으론 그렇습니다.”
아리의 대답을 잠깐 곱씹던 차희가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그래. 애한테 무슨 생각이야. 정신 차리자. 민차희.”
그녀가 자신의 뺨을 양손으로 가볍게 두들겼다.
“대천사가 맞군.”
윤성이 미소 짓자 아이가 따라서 씽긋 웃었다.
윤성은 아이를 꼭 안은 채 실렌티 쪽을 보고 말했다.
“헬라엘한테 전해줘. 수호자가 확인했으니 이 애한테 대천사의 교육을 해달라고. 그리고 성인이 되면 내가 직접 마제스티엘의 스톤을 가지고 찾아간다고.”
“스톤은 네가 가지고 있는 거야?”
차희가 물었다.
“응. 새로 코드를 짰어. 각성해도 전대의 감정들이 남지 않도록.”
윤성이 말했다.
“이제 대천사도 행복하고 즐거운 것만 느끼면서 살아야지.”
그가 대천사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
“넥스트.”
백마 길드 공채 면접실. 코르소가 지원자 차트를 보면서 말했다.
이제는 10년 차에 접어든 신차민이 옆에서 다리를 떨었다.
“가만히 좀 있어요.”
코르소가 핀잔을 주었다.
“헤헤. 하지 정맥이 오는 거 같아가지고.”
신차민이 피식 웃었다.
“근데 코르소. 결혼하면 어떤 기분이에요?”
“기분?”
“좋아요?”
“결혼은 평생 친구를 고르는 겁니다. 신차민. 왜요? 결혼하려고?”
“고민 중이에요.”
“굳이 결혼하지 않아도 평생 친구를 만들 수는 있어요.”
“인생 선배 입장에서 코르소는 결혼 반대하시는 건가요?”
“보통은 그런데, 신차민 같은 경우엔 찬성입니다.”
“왜요?”
“당신 같은 철딱서니를 다윤 과장님이 거둬주신다면 여기서부터 기술과학부까지 삼보일배하면서 가야 할걸.”
“헤헤. 그건 저도 동의해요. 근데 코르소 한국어 엄청 늘었네요. 삼보일배 같은 단어는 어떻게 아는 거예요?”
“난 당신이 헌터가 되기 한참 전부터 한국에 살았습니다. 그리고 당신이 헌터가 된 지가 10년이나 지났죠.”
“하긴.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니까요. 근데 다음 지원자 왜 안 들어와?”
“잠깐.”
코르소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가 창밖을 내다보았다.
“오우, 씻!”
“뭡니까?”
차민이 고개를 불쑥 내밀었다.
위이이이이잉!
사이렌이 터졌다.
“아, 퇴근 조졌따리…….”
신차민의 목소리에 우울감이 묻어났다.
“코르소. 타입이 뭐죠?”
“용계에서 안티 실렌티 파의 잔당들 생겼던 거 아시죠?”
“아, 설마……. 아니라고 해주세요.”
“소탕하고 남은 녀석들이 이쪽으로 오려는 것 같은데.”
콰과광!
백마 광장 앞에 게이트가 분출했다. 동시에 하늘에서도 게이트가 하나 열렸다.
이제는 황금드래곤이 된 실렌티와 거대 드래곤 다섯이 하늘에서부터 모습을 드러냈다.
“용계 일이다. 우리가 처리하겠다. 미안하다.”
실렌티가 용안으로 지상을 훑으며 소리쳤다.
“그렇게 얘기해 봤자, 전장이 인계라면 가만히 있을 수가 없잖아.”
코르소가 머리를 긁적였다.
“윤성 형님은 용계에 저런 것들 안 치우고 뭐 하시는 거야?”
차민이 불평했다.
“이런 사소한 일까지 신경 쓰기엔 너무 바쁜 분이니까요.”
“차희 대표님하고 데이트 한 번만 줄여도 하겠구만!”
차민이 창문을 열었다.
“갑시다! 코르소!”
“어라, 잠깐.”
“네?”
아래층 창문이 열리더니 누군가가 고개를 불쑥 내밀었다.
겨우 스무 살 정도 되었을 것 같은 여자였다.
그녀는 하늘에 떠 있는 실렌티를 보기 위해 고개를 들어 올렸다.
“앗, 저 사람!”
같은 타이밍에 얼굴을 알아본 코르소가 소리쳤다.
“누군데요? 전 애인?”
“미쳤어요?”
“농담이에요.”
“지원자입니다. 이름이……. 유나랬나?”
그녀는 창틀에 발 하나를 올리더니 지상을 쏘아보았다.
새로 등극한 용제가 잘 처리하겠지만 그래도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 헌터가 지상에 있어야 한다.
유나는 주먹을 꽉 쥐었다. 지상까지는 꽤 거리가 멀지만 다치진 않을 거다.
“후우우.”
그녀가 깊이 숨을 내쉬었다.
먼 옛날, 어느 폐건물에서 카멜리들에게 쫓기던 그녀를 그 전설적인 헌터가 구해주었다.
그때부터 줄곧, 그 헌터의 첫 랜딩이 뇌리에 박혀 사라지지 않았다.
탁!
그녀가 창틀을 박차고 날아올랐다.
한 손은 지상을 향해 수직으로 펼치고.
두 무릎은 유연하게 구부린다.
바닥에 닿는 것은 반드시 두 발과 한 손의 3점 착지.
남은 팔은 자유롭게 펼쳐 무게 중심을 잡는다.
콰앙!
“랜딩 성공!”
그녀가 주먹을 불끈 쥐며 작게 혼잣말을 했다.
메시지창은 없지만.
유나가 떨어지는 모습을 위층에서 신차민과 코르소는 황당한 듯 지켜보고 있었다.
“12층인데 안 다쳤을까요.”
차민이 멍한 표정으로 말했다.
“A급 이상인가 보지. 가자!”
코르소가 외쳤다.
사방에서 헌터들이 현장으로 우르르 뛰어들고 있었다.
그것은 이 땅을 지켜내기 위한 저마다의 랜딩이었다.
The end
※완결 후기
안녕하세요. 임이도입니다. 우선 <레벨업 속도는 9.8m/s^2>를 읽어주신 독자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데드풀 1편을 보다가 우연히 포착한 ‘슈퍼히어로랜딩’이라는 클리셰에서 260편에 이르는 이야기가 나오게 되었습니다.
제가 쓴 이야기가 스스로도 재밌어서 밤잠을 설친 적도 있었고, 다음 이야기를 어떻게 전개할지 몰라 시간을 한참 허비한 끝에 새벽 늦게 첫 문단을 시작한 적도 있습니다.
제 역량이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여기까지 무사히 올 수 있었던 것은 여러분의 응원 덕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저를 끝까지 믿고 지지해 주신 가족들과, 데이트한다고 만나서는 카페에 앉아서 글만 쓰는 제 옆에서 지루함을 꾹 참고 기다려 준 제 여자친구, 그리고 이 작품의 시작부터 끝까지를 함께해 주신 최고의 파트너 kwbooks와 임학두 담당자님께 특별히 감사 인사를 드립니다.
더욱 재밌고 신선한 글로 다시 돌아오겠습니다. 그동안 모든 분께 항상 즐거운 일만 가득하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