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59
레벨업 속도는 9.8m/s^2 259화
만약 향수병 안에 향수 분자들이 잔뜩 들어 있다고 해보자.
그 향수병과 향수 분자들은 며칠이 지나도록 거의 그대로일 것이다.
하지만 100만 년이 지나도 그대로일까?
100억 년 후에는?
‘먼지조차 남지 않을 것이다.’
이 우주는 어떤 물질이 좁은 공간에 질서 정연하게 밀집해 있는 것을 원치 않는다.
무엇이든 분해하고 흩뜨려 우주 곳곳에 퍼뜨려 놓으려는 힘.
세계의 외연을 무한히 확장시키고 서로의 거리를 벌려놓는 힘.
윤성이 손에 넣은 만물을 재로 만드는 힘.
그것은 엔트로피 법칙 그 자체다.
끝없이 증가하기만 하는 무질서도는 언젠가 모든 것에 멸망을 초래한다.
태양을 비롯한 모든 별들도, 은하도 연료를 소모하고 나면 먼지가 되어버릴 것이다.
인간도 콜로라 성인도 이 우주적인 힘의 흐름 앞에는 어떤 의미조차 없다.
그야말로 신의 힘이라 할 수 있다. 수호자들에게도 이런 것은 없으니.
스스스스
클리앙의 머리가 재가 되어버렸다.
그의 몸이 흐물흐물 퍼져나간다.
“너 하나만이 아냐.”
윤성의 시선이 하늘을 향했다. 그의 기감이 달을 감싸 안았다.
“이 땅을 위협하던 모두들. 사라져라.”
슈우우욱-
달에서 대기하던 콜로라 전사들이 하나씩 재가 되어 사라지기 시작했다. 그들이 가져온 장비들조차 흔적을 남기지 않았다.
콜로라 전함이 사라지는 데는 불과 10초 남짓한 시간이 걸렸을 뿐.
이제 윤성은 회복된 샌텀 타워 41층을 향해 손을 뻗었다.
클리앙이 장치해 놓은, 침식형 던전이 저 자리에서 발생한다.
쿠구구구구!
윤성은 잠재적 게이트를 마력으로 메워서 닫아버렸다.
‘이젠 정말로 끝이다.’
익시튬 때처럼 승리에 고취되어 내린 섣부른 판단이 아니다.
6억 4천만 광년 거리의 버프를 가진 우주의 패자로서 확신할 수 있다.
그의 감각 능력은 이미 근처의 수많은 은하와 수백 년의 미래까지를 모두 아우르고 있었다.
적어도 콜로라와의 싸움은 더 이상 없다. 그쪽에 새로운 수호자가 탄생하고 다음 정복 전쟁을 벌이기 전까지는.
아마 수천 년 후가 되리라.
윤성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직도 시간은 멈춰 있다.
바토리, 아리, 미들로드, 용제, 퀸, 헬라엘.
각 차원의 군대가 밀집해 있다.
시간은 침식형 게이트 발생 전이지만, 그들은 아직 인계에 있었다. 각자가 넘어왔던 차원문의 발생 지점 근처에 머물러 있다.
차원을 넘어가는 방법은 차원문을 통하는 것뿐이기 때문인가?
클리앙 군대의 침공 자체가 없었던 일이 되어버렸으니, 시간을 재생시키면 다들 어리둥절하겠군.
“후후.”
윤성은 샌텀 타워를 올라가 41층으로 이동했다.
제작진이 스튜디오의 빈 무대를 카메라로 찍고 있었다. 원래 윤성이 있었어야 할 자리.
멈춘 시간 속에서 사회자가 빈 의자를 향해 질문하고 있었다.
약간 소동은 생기겠지만 괜찮겠지. 주위를 둘러싼 객석을 보며 윤성이 빙긋 웃었다.
윤성은 스튜디오 밖의 대기실로 이동했다.
그곳에 차희가 있었다.
“수고 많았어.”
그가 차희의 머리를 살짝 안으며 그에게 키스했다.
이제 그들의 삶을 되돌려줄 때다.
막을 내리고 대기실로 돌아갈 때다. 힘은 힘 자체일 뿐. 세상은 인간들의 것이니까.
‘감히 신의 힘을 손에 넣은 대가가 어떠할지 대강은 짐작하고 있다.’
기꺼이 받아들일 생각이다.
하나의 문장을 맺었는데 마침표를 안 찍을 순 없으니까.
윤성은 오른손을 들었다.
엄지와 중지 끝이 맞닿았다.
딱!
손가락을 튕김과 동시에 그의 몸이 옆으로 기울었다.
쿠웅!
바닥에 쓰러진 윤성을 보고 차희가 화들짝 놀랐다.
“윤성아!”
그녀가 윤성을 와락 끌어안았다.
“뭐, 뭐야?”
대기실의 제작진이 놀라서 윤성을 바라보았다.
“윤성 씨? 좀 전까지 녹화실 안에 있었는데?”
“에어포스는 어디 갔어?”
“방송 중지! 끊어! 끊어!”
지상에서는 헌터들이 사방을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왜 다 밀집해 있는 거야?”
“다른 차원 녀석들이다. 하지만 차원문도 없이 어디서 이만한 군대가 갑자기?”
“용제!”
바토리가 눈을 날카롭게 뜨며 외쳤다.
“내 기감에 이상한 게 느껴진다. 대기 중 마력의 파동이 그 어느 때보다도 이색적이다.”
“나도 안다. 이것은……. 시간 마법이군.”
“옛 문헌에서 읽은 적 있다.”
“시전자는……. 주인님인가요?”
아리가 샌텀 타워 41층을 향해 눈을 번쩍였다.
“어서 올라가자!”
바토리가 용제의 목 위에 멋대로 올라탔다.
화아악!
용제가 하늘로 날아오르자 아리가 부스터를 켜고 함께 솟구쳤다. 그들은 41층 창가로 접근했고, 용제는 인간으로 변신했다.
그와 바토리가 동시에 창문 안으로 난입했다.
와지직!
다음으로 아리가 창틀을 박살 내며 그 거구를 안으로 밀어 넣었다.
미들로드와 퀸도 비슷한 시각에 건물 41층을 향해 뛰어올랐다.
헬라엘을 비롯한 천사들도 41층으로 뛰어올랐다.
그들은 윤성 때문이 아니다. 에어포스의 기감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쾅!
아리가 41층의 스튜디오 대기실 문을 열고 들어섰다.
“윤성! 왜, 왜 이러는 거야?”
차희가 울먹이며 그의 몸을 흔들어대고 있었다.
더 이상 그의 심장이 뛰지 않았다.
***
“이런 걸 먹고 살다니?”
학식으로 나온 돈가스를 두 조각 먹고 신차민이 놀랍다는 듯 말했다.
“왜? 난 먹을 만한데.”
다윤이 고개를 갸웃했다.
“너무 맛있다는 뜻이었어. 우리 회사는 구내식당 맛없거든.”
“백마 길드가?”
다윤이 정색했다.
“말도 안 돼. 전에 차희 언니랑 같이 갔을 때 엄청 맛있던데. 호텔 뷔페식이잖아?”
“음.”
“너도 처음에 되게 맛있다고 했었어!”
“그랬나? 사실 요즘 같이 일하는 아재가 자꾸 영어 써서 그런가, 밥 먹을 때마다 체할 거 같아.”
“누군데?”
“코르소라고 좀 이상한 외국인 있어.”
신차민이 돈가스를 슥슥 썰며 말했다.
조각 하나의 크기가 다윤이 썰어놓은 것의 세 배다.
‘저걸 한 입에 씹을 수 있단 말이야?’
다윤은 서커스라도 보는 듯한 표정으로 돈가스를 먹는 신차민을 지켜보았다.
식사 속도의 차이가 너무 컸고, 신차민이 그걸 배려해 줄 정도로 사려 깊지 않았기 때문에 다윤이 반쯤 먹었을 때 차민은 휴대폰을 만지고 있었다.
“나, 공강 네 시간 정도 남는데. 뭐할까?”
다윤이 말했다.
“옷이나 살래?”
“근처에 살 데가 있…….”
“와아!”
갑자기 학생 식당 입구 쪽에서 학생들의 감탄이 터져 나왔다.
“뭐야?”
차민이 고개를 삐죽 내밀어 살폈다.
큰 키에 검은 망토를 두르고 이마에 뿔이 난 남자 넷과 여자 둘이 들어오고 있었다.
“마족이다.”
“이번에 왔다는 교환 학생인가 봐.”
학생들이 수군거렸다.
“별거 아니구만.”
신차민이 피식 웃었다.
“누군데?”
다윤이 물었다.
“차원간 교류 계획 목적으로 들어온 애들이야. 마족들.”
“아는 사람들이야?”
“아니. 생판 처음 보는데. 그리고 쟤들 인간으로 치면 민간인이야. 너처럼 대학생 같은 거라고. 근데 직장인 헌터인 내가 알 리가.”
차민이 으스댔다.
“익시튬 때 같이 싸운 귀족들 정도면 알지도?”
“누가 같이 싸워. 너 지하 벙커 담당이었다며.”
“버, 벙커도 중요하거든?”
“아, 우리 차희 언니한테 가볼까?”
“차희 대표님 굉장히, 굉장히, 굉장히 바쁜 분이야.”
“세 번이나 강조할 정도로?”
“전에 스케줄을 우연히 봤는데 거의 인간이 아닌 수준이야. 하루 만에 차원 두 개랑 미국이랑 말레이시아를 왔다 갔다 하는 사람이라고. 내 생각엔 대표님 분명 타임 스톤 갖고 있다.”
“하지만 언니가 오늘 꼭 오랬는데.”
“정말?”
다윤이 고개를 끄덕였다.
“원래 저녁때 소윤이랑 같이 가기로 했는데, 그냥 공강 시간에 혼자 잠깐 다녀오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아서. 언니는 시간 상관 없댔거든. 오늘 스케줄 없다고.”
“대표님이 스케줄이 없다고?”
차민이 눈을 가늘게 떴다.
“말도 안 돼! 일요일에도 꽉 차 있는 분이야!”
“하지만 본인이 그렇다고 하셨는걸. 일부러 비웠대. 일단 가보자.”
다윤은 빙긋 웃으며 차민과 함께 식기를 반납했다.
두 사람은 백마 길드로 이동했다. 지하철을 타고 30분 정도 걸렸다.
백마 길드 광장.
이제는 거대 비즈니스의 중심이자 세계 평화의 상징이 되어버린 이곳.
요즘은 헌터보다도 민간인이 더 많다.
차희가 차원 교류 사업을 시작한 이후 그쪽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대거 늘어났기 때문이다.
다윤은 차민과 함께 본관에 들어가 엘리베이터를 탔다. 대표 사무실로 이동하자 차희의 업무를 도와주는 비서진이 맞아주었다.
윤성이 쓰러진 지 몇 달이 지났지만 윤성의 동생이라는 다윤의 신분은 이곳에서 꽤 영향력이 있다.
차희와의 관계를 사람들이 알기 때문이기도 하다.
차희는 대표 사무실로 두 사람을 들이는 대신 직접 사무실에서 나왔다.
복도를 성큼성큼 가로지르는 그녀의 걸음에 힘이 가득하다.
“오느라 고생했어. 날씨 덥지?”
그녀가 방 안의 냉장고에서 꺼내온 듯한 음료를 내밀었다.
“벌써 7월 하순이네. 학교는 방학 중이야?”
“계절 듣고 있어요.”
“그렇구나. 차민이가 잘 해줘?”
“뭐, 가끔?”
다윤이 웃으면서 말했다.
세 사람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VIP 병동.
이곳으로 들어올 때부터 다윤의 가슴이 두근거렸다.
‘차희 언니가 부른 이유가 혹시?’
철컥.
차희가 문을 열었다.
“오빠…….”
“어, 왔어?”
침대에 누운 채 휴대폰을 만지던 윤성이 빙긋 웃었다.
다윤은 눈물을 왈칵 쏟으며 달려들었다.
“형님!”
신차민이 그녀를 뒤따랐다.
“울지 마. 괜찮아.”
윤성이 다윤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넌 왜 또 울어?”
“안 울어!”
눈가를 닦아내며 차희가 얼른 대답했다. 이미 한 번 펑펑 울었음에도 윤성을 보니까 또 눈물이 났다.
“너 진짜. 몇 달 만에 깬 줄 알아?”
“미안. 하하. 근데 소윤이는?”
윤성이 멋쩍게 웃으며 다윤에게 물었다.
“걔 고등학생이야. 이 시간엔 학교에 있지.”
“그렇구나.”
“형님 근데 마력이?”
신차민이 윤성 곁에 앉으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으음.”
윤성이 손을 쥐락펴락했다.
“아무래도 난…….”
“E급으로 돌아가신 겁니까?”
“아니. 아마 이젠 인간이 아닌 모양이야.”
“인간이 아니라고?”
“인간 강윤성은 너무 큰 힘을 사용한 나머지 죽어버렸거든.”
“너무 큰 힘을 쓰다뇨?”
“너흰 몰라도 돼.”
윤성이 씩 웃었다.
“이제 여기 있는 건 수호자 강윤성이다.”
그의 눈앞에 마법 시스템 코드들이 떠다녔다.
“수호자요?”
“근데 왜 갑자기 기절했던 거야?”
다윤이 물었다.
윤성은 차희를 힐끔 살펴보았다.
“차희는 알지?”
“응.”
차희가 쓰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언니는 어떻게 알아요?”
차희는 윤성이 쓰러졌던 순간을 다시 떠올렸다.
윤성이 죽음 속으로 침전하고 있을 때, 그의 머릿속에 무언가가 들어왔다.
그것은 차희의 의식이었다.
인계 관리자의 힘이 그와 연대하고 있었다.
그 안에서 차희가 본 것은 매우 충격적인 것이었다.
시간이 멈추어 있었다.
클리앙의 침공과 함께 벌어졌던 어마어마한 전쟁이 보였다.
윤성이 무엇을 희생했는지도.
“그런 버프를 쓸 수 있었다는 게 기적이야.”
차희가 말했다.
“글쎄.”
윤성이 빙긋 웃었다.
“나도 처음엔 기적이라 생각했는데. 수호자가 되고 나니 또 생각이 달라지네.”
“뭐가?”
“전부 우리가 해낸 거야.”
윤성이 말했다.
“네가 나한테 버프를 걸어줬기 때문에 그걸로 랜딩을 견뎌낸 거야.”
차희가 피식 웃었다.
“인간 관리자의 마법 정도로 6억 4천만 광년 거리의 랜딩의 부작용을…….”
“견뎌낼 수 있지.”
윤성이 단호하게 말했다.
“기적이 아니라 모든 건 인과에 따른 거였어. 클리앙은 수호자 둘을 죽이면서 별들의 저주를 받았거든.”
“저주?”
“지구를 침공한다는 결정을 내린 거 말이야.”
윤성이 웃으며 말했다.
“아무튼 이젠 다 끝났는데, 나랑 같이 좀 갈 데가 있어. 차희.”
“가자.”
그녀가 손을 뻗었다.
<차원문 발동!>
“이런 것도 할 줄 알아?”
윤성이 깜짝 놀랐다.
“인계 관리자인걸. 물론 그래 봤자 차원 통신, 차원문이 전부지만.”
“어디로 갈지도 알고 있었군?”
차원문의 타입을 살펴본 윤성이 말했다.
차희가 빙긋 웃으며 차원문을 넘었다.
“어디 가?”
다윤이 윤성에게 물었다.
윤성의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조문하러.”
윤성이 천계의 차원문을 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