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57
레벨업 속도는 9.8m/s^2 257화
“헉, 헉.”
윤성은 재건축 빌딩의 나선 계단을 올라 안쪽으로 들어갔다. 더 이상 바깥에서는 저격할 각도가 나오지 않는다.
그러나 콜로라 전사들은 직접 계단을 뛰어올라 그를 뒤쫓았다.
탕! 탕! 탕!
군화에 짓밟히는 계단이 요란한 소리를 냈다.
‘처음 Joker를 각성하던 때와 오버랩되는군.’
물론 몇 가지 다른 점은 있다.
하급 마수 카멜리가 아니라 콜로라 전사들이 뒤쫓는다는 것.
이곳이 지구가 아니라는 것.
그리고 구할 대상이 어린애 하나가 아니라 전 세계라는 점.
“죽어라!”
어느새 달려온 전사 하나가 윤성을 향해 클로를 겨누고 달려들었다.
퍼억!
윤성의 펀치가 그의 얼굴에 꽂혔다. 피가 왈칵 튀었는데 콜로라 전사의 것이 아니었다. 윤성의 괴사한 손목 조직에서 나온 것이다.
능력치들은 여전히 높지만 몸이 안 따라준다.
힘이 제대로 실리지 않은 탓에 적은 얼굴을 움켜쥐고 비틀거렸지만 쓰러지진 않았다.
제힘을 발휘할 수만 있으면 이것들 한 주먹 거린데.
투두두두!
뒤이어 달려온 전사 두 명이 윤성에게 라이플을 쏘아댔다.
어깨와 가슴, 목, 아랫배에 마법 총알이 박힌다.
콸콸 쏟아지는 피. 정신이 아찔하다. 윤성이 휘청거리는 것을 보고 전사 셋이 용기를 얻었다. 그들이 클로를 휘두르며 차례로 달려들었다.
캉!
제일 처음 들어온 공격을 윤성이 단검으로 막아냈다. 그러나 머리 색 노란 전사의 클로가 윤성의 복부에 박혔다.
“내가 마무리할게!”
가장 뒤에 있던 녀석이 클로를 겨누고 윤성에게 덤벼드는 순간.
쉬익!
윤성은 아슬아슬하게 그의 공격을 피하고는 왼손으로 목을 콱 움켜쥐었다.
“크헉.”
싸악!
이번엔 오른손에 든 단검을 휘둘러 아랫배를 찌른 손목을 잘라 버렸다.
“끄아악!”
노란 머리 전사가 손목을 움켜쥐고 비명을 질렀다.
콰직!
다음으론 손가락에 힘을 줘서 왼손에 붙잡힌 놈의 목을 부러뜨렸다.
하지만 윤성의 손가락도 함께 괴사해 부서지고 말았다.
“헉…… 헉…….”
남은 적은 둘. 하나는 제일 앞서 덤벼들었던 녀석이고, 또 하나는 손목 잘린 놈이다.
“다, 다가오지 마.”
윤성이 뒷걸음질 치며 말했다.
피를 너무 많이 흘렸다. 재생력도 거의 한계에 이른 모양이다.
윤성은 밖을 힐끔 살폈다.
약 7층. 30미터 정도 될 듯하다.
이 정도면 될까?
“강윤성!”
계단을 뒤늦게 올라온 엔이 소리쳤다.
“이제 싸움은 끝났다. 항복해.”
“…….”
“그 몸으로 뭘 더 할 수 있겠어?”
“몸은 회복될 거다.”
“클리앙 님도 그런 얘길 했지. 네가 비정상적인 재생 능력을 갖추고 있다고. 하지만 소용없어.”
엔이 한 걸음씩 다가오며 말했다.
“네 고향은 이미 전멸 상태다. 네가 왜 여기 와서 이러는지는 모르겠지만 네가 할 수 있는 건 이제 아무것도 없어.”
“전멸이라고?”
“클리앙 대표님이 보내주신 영상이야. 잘 봐.”
엔이 통신기를 내밀었다.
지구의 미디어에서 생방송되었던 클리앙의 메시지가 나타났다.
캠코더에 비친 현장은 끔찍했다. 대부분이 죽었다. 차희는 클리앙의 클로 바로 옆에서 몸을 떨고 있었다.
순간이동석은 그녀의 손아귀에 있었지만, 그 높이는 지상에서 불과 십 센티미터 정도였다.
이러면 ‘랜딩’이 불가하다.
차원 이동하면 그냥 몸이 지상에 붙은 채로 나타날 것이다. ‘낙하’할 공간이 없다.
영상 화면 내의 클리앙이 말했다.
-다시 말하지만 3분의 타이머를 걸어놓고 이 폭탄을 작동시켰다. 이제는 2분 남았다. 어서 와라, 강윤성.
“…….”
윤성의 시선이 바닥으로 내려갔다.
“네가 항복하겠다면 클리앙 님께 지금 메시지를 써주겠다. 그럼 네 목숨 정도로 봐주실지도 모르지.”
엔이 말했다.
“난…….”
“무릎을 꿇어. 증거 사진으로 보내드리게.”
윤성은 밖을 다시 내다보았다.
바람이 분다.
지금까지의 긴 여행이 모두 꿈같다.
랜딩에 성공해도 6억 4천만 광년이라는 이 막대한 거리에서 발생하는 버프를 감당할 수 있을까.
랜딩하자마자 죽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프로그램이 깨질지도 모르고.
“내가 항복하면……. 차희는 살려주는 건가?”
윤성이 물었다.
“몰라. 하지만 그게 유일한 가능성이지.”
윤성이 긴 한숨을 뱉었다.
그의 무릎이 천천히 구부러지는 순간이었다.
-클리앙!
통신기 화면 너머에서 누군가의 앙칼진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윤성의 눈이 커졌다.
목소리의 주인공은 신차민이었다.
“저 바보 녀석이…….”
신차민은 장검을 쳐들고 클리앙을 향해 돌진하고 있었다.
클리앙은 차희에게 버프를 받은 SS급 헌터들조차 빗자루로 쓸어버린 낙엽처럼 초라해지는 적이다.
그 클리앙에게 A급 헌터 신차민이 달려드는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코르소와 카다시안, 성희주, 태진수, 최중일, 추준호, 천명준, 이시열. 어디선가 몇 번 본 듯한 A급 헌터들이 달려가고 있었다.
“A급 이하는 전장에서 빠지라고 했잖아!”
차희가 소리쳤다.
“그럴 수 없어요!”
표진수가 외쳤다.
“당신들이 당했다면, 다음은 우리의 턴입니다!”
코르소가 말했다.
차희의 어깨에 소름이 돋았다.
A급 헌터들 뒤를 따라 다른 헌터들이 수없이 몰려오고 있었다.
탕!
건물 옥상에서 D급 헌터 리나가 마법 저격총으로 클리앙을 쏘았다.
쉬이익!
어디선가 핸드볼만 한 크기의 파이어볼이 날아와 클리앙을 저격했다.
딱 보면 사이즈가 나온다. E급 마법 계열 헌터의 공격이다.
클리앙은 입김을 훅! 부는 것만으로 그 공격을 꺼버렸지만 몹시 거슬린다는 표정이 되었다.
“별 지푸라기 같은 것들이…….”
“차희 님을 보호해!”
헌터들 중 하나가 외쳤다.
두두두!
송민구 헌터의 손목에 찬 석궁에서 마법 볼트가 날아와 클리앙에게 박혔다.
정확히는 날아오면서 클리앙의 마력 압을 못 견디고 증발해 버렸지만 송민구는 공격을 멈추지 않았다.
헌터들의 전투가 계속된다.
오합지졸이라 할 만한 군대였지만 그들의 기세는 상당하다.
대다수는 E급이다.
-세상을 지키는 건 헌터 중 가장 다수를 차지하는 E급.
누군가의 말이 떠오른다.
하지만 이 상황에서 헌터 클래스의 급수를 나누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들 모두가 하나의 적을 상대로 분투하고 있는데.
뜨거운 힘이 그들 사이에 박동하고 있었다. 차희는 마치 체인처럼 연결된 투지의 고리가 보이는 것만 같았다.
관리자들도 상대가 안 되었던 이 압도적인 적에게 달려드는 동기는 어디서 나오는 걸까?
“슈퍼히어로랜딩…….”
차희는 묘하게 그들의 모습에서 윤성을 연상했다.
헌터계의 밑바닥에서 바득바득 투쟁한 끝에 수호자의 후계 자리까지 올라간 남자.
그건 단순히 성공에 대한 의지와 노력 같은 게 아니다.
슈퍼히어로랜딩의 조건은 강한 힘이 아니라 투지다.
인간은 타협하는 순간 지는 것이고 투쟁하지 않는 순간 노예가 되기에.
인계 관리자의 정신 속에서 길고 긴 역사 속의 수많은 지도자들의 이념이 빠르게 흐른다.
세상을 진보시키는 동력들은 으레 그런 메카니즘이 아니겠는가.
무력이 있어서 시작되는 게 아니다.
정의가 앞서고 희생이 뒤따르면 마지막 순간에 그들에게 힘이 주어지는 것.
그렇다면 절대 포기할 수 없다.
아직 싸움은 끝나지 않았고, 그녀도, 윤성도 이 길고 지루한, 처참한 이야기에서 맡은 역할이 남았다.
“날 구해주세요!”
차희가 소리를 지르며 벌떡 일어났다.
그녀가 달리기 시작했다.
“차희를 지켜!”
헌터들이 소리쳤다.
“와아아!”
“저 괴물을 죽여 버려!”
“이 무슨…….”
클리앙이 헛웃음을 지으며 차희의 등 뒤를 손가락으로 겨냥하고 마법을 발사하는 순간.
콰앙!
누군가가 달려와 그 공격을 몸으로 막아냈다.
머리와 다리만 간신히 재생된 퀸이었다.
이번 공격으로 다시 발목만 남았지만.
<콜로라 스나이핑 라이플 발동!>
클리앙의 두 번째 공격.
파앙!
그러나 이번에도 무언가가 막아섰다. 서른일곱 개의 방어 마법이었다.
“막아!”
마법 헌터들이 온 힘을 다해 실드와 방어막, 보호, 프로텍트 에어리어 따위의 방어 마법들을 쏟아붓고 있었다.
“이 귀찮은 새끼들!”
클리앙이 다시 한번 큰 마법을 사용하는 순간.
콰앙!
무언가가 클리앙의 바로 앞에 착지했다.
겨우 두 마리 남은 드래곤이었다.
그중 하나의 머리에서 헬라엘이 뛰어내렸다.
“클리앙!”
일곱 명 남은 플라멘들이 검을 들고 클리앙을 향해 돌진했다.
<스페이스 스퀴즈 발동!>
그러나 클리앙은 전의 스킬을 이용해 천사 일곱과 드래곤 둘을 단번에 꺾어버렸다.
“넌 강윤성의 목을 치기 직전까지 내 발아래 엎드려 있어야 한다.”
클리앙의 마안이 차희를 추적했다. 그녀는 백마중 기념관을 뛰어오르고 있었다.
콰앙! 쾅! 쾅!
클리앙이 이제 적들을 넘어 달렸다. 성난 들소에 치인 강아지들처럼 헌터들이 사방에 쓰러졌다.
피가 난무하고 비명이 튄다.
싸아악!
클리앙의 클로가 가슴께를 갈라버린 코르소가 피를 움켜쥐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왓 더…….”
“코르소!”
카다시안이 그를 감싸 안으며 마법을 사용하려던 찰나.
퍽!
그녀의 허리를 클리앙의 마법 총탄이 꿰뚫어버렸다.
“아악!”
비명을 지르며 쓰러지는 카다시안을 코르소가 안았다. 하지만 두 사람 모두 함께 누웠을 뿐이다.
“크억!”
이어서 그 옆에 웬 애송이가 치명상을 입고 나동그라졌다.
신차민이 숨을 헐떡였다.
“아, 안 돼!”
그가 비틀거리며 일어나려 애썼지만 부상이 커서 잘 되지 않았다.
‘차희 대표님을 지켜야 하는데.’
너무 많이 거리가 벌어졌다.
지금 뒤쫓기는 늦었다. 다른 헌터들에게 맡기는 수밖에.
쿵!
차민의 몸이 기울어 다시 주저앉았다. 물리적으로 일어나는 게 불가능하다. 하반신에 감각이 없다.
하늘이 어둡다. 클리앙의 마법으로 검붉어진 하늘이 흉흉하게 흐르고 있었다.
왜 히어로들은 항상 위에서 내려오는지.
어쩐지 알 것 같다.
누군가를 위해 위기 속에 뛰어들 수 있는 이들은 모두 히어로다.
그 용기. 또는 그 투쟁 자체를 슈퍼히어로랜딩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히어로가 랜딩을 하는 게 아냐. 랜딩을 하는 게 히어로지.’
신차민이 검으로 땅을 짚은 채 몸을 세웠다.
“코르소, 좀 빌릴게요.”
그는 코르소의 장검을 한 손에 들고는 목발 짚듯 절뚝거리며 움직였다.
차희는 다른 헌터들에게. 클리앙은 윤성 형님에게 맡기자.
어떻게든 해줄 것이다.
‘뒤처진 우린 저걸 어떻게든 해야 하지 않을까?’
차민과 같은 생각을 한 헌터들이 있다. 이미 S급 헌터 김성인과 SS급 헌터 세르게이가 폭탄 가방을 몸으로 끌어안았다.
몇몇의 헌터들이 다가가 그 옆에 붙었다.
차민이 절뚝거리며 도착했을 때 그의 위치는 폭탄 가방이 눈으로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바깥이었다.
이걸로 폭발이 줄어들 리 없다. 지구 멸망은 결코 막을 수 없는 일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인간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한다.
헌터들은 하늘을 쳐다보았다.
구원을 바라는 눈빛.
이제는 힘 그 자체가 내려오길 바랐다.
정의에 항상 힘이 따르지는 않는다는 것은 세상 모두가 다 아는 것이지만, 그래도 그 용기는 보상받을 만한 게 아니겠는가.
세상을 진보시키는 원리란 게 그런 거니까.
***
“무릎을 꿇으라고?”
윤성의 눈빛이 변했다.
“안 돼.”
“뭐?”
“그럴 수 없다. 난 아무래도 포기할 수 없어.”
윤성의 눈이 투지로 불탔다. 흐물흐물 녹아내리는 몸뚱이와 재생되는 조직들.
그가 손가락이 셋 남은 주먹을 꽉 쥐었다.
엔이 눈살을 찌푸렸다.
“모두의 목숨을 걸고 도박을 하겠다는 거야? 그런 이기적…….”
“그런 게 아냐.”
윤성이 말했다.
“그들의 기대에 부응해야 하기 때문이다.”
“뭐?”
본질은 E급 헌터. 겁쟁이. 우연히 Joker를 얻어 요행으로 성공한 놈. 도와준 수많은 사람들을 잊어버린 배은망덕한 자식.
바보 같은 지휘로 에어포스를 죽게 한 놈. 수많은 이들을 위험에 빠뜨리고 전장을 떠난 비겁자.
‘이런 나를, 저 싸움을 구원할 히어로라 믿고 기다리는 사람들이다.’
그 결말이 어떠하든 이 마지막 책임을 다해야 한다.
차희가 건물로 뛰어오르고 있었다.
윤성의 몸은 재건축 건물 밖으로 기울었다.
“랜딩은 3점 착지다.”
그가 말했다.
“무릎을 꿇으면 안 돼.”
떨어진다.
모든 감각이 잘 벼려진 칼날처럼 예리하다.
귓불을 스치는 바람.
윤성은 날카롭게 눈을 뜨고 가까워지는 바닥을 바라보며 순간이동석을 꺼냈다.
<순간이동석:차원문 발동!>
콰과광!
차원문은 본래 바닥에 수직으로 만들어지는 것이나 이번에는 예외적인 수평 구조이며 허공에 생성되었다.
콜로라 전사들도 이런 것은 처음 본다. 그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윤성의 몸은 공중에 가로 놓인 게이트 안으로 쏙 들어갔다.
“민차희!”
클리앙이 강력한 마법을 발동해 건물을 통째로 휘저었다.
와르르 소릴 내며 기우는 건물의 4층.
더 이상 올라갈 순 없다. 여기가 한계다.
“제발…… 타이밍을 맞춰줘!”
차희가 창밖으로 몸을 던졌다.
그녀가 눈을 질끈 감았다.
1초가 천 년처럼 길어지는 느낌.
지상을 향해 떨어지는 그녀의 목덜미에 묘한 긴장감이 흐른다.
상쾌한 바람이 불었다.
콰앙!
귓가에 강렬한 마력의 파동음이 울려 퍼졌다.
눈을 뜨지도 않았는데 무엇이 나타났는지 알 것 같았다. 차희의 가슴에서 울컥 무언가가 치밀었다.
눈물이 쏟아질 것 같다.
“차희.”
윤성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건 오랜만이지?”
그가 차희의 몸을 공중에서 낚아챘다. 차희는 윤성의 목을 끌어안았다.
‘옛날 엘리베이터에서 이렇게 랜딩한 적이 있지.’
차희를 업은 채, 윤성의 몸이 지면을 향해 떨어졌다.
“한 손을 지면에 수직으로.”
차희가 말했다.
“두 무릎을 유연히 구부리고.”
그녀가 미소를 지었다.
바닥에 닿는 것은 반드시 세 점.
남은 팔 하나는 사선으로 펼쳐 중심을 잡는다.
쿠우웅!
두 사람이 추락하는 순간, 헌터들의 얼굴에 환희가 번졌다.
붕괴하던 신체 조직이 모두 복구되었다. 스킬들을 무력화했던 디버프가 해제되었다.
바닷물에 휩쓸린 한 줌 물감처럼 클리앙의 마법은 희미해져 버렸다.
눈앞에 메시지가 떠올랐다.
<최종 속력=27.30㎧, 낙하 거리=6.05E24m, 낙하 시간=3.10s>
<랜딩 성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