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벨업 속도는 9.8ms^2-251화 (251/260)

# 251

레벨업 속도는 9.8m/s^2 251화

이 타이밍이다.

차희는 지금이 사람들을 설득할 적기라 판단하고 앞으로 성큼 나섰다.

<신앙 발동!>

빛바랜 기억들을 뒤져보면 예수나 석가모니 같은 종교 지도자들이 이걸 많이 쓴 모양이다.

차희의 어깨 뒤에서 후광이 비친다.

목소리에는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힘이 담기고 눈빛에는 감히 쳐다볼 수 없는 존엄함이 서린다.

“샌프란시스코 사건을 모두 기억하실 겁니다. 그때의 드래곤보다 몇 배는 강한 존재들이 백마 길드에는 수천 단위로 존재합니다.”

차희가 말했다.

“다른 차원의 군대들 역시 강윤성 헌터의 손아귀 아래에 있다고 할 수 있고요. 그들이 움직이면 강윤성 헌터가 이 세계를 점령하는 데는 며칠이면 됩니다.”

“…….”

유엔 주재 대사들이 침묵했다.

논리적으로 설득되었기 때문이 아니다. 이유를 알 수 없는 소름과 어마어마한 존경심이 가슴 속에서부터 빼곡히 차올랐다.

이 젊은 여자의 발아래 엎드려 절을 올리고 손등에 입을 맞추고 죄를 고하고 영원히 그녀를 따르고 싶은 기분이다.

‘대체 어떻게 이런 게 가능하지?’

오스칼은 소름이 돋아 양팔을 손으로 문질렀다.

전쟁 때 차희의 스킬을 그녀도 겪어보았지만 정말이지 믿을 수 없는 힘이다.

“그러나 백마 길드는 세계 지배를 원치 않습니다. 인계는 민주적인 곳입니다. 다른 차원들과 다른. 인계만의 특색이죠.”

차희가 말했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이 세계를 콜로라의 손아귀에서부터 안전하게 지키는 것. 오직 그뿐입니다. 또한 이 세계를 더욱 민주적으로 발달시키고자 하는 것뿐입니다.”

“…….”

이사국 대사들은 침이 마르는 기분을 느끼며 차희의 말을 경청했다. 어쩐지 선생님 앞의 초등학생처럼 우물쭈물하는 기분이 되었다.

차희가 말했다.

“그렇기 때문에 유엔이 상임이사국들의 독재로 굴러가는 걸 용납할 수 없습니다. 대대적인 재개편이 필요합니다. 현재 상임이사국들의 지위를 모두 내려놓고 더 민주적인 기구로 개편해요. 제가 도와드리겠습니다.”

“…….”

“찬성합니다.”

러시아 대사가 말했다.

“저도 찬성입니다.”

이어서 중국 대사, 프랑스 대사가 동의했다.

영국 대사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

다윤과 소윤은 수호자와 함께 차를 마시고 있었다.

다윤은 신차민과 함께 데이트하던 중 괴한의 공격을 받고 수호자가 있는 곳으로 순간이동 했었다.

당시에는 너무 놀란 나머지 수호자를 보고 비명을 지르고 들고 있던 휴대폰을 던졌다.

‘네 오빠 친구’라는 수호자의 자기소개를 그럭저럭 받아들인 것은 역시 바토리며 아리며 미들로드며 하는 온갖 괴물들을 동료랍시고 데리고 다녔던 윤성의 전력 때문이다.

다윤은 안전해질 때까지 지구로 돌아갈 수 없다는 수호자의 엄포와 함께 강제로 보호받게 되었다.

딱 하루가 지난 후에 소윤도 이곳으로 날아왔다. 그녀는 학교에서 동급생의 공격을 받았다고 했다.

“오빠 괜찮을까?”

그로부터 꽤 시간이 지난 후, 함께 점심을 먹던 중 소윤이 말했다.

“오빠는 당연히 괜찮지.”

다윤이 소윤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차민이는 좀 걱정되네. 오빠만큼 강하지도 않고.”

“네 오빠가 들으면 서운해하겠다.”

수호자가 말했다.

“안 그럴걸요. 사실인데 뭘. 그리고 솔직히. 차민이보다도 제 시험이 더 걱정이에요.”

다윤이 고개를 푹 숙였다.

“중간고사 몇 과목은 이미 지났어.”

“전쟁을 한다 어쩐다 하면서 네 오빠가 난리 치고 시민들 벙커로 대피시키고 있는데 대학교 시험이 대수냐? 안 했겠지.”

“그럼 저 지금 공부할래요.”

“공부?”

“미분적분이랑 일반화학이랑 일반물리학이랑…….”

“하지만 책이 없잖니?”

“수호자님 힘으로 어떻게 해주실 수 없나요?”

“…….”

“아! 아니면 저 과외해 주실 수 있어요? 이 세계를 만드신 분이랬으니까 물리학에는 정통하실 거 아니에요?”

“그래. 지구를 만든 게 나다. 그런 나를 보모로 쓰는 네 오빠가 여태까지 내가 본 사람 중 가장 정신 나간 놈이었는데 지금 부로 바뀌었다.”

“근데 파스타 너무 짜.”

소윤이 불평했다.

“혹시 달에는 봉구스 밥버거 같은 거 없어요?”

“지금 또 바뀌었어.”

수호자가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쿠구궁!

수호자의 사옥 밖에서 강한 진동이 일었다.

“윤성이 왔군.”

수호자는 의자에서 폴짝 뛰어내리며 다다다 뛰어가 문을 열어주었다.

“잘 있었어?”

윤성이 웃으며 들어왔다.

“이기고 왔다. 다윤아, 소윤아. 집에 가자.”

“전쟁 끝났어?”

“응. 내가 익시튬 박살 냈어.”

“어떻든?”

수호자가 물었다.

“세더라. 고생 좀 했어.”

“100만㎞ 정도로 충분했나 보네.”

“아니. 모자랐는데 차희가 버프 걸어줘서 한 큐에 보냈지.”

“그렇군. 아무튼 ‘최후의 수단’은 안 써서 다행이야.”

“그것도 준비는 다 해놨는데.”

“안 쓰는 게 좋지. 그건 네 몸에 걸리는 부담이 너무 커. 아무리 네가 버프 중독이어도 안 돼.”

“그래. 그동안 동생들 봐줘서 고마워.”

윤성이 웃으며 수호자와 악수했다.

“강윤성. 이제 전쟁도 끝났으니 내일부터는 너 코딩 연습해라.”

수호자가 말했다.

“매일 아침 아홉 시에 여기로 와. 내가 모든 걸 전수해 줄 테니까. 넌 수호자의 직위를 이어야 해.”

“음……. 알았어. 하지만 조금만 쉬고. 주위 사람들 좀 챙겨주고.”

“좋아. 그럼 어서 꺼져버려. 네 동생들 여기 일주일만 더 있으면 나 스트레스로 사망할걸.”

“근데 전쟁이 끝났으면 이제 오빠 밖으로 안 돌아다녀도 돼?”

다윤이 물었다.

“뭐, ‘밖’이라는 게 어느 정도냐에 따라 다른데. 한국 밖을 얘기하는 거면 계속 돌아다닐 거고, 지구 밖을 얘기하는 거면 거의 안 가겠지?”

“수고했어.”

다윤이 어깨를 두드려주었다.

“차민이는 무사해?”

“A급 헌터 이하는 애초에 위험 지역으로 안 보냈어. 차민이는 벙커 치안 담당이었을걸. 괜찮아.”

“그럼 희생자는 별로 없는 거야?”

“많아.”

윤성이 약간 침울하게 대답했다.

“내가 랜딩하기 전까지 당한 사람들이 많거든.”

“많긴.”

수호자가 웃었다.

“아직 수호자 되려면 멀었군. 그 정도 피해면 내가 볼 땐 없는 수준이다.”

“넌 지구의 역사를 쭉 봐왔으니 우리하곤 인지하는 스케일이 다르겠지.”

윤성이 웃었다.

“아무튼 우린 이제 돌아갈게. 수호자. 고마웠어.”

“코딩 배우러 꼭 와라.”

“알았다니까.”

<차원문 발동!>

콰광!

연한 파란색 차원문이 빙글빙글 돌아가며 앞에 나타났다. 인계로 가는 통로다.

윤성은 동생들과 함께 차원문을 넘었다.

인벤토리에서 자동차를 꺼냈다.

‘그러고 보니 인벤토리도 처음 주웠을 때는 자동차 같은 크기는 안 들어갔는데.’

콜로라와의 전쟁을 거듭하면서 얻은 상급 인벤토리에는 더 크고, 마력이 더 강한 물건들도 쉽게 들어갔다.

윤성은 차량 뒷좌석에 동생들을 태우고 집을 향해 운전하기 시작했다.

“나 근데 이제 오빠 정체 같은 거 막 얘기하고 다녀도 되지?”

잠시 후 소윤이 물었다.

“응. 근데 왜?”

“궁금해하는 애들이 많거든. 특히 슈퍼히어로랜딩에 대해서.”

“아, 그거.”

윤성이 잠깐 고민하다가 말했다.

“얘기해도 돼. 그리고 어차피 이번 주 주말에 방송 있거든.

“방송?”

“샌텀 타워에서. X등급 특집 방송 같은 건데, 생방송으로 슈퍼히어로랜딩에 대해서 설명하고 이번 전쟁의 뒷얘기, 콜로라에 대한 정보, 뭐 이것저것 쭉 설명해 주는 거야.”

“아.”

“차희가 전 세계에 백마 길드를 파견하는 걸 추진하고 있는데, 거기에 힘을 실어주려면 최대한 많은 것들을 세상에 보여주고 공개해야 해.”

윤성이 말했다.

“어차피 이제 전쟁도 끝났고. 콜로라 잔당들도 내 랜딩 능력에 대해선 거의 다 알고 있기 때문에 지구에서 공개해도 상관없어.”

“그래?”

“그리고 그놈들이 뭘 계획한다고 하더라도 그걸 실행에 옮길 정도로 강한 놈들이 이제 없기도 하고.”

“그렇구나.”

“응, 내가 다 죽였거든.”

윤성이 씨익 웃었다.

순간, 갑자기 불안한 기분이 들었다.

윤성은 메시지창을 띄웠다.

<임무 : ALK 혹성에 꽃 피우기. (실패.)>

‘실패?’

윤성이 고개를 갸웃했다.

실패했다고? 이런 메시지는 한 번도 본 적이 없는데.

클리앙과 경쟁 중이라는 내용이 한 번 언급된 적 있었고, 클리앙을 직접 물리친 후에 그 내용이 사라진 적이 있었다.

이상하군. 원래 시간이 지나면 실패라고 뜨는 건가? 아니면 익시튬을 죽였기 때문에 이런 건가?

“무슨 생각해?”

다윤이 말을 걸었다.

“응? 아, 아냐. 잠깐 다른 생각 하고 있었어.”

윤성이 답했다.

“차희 언니 생각 그만해.”

“언니 보고 싶다.”

다윤과 소윤이 웃으면서 장난을 쳤다.

“오빠. 이번 주말에 차민이랑 언니랑 소윤이랑 다 같이 놀러 가자.”

다윤이 신이 난 표정으로 말했다.

“좋아. 나 샌텀 타워에서 방송하고 나서 가자.”

“오빠가 이렇게 어디 놀러 가자는 식으로 얘기하고 나면 항상 사고 나던데.”

“이제 안 그래.”

윤성은 아파트 주차장에 차를 대고 동생들과 함께 밖으로 나왔다.

“먼저들 올라가.”

윤성이 말했다.

“오빠는?”

“잠깐 누구랑 얘기 좀 하게.”

“누구?”

“있어. 아무튼 들어가.”

윤성은 동생들이 아파트로 들어가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는 것까지 본 후에 고개를 들었다.

“내려오세요.”

슈우우우우!

윤성의 말을 듣고 하늘에서 누군가가 빠른 속도로 내려왔다.

지상에 사뿐히 착지한 그녀는 다섯 쌍의 아름다운 날개를 가지고 있었고 은은하게 빛이 났다.

“같이 차 타셔도 됐는데. 왜 따라오셨어요?”

“최대한 기척을 죽였는데.”

“그런 것 같아서 모른 척하고 있었어요.”

“이제는 제가 기척을 죽여도 알아챌 정도로 기감이 높아지셨군요.”

“그럼요.”

윤성이 환하게 웃었다. 에어포스도 따라서 미소 지었다.

“근데 에어포스, 어쩐 일이세요?”

“샌텀 타워에서 방송하시죠?”

“네.”

“저도 같이 가겠습니다.”

“에어포스도요?”

“일단 그 랜딩 자세는 제가 원조니까요.”

“하하!”

“농담이고. 다른 차원의 전사들은 대부분 인계에서는 ‘마수’로 통하던 존재들입니다. 그래서 차희 씨가 추진하는 일에 거부감이 클 거예요.”

“그래서 그걸 완화하려고 제가 방송도 나가는 거죠.”

“제가 윤성 씨를 지지하면 도움이 될 겁니다. 전 원래 인계의 헌터로 활동했으니까요.”

윤성의 얼굴이 밝아졌다.

“천사들을 파견해 주시는 것만으로도 고마운 일인데…….”

“후후.”

에어포스는 약간 쓰게 웃었다.

“윤성 씨.”

“네?”

“저는 인계에서 평생을 인간으로 자랐습니다.”

“그렇죠.”

“심리적으로 천사보다 인간이에요.”

“아.”

“……파견해 줘서 고맙다고. 그렇게 말하지 마세요.”

에어포스가 고개를 살짝 돌렸다. 그 옆얼굴이 어쩐지 우울해 보였다.

“미안해요.”

“미안할 건 아니구요. 그냥……. 아니. 죄송합니다. 제가 쓸데없는 소리를 했네요.”

“천계에 있으면 불편해요?”

“그렇진 않아요. 마제스티엘의 감정들이 제게 남아있으니까요. 하지만……. 타지에 오래 살아도 고향에 돌아오면 정감이 가는. 그런 느낌이죠. 제가 인계를 보는 기분은.”

“그렇군요.”

“차희 씨가 인계의 관리자가 되었더군요.”

“맞아요.”

“…….”

에어포스가 빙긋 웃었다.

“잘 어울립니다. 차희 씨는 멋진 여자죠. 당신한테 어울려요.”

에어포스가 발을 통 튕기며 하늘로 튀어 올랐다.

“저는 그만 가보겠습니다. 샌텀 타워에서 뵙겠습니다.”

“안녕히 가세요.”

윤성이 인사했다.

멀어져가는 에어포스를 보면서 그는 의아한 기분이 들었다.

고작 저런 얘길 하기 위해서였다면 전화로 해도 됐을 텐데.

굳이 차 위를 몰래 따라오지 않고 말이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