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9
레벨업 속도는 9.8m/s^2 239화
76. X등급 전사 익시튬
4월 하순.
벌써 개강한 지 두 달이 다 되어간다.
새내기의 설렘은 첫 달에 한정되는 법이고 이제는 중간고사 기간이다.
시험공부를 하던 다윤이 지친 얼굴로 도서관에서 나왔다.
신차민이 건물 앞 벤치에 앉아서 휴대폰을 만지고 있었다.
시험공부에 지친 학생들이 근처에서 담배를 피우면서 시끄럽게 떠들어 댔다.
그러나 차민은 그 소음들 속에서도 다윤의 발소리를 정확히 포착할 수 있다.
그가 번쩍 고개를 들자 눈이 마주친 다윤이 환하게 웃었다.
“공부 잘 돼가?”
신차민이 미리 뽑아놓은 자판기 커피를 건네며 물었다.
“그냥저냥. 할 만해.”
“캬, 역시 다윤이. 전공 공부도 문제없죠. 오졌죠.”
“저녁은 먹었어?”
“우리 길드 석식 제공이잖아. 당연히 먹고 나왔지.”
“석식을 주는 회사는 다 최악이라던데.”
“야근을 시키니까 그런 건데 백마는 야근 강요 안 해.”
“그래?”
“강요받는 사람들도 좀 있지. S급 이상 중에선.”
“차희 언니도 야근하시겠지?”
“그분은 일과 일상이 일체가 되어버린, 뭐 그런 삶을 산 지 오래됐지.”
“하긴. 오빠 대신 일들 처리하려면…….”
다윤이 피식 웃었다.
그녀는 신차민과 함께 학교 도서관 뒤편의 돌담길을 걸었다.
화단이 예쁘게 조성되어 있고 가로등은 로맨틱할 정도로만 밝아서 교내 커플들이 자주 찾는 장소다.
한 쌍의 남녀가 벤치에 앉아 키스를 나누다 차민과 다윤의 인기척에 황급히 떨어졌다.
방해할 생각은 없었는데.
“얼른 가자.”
미안한 마음에 다윤이 차민의 팔을 잡아당겼다.
두 사람은 돌담길을 따라 쭉 걸으며 이과대학 연구실 옆을 돌았다.
다정하게 팔짱을 꼭 끼고 있었다.
꺼삐딴과의 전쟁에서 납치당할 뻔했던 다윤을 신차민이 목숨 바쳐 구해낸 이후, 두 사람은 빠르게 가까워졌던 것이다.
수풀 사이에서 뚜르르 뚜르르 우는 소리들이 들렸다.
날씨가 약간 풀린 탓인지 풀벌레들이 늘어난 모양이다.
“빨리 너 시험 끝났으면 좋겠다.”
차민이 말했다.
“왜?”
“같이 놀러 가게.”
“어디로?”
“광양에 꽃 축제 한대. 5월에”
“와.”
“내가 연차 내고 회사 차 끌고 데리러 갈게. 같이 가자.”
“회사 차량을 사적으로 써도 되는 거야?”
“그럼 엄마 차 끌고 갈게.”
다윤이 후후 웃었다.
“우리 오빠 차 타고 갈까?”
“그거 어디 박으면 내 연봉 없어지는데.”
“설마 오빠가 너한테 달라겠어?”
다윤이 차민을 슬쩍 끌어안았다.
차민은 그녀의 이마에 키스하고 안아주고 머리를 쓰다듬었다.
“근데 나 여행 가면 집에 소윤이 혼자 남는데.”
다윤이 말했다.
“차희 비서님이 봐주실 거야.”
“차희 언니 바쁜 사람이잖아. 신경 쓰게 하고 싶지 않아. 안 그래도 요즘은 우리 집에 못 오게 하고 있어. 소윤이 내가 본다고.”
“비서님은 너도 애처럼 생각하시던데…….”
“오빠 때문에 그래. 난 성인인데.”
성인이라는 말에서 다윤의 눈빛이 약간 묘했다. 그녀의 얼굴이 가까이 다가오자 차민이 침을 꿀꺽 삼켰다.
그녀의 코에서 나오는 날숨이 차민의 인중에 닿았다. 차민은 눈을 살짝 감았다.
저벅저벅.
갑자기 울린 발소리에 신차민이 소스라치며 고개를 떼었다.
약간 떨어진 곳에 남자 한 명이 손에 캔커피를 들고 서 있었다.
“아, 미안해요. 방해할 생각은 없었어요.”
그가 옆을 지나가며 말했다.
다윤이 그를 보며 피식 웃는 순간이었다.
“혹시 강다윤?”
남자가 다윤의 얼굴을 알아보겠다는 듯 말을 걸었다.
“누구세요?”
“저 아세요?”
차민과 다윤이 동시에 반응했다.
“아, 강윤성 대표님 동생분이시잖아요. 워낙 유명하시니까…….”
그 말대로 워낙에 유명했기 때문에 개강 첫 달에 어마어마한 관심을 받았고 요즘은 잠잠해졌다.
특히 요 몇 주 사이에는 교내에서 이런 사람이 잘 없었는데.
“맞죠? 강윤성 대표님 동생분?”
남자가 재차 물었다.
“아, 맞긴 맞는데…….”
다윤이 어색하게 웃으며 답했다.
바로 그 순간.
팍!
갑자기 남자가 주먹을 쥐고 달려들었다. 마력이 급격히 치솟는다. 놀란 차민이 다윤을 거칠게 잡아당기며 앞으로 뛰쳐나갔다.
장비가 하나도 없지만 맨손으로도 할 수 있다.
<티타늄 펀치 발동!>
차민의 주먹이 광이 나는 흑색으로 변하며 상대를 향해 매섭게 쇄도했다.
콰직!
그 펀치는 일격에 남자의 어깨를 탈골시켰다.
파앙!
이어지는 하이킥이 턱에 꽂히자 남자의 눈이 스르르 풀렸다.
그러나 이 공격이 적중할 때, 차민은 뭔가 이상함을 느꼈다.
이 사람은 일반인이다.
다윤에게 달려들 때 마력이 솟은 것은 본래 그의 것이 아니다.
물론 백마 길드의 위상이나 윤성의 지위를 고려하면 다윤이를 납치해서 뭔가를 해보려는 일반인들이 있을 수도 있지만, 보통은 아예 건드릴 엄두 자체를 못 내지 않을까?
게다가 다윤을 납치하거나 해코지하려고 계획한 사람이라면 차민의 얼굴을 모를 리 없다.
윤성이 꺼삐딴을 멸망시키고 백마로 돌아왔을 때 전 세계 카메라 앞에서 다윤과 포옹하며 전쟁의 종결과 평화를 알렸던 얼굴인데.
‘조종당했다.’
인형술과 비슷한 것이다. 하지만 살아있는 인간을 움직이다니?
쿠웅!
여기까지 생각이 마쳤을 때 남자가 뒤로 넘어가 바닥에 쓰러졌다.
“다윤!”
차민은 재빨리 고개를 돌렸지만 늦었다.
수풀 뒤에서 또 다른 남자가 튀어나와 다윤을 향해 단검을 휘두른 것이다.
그 칼끝이 슬로모션처럼 천천히 다윤의 목덜미를 향하는 게 차민의 눈에 들어왔다.
“안 돼!”
차민이 비명을 지르며 뛰어드는 순간.
팍!
갑자기 다윤의 몸이 사라졌다.
“뭐야?”
마치 순간이동이라도 한 것처럼 없어져 버렸다.
차민은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단검을 든 남자를 붙잡았다. 몇 번의 주먹을 휘두른 후, 다윤이 어디로 사라졌느냐고 소리를 질러댔다.
그러나 이 남자 역시 조종당했을 뿐이다.
그는 눈이 풀리며 쓰러졌다.
***
늦은 밤.
백마 길드 광장에 차원문이 열렸다. 문 너머에서 튀어나온 것은 메탈로이드계의 관리자, 아리.
본래 이 건물을 제집처럼 드나들었던 로봇이지만 사전에 차희에게 연락 정도는 했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한마디 상의도 없이 백마 길드로 바로 날아온 것이다.
사안이 사안이니만큼 어쩔 수 없다.
이제는 건물을 파손하지 않고 내부를 돌아다닐 수 없을 정도로 아리가 커진 탓에, 그는 정문으로 들어가는 대신 부스터를 켰다.
어차피 목적은 차희에게 있고, 차희가 있는 대표 사무실 앞까지만 가면 되는 것 아니겠는가.
“안주인님!”
아리가 창문을 열며 소리쳤다.
차희가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돌렸다.
“뭐야?”
“왔습니다!”
“나도 알아.”
“아신다고요?”
아리가 고개를 갸웃했다.
“우주선 접근 경계는 메탈로이드의 일이었는데요.”
“우주선?”
이번엔 차희가 고개를 갸웃했다.
“네! 콜로라 본대의 함선이 지금 이 앞까지 왔다고요!”
“아…….”
차희의 몸이 파르르 떨렸다.
“결국 왔구나.”
“안주인님은 누가 왔다고 알아들으신 거예요?”
“그야 당연 나지.”
차희 대신 사무실 안쪽에서 남자 목소리가 대답했다.
윤성이 천천히 창가로 다가왔다.
그가 콜로라로 떠난 지 두 달 반 만이었다.
“주인님!”
아리가 반가움에 창문으로 들어오려고 했다. 그 몸집에 걸린 창틀이 덜거덕 소리를 내며 무너지려고 했다.
“야, 야! 진정해!”
“언제 오신 겁니까? 왜 제게 미리 연락하지 않으셨죠? 제가 백마 앞에 모든 차원의 군대를 집결시켜 놓고 환영식을 치를 수 있었는데요.”
“그래서 얘기 안 한 거야. 거기 가만히 있어.”
“잠깐만요. 주인님……. 지금 마력의 상태가…….”
아리의 눈이 번들거렸다.
“뭐, 뭡니까? X등급입니까?”
“아니야. 그 직전까지 트레이닝했지.”
“대체 어떻게요?”
“콜로라 전사들이 쓰는 X등급 튜토리얼을 완전히 클리어했다. 하지만 X등급이 되지는 않더군. 한 단계 넘어서는 각성. 그런 게 없었어.”
“그렇군요. 그건 이상하네요. 주인님이 인간이기 때문일까요?”
“글쎄.”
윤성이 고개를 끄덕이며 메시지창을 열었다.
아직도 이 임무는 사라지지 않았다.
다른 소행성들을 처리하는 그 아래의 서브 임무들을 모두 클리어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놈들이 왔다고 했지?”
윤성이 물었다.
“제가 볼 때 다음 주 안에 지구에 도착합니다.”
“차희. 나 지금 미국으로 가야겠어.”
“알겠어. 하지만 지금 우주선을 타면 안 돼. 알지?”
“물론이지.”
윤성이 고개를 끄덕였다.
콰앙!
대표 사무실 문이 박살 나듯 열리며 신차민이 난입했다.
“비서님!”
그가 소리를 질렀다. 그러다 윤성과 눈이 마주치고는 희망적인 미소가 번졌다.
“형님도 돌아오셨군요!”
“형님이라니. 다윤이랑 사귀는 건 허락해 줬지만 회사에선 대표님이라고 불러.”
“다윤이가 사라졌어요!”
“뭐라고?”
윤성과 차희가 깜짝 놀라며 반응했다.
“학교에서 어떤 남자들이 조종당해서 다윤이를 공격했는데 사라졌어요!”
“뭐라는지 하나도 모르겠다. 천천히 좀 얘기해 봐!”
차희가 당혹스런 표정으로 말했다.
“어떤 놈입니까?”
창밖에서 아리가 눈에 새빨간 전조등을 켜고 위협적인 목소리로 말했다.
“제가 지금 날아가서 미립자 단위로 갈아버리겠습니다.”
“좀 기다려 봐. 다들 진정해.”
윤성이 말했다.
“누구한테 공격받았다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다윤이를 누가 습격했고, 그 애가 갑자기 순간이동 하듯 사라졌다는 거지?”
“네!”
“그건 수호자가 한 거야. 내가 전에 부탁해 뒀거든. 아마 지금 수호자 곁에 있을 테니 걱정할 필요는 없다.”
윤성이 말했다.
“그보다 이것들이 움직임이 생각보다 빠르고 교묘하잖아?”
“콜로라에서 한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차희가 물었다.
“당연하지. 본대가 여기 바로 앞까지 왔다며? 그놈들 정찰부대는 오래전에 와있었어. 이제 전쟁이 시작될 거니까 정보 수집을 그만두고 움직임에 나선 거지.”
“정보 수집이요? 콜로라가 지구에 또 있었나요?”
차민이 놀라서 물었다.
“당연하지. 하지만 그렇게 신경 쓸 일은 아냐. 어차피 SL은 극비에 제조되고 있었고, 놈들이 알았다고 해도 메탈로이드 편대가 있으니 내가 랜딩할 때까지는 버틸 수 있을 거야.”
윤성이 말했다.
“문제는 놈들이 어떻게 들어오느냐 하는 거야. 익시튬이 지상에 내려온 다음에 랜딩해야 이길 수 있다.”
“익시튬이요?”
차민이 고개를 갸웃했다.
“X등급의 이름이야. 아무튼 차민아. 한동안 이 문제나 내가 온 것에 대해선 함구해. 차희가 따로 공표할 테니.”
윤성이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제 이 지긋지긋한 싸움이 막바지에 이르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