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0
레벨업 속도는 9.8m/s^2 230화
고제하를 비롯한 협회의 사망한 헌터들, 백마 길드의 전사자들의 추도식이 현충원에서 열렸다.
모든 사망자들을 그곳에 안치할 수는 없지만 고제하와 몇몇 간부들은 이곳에 들어왔다.
추도문은 물론 모든 희생자를 기리는 문장이었다.
“이 나라와 세계를 위협하는 세력들로부터 우리 이웃을 지켜내기 위해 분투했던 그 고귀한 용기를 우리 모두가 보았습니다. 이번 전쟁에서 소중한 목숨을 바쳐 세상을 구해낸 329명의 헌터들에게…….”
차희가 추도문을 묵묵히 읽었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오후.
윤성은 에어포스와 함께 엄중한 표정으로 자리를 지켰다.
수많은 헌터와 정부 인사들이 두 사람의 옆과 뒤에 쭉 늘어선 채 차희의 목소리를 듣고 있었다.
어떤 이들은 울었고 어떤 사람들은 기도했다. 차희는 윤성을 생각하고 있었고 에어포스는 고제하를 생각하고 있었다.
윤성은 X등급 전사를 생각했다.
추도식이 끝난 후, 윤성을 비롯한 최상급 헌터들은 따로 자리를 가져 간단히 회포를 풀었다.
시기가 시기인지라 간소한 차림이었고 그 누구도 풀어지지 않았다.
모든 행사가 끝난 후 윤성은 차희와 함께 차로 이동했다.
에어포스가 그들을 따라와 작별 인사를 하고 있었다.
“근데 윤성 씨, 수호자를 만나러 가실 겁니까?”
그녀가 물었다.
“가야죠.”
윤성이 당연한 것이라는 듯 대답했다.
“에어포스는 방법만 알려주시면 돼요.”
“에어포스가 그런 방법을 알아요?”
차희가 끼어들었다.
“옛날에 협회장님이 제게 알려주셨습니다. 하지만 윤성 씨. 전에도 말씀드렸던 것 같은데 수호자를 만나려면 지구의 파장이 달과 맞아야 해서 일식 상황이 필요합니다.”
에어포스가 말했다.
“상관없어요. 그런 타이밍 필요 없으니까.”
윤성이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랜더의 팔찌.
본래 스킬을 저장할 수 있는 아이템이었던 이 물건은, 음속 랜딩에 성공한 이후 외형이 바뀌면서 속성도 변했다.
이제 그 능력은 마력 파장대를 일시적으로 다루는 것이 되었다.
<조작 가능한 범위의 공간 내의 파장대를 조절할 수 있습니다.>
그 범위라는 게 어디까지 미치는지는 모르겠지만 최소한 달에서 지구까지는 가능하다.
“일식처럼 파장대를 인위적으로 맞출 수 있을 거예요. 수호자를 만나서 물어볼 것도 있고. 한 번 다녀와야겠어요.”
윤성이 말했다.
“차원 통신으로 수호자한테 연결하는 법도 있는 것 같은데 제가 그건 할 줄을 몰라서.”
“알겠습니다. 그럼 제가 준비를 도와드리겠습니다.”
“할 때 저도 불러주세요.”
차희가 손을 들며 말했다.
“알겠습니다. 하지만 저도 먼저 천계에 좀 다녀와야 합니다.”
<차원문 발동!>
에어포스는 두 사람에게 인사하며 천계로 걸음을 옮겼다.
***
한동안 정신없이 바쁜 날들이 흘렀다. 정치권에서는 윤성의 전투력을 세계를 지배할 수 있는 수준이라고 판단했다.
그런 진단은 별로 과장된 게 아니었다. 사실상 모든 관리자들이 자신의 차원으로 돌아간 지금, 인계에서 윤성을 상대로 시간 끌기라도 해볼 수 있는 이는 단 하나도 없다.
이 정도의 압도적인 무력을 한 인간이 소유하고 있다는 것은 그 자체로 문제가 된다.
정치권에서는 섣부른 움직임을 보이지는 않았지만 윤성을 견제하면서 동시에 이용하고 싶어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또 한편으로는 타 국가들과의 마찰도 걱정하는 모양이었다.
특히 아직 적대국인 북한 같은 경우에는 국내 방송을 통해 체제를 안정시키는 연설을 함으로써 불안감을 느끼고 있다는 걸 대외적으로 드러냈다.
“귀찮게 정말.”
그 불편한 분위기들을 보고서로 접하면서 윤성이 짜증을 냈다.
“옛날부터 사람들이 그런 걸 예상하긴 했지.”
차희가 말했다.
“뭘?”
“만약 던전 범람이 일어나지 않게 된다면 최상급 헌터들은 마수 소탕 인력이 아니라 국가의 전쟁 자원이 될 거라고.”
“확실히 이제 던전 범람은 거의 없지.”
윤성이 말했다.
인계를 침공하려던 엘리지아나 메탈로이드를 뿌리 뽑아버린 후 수호자를 만나고 차원들의 통합을 마쳤다.
다른 차원들의 관리자들이 윤성의 손아래 들어온 지금 시점에선 사실상 인계를 건드릴 정신 나간 녀석들이 없는 것이다.
관리자들이 단속을 잘하는 모양이고 수호자도 적당히 끊어주는 듯하니.
“하지만 헌터들이 전쟁 자원이 되어서 서로를 견제한다기에는 지금 상황은 나만 견제하는 것 같은데.”
“그리고 헌터들이 견제하는 건 아니지. 헌터들은 대부분 널 존경해. 정치권들이 문제일 뿐.”
차희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윤성아. 미국 대통령하고 미팅이 잡혔어.”
그녀가 말했다.
“뭐? 언제?”
“사흘 후.”
“그 날 무슨 스케쥴 있나?”
“없어서 그 날로 잡았어. 하지만 넌 길드에 남아 있어. 우리 둘 중 하나는 본진을 지키고 있어야지.”
“너 혼자 갔다가 해코지당하면 어떡해?”
윤성이 눈살을 찌푸렸다. 차희는 빙그레 웃었다.
그녀가 윤성의 뺨을 어루만졌다.
“누가 날 건드려?”
“네 말대로 내가 세계적인 전쟁 자원이 되었다면 널 납치한다거나 그럴 수도 있지 않을까?”
“믿을 만한 헌터들 몇이랑 같이 갈 거야.”
“무슨 일 있으면 연락해. 워싱턴까지 세 시간 안에 갈 수 있으니까.”
윤성이 몸을 살짝 튕기며 말했다.
“아무 일 없을 거야.”
차희가 그의 이마에 살짝 입을 맞췄다.
“그리고 윤성아. 나 미국 가는 거 중요한 사업 때문이기도 해.”
“사업?”
“전에 얘기했던 거 있잖아.”
차희가 눈을 빛냈다.
“그거 벌써 시작하는 거야?”
“지금부터 해둬야 X등급 오는 날 맞춰서 준비를 하지.”
“언제 올지 아직 모르잖아?”
“그럼 나 없는 동안 그거나 좀 연구해봐.”
***
차희가 출국하는 날.
윤성은 그녀를 배웅해 주었다. SS급 헌터 오스칼이 호위로 붙었다.
‘저 정도 실력자라면 괜찮겠지?’
미국 최강의 SS급 헌터 넷이 사실상 모두 미국을 떠났다. 그중 샌드맨과 제다이는 죽었을 가능성이 높고.
오스칼을 상대할 수 있는 헌터가 미국에는 없다.
“다녀올게.”
차희는 윤성에게 가볍게 입을 맞추고 오스칼과 함께 전용기에 올라탔다.
그녀를 배웅하고 백마 길드로 돌아온 윤성은 몇 가지 서류 작업들을 처리하고 밤 9시경 퇴근했다.
아직 잘 시간은 아닌데 집 안에 불이 모두 꺼져 있고 커튼도 쳐져 있다.
“나 왔다.”
현관을 열고 들어가자 소윤이 부엌에서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뭐 하고 있었어? 저녁 먹었어?”
윤성이 물었다.
“응.”
“커튼은 왜 다 쳐놨어? 우중충하게.”
윤성이 커튼을 걷어버리려 하자 소윤이 얼른 달려와 붙잡았다.
“안 돼.”
“왜?”
“누가 자꾸 지켜보는 거 같아.”
“어떤 놈이?”
윤성은 커튼을 살짝 당겨서 눈만 내밀어 바깥을 주의 깊게 살폈다.
온갖 최강의 마수들과 전쟁을 거치면서 이미 인간의 범주를 한참 넘어섰다. 시력만 따지면 웬만한 망원경 수준이다.
하지만 윤성의 눈에는 특별한 것은 보이지 않았다.
“뭐 없는 것 같은데.”
“그런가?”
소윤이 머리를 긁적였다.
“좀 예민해졌나 봐.”
“누가 귀찮게 해?”
“그냥. 오빠 정체 소문난 후에 학교에서 난리야.”
“에휴.”
“친한 애들이 물어보는 건 상관없는데 모르는 사람들도 자꾸 말 걸어.”
“뭐라고?”
“막 나쁜 건 아닌데. 그냥. 너희 오빠가 마스크맨이라며? 이러면서 말 걸고 우리나라 지켜줘서 고맙다고 전해달라고.”
확실히 나쁜 사람들은 아닌 모양이지만 애들이 견디기에는 그 관심이 주는 피로가 과한 모양이다.
“어떻게 좀 해야겠네.”
윤성이 말했다.
<차원 통신. 천계의 관리자가 통신을 요청합니다.>
갑자기 메시지가 떠올랐다.
윤성은 메시지창을 누르면서 대답했다.
“에어포스?”
윤성은 소윤에게 손짓해서 인사하고는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지금 인계로 갈 겁니다. 수호자한테 보내드리죠. 차희 씨는?
“차희는 지금 미국에 가 있어서 안 돼요.”
-바쁘시군요. 별수 없죠. 일단 백마 길드로 가겠습니다.
“저 퇴근했는데……. 집으로 오실래요?”
-알겠습니다.
“에어포스. 혹시 사람 추적할 수 있는 마법 GPS 같은 거 가지고 계세요?”
-네? 그런 게 있을 리가 없죠.
“그렇죠. 혹시나 해서 물어봤어요.”
-근데 왜요?
“동생들한테 자꾸 사람들이 들러붙는데 경호 붙이는 건 좀 오바 같고. 걱정은 되고 그래서요.”
-GPS를 붙여놓고 어디 있는지 감시하는 것도 정상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렇군요. 하긴. 얘들도 사생활이 있는데.”
-좀 더 좋은 방법이 있을 겁니다. 수호자를 만나면 부탁해 보시죠. 프로그램을 짜줄지도 모릅니다.
“알겠어요. 일단 저희 집으로 와주세요.”
-거의 도착했습니다.
말 끝나기 무섭게 정말로 창밖에서 쿠우우 하는 바람 소리가 들렸다.
에어포스가 비행을 써서 날아오고 있었다.
그녀는 베란다 문을 열고 들어와 곧장 윤성의 방으로 향했다.
“잠깐. 문 닫지 마요.”
윤성이 에어포스가 닫으려던 베란다 문을 다시 열었다.
하늘에 달이 선명하게 보인다.
윤성은 그쪽을 향해 왼손을 쭉 뻗었다.
랜더의 팔찌가 달을 가리킬 수 있도록.
<랜더의 팔찌 발동!>
<파장 동기화 시작. 사용자의 위치에서부터 타깃 위치까지의 직선 루트를 계산합니다.>
<파장 상수값 : 488>
“됐어요.”
윤성이 에어포스를 향해 몸을 돌렸다.
“자, 이제 뭘 하면 되죠?”
“일단 상의를 벗어야 합니다.”
“네?”
에어포스가 약간 얼굴을 붉혔다.
“등에 메시지를 써야 합니다.”
“용계에서 수호자를 만나러 갔을 때는 그런 거 안 했던 것 같은데.”
“원래 차원마다 방법이 다 다릅니다.”
“천계에선 어떻게 하는데요?”
“저희 차원의 방식은 날개가 있어야 합니다. 윤성 씨는 해당 사항 없으니 인계 방식으로 갑시다. 벗으세요.”
윤성은 어깨를 으쓱하더니 상의를 벗었다.
“등 대고 돌아 앉아요.”
에어포스가 시키는 대로 얌전히 따라주자 에어포스는 주머니에서 펜을 꺼내 마치 부적을 쓰는 것처럼 윤성의 등에다 무언가를 그리기 시작했다.
“좀 간지럽네요.”
“참아요.”
“헬라엘은 잘 있던가요?”
“건강합니다. 우리 모두 다음 전쟁에 대비해서 힘을 기르고 있습니다.”
“X등급과 싸울 걸 준비하는 거예요?”
“그렇습니다. 그러고 보니 궁금하군요. X등급이 들어오면 어떻게 대항하실 셈인지. 또 달에서 유성 랜딩을 할 겁니까?”
“그걸로 이길 수 있다는 보장은 없죠. 보다 센 걸 준비할 겁니다.”
“뭡니까?”
“하하. 궁금하죠? 비밀이에요.”
“차희 씨가 미국에 간 게 그것 때문입니까?”
“어떻게 아셨죠?”
윤성이 깜짝 놀라며 에어포스를 돌아보았다.
“뭐. 그냥.”
에어포스가 고개를 살짝 떨구었다.
“고개 돌리니까 몸도 돌아가잖아요. 앞에 보세요.”
윤성이 다시 몸을 돌리자 에어포스가 등에 그리던 문양을 마무리하기 시작했다.
“차희 씨에겐 아무런 비밀도 없으시군요. 옛날에도 그랬고…….”
에어포스가 말했다.
“뭐, 오래전부터 알고 지낸 사이기도 하고. 제가 약골이던 때부터 절 서포트해 준 사람이니까요.”
“그런 게 아니죠. 사랑하는 사람이니까 비밀이 없는 거 아닙니까?”
“좀 간지럽네요.”
“거의 다 됐습니다. 움직이지 마세요.”
에어포스의 펜 끝이 머뭇거렸다.
“윤성 씨.”
“네?”
“아닙니다.”
“왜요?”
“아닙니다. 다 끝났으니 일어나십쇼.”
그녀가 펜 뚜껑을 닫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