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9
레벨업 속도는 9.8m/s^2 229화
73. 사후 복구
“백마 길드는 애초에 덩치가 커서 피 좀 흘려도 버틸 만합니다만.”
백마 길드 대표 사무실.
이제는 더 이상 마스크를 쓰지 않는 윤성이 말했다.
“협회는 사실상 궤멸에 가까운 상태 아닌가요?”
에어포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고제하 협회장님이 핏빛야수가 되어 있었으니까요.”
그녀가 말했다.
“전쟁이 막 시작되던 시점에 지휘 체계에 심각한 혼선이 생기면서 핏빛야수로 폴리모프를 해제한 전사들이 헌터들을 마구 해쳤습니다.”
“많이 죽었나요?”
차희가 물었다.
지금의 회의는 전쟁의 사후 처리에 대한 비밀 미팅이었다.
천사지만 여전히 헌터 협회에서 가장 입김이 센 에어포스와 차희, 윤성만이 모여 있었다.
에어포스는 시름 가득한 한숨을 뱉었다.
“전쟁 이전과 비교하면 절반 이하로 줄었습니다. 원래부터 핏빛야수였던 숫자가 상당했던 것도 문제고, 그들한테 죽임당한 이들도 많았으니까요. 근데 나머지 절반 중에도 부상자가 많습니다.”
윤성이 골치 아프다는 듯 머리를 긁적였다.
“왠지 협회가 할 일이 우리한테 넘어올 것 같은 기분인데.”
“백 퍼센트.”
차희가 확신했다.
“어디 한국만의 일이겠습니까?”
에어포스가 끼어들었다.
“별수 없죠. 일단 전사한 사람들 장례부터 치르고 하나씩 수습합시다.”
윤성이 말했다.
“에어포스는 이제 천계로 가도 좋아요. 굳이 여기 일 더 도와주실 필요는 없어요.”
“고제하 협회장님의 장례 정도는 치르고 갈 겁니다.”
“음……. 그래도 되고요.”
윤성이 대답했다.
“만약 우리가 협회 일을 하게 된다면 정부 부처에서 넘기는 일들도 처리해야 할 텐데. 어떡하지?”
“그런 거 이미 많아.”
차희가 말했다.
“네가 밖을 돌아다니면서 괴물들 때려잡는 동안 난 매일 어떻게 한 번 백마 길드랑 엮여보려는 정치인들 상대했다구.”
“그럼 그 문제는 앞으로도 차희한테 맡기는 걸로 하면 되겠네.”
“처음부터 네가 할 거라고는 기대도 하지 않았어.”
차희가 빙긋 웃었다.
그녀는 소파에서 일어나 윤성의 등 뒤로 돌아왔다.
그의 어깨를 살짝 손으로 감싸면서 말했다.
“옛날에 동생들 데리고 놀이공원 간다 했던 거 기억나?”
“맞아. 그런 약속을 했었지.”
윤성이 고개를 푹 숙였다.
“난 최악이야.”
“괜찮아. 그동안 진짜 엄청 바빴잖아.”
차희가 달랬다.
“그런가? 그치……? 그렇게 나쁜 건 아니지? 그쵸? 에어포스?”
“네?”
에어포스가 딴 데 정신을 팔고 있다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방금까지 그녀는 윤성의 어깨에 올라간 차희의 손을 가만히 쳐다보고 있었다.
“아. 그렇죠. 윤성 씨 정도면 훌륭한 보호자입니다.”
그녀가 약간 장난스러운 목소리로 덧붙였다.
“비록 스무 살 겨우 된 애랑 아직 미성년인 애를 마계로 보내 버리기까지 했지만.”
“네, 반성합니다.”
윤성이 손을 흔들었다.
“좀 더 작전을 꼼꼼히 짰어야 했어.”
“후후, 농담이었습니다. 모두 훌륭했습니다. 옌뚜르가 너무 어려운 상대였을 뿐이죠.”
에어포스가 말했다.
“X등급 전사가 올 때까진 아직 시간이 좀 있을 거 아냐? 그동안이라도 애들 좀 봐줘.”
차희가 말했다.
“근데 X등급 전사가 당장 안 온다는 건 확실한 겁니까?”
에어포스가 딴지를 걸었다.
“뭐, 증거 같은 건 없지만, 꺼삐딴 멸망시키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차례로 다음 적이 등장하는 게 더 이상하지 않아요? 드래곤볼도 아니고.”
차희가 말했다.
“시간은 좀 있습니다.”
윤성이 통신기를 들어 올렸다.
“옌뚜르 통신기에 X등급 전사와 그 녀석의 본대 위치에 대한 정보가 있어요. 실시간으로 업데이트되는데 지금은 지구에서 꽤 멀어요.”
“어딘데요?”
“소행성 MEK이라는 곳인데. 콜로라의 식민지 중 하나인 모양입니다.”
윤성이 어깨를 으쓱하며 답했다.
“근데 꺼삐딴에서 한 놈 놓쳤다고 하지 않았어?”
차희가 물었다.
“아, 클리앙! 그놈도 문제야.”
윤성이 눈살을 찌푸렸다.
“조무래기는 몇 놈 놓쳐도 상관없어. 하지만 그런 간부급은 놓치면 후환이 된다고. 게다가 그놈은 옌뚜르 콤플렉스가 장난 아닌 놈인데 내가 그놈 눈앞에서 옌뚜르를 죽여 버렸으니.”
“복수심에 불타고 있겠군요.”
에어포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뚜르르르르!
사무실 전화가 울렸다.
윤성이 전화를 받으려고 손을 뻗었지만 차희가 더 빨랐다.
그녀는 숙련된 동작으로 전화를 귀에 대고 말했다.
“백마 길드 대표 사무실 민차희입니다.”
그러더니 갑자기 차희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녀는 손목시계를 보았다.
“앞의 미팅이 길어졌습니다. 곧 가겠습니다.”
그녀는 얼른 전화를 끊고 외투를 입었다. 윤성이 물었다.
“누군데?”
“협회와 길드 앞 광장 파손의 피해액을 추산 중인데 그쪽 전문가팀하고 미팅이 있었거든. 금방 다녀올게.”
차희는 후다닥 문을 닫고 밖으로 빠져나갔다.
“우리보다 더 바쁘시군요.”
에어포스가 말했다.
“만약 차희 씨한테 동생이 있었다면 이번 전쟁 때 마이어계에 숨어 있었을 것 같습니다.”
“아. 근데 에어포스. 저 궁금한 거 있어요.”
“뭐죠?”
“꺼삐딴 멸망시킨 후에 우리가 여기로 어떻게 넘어왔는지 생각나요?”
“순간이동석을 써서 인계로 넘어온 다음 수신탑이 설치된 백마 길드 옥상으로 차원문을 열어서 다 같이 이동했죠.”
“맞아요. 순간이동석이 아니면 콜로라로 갈 순 없어요. 차원문으로 이동하는 게 불가능하기 때문에 제가 관리자들에게 순간이동석을 나눠줬던 거죠.”
윤성이 설명했다.
“차희와 신차민이 쓸 순간이동석은 카이야쓰를 물리친 후에 슬쩍해서 챙겨두었지만, 솔직히 차희가 그걸 쓸 수 있을 거라는 건 도박이었어요.”
“마력이 없으니까요?”
“그렇죠. 신차민은 헌터지만 차희는 일반인이에요. 근데 쟤는 통역 마법도 배운 적 있거든요. 이번엔 순간이동석도 작동시켰고.”
“신기하군요.”
“하지만 쟨 누가 봐도 민차희거든요? 오래 알고 지냈으니 아는, 특유의 느낌 같은 게 있어요. 절대 핏빛야수가 폴리모프한 건 아니에요. 완벽한 척하면서 미팅 시간 잊어버린 지금 같은 때만 봐도.”
“확실하죠.”
“혹시 에어포스는 이런 사례에 대해 좀 들어보셨나요? 일반인이 스킬석을 쓴다거나 하는.”
“솔직히 전혀 모르겠습니다.”
에어포스가 소파에서 다리를 까닥거렸다.
“수호자를 만나서 물어보시죠.”
***
소행성 MEK.
매우 작은 행성이라, 표면적의 육지라곤 지구의 호주 정도 크기밖에 되지 않는다.
주민의 수도 매우 적다.
그들 대부분은 농업에 종사하면서 가난하게 살았지만 최근엔 꽤 많은 돈을 벌게 되었다.
일주일 전부터 막대한 숫자의 군대가 묵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조그만 동네 주점.
콜로라 본대의 전사 셋이 술을 마시면서 떠들고 있었다.
“근데 얘기 들었냐? 꺼삐딴이 멸망했다고 하더라?”
“꺼삐딴이?”
“개소리하지 마, 우리 함선이 눈먼 블랙홀에 침몰할 가능성이 더 높겠다.”
“진짜야. 오늘 본국 스마트 뉴스로 봤어.”
“어디 봐.”
전사들이 통신기에서 본국의 최신 뉴스들을 띄웠다.
정말이다. 멸망해서 잔해만 남은 꺼삐딴 본사 건물이 1면에 나타났다.
“전원 사망?”
전사 중 하나가 경악했다.
“그게 말이 되냐?”
“우리가 이번에 침공하는 지구의 전사들한테 털렸다는데.”
“그놈들이 순간이동석을 타고 콜로라 고향 행성까지 이동한 다음, 꺼삐딴 길드를 멸망시키고 돌아갔다고?”
“풋!”
갑자기 전사들이 웃음을 터뜨렸다.
“지구인가 뭔가 그거 완전 촌구석 아니냐? 어떻게 그런 놈들한테 털리는 거야?”
“어쩌면 우리도 지구 갔다가 박살 나는 거 아니냐?”
“아냐. 우리한텐 보스가 있잖아.”
“잠깐만. 이 뉴스 보면 지구에도 X등급이 있다는데?”
“X등급도 체급이 있지. 우리 보스는 다른 행성들 X등급 죽인 적 많아.”
“그렇긴 하지. 마제스티엘 그 미친 새끼만 아녔어도 지구 이미 끝났을 텐데.”
“그럼 꺼삐딴도 무사했을 테고.”
“우리 본대한테 항상 라이벌이니 뭐니 하더니 꺼삐딴 사실 별거 아니었던 거 아냐?”
“그러게. 옌뚜르 그놈도 그래. 왜 보스는 그런 놈을 높이 평하시는 건지.”
전사들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들이 술을 한 잔 쭉 들이켰다.
“옌뚜르도 X등급 되겠다고 무슨 약을 빨고 어쩌고 그랬다지 않았냐?”
“아무리 해봤자 보스한텐 안 될 텐데.”
“불쌍한 새끼. 주제를 알고 좀 찌그러져 있었어야지. 함부로 나대니까 지구 같은 시골 X등급한테 처맞…….”
콰직!
전사의 머리가 테이블에 수직으로 찍혔다.
누군가 그의 뒤통수를 꽉 움켜쥐고 있었다.
“뭐야!”
그의 일행 둘이 벌떡 일어나며 클로를 빼 들었다.
상대는 매우 젊은 전사다.
다만 전투복 어깨에 문양이 새겨져 있다.
“꺼삐딴……?”
“항상 입이 문제야.”
클리앙이 말했다.
“뭐야 이 새끼……. 너 미쳤냐?”
전사들이 험악한 표정으로 클리앙을 쾅, 떠밀었다.
“감히 누굴 건드려? 뒈질려고. 나이도 어려 보이는데.”
“내가 쯔위민하고 동기다. 아냐? 졸업 시험에서 옌뚜르가 1위, 쯔위민이 2위, 내가 3위였다고.”
쯔위민의 동기라는 남자가 클리앙의 멱살을 붙들었다.
“길드 망해서 힘든 건 알겠는데 그렇다고 엄한 사람한테 화풀이를 하면 되나.”
“화풀이.”
클리앙이 피식 웃었다.
“내가 화풀이를 했으면 너희가 아직까지 살아 있을 것 같아?”
“뭐라고?”
“지금……. 내 화가 어느 정도인지 짐작이나 할 수 있겠어?”
클리앙의 눈에서 눈물 한 방울이 떨어졌다. 그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칫. 짜증 나게.”
전사가 멱살을 놓았다.
“가자, 얘들아.”
그가 친구와 함께 테이블에 머리 박힌 녀석을 일으켜 세웠다.
“다음부터는 조심해. 나 쯔위민 동기 판게다. 너네 길드 간부급 실력이라고.”
그가 클리앙을 지나치면서 말했다.
“이딴 새끼를 길드원이라고 뽑는 놈이 대표니까 길드가 망하지.”
<스페이스 스퀴즈 발동!>
클리앙이 사용한 스킬에 공간축이 뒤틀렸다. 판게의 팔꿈치도 함께다.
“끄아아악!”
그가 비명을 지르며 팔을 움켜쥐었다.
제멋대로 찌그러지고 꺾인 팔의 뼈가 괴상한 모양이 되었다. 팔꿈치 관절이 사라졌다.
“이 미친 새…….”
화를 내려던 판게가 움찔하며 멈추었다.
클리앙의 몸에서 마력이 가파르게 상승하고 있었다.
“무, 무슨…….”
본대에서도 고위 간부들 수준이다.
이 애송이가 어떻게 이런 힘을 낼 수 있는 거지?
“너 정체가 뭐냐?”
“꺼삐딴의 마지막 남은 일원이다.”
콰아앙!
그가 판게의 얼굴에 주먹을 박았다.
클로를 바짝 세웠다.
“자, 잠깐만!”
쓰러진 판게가 얼굴을 감싸 쥐고 소리쳤다. 정말로 죽을 위기다.
클리앙은 판게를 향해 성큼성큼 다가갔다.
<마안 발동!>
그의 눈에서 붉은빛이 튀는 순간이었다.
<마안 발동!>
동일한, 그러나 훨씬 강렬한 파장의 마안이 대로 반대편에서 날아와 클리앙을 막았다.
두 마안이 충돌하면서 터진 붉은 파장이 강렬한 풍압을 만들면서 사방을 휩쓸었다.
클리앙이 눈살을 찌푸리며 고개를 들었다.
“내 부하가 실수를 했나?”
남자가 말했다.
“용서해 주길 바란다. 꺼삐딴의 간부. 클리앙.”
그가 클리앙에게 다가와 악수를 청했다.
“X등급 전사. 익시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