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8
레벨업 속도는 9.8m/s^2 228화
윤성이 내려오자 현장이 조용해졌다.
대전사들은 이미 거의 다 모함으로 후퇴한 상태.
이 길고 지긋지긋한 전쟁이 막바지에 접어들고 있었다.
‘졌다.’
베아트리체는 분한 마음을 억눌렀다.
강윤성과 관리자들이 모두 인계로 넘어왔다.
이 말은 곧, 꺼삐딴이 패배했다는 뜻이리라.
“우리 길드는 어떻게 됐지?”
베아트리체가 물었다.
“완전히 파괴했다. 잔해밖에 안 남았지.”
“대표님은? 쯔위민 선배는? 카이야쓰 선배는……?”
“모두 죽였다.”
윤성이 말했다.
“그곳의 꺼삐딴 전사들 중 살아남은 건 없어.”
“……클리앙…… 도?”
윤성은 어깨를 으쓱했다.
베아트리체의 주먹이 파르르 떨렸다.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똑똑 떨어졌다.
치직*
그녀의 통신기가 울렸다.
-베아트리체 님. 어서 올라오십시오!
대전사 중 하나가 말했다.
하지만 베아트리체는 이미 탈출할 의지를 상실했다.
“알아서 도망쳐라. 난 이 싸움을 끝내고 간다.”
-뭐라고요?
“난 저놈을 죽이지 않으면 여길 떠날 수 없을 것 같아.”
그녀가 말했다.
-도와드리겠습니다.
“웃기는 소리 하지 말고 빨리 떠.”
-지금 여기에 씀푸가 타고 있습니다.
대전사가 말했다.
“뭐?”
-꺼삐딴 최고의 엔지니어 중 하나 아닙니까?
“……설마?”
-버프 제거기를 고쳤습니다.
베아트리체는 잠깐 망설였다.
“좋아. 그럼 그걸 써줘. 한 번이면 된다. 그 후엔 바로 도망쳐.”
베아트리체는 차분히 강윤성의 마력을 가늠하고 있었다.
옥상에 있을 때는 관리자들이 주위에 잔뜩 있었고 차원문도 작동하는 중이라 마력이 짐작되지 않았다.
그러나 그때에도 X등급 수준은 아니었다.
지금도 그런 레벨은 아니다. 당연히 그렇겠지, 차원 이동을 하려면 X등급 수준의 힘을 가지고는 불가능하니까.
옌뚜르는 강윤성이 꺼삐딴에서 X등급의 버프를 사용했다고 했다.
그렇다면 인계로 넘어오면서 버프를 지웠을 것이다.
‘처음 X등급 실력을 냈던 때는 우주에서 유성처럼 떨어졌었다. 하지만 이번엔 건물 옥상에서 뛰어내렸지.’
높이에 따른 버프의 차이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지금 강윤성의 마력은 그렇게 절망적인 경지는 아니다.
쯔위민 정도 될까?
하지만 거기엔 옥상에서 뛰어내리며 얻은 버프가 포함되어 있다.
‘백마 길드 지하에서 보았던 강윤성의 전투력은 지구의 여러 차원 관리자들한테도 못 미쳤다.’
모함으로 버프를 날려 버리면 다시 그 정도의 실력으로 내려올 것이다.
베아트리체는 자신의 몸 상태를 점검했다.
많은 부상을 입었지만 해볼 만하다.
저 녀석만이라도 죽인다.
<콜로라 스나이핑 라이플 발동!>
베아트리체의 손에서 발사된 마법 탄환이 윤성을 향해 쇄도했다.
퓽!
관리자들을 제외하고는 그 공격을 제대로 포착한 이가 지상엔 없었다.
실렌티나 헬라엘도 피하거나 막아내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윤성은 애들 공놀이라도 되는 것처럼 가뿐히 고개를 기울여 탄환을 피했다.
그 태연한 표정과 자세를 보고 베아트리체가 이를 갈았다.
‘그렇게 서 있는 것도 버프가 지워지기 전까지다!’
그녀가 클로를 바짝 세우고 돌진하기 시작했다.
맹렬한 기세.
<원 포인트 쓰러스트 발동!>
클로의 다섯 칼날이 한 점에 모여서 펜싱 선수의 레이피어처럼 윤성을 찔렀다.
캉!
하지만 윤성의 단검이 그 공격을 간단히 받아쳤다.
<용조 발동!>
“큭!”
베아트리체가 공격을 간발의 차이로 피했다.
등줄기가 서늘하다.
그러나 베아트리체의 투지는 어느 때보다 뜨겁게 불타올랐다.
<컷 오프 발동!>
그녀가 휘두른 클로가 윤성의 목덜미를 스쳤다.
콰직!
윤성이 그녀의 손목을 움켜쥐고 꺾었다. 고통이 심할 테지만 베아트리체는 눈꺼풀 한 번 꿈틀하지 않았다.
퍽!
그녀가 윤성의 아랫배에 주먹을 먹였지만 손이 더 아프다.
돌덩이를 친 것 같았다.
“젠장. 가지고 노냐?”
베아트리체가 말했다.
“죽일 타이밍이 왔으면 빨리 죽이던가!”
“고민 중이다, 베아트리체. 널 잡아두는 게 나을지. 죽이는 게 나을지.”
“뭐라고?”
“X등급 전사가 왔을 때 새로운 카드로 쓸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
“닥쳐!”
분노한 베아트리체가 초 근거리에서 사격 스킬을 발동했다.
<콜로라 버닝 캐논 발동!>
그녀의 클로에서 발사된 뜨거운 폭발이 윤성의 가슴을 태웠지만 이번에도 그의 몸에는 흠집 하나 나지 않았다.
어쩌면 지금 이놈의 전투력은 쯔위민보다 훨씬 위일지도 모르겠군.
“하지만 혼자서 여기 내려온 건 실수였어.”
베아트리체가 말했다.
“우린 버프 제거기를 고쳤거든.”
“버프 제거기?”
윤성이 고개를 갸웃했다. 베아트리체는 통신기를 향해 소리쳤다.
“지금이다! 작동시켜!”
잠깐의 침묵이 흘렀다.
뭔가 잘못되었음을 베아트리체도 느끼고 있었다.
-이, 이미……. 작동 중입니다.
대전사가 대답했다.
“뭐?”
베아트리체의 안색이 파랗게 질렸다. 윤성은 후, 하고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널 이용할 수 있는 카드는 없군.”
윤성이 말했다.
<빛의 탄환 발동!>
팡!
강렬한 소음과 함께 베아트리체의 심장에 구멍이 뚫렸다.
“컥…….”
콸콸 피를 쏟으며 천천히 무너져 내리는 베아트리체를 뒤로하고 윤성은 천천히 모함이 있는 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그 충격적인 장면을 내려다보던 관리자들은 소름이 돋았다.
“어, 어떻게 된 거예요? 비서님?”
차원문에서 가장 늦게 나온 신차민이 차희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윤성 형님 차원문 넘기 전에 버프 제거하고 나서는, 저렇게 세지는 않았잖아요?”
“글쎄…….”
차희가 헛웃음을 지었다.
“꺼삐딴을 멸망시키는 과정에서 레벨업을 엄청나게 했다고 하긴 했어.”
모함 내부.
대전사들은 대부분이 패닉에 빠졌다.
꺼삐딴의 멸망. 바로 코앞에서 일어난 베아트리체의 피살.
“버프 제거기를 썼는데 왜…….”
누군가 울부짖는 목소리로 말했다.
“탈출……. 탈출해. 여기 있다간 전멸이야.”
김이나 기자 신분으로 인계에 남아 있다가 좀 전에 합류한 씀푸가 말했다.
대전사들이 달려가 순간이동 버튼을 눌렀다.
파직!
강렬한 스파크가 튀어 올랐다.
“뭐야?”
“순간이동이 안 돼.”
전사들 몇몇이 공포에 질려 말했다.
씀푸는 황급히 모니터실로 달려갔다.
지상을 비추는 카메라에 윤성이 이쪽을 향해 왼손을 뻗고 있는 게 들어왔다.
<둠 오브 루인 발동!>
윤성이 순간이동을 차단하고 있었다.
이제는 그의 오른손이 천천히 펴져서, 그 손바닥이 모함을 향하기 시작했다.
와직!
모함 아래층에서 무언가가 찌그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염력 발동!>
윤성의 팔뚝에 핏줄이 섰다.
마치 나무에 걸린 연의 실을 잡아당기는 것처럼, 염력으로 움켜쥔 모함을 잡아당기기 시작했다.
그 거대한 모함이 기운다.
“맙소사…….”
현장을 지켜보던 테쿰세는 오한이 돋는 것을 느꼈다.
역사적 장면을 함께한다거나, 그런 수준이 아니다.
강윤성은 모든 것을 잃어버린 척, 핏빛야수들에게 죽임을 당했지만 완전히 부활하여 그들을 파괴했다.
하늘에 떠 있는 외계 문명의 우주선을 지상으로 끌어내리는 힘.
그 장관이 주는 전율은 그저 강한 것에 대한 동경심 같은 게 아니다.
인간이 할 수 없어야 하는 일을 해내는 인간을 보면서 같은 인간이 느낄 수 있는 것은 인지부조화와 신앙심 같은 것이다.
관리자라고 해서 이런 걸 할 수 있겠는가.
이날의 싸움과 강윤성이란 인물이 기록된다면, 어쩌면 그것은 신화라고 불릴 영역일지도 모른다.
콰아앙!
기어이 모함이 지상에 추락하고 말았다.
산산이 박살 난 전반의 파편이 사방으로 튀어 오르고 깨진 유리들이 와르르 떨어졌다.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이제는 윤성의 염력이 모함의 천장부를 짓누르기 시작했다.
우직, 우직.
끼이익
철근 파이프들이 기울고 가스 밸브들이 터져 사방으로 기체와 마정석을 녹인 마법액과 냉각수가 흘러내린다.
쾅!
모함의 가운데가 무게 중심의 왜곡을 이기지 못하고 부러지고 말았다.
찢어진 틈 안으로 보이는 네 개 층에는 핏빛야수들이 있었다.
대부분이 죽었거나 치명상을 입고 기절한 채 죽어가고 있었다.
그 높이에서 추락했으니 무리도 아니다.
쩍. 쩌적.
윤성이 양손을 써서 염력을 모든 방향에서 주기 시작했다. 모함이 기이한 모양으로 일그러지고 있었다.
이미 버프 제거기 같은 기계들은 다시 파손된 지 오래였고 모든 시스템이 박살 났다.
하지만 윤성의 염력은 기계를 완벽하게 뒤틀고 찌그러뜨려 산산이 파괴해 버렸다.
이제는 점점 압축되고 있었다.
모두의 충격과 경이로움, 공포와 존경심이 뒤섞인 혼란한 분위기 속.
꺼삐딴의 모함은 동그란 모양으로 완전히 구겨져서 거대 빌딩 크기의 은색 공이 되어버렸다.
헌터들은 제대로 숨도 쉬지 못하며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전쟁은 끝났습니다.”
윤성이 말했다.
“이 시대에 평화를 약속합니다.”
-이 시대에 평화를 약속합니다!
아리가 스피커를 이용해 다시 크게 외쳤다.
동시에 또 누군가가 소리를 질렀다.
“마스크맨!”
테쿰세가 환한 표정으로 이쪽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그는 윤성의 손을 꽉 쥐고는 눈물을 흘렸다.
“꺼삐딴은 막았습니까?”
그가 물었다.
“멸망시켰습니다.”
“난 당신이 해낼 거라고 줄곧 믿어왔습니다.”
그가 눈물을 닦아냈다. 미국의 헌터 협회의 수장으로서, 그는 가장 먼저 꺼삐딴의 협박과 회유를 받았던 인물이었다.
그 후 지금까지 인계를 지켜야 한다는 사명감과 꺼삐딴에 대한 적대감으로, 단 한 번도 잠을 깊게 이룬 적이 없었다.
하지만 그의 믿음은 정확했다.
마스크맨이 해냈다.
강윤성이 정말로 인계를 지켜냈다.
투투투투.
상공의 헬기들이 하나씩 지상으로 내려오기 시작했다.
드래곤도, 마족도, 심지어는 지능이 없는 좀비조차도 윤성에 대한 공포감이나 불편함 때문에 쉽게 접근하지 못했지만 인간은 다르다.
테쿰세가 접근한 것을 보고 헌터들이 하나씩 다가오기 시작했다.
그들도 이미 강윤성의 정체를 짐작하고 있었다.
“대표님……?”
홍창민이 조심스럽게 말을 걸었다.
“그동안 수고했습니다. 모두들.”
윤성이 말했다.
콰과광!
갑자기 윤성의 옆에 차원문 하나가 발생했다. 바토리가 씨익 웃으며 마력을 조작하고 있었다.
윤성도 그 너머에서 누가 나올지를 알고 있었다.
‘내 호출을 받고 꺼삐딴으로 넘어오기 전에 얘기해 뒀나 보군.’
윤성은 빙긋 웃으며 차원문 밖으로 나오는 두 사람을 맞이했다.
“무사해서 다행이다.”
“오……. 오빠?”
다윤이 약간 당혹스런 표정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리고 그녀의 팔을 쥔 채 소윤이 떨고 있었다.
“다윤아!”
길드 본관 쪽에서 신차민이 힘껏 달려오면서 소리쳤다.
윤성을 보고도 반응이 얼떨떨하던 다윤은 갑자기 눈물을 펑펑 쏟기 시작했다.
죽음의 순간까지 나누었던 두 사람은 재회의 기쁨에 서로를 와락 껴안았다. 차민도 울고 있었다.
“이제 다 끝났다. 고생들 했어.”
윤성이 말했다.
그는 본관 입구에 서 있는 차희와 에어포스를 바라보았다.
“강윤성 헌터님! 한 말씀 해주시죠!”
“강윤성 헌터님이 마스크맨이었던 겁니까?”
기자들이 등 뒤에서 소리쳐댔다.
“차희. 좀 도와줄래?”
윤성이 그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차라리 핏빛야수 때려잡는 게 낫지. 이 복잡한 사연을 조리 있게 설명하는 건 영 자신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