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7
레벨업 속도는 9.8m/s^2 227화
백마 길드 상공.
기자들 몇이 헬기를 타고 대포 같은 카메라로 현장을 찍고 있었다.
현장으로부터 일정 거리를 두고 무장한 군인들이 원형으로 스크린을 짰다.
혹시 있을 시민들의 접근을 제한하기 위해서다.
클리앙이 침공했을 때보다도 상황이 훨씬 심각하다. 당시에는 기껏해야 마이어계 패잔병과 메탈로이드 패잔병 몇이 나왔을 뿐이지만 이번은 규모가 완전히 달라졌다.
문자 그대로 전쟁.
그러나 군이 여기서 할 일이 없다는 것은 모두가 알고 있었다.
그리고 이 싸움에 세계의 운명이 달려 있음도 알고 있었다.
카메라맨이 찍은 화면을 중계하면서 BBC 앵커가 말했다.
“핏빛야수들 한가운데 있는 저 마수가 사령관으로 보이는데요. 지금 무전기 같은 것을 들고 흥분해서 소리치는 모습이 나오고 있습니다.”
그 정체는 베아트리체였다.
“대체 무슨 소립니까? 대표님? 우리가 여기서 주의를 분산시키겠습니다. 시간만 끌면 됩니다. 마스크맨은 인계가 멸망하도록 내버려 두지 못할 거예요.”
그녀가 통신기에 대고 말했다.
“결국 그놈은 인계로 돌아와야 할 겁니다. 나머지 관리자들을 정리하시면 우리가 이기는 거예요!”
-내가 치명상을 입었다.
옌뚜르가 말했다.
-이제 배터리를 쓸 수 없게 되었다. 클리앙을 이곳에서 탈출시키겠다. 넌 그곳의 어린 전사들을 데리고 모두 후퇴해라.
“자, 잠깐만. 대표님!”
-강윤성이 버프를 썼다. X등급으로 각성했어. 아무도 그를 못 막는다. 이미 카이야쓰도, 쯔위민도 한계다.
“하지만…….”
-도망쳐라…….
옌뚜르와의 통신이 끊어졌다.
베아트리체가 입술을 달싹였다.
고민에 잠긴 그녀에게 대전사 하나가 슬쩍 물었다.
“어떻게 할까요?”
“지금 협회와 백마 길드 내에서 활동하면서 소란을 일으키고 있는 하급 전사들 모두 모함으로 후퇴하라고 해.”
베아트리체가 말했다.
“그들을 모두 모함으로 보낸 후에 너희도 올라간다.”
“베아트리체 님은요?”
“난 안 가.”
“네?”
“이렇게 패배하고 도망칠 순 없어.”
베아트리체가 클로를 바짝 세우고 적들을 향해 돌진하기 시작했다.
“전부 다 덤벼! 이 하찮은 것들아!”
그녀가 소리를 질렀다.
팡!
<소니케이션 발동!>
클로에서 강렬한 초음파가 발산해 하늘을 향했다. 드래곤들의 방향감각이 흐트러졌다.
쉬익!
제자리에서 훌쩍 뛰어 오른 베아트리체는 SS급 헌터 세르게이의 머리를 밟고 넘어갔다.
그녀의 클로가 공격에 들어간 독사의 송곳니처럼 움직였다.
헌터들과 좀비들, 메탈로이드 무리의 가운데 곳곳을 뛰어다니는 베아트리체의 움직임은 그 누구도 쉽게 쫓을 수 없다.
귀신.
무관 학교 최연소 에이스로 역대 기록을 새로 쓰며 졸업하던 당시, 그녀에게 그런 별명이 붙었다.
졸업 시험 심사를 지켜본 어느 기자가 그녀의 움직임이 마치 귀신같다며 평한 데서 생긴 것이다.
모든 콜로라의 유명한 전사들을 가뿐히 뛰어넘는 잠재력.
마정석을 남들 두 배로 먹어도 소화시킬 수 있는 축복받은 성장력의 천재 클리앙이 나오기 전까지, 베아트리체는 그 나이를 고려했을 때 콜로라의 역사를 통틀어 최고의 실력자였다.
“내가 다 죽여 버릴 거야!”
그녀가 소리를 질렀다.
<황룡 참파 발동!>
좌측에서 날아온 티엔의 스킬.
베아트리체는 공중제비를 넘어 사뿐히 피했다.
전방에선 여덟 개의 메탈로이드의 포탄과 미사일.
후방에선 좀비와 마계 기사들이 일곱.
좌측에선 다시 티엔과 세르게이, 프랑수아.
그러나 베아트리체는 신들린 것처럼 움직여 그들의 모든 공격을 피했다.
티엔의 뺨에 식은땀이 흘렀다.
‘이게 가능한 건가?’
베아트리체의 사나운 눈빛이 그를 마주하고 있었다.
인계로 넘어오기 전, 길드 건물 옥상에서 에어포스의 빛펀치를 맞았을 때도 그랬다.
용안에 모든 움직임을 읽혔고 에어포스가 정확한 타이밍에 정확한 각도로 펀치를 날렸지만, 베아트리체는 간발의 차이로 피해 치명상을 면했던 것이다.
클리앙처럼 마정석을 소화하는 능력은 없다.
베아트리체의 천재성은 단순히 실전이 거듭됨에 따라 감각이 날카로워지는 것뿐.
그러나 그게 무서운 것이다.
이젠 그 어떤 공격도 모두 피할 수 있을 것만 같다.
<혜성 찌르기 발동!>
베아트리체의 클로의 칼날에서 혜성 꼬리처럼 반짝이는 얼음 조각 같은 것이 날렸다.
그녀의 공격이 티엔의 목에 꽂히기 직전.
“큭!”
베아트리체의 머리가 지끈 울렸다.
“뭐야?”
정신 공격이다. 시전자와의 레벨 차이가 큰 탓에, 기절하거나 의식이 잠식당할 정도로 강력하진 않다.
하지만 편두통처럼 괴롭고 움직임이 끊긴다.
“어떤 새끼가…….”
그녀가 주위에 몰려드는 적들을 헤치며 포위 밖으로 빠져나갔다.
백마 길드 건물과 협회 방향에서 수많은 하급 전사들이 몰려들고 있었다.
A급 헌터 대대가 마치 그들을 사냥이라도 하는 듯 뒤쫓고 있었다.
“포탈 올려!”
베아트리체가 통신기에 대고 소리쳤다.
모함에서부터 웅웅거리는 소리가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일정 거리에 접어든 전사들이 마치 번개를 맞는 듯한 모양새로, 모함에서 날아온 빛줄기를 받으며 증발했다.
“전부 대피해!”
그녀가 소리쳤다.
하지만 대전사들은 아직 달아나지 않았다. 그들은 클로를 세우고 계속해서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뭐 하는 거야?”
베아트리체가 눈살을 찌푸렸다.
“우리도 함께하겠습니다.”
대전사 중 하나가 말했다.
머리 위에서 화염과 마법 미사일들이 쏟아진다.
베아트리체는 이를 갈며 적들 가운데와 근처 건물들을 살펴보았다.
정신 공격을 시도한 놈이 여기 어딘가에 숨어 있을 것이다.
‘그리 멀지는 않을 텐데. 대체 어디에…….’
퍽!
갑자기 한쪽에서 날아온 창 하나가 베아트리체의 옆구리를 스쳤다.
헬라엘이 던진 것이었다.
베아트리체는 다시 마력을 끌어올리며 그를 향해 돌진했으나 또 한 번 날카로운 두통을 느꼈다.
헬라엘이 검을 들고 달려오고 있었다.
“안 돼!”
실렌티가 하늘 위에서 소리쳤다.
“그래도 만만히 볼 상대는 아니다! 관리자들이 올 때까지 기다려라, 헬라엘!”
헬라엘은 약간 주춤했지만 물러나진 않았다.
무엇보다 앞에서 누군가 주의를 끌어주지 않으면 테쿰세가 발각될 것 같았다.
<콜로라 스나이핑 라이플 발동!>
베아트리체가 발사한 탄환이 헬라엘의 손목을 뚫었다.
“크윽.”
헬라엘이 손목을 움켜쥐었다.
<마안 발동!>
베아트리체의 눈이 붉게 빛났다. 마치 정신 공격이란 이런 것이다, 라고 적들에게 보여주는 듯한 마법.
헬라엘이 무릎을 꿇었다. 머릿속이 핑핑 도는 기분. 토할 것 같은 느낌이다.
타다다닥!
베아트리체는 매서운 기세로 달려들었다. 다시 한번 두통이 머리를 쪼개 버릴 것처럼 찾아왔지만 꾹 참았다.
헬라엘 같은 강자를 기회가 왔을 때 처치하지 못하면 안 된다.
그러나 그녀가 헬라엘의 목을 쳐버리기 전, 또 다른 방해꾼이 나타났다.
육지를 부술 듯이 울리면서 착지한 실렌티가 베아트리체를 향해 고열의 화염을 퍼부었다.
<엘리멘탈 프로텍션 발동!>
베아트리체는 마법을 써서 그 공격을 방어했다.
그러나 마력이 빠른 속도로 소모되고 있다. 이런 식의 싸움으로는 끝이 없다.
제대로 된 컨디션이었다면 이들 중 상당수를 처치할 자신이 있지만 지금 그녀의 몸은 만신창이다.
콰앙!
놀랍게도 대전사 몇이 달려와 몸으로 실렌티를 떠밀었다.
그들의 클로가 실렌티의 옆구리에 박히고 마법이 난무했다.
드래곤 둘과 천사 일곱이 지상으로 빠르게 낙하하며 그들 가운데 끼어들었다.
아톰이 무시무시한 기세로 달려와 베아트리체를 몸통을 떠밀어버리고는 플라즈마 캐논을 연사했다.
아비규환.
그야말로 전장은 완전히 진흙탕이 되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하급 전사들은 모두 모함으로 대피했다는 것 정도인가?’
베아트리체가 쏟아지는 포격들을 피하며 상황을 진단했다.
“베아트리체 님!”
대전사 중 하나가 그녀에게 달려왔다.
“찾았습니다.”
“뭘?”
“정신 공격을 하는 녀석 말입니다.”
“어디에 있지?”
대전사가 손가락을 들어 약 2킬로미터 떨어진 곳의 꼬마 빌딩을 가리켰다.
듣고 보니 그쪽에서부터 찝찝한 마력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제가 가겠습니다.”
“잠깐만.”
베아트리체가 대전사의 팔을 잡아당겨 세웠다.
“……안 돼. 모두 대피해라.”
“네?”
“어서! 꺼삐딴 전사들은 전원 모함으로 돌아간다! 명령이다!”
베아트리체가 소리를 질렀다.
백마 길드 본관 옥상에 작은 차원문이 하나 열려있었다.
거기서 모습을 드러낸 것은 강윤성이었다.
***
“저것 보십시오!”
헬기의 기자들이 카메라로 백마 길드 옥상을 찍었다.
전 세계 곳곳의 방송국들이 현장에서 들어오는 영상을 속보로 보도하고 있었다.
“행방불명되었다던 민차희 비서와 강윤성입니다!”
앵커들이 상황을 전달했다.
“강윤성 헌터는 마스크맨의 살해범으로 알려져 있는데요.”
“핏빛야수들의 전장을 돕기 위해서 민차희 비서를 데리고 인질극을 하기 위해 나온 게 아닌가 싶습니다.”
“어, 지금 화면에 또 다른 게 잡히는 것 같은데요. 차원문으로 뭔가가 또 나오는……. 헉.”
퀸이다.
엘리지아 퀸이 차원문을 넘었다. 넌밀, 성체들과 함께였다.
퀸은 처음 느껴보는 인계의 신선한 공기를 흠뻑 들이마시며 옥상 난간에 몸을 기대었다.
이윽고 바토리와 미들로드가 모습을 드러냈다.
치지직-
차원문이 요동치더니 이번엔 에어포스가 넘어왔다.
모든 앵커들이 말을 잃었다.
이 별난 조합을 그 누가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는가.
이제는 차원문이 크게 부풀더니 훨씬 덩치가 큰 이들이 인계로 몸을 옮기고 있었다.
아리와 용제.
그 모습을 보며 베아트리체가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녀가 대전사들에게 소리쳤다.
“나도 피하겠다. 약속할게. 모든 대전사들! 모함으로 후퇴해라!”
“약속하신 겁니다.”
대전사들이 하나씩 마법을 써서 모함의 포탈에 동조화시켰다.
순식간에 그들이 증발해 모함으로 이송되기 시작했다.
윤성과 관리자들, 차희는 그 광경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마스크 안 써도 됩니까?”
에어포스가 윤성에게 물었다. 윤성 대신 차희가 답했다.
“이제 상관없어요. 어차피 적들에게 감추는 게 목적이었으니까요.”
“하지만 적들은 이제 제 정체뿐 아니라 능력도 알죠.”
윤성이 맞장구치며 통신기를 집어 들었다. 옌뚜르의 것이었다.
그 안엔 윤성의 랜딩과 그것을 통해 강력한 버프를 얻는 듯하다는 추측성 메시지가 입력되어 있었다.
수신자는 콜로라 본대.
X등급에게 전해진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베아트리체는 내가 잡겠다.”
용제가 말했다.
“마무리를 못했던 건 내 책임이니.”
“아뇨. 제가 처리합니다.”
윤성이 난간 위에 발을 디뎠다.
“다들 잘 봐두십시오!”
갑자기 아리가 소리쳤다. 윤성이 눈살을 찌푸렸다.
“꼭 그렇게 해야겠냐?”
“얼굴 까고는 처음이잖아요?”
“맘대로 해.”
아리가 확성기 프로그램을 작동시켰다. 볼륨을 최대로 높인 후 길드 인근 광장의 스피커들을 해킹했다.
그의 로봇 음성이 헬기 위의 기자들에게까지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클리앙이 침공했을 때, 다들 기억하시죠? 지구를 침공한 놈들은 어떻게 되는지 다시 보여드릴 겁니다. 지구엔 어떤 존재가 있는지 지켜보십시오.”
아리가 말했다.
BBC 앵커는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클리앙의 침공 당시 유명해졌던 동영상이 떠올랐다.
“슈퍼히어로랜딩…….”
콰아앙!
길드 옥상에서 지상으로 수직 낙하한 윤성의 한 손과 두 발이 지면에 닿았다.
남은 팔은 사선으로 펼쳐 무게 중심을 잡는다.
손바닥 끝의 찌릿한 통감.
익숙한 메시지가 떠올랐다.
<최종 속력=49.12㎧, 낙하 거리=323.75m, 낙하 시간=9.8s>
<랜딩 성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