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6
레벨업 속도는 9.8m/s^2 216화
69. 전력 집중
딘야차는 꽤 오랜 시간을 기다려서 바토리를 만날 수 있었다. 그녀는 차가운 표정으로 테이블에 앉더니 딘야차를 빤히 노려보았다.
“눈에 힘 좀 푸시지?”
딘야차가 웃으며 말했다.
“그럴 수 있겠느냐? 네놈이 마왕님을 살해했는데.”
“그리고 덕분에 네가 그 힘을 가진 모양인데?”
“문제 될 게 있느냐? 그분이 후계를 누구로 결정하시든 그것은 마계의 자치 권한이다.”
“하지만 꺼삐딴에 반항적인, 그 유명한 바토리에게 힘을 넘겼다면 문제가 될 수 있지.”
“내가 반항적인 게 문제인 건가?”
“그럼? 지금부턴 맘을 바꾸어서 꺼삐딴에 충성이라도 하겠다는 거야?”
딘야차가 조소를 띠고 물었다.
“굳이 못 할 것도 없지.”
“정말인가?”
딘야차가 뜻밖이라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그렇게 완강한 바토리가 갑자기 고분고분해졌다. 심지어 그녀가 그토록 따랐던 마왕이 살해당한 직후인데?
“마왕께서 내게 가르치셨던 것은 마계의 통치자의 권위가 아니라 책임감이다.”
바토리가 말했다.
“나는 마족들의 안전을 책임져야 하지. 이젠 전쟁광처럼 굴 수 없는 것이다.”
“마족 놈들 참 독특해.”
딘야차가 웃음을 터뜨렸다.
“좋아, 바토리. 우린 원래 널 죽이고 마왕에게 마정석을 헌납케 하려고 했다.”
딘야차가 말했다.
“하지만 네 죽음은 전 마왕의 죽음으로 대신해주지. 네가 꺼삐딴에 복종한다는 전제하에 말이야. 하지만 마정석 헌납은 해야 해.”
“몇 개지?”
“A급 이상 마정석 3만 개.”
“너무 많군. 2만 개로 해라.”
“장난하냐?”
딘야차가 어이없다는 듯 눈살을 찌푸렸다. 하지만 바토리는 단호한 표정이다.
“마왕께서 돌아가셨으니 마계는 한동안 불안정해질 것이다. 라플라스나 르네 같은 지방의 강력한 귀족들이 들고일어나겠지. 날 마왕으로 인정하지 못하겠다고.”
“그건 너희 사정이고.”
“그들을 제압하고 중앙 귀족들의 반대를 진정시키려면 많은 마정석이 필요하다.”
“그러니까 그건 네가 알아서 할 문제라고.”
“인도적인 지배 운운하더니 이렇게 상황을 이해해 주지 못하는가?”
“하, 참나.”
딘야차가 머리카락을 쓸어넘겼다.
“이봐. 죽고 싶어?”
그가 은근한 목소리로 위협했다.
“네년은 마왕이 된 지 얼마 안 되었으니 그 마력을 충분히 운용하지 못할 거다. 지금 네 실력으론 날 당해낼 수 없을 텐데.”
“그건 해봐야 아는 거지.”
딘야차의 눈썹이 꿈틀했다. 바토리는 차가운 표정으로 딘야차를 쏘아보았다.
그 눈빛에는 조금의 흔들림도 없었다.
갑자기 딘야차가 피식 웃음을 지었다.
“이런 협박이 먹히진 않는군. 마왕이 후임을 잘 고르긴 했어.”
“2만 개로 줄일 건가?”
“그건 아니다. 대표님하고 얘길 해봐야겠군.”
딘야차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바토리가 황급히 붙잡았다.
“잠깐만.”
“뭐야?”
“마왕님의 마지막이 어땠는지 얘기해다오.”
시간을 더 끌어야 한다. 딘야차는 고개를 갸웃하면서도 자리에 앉았다.
“그게 왜 궁금하지?”
“마왕께선 날 오랫동안 보살펴준, 내 아버님 같은 분이었으니까…….”
바토리가 말했다. 이번 것은 진심이었다.
하지만 말미에 그녀는 무언가를 느끼고 속으로 미소지었다.
강윤성이 왔다.
바토리는 눈으로 그를 확인하진 못했지만 뛰어난 기감으로 움직임을 감지하고 있었다.
윤성은 기척을 최대한 억누른 채 귀족들의 응접실 입구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바토리보단 기감이 한 수 아래지만 딘야차도 이 거리라면 무언가를 느낄 수 있다.
주인공의 정체를 짐작하진 못했지만, 딘야차의 표정이 찝찝한 듯 미세하게 일그러졌다.
<돔 오브 루인 발동!>
윤성이 시전한 마법이 반투명한 돔의 형태가 되어 응접실 전체를 감쌌다.
윤성이 무슨 짓을 저지를지 이미 알고 있었던 바토리조차 깜짝 놀랐다.
‘세상에 뭐 이딴 마법이?’
청정수처럼 흐르던 대기 중의 마력이 썩은 진흙 구덩이처럼 혼탁해졌다.
순간이동을 비롯한 몇 종류의 마법을 완벽하게 차단하고 망가뜨릴 수 있는 스킬.
엘리베이터 랜딩을 다섯 번 반복한 끝에 이걸 얻었다.
“무, 무슨……?”
놀란 딘야차가 어정쩡한 자세로 일어나며 두리번거렸다. 그리고는 윤성을 발견하자 표정이 사납게 변했다.
챙!
딘야차는 곧장 클로를 빼 들며 전투태세를 갖추었다.
“어떻게 회복했지? 치유 불가능한 부상이었을 텐데?”
“엘리지아의 힘으로 회복했다.”
“……하지만 뇌 속의 마력 기저핵까지 파괴했는데!”
“엘리지아는 뇌를 포함해서 머리가 통째로 날아가도 핵 하나만 남아 있으면 재생하는 놈들인데.”
윤성이 손가락을 총 모양으로 만들었딘.
<빛의 탄환 발동!>
그의 양손에서 연달아 섬광이 발사되었다.
<플라즈마 개틀링 발동!>
딘야차가 곧바로 응전했다. 그의 클로가 개틀링건처럼 변하더니 플라즈마 마력 탄환이 무수히 쏟아지기 시작했다.
파바바!
순식간에 윤성의 몸이 벌집처럼 되었지만 그는 아직 엘리지아의 정복자 칭호가 적용되는 중이었다.
빠른 속도로 스멀스멀 아무는 상처들을 보며 딘야차가 경악했다.
그러나 적은 윤성만이 아니다.
싸아악!
딘야차가 당황한 틈을 놓치지 않고 바토리가 장검을 휘둘렀다.
마왕의 마력이 실린 묵직한 일격.
“크악!”
딘야차의 어깨에 깊은 상처가 났다. 그는 고통스러운 듯 어깨를 움켜쥐고 물러났다.
윤성이 그 앞으로 바짝 치고 들어갔다.
“바토리. 내가 앞에 서겠다. 활을 쏴.”
“알겠다.”
파앙!
바토리가 한 손을 펼치자 그녀의 손아귀에 새까만 마법의 활이 나타났다.
<암수살 발동!>
그리고 그녀는 곧장 뒤로 이동해 거리를 만들면서 연달아 화살을 쏘아댔다.
“큭!”
한 발 한 발에 막강한 마력이 실려 있다.
딘야차는 클로를 휘둘러 몇 발을 쳐냈고, 리플렉션 마법을 국소적으로 발동해서 또 몇 발을 막아냈다.
콱!
그러나 결국 한 발이 허벅지에 꽂혔고 리플렉션이 흐트러지자 어깨에도 한 발 꽂혔다.
그러나 더 큰 공격은 지금 날아드는 중이다.
<용조 발동!>
콰직!
드래곤의 발톱을 닮은 윤성의 손가락이 딘야차의 아랫배 속으로 파고들었다.
딘야차의 입에서 피가 울컥 올라왔다.
싸아악!
그가 클로를 휘둘러 윤성의 손목을 잘라냈다. 하지만 곧바로 재생되기 시작했다.
콰직!
멀쩡한 손으로 용조를 다시 썼다. 윤성의 주먹이 상처 부위를 더욱 깊숙이 파고들었다.
“커헉!”
딘야차가 다시 피를 토했다.
그의 주먹이 뱃속에 들어와 있는 게 느껴진다.
윤성은 손가락 세 개를 폈다.
<빛의 산탄 발동!>
펑!
작은 수류탄이 터진 것처럼 딘야차의 복부에서 피와 살점이 분출했다.
그가 이를 으득 깨물었다.
“이, 이 새끼…….”
딘야차가 윤성의 손목을 움켜쥐었다.
딘야차의 주력 스킬들은 저주와 감염 계열이다. 윤성이 펼쳐놓은 마법 돔 때문에 스킬 대부분을 쓰지 못하게 되었다.
하지만 이 정도 거리에서 피부 접촉이 있으면 시도해 봄 직하다.
<디케이 발동!>
조직을 괴사시키고 무너뜨리는 스킬이다. 어팝토시스와 비슷하지만 더 강하다.
그러나 스킬이 윤성의 피부로 전해지기 직전.
쫘아악!
바토리가 장검으로 딘야차의 손목을 잘라버렸다.
푹!
그녀가 곧장 장검을 역수로 쥐고 딘야차의 가슴을 찔렀다.
“네, 네놈들이…….”
딘야차의 몸이 파르르 떨렸다.
윤성은 그의 목을 한 손으로 꽉 움켜쥐었다.
<인페르노 발동!>
“끄아악!”
화염에 휩싸이자 딘야차가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그 목소리는 오래가지 못했다. 이미 생명력이 바닥난 상태였던 것이다.
딘야차의 몸이 스르르 기울어 바닥에 쓰러졌다.
“자. 일단 소지품부터 챙겨볼까.”
윤성은 딘야차의 인벤토리 주머니를 꺼내 소지품을 확인했다. 신분증과 딘야차에게 귀속된 순간이동석 따위가 들어 있었다.
“그리고 헬라엘이 알려준 대로.”
윤성은 딘야차의 마력 파장에 자신의 마력 파장을 맞추어 조율했다.
죽은 이의 DNA가 들어 있는 게 필요하다.
머리카락 정도면 되겠지?
윤성은 딘야차의 반쯤 타버린 머리카락 하나를 뽑았다.
<폴리모프 발동!>
“맙소사…….”
바토리가 입을 떡 벌렸다.
“어때? 바토리. 나 딘야차 같냐?”
“완전 똑같다.”
“헬라엘이 제대로 알려줬군.”
윤성이 웃으며 말했다.
“그자는 그걸 어떻게 알았던 것이지?”
바토리가 물었다.
“마제스티엘이 살해되고 옌뚜르가 마제스티엘로 변신해서 천계를 엎은 다음에, 마제스티엘의 명예를 회복하려고 계속 조사했다더군.”
윤성이 말했다.
“하지만 그 녀석도 폴리모프 방법에 대해 확신하고 있는 건 아니었어. 아무튼 잘됐으니 다행이야.”
윤성은 딘야차의 전투복을 내려다보았다.
“이걸 입고 가면 위장하기 더 쉬울 텐데.”
“하지만 이미 누더기 같은 상태다.”
“맞아. 어쩔 수 없지.”
“그냥 갈 것이냐? 그 복장이 눈에 띄진 않겠느냐? 마계의 귀족 의상은 이 자가 입은 것과는 사뭇 다르다.”
“하긴. 딘야차가 전투복 말고 다른 걸 입는 것을 본 적은 없네. 특히 다른 차원들을 돌아다니는 요즘 같은 때엔 좀 어색할지도 모르겠어. 하지만 방법은 또 있지.”
윤성은 순간이동석을 꺼냈다.
***
콜로라의 귀금속 상인 빠뜨는 역대급 호황을 맞이하고 있었다.
윤성이 가져다준 인계의 마력 아이템들 덕분이다.
그걸 자본 삼아 사업을 확장했고 성공적인 성과를 올리고 있다.
‘근데 그 강윤성이 인계의 관리자였을 줄이야.’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그 때문에 한때 경찰에 불려가서 취조도 받고 꺼삐딴의 간부들을 만나서 면담도 했다.
하지만 팔아주는 물건들을 샀을 뿐인데 뭐가 문제가 되겠는가. 아무것도 몰랐는데.
솔직히 빠뜨 입장에선 윤성이 나쁜 놈 같지도 않았다.
‘전쟁에 대해선 잘 모르지만, 격전지 쪽 대장 비슷한 거라던데.’
그럼 자기네 땅 지키기 위해서 열심히 싸우는 것이 당연한 것 아닌가.
“에이. 잡생각은 그만. 일을 해야지, 일.”
새로 벌인 의류 매장의 매출을 높이기 위해 꺼삐딴 간부들을 모델로 사용하는 방법을 고민하는 중이었다.
“클리앙은 얼굴이 잘생겼고, 베아트리체는 몸이 비율이 좋으니까. 그런 사람들한테 모델을 맡기면 딱인데.”
빠뜨가 새로 들어온 신상 의류들을 정리하며 혼잣말을 했다.
우웅.
현관의 자동문이 열리면서 누군가가 매장에 나타났다.
“헉!”
그의 얼굴을 본 빠뜨가 경악했다.
“딘야차 님!”
“옷을 좀 보러 왔습니다.”
윤성이 말했다.
“맙소사. 저희 매장에서 사시는 겁니까?”
윤성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딘야차의 평소 말투가 어떤지 잘 모르니까 최대한 말수를 줄일 생각이었다.
“세상에. 어쩐 일이세요? 전에 저 취조하셨던 것 때문에 미안해서 그러시는 겁니까? 괜찮은데. 헤헤헤헤.”
빠뜨는 신나서 홀로 튀어나와서는 옷가지들을 하나씩 꺼내놓았다.
“어떤 걸 찾으십니까?”
“전투복…….”
“그럼 이런 것은 어떻습니까?”
빠뜨가 딘야차가 평소 입던 것과 비슷한 디자인의 전투복을 꺼냈다.
“본국에서 새로 나온 SSS급 전투복입니다.”
윤성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근데 제가 지금 지갑을 안 가져왔는데, 이따 저녁에 계산해드려도 됩니까?”
윤성이 물었다. 딘야차 정도의 유명세를 가진 얼굴이라면 먹힐 거라 생각했는데 빠뜨는 뜻밖의 말을 꺼냈다.
“무상으로 드리겠습니다!”
“정말요?”
“저희 매장 옷을 입어주신다는데 뭘 더 바라겠습니까?”
윤성은 피식 웃으며 전투복을 가지고 피팅룸에 들어갔다.
딘야차의 몸이 제법 근육질에 골격이 큰 편이라 전투복은 어깨가 딱 조였다.
‘어차피 몇 가지 할 일들만 처리하고 나면 옷가지 따위는 중요하지 않으니까.’
움직이기 조금 불편했지만 참을 만하다.
윤성은 빠뜨에게 인사하고 가게를 나왔다.
“근데 어디 전투하러 가십니까?”
빠뜨가 물었다.
“새 전투복도 차려입으시고. 허허.”
“아닙니다. 길드로 돌아가는 길입니다. 대표님을 뵈러요.”
윤성이 웃으면서 대답했다.
꺼삐딴 길드를 향하면서 깊이 심호흡을 했다.
<차원 통신 발동!>
윤성이 정신을 집중했다.
통신의 파장대는 엘리지아.
<퀸. 날 좀 도와줘.>
윤성이 메시지를 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