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4
레벨업 속도는 9.8m/s^2 214화
옌뚜르는 고민에 잠겨 있었다.
강윤성을 꺼삐딴으로 압송하지 않고 백마 길드 지하에 파묻어버린 것은 두 가지 목적이 있었다.
첫째. 마스크맨과 민차희가 사라진 인계에 혼란을 야기하지 않기 위해서다.
이미 인계는 꺼삐딴에 대해 많은 걸 안다.
지도부를 상실한 백마 길드는 두 사람을 살해한 범인이 누군지 몰라서 서로를 의심하고 분열할 것이다.
그보다는 차라리 범인을 잡았다는 위안을 가진 채 백마 길드를 중심으로 뭉쳐있는 편이 다스리기 편하다.
따라서 강윤성을 마스크맨의 살해범으로 지목해서 공개하고 넘겨준 것이다.
둘째. 강윤성은 현재 마스크맨을 살해한 핏빛야수로 알려져 있다. 상당히 중요한 인물이다.
자경단의 헌터들이 그를 감금한다면 어디로 데려갈까?
클리앙과 베아트리체가 감금된 곳으로 갈 가능성이 가장 높다. 같은 감옥이 아니라도 같은 레벨의 보안이 걸린 근처의 방으로 갈 것이다.
아직까지 백마 길드에 심어놓은 꺼삐딴의 첩보원들로는 두 사람의 소재를 파악할 수가 없었다.
따라서 강윤성을 앞세우고 감금하는 현장을 뒤따르는 방식으로 처리하려 했던 것이다.
“어떡하죠? 아직 클리앙, 베아트리체 선배를 못 찾았는데.”
옌뚜르와 둘만 남게 되자 고제하가 물었다.
그의 정체는 꺼삐딴의 대전사 피어시그였다.
“테쿰세와 제다이는 한동안 이곳 지하에서 살았다.”
옌뚜르가 말했다.
“클리앙과 베아트리체를 감금해 뒀다면 누군가 계속 감시하고 식사를 날라야 한다. 아무한테나 그 일을 맡길 순 없을 테고.”
“테쿰세는 알 것이라는 겁니까?”
“다른 차원의 관리자들이 모두 자신의 계로 돌아간 것으로 보이는데, 지금도 그 일을 하고 있는 사람은 있어야 하니까. 테쿰세 정도면 지위도 있고 고유 스킬도 있어 믿을 만하지.”
“제가 테쿰세에게 물어보겠습니다. 하지만 갑자기 물어보면 의심하지 않을까요?”
“내가 하겠다. 다만 네 얼굴이 더 신뢰도가 높을 듯하군. 잠깐 넘겨라.”
“알겠습니다.”
<마안 발동!>
옌뚜르의 눈이 붉게 빛나며 피어시그의 머릿속으로 침투했다.
피어시그는 옌데르의 얼굴로 변했고 옌뚜르가 고제하의 폴리모프 정보를 넘겨받았다.
타인이 이미 사용한 폴리모프를 가져오는 것은 마안 동력의 극단적인 경지에 이른 이들만이 할 수 있는 것이다.
X등급 전사조차도 이런 것을 하진 못한다.
옌뚜르는 고제하로 변신한 후 백마 길드의 테쿰세를 찾아갔다.
“테쿰세 헌터님. 혹시 클리앙과 베아트리체를 만나볼 수 있습니까?”
옌뚜르가 물었다.
“그들은 무슨 일로요?”
“마스크맨이 살해되고 강윤성이 그를 연기한 게 오래되진 않았을 것 같습니다. 민차희 비서님이 당한 것도 최근이니까요.”
“그렇죠.”
“하지만 만약 제가 핏빛야수고, 마스크맨이 된다면 가장 먼저 할 일은 클리앙과 베아트리체를 석방하는 겁니다.”
“아. 그건 걱정하지 마십시오. 제가 오늘 아침에도 보고 왔으니까요.”
“잘 있다니 그나마 다행이군요. 하지만 한 가지 더. 민차희 비서님이 살아있다는 얘기가 있습니다.”
“살아계신다고요?”
“아까 옌데레 헌터님과 함께 강윤성을 심문하면서 알게 된 사실입니다. 보시죠.”
고제하가 통신기를 내밀었다.
“강윤성에게 압수한 물건입니다. 핏빛야수의 휴대폰 같은데 이런 사진이 있더군요.”
옌뚜르는 포박된 차희와 함께 쯔위민이 찍은 사진을 열어주었다.
“흠.”
“클리앙과 베아트리체와 얘길 하게 해주십시오. 인질 교환에 대해서 생각을 좀 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알겠습니다.”
테쿰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안건이 안건이기도 하고, 고제하는 적어도 마스크맨으로 변신한 핏빛야수 강윤성의 정체를 폭로했다는 점에서 많은 신뢰를 받는 인물이었다.
테쿰세는 고제하와 함께 지하로 내려가 비밀 벽을 열었다.
높은 수준의 마력 차단 처리가 되어있는 벽이었다.
‘그래서 두 사람의 마력을 느끼지도 못했군.’
옌뚜르가 혀를 쯧 찼다.
테쿰세가 말했다.
“원래는 강윤성도 여기에 감금하려고 했습니다. 보는 눈이 많아서 관두었지만. 나중에 옮길 겁니다.”
“감사합니다.”
비밀 방으로 들어간 옌뚜르는 클리앙과 베아트리체에게 인사를 건넸다.
“클리앙. 베아트리체.”
그의 눈에 붉은빛이 약하게 감돌았다.
<옌뚜르다. 연기해라.>
옌뚜르가 보낸 텔레파시에 클리앙의 눈이 커졌다. 놀라서 벌어지는 입을 보고 베아트리체가 그의 옆구리를 팔꿈치로 쿡 찔렀다.
테쿰세가 보고 있다.
“꺼삐딴에서 마스크맨을 살해했다.”
옌뚜르가 말했다.
“혹시 이와 관련된 작전 중 알고 있는 게 있나?”
“글쎄.”
베아트리체가 말했다.
“마스크맨을 죽일 작전은 워낙 많았기 때문에 뭐부터 얘기해야 할지.”
그녀가 푸흐흐 웃었다.
원래부터 당돌한 태도로 모든 심문을 받아치던 여자다.
하지만 그녀의 이번 웃음은 허세가 아니라 정말 즐거워서 터져 나오는 웃음이었다.
사실 옌뚜르도, 클리앙도 그렇게 웃고 싶은 기분이었다.
인계의 점령에 성공했다.
옌뚜르는 형식적인 심문을 길게 거치면서 중간중간 화를 내고 폭행을 가했다.
클리앙의 뺨을 후려치면서 무언가를 슬쩍 흘렸는데, 테쿰세는 눈치채지 못했다.
손톱만 한 크기의 칩 두 개였다.
그 안에는 꺼삐딴 본사로 통하는 초소형 일회용 순간이동석이 박혀 있었다.
<두 사람 모두 여기서 충분히 쉬었지?>
옌뚜르가 메시지를 보냈다.
<돌아가면 바로 임무에 투입될 거다. 지금 카이야쓰와 딘야차 둘이 고생하고 있거든. 마스크맨을 파멸시켰으니 다른 차원들을 관리해야 한다.>
***
마이어계의 마력 총합은 약 1억 점에 이른다.
이 마력은 마이어계 전체에 골고루 분포되어, 삶과 죽음의 경계에 있는 수많은 이들을 움직이게 만드는 원동력이다.
죽음에 가장 근접한 이는 마이어의 칭호를 얻게 되며, 관리자로서 계의 마력 총량의 일부를 갖게 된다.
역대 마이어 중 최강이었던 이는 1억 점의 1%의 지분을 가졌었다.
100만 점.
네 능력치에 고루 분포해도 25만 점씩이다. 윤성이 엘리지아 퀸을 쓰러뜨리던 때보다도 더 높은 값이다.
그러나 그 최고 기록은 최근 경신되었다.
마이어계의 간부들이 모두 죽어버려서 마력의 지분을 나눌 만한 이들이 없다.
역대 최강의 마이어의 탄생.
그는 특이하게도 자신의 고유한 이름을 계속 쓰길 원했다.
“미들로드.”
구울들이 몰려와 새로운 왕에게 머리를 조아렸다.
“꺼삐딴에서 사자가 왔습니다.”
“들어오라고 해.”
미들로드는 옥좌에서 다리를 건들거리며 말했다.
잠시 후, 카이야쓰가 나타났다.
꺼삐딴은 기존에 길드에 우호적이었던 계들부터 돌고 있었다. 마스크맨이 새로 만들어놓은 질서를 빨리 와해시켜야 했다.
첫 타자는 마왕이었고 성공했다.
마왕은 자결했으니까.
‘루비를 못 찾은 게 문제인데.’
그 때문에 딘야차가 마계를 뒤지고 있다. 마왕이 죽으면서 루비를 어딘가로 보내 버린 게 아닐까 해서다.
‘아무튼 난 마이어계를 정리해야지.’
이 다음은 용계다.
카이야쓰는 고개를 똑바로 들고 미들로드에게 인사했다.
“초면이군. 꺼삐딴의 간부 카이야쓰라고 한다.”
“미들로드다.”
“마스크맨이 모든 힘을 잃은 것은 알고 있겠지?”
“그랬나?”
“몰랐나 보군. 너희 연합은 끝났다. 콜로라에 맞서려 했던 것에 대한 죄로, 모든 계를 박살 낼 수도 있지만 꺼삐딴은 마이어계에 살아남을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주려고 한다.”
“살아남고 자시고 마이어계는 이미 박살 나 있는데. 너희가 이전에 한 번 들쑤시지 않았나?”
“우리는 간부들을 몰살시켰을 뿐이다.”
카이야쓰가 말했다.
“차원을 파괴하진 않았다는 거다.”
“이번엔 그렇게 할 수 있고?”
“물론.”
“큭큭큭큭.”
갑자기 미들로드가 음흉한 웃음을 터뜨렸다.
“척루인을 납치한 게 누군지 알고 내게 이런 제안을 하는 건가?”
“알고 있다. 네가 했던 일이지. 하지만 한 번만 용서하기로 했다. 만약 너희가 A급 이상 마정석 5만 개를 바친다면…….”
“이봐.”
미들로드가 해골과 뼈로 만들어진 왕좌에서 천천히 몸을 일으켜 세웠다.
“마스크맨이 힘을 잃은 게 대체 무슨 상관이냐?”
미들로드가 말했다.
“나는 미들로드다. 마이어계의 역대 최강의 통치자다.”
그가 주먹을 불끈 쥐었다. 불길한 검은 연기와 마력이 늪지처럼 스멀스멀 번져 나왔다.
“우리에게 맞서겠다는 건가?”
카이야쓰가 불쾌한 목소리로 물었다.
“맞서다니.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 거냐?”
마이어가 소름 끼치는 미소를 지었다.
“마이어는 모든 생물의 포식자다. 난 너희를 사냥할 뿐.”
콰아악!
미들로드를 둘러싼 검은 마력이 날카로운 이빨처럼 변했다.
<바이팅 발동!>
늑대가 사냥감을 물어뜯는 듯한 모양새로, 이빨들이 카이야쓰를 향해 날아들었다.
동시에 미들로드의 오른손에서 채찍이 튀어나왔다.
<슬래시 휩 발동!>
채찍이 물결치며 검은 이빨들을 뒤따랐다.
“칫.”
카이야쓰가 양손에서 클로를 뽑았다.
그는 날아오는 마력의 송곳니들을 한 번 쳐내고는 마법을 썼다.
<엘리멘탈 리플렉션 발동!>
일정 수준의 마력 공격을 튕겨내는 다채로운 마법 장벽이 솟구쳤다.
키잉!
미들로드의 채찍이 튕겨 나왔지만 그는 조금도 기세가 꺾이지 않았다.
사나운 기세로 달려든 미들로드의 주먹이 엘리멘탈 리플렉션을 힘껏 후려쳤다.
콰아앙!
단번에 금이 쩍 갔다.
‘마제스티엘을 상대로도 꽤 선전했던 마법인데.’
카이야쓰가 인상을 찌푸렸다.
깨진 틈으로 미들로드의 주먹을 불쑥 들어왔다. 팔뚝이 날카로운 단면에 베어 피가 철철 흘렀으나 미들로드는 개의치 않았다.
콰직!
그의 손아귀 끝이 카이야쓰의 목을 옥죄었다.
푸욱!
카이야쓰는 클로를 팔뚝에 쑤셔 박았지만 미들로드의 힘은 조금도 줄지 않았다.
‘크헉!’
목뼈가 부러질 듯하다.
집중이 흐트러지자 리플렉션이 해제되어 허물어졌다.
카이야쓰가 손을 곧게 뻗어 손바닥을 미들로드의 가슴에 맞추었다.
<소니케이션 발동!>
강렬한 초음파가 미들로드의 가슴속에 퍼져 나갔다. 마력이 실린 파동으로 세포를 사멸시켜 장기를 파괴하는 마법이다.
그러나 미들로드는 이미 반 죽어 있는 언데드.
장기에 손상을 입는 것은 약간의 멀미 외에 어떤 악영향도 끼칠 수가 없다.
“미친……. 괴물 같은 놈!”
카이야쓰가 힘껏 미들로드를 발로 차면서 그의 손아귀에서 빠져나왔다.
목이 얼얼하다.
<바인딩 휩 발동!>
미들로드가 던진 채찍 한 쌍이 낚시찌를 던진 것처럼 멀리 날았다. 카이야쓰의 좌우로 빙글 돌아 되돌아온다.
‘날 묶으려고 하는군.’
카이야쓰가 그 공격을 읽으며 생각했다.
죽자고 싸우면 못 이길 상대는 아니다. 전대 마이어에 비해선 훨씬 강력하지만 카이야쓰 역시 꺼삐딴에서 손꼽히는 강자다.
해볼 만한 싸움이다.
‘하지만 굳이 무리할 필요는 없지. 본대의 힘을 빌릴 수 있으니까. 쉽게 가자고.’
카이야쓰가 인벤토리에서 순간이동석을 꺼냈다.
화아악!
그의 몸이 하얀 불꽃과 함께 산화해서 사라졌다.
“도망쳤군.”
미들로드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가 왕좌로 다시 돌아가는 길.
심부름꾼 좀비 하나가 겁을 잔뜩 먹은 채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 저어……. 마이어 님.”
“뭐냐?”
“인계에 있는 좀비들에게 마스크맨이 죽었다는 얘길 들었는데요. 연합이 와해될 거라고.”
“그래서?”
“정말이라면 꺼삐딴에 줄을 서야 하지 않을까요?”
미들로드는 피식 웃었다.
“걱정하지 마라.”
그의 머리 위에 메시지창이 떠 있었다.
윤성이 모든 차원의 관리자들에게 돌린 차원 통신이었다.
<나는 무사하다. 하지만 꺼삐딴은 내가 무너진 줄 안다. 이 상황을 역이용해서 오늘 밤 꺼삐딴을 궤멸시킬 테니 다들 준비해 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