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1
레벨업 속도는 9.8m/s^2 211화
기억을 잃은 씀푸는 포천 던전에 대한 그 어떤 것도 상부에 보고하지 못했다.
포천 사건이 아무리 큰일이었다고 해도 살아남은 E급 헌터에 대한 신비감 때문에 시민들과 하급 헌터들 사이에서 회자되었을 뿐이다.
실제 결과물만 보면 레이드 중 D급 헌터 넷이 죽은 것이고, 이만한 사건은 전 세계에 수없이 많이 일어난다.
꺼삐딴은 넓디넓은 인계에서 씀푸가 사고를 당한 곳을 특정해내지 못했다.
뜻하지 않게 윤성의 각성은 꺼삐딴에 보고되지 않은 채 묻혀버렸던 것이다.
이후 씀푸는 자신의 기억과 마안을 되찾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였다.
“바보 같았지. 바로 옆에 같이 레이드했던 놈이 그 범인이라는 걸 몰랐으니.”
씀푸가 웃으며 말했다.
“언제 기억을 되찾았지?”
“맞춰봐.”
“난 너와 레이드하던 때 빛의 탄환을 보여준 적 있다. 그땐가?”
“안타깝게도 난 천계 대전에 참가한 경험이 없어서 그 스킬을 그 때 처음 봤어. 네가 콜로라 전사가 아니라는 증거였는데도 몰랐지.”
“그럼 당시엔 기억도 마안도 되찾기 전이었나?”
“물론. 그랬으니까 네가 이렇게 오랫동안 일을 해온 거야.”
“하지만 난 그때 네가 마안을 쓰는 걸 본 것 같은데.”
“이걸 말하는 거야?”
씀푸의 눈이 붉은빛으로 번들거렸다.
“후후. 이건 마안이 아냐. 털이 곤두선다거나 심박이 빨라진다든가. 뭐 그런 생리 현상이랑 비슷한 거지.”
씀푸가 눈에 마력을 쏟아 부었다.
<마안 발동!>
찌잉!
윤성의 머릿속에 날카로운 감각이 울렸다.
“큭…….”
“마안은 이런 거지.”
씀푸가 말했다.
“마안은 콜로라 전사의 고유 스킬이다. 옌뚜르 대표님의 경우엔 ‘마력 박탈’ 내 경우엔 정신 내에 침투하는 기술이야. 하지만 파고들 틈이 없군. 넌 이미 나보다 훨씬 강해.”
윤성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씀푸가 그의 머릿속으로 들어오려고 할 때, 윤성은 오히려 그녀의 머릿속을 역으로 잠식했다.
기억과 마안을 되찾으려고 그녀가 했던 노력들이 오래된 흑백 사진처럼 떠올랐다.
씀푸가 마이어계로 들어간 것도 기억과 마안을 되찾기 위해서였다.
인간을 좀비로 타락시키는 약물과 망자와 죽음을 다루는 가장 이질적인 차원. 온갖 주술과 약제가 가득한 그곳에서 수많은 문헌과 자료를 뒤졌던 것이다.
그곳에서 씀푸는 마안을 상실한 것에 대한 약간의 실마리를 찾았다.
“너한테 마안을 썼을 때 우리의 정신이 뒤엉켜버린 거야. 마이어계에서 연구를 마친 나는, 내가 마안을 쓸 때 뒤엉킨 상대의 마력이 공명한다는 걸 깨달았지.”
“…….”
“처음엔 그게 수호자인 줄 알았어. 내 마안 시스템을 망가뜨리고 코드를 꼬아버릴 정도의 상대라면 수호자일 거라 판단했지.”
“그럼 네가 실종되었던 기간에, 너는 수호자를 만나러 갔던 건가?”
“맞아. 난 수호자를 찾아 헤매고 있었지. 브리트마인가 뭔가 하는 놈한테 수호자를 만나는 방법을 배워서 시도했지.”
씀푸가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콜로라 성인의 접근은 차단되어 있었어. 게이트 역류에 휘말리면서 나는 잠깐 다른 차원으로 날아갔고.”
“그래서 실종됐던 거군. 하지만 브리트마는 쯔위민에게 네 행방을 모른다고 한 모양이던데.”
“책임지라 할까봐 쫄았겠지. 어차피 죽을 거면서. 멍청한 게.”
씀푸가 쿡쿡 웃었다.
“하지만 우리 선배들한테 미안하긴 하지. 미리 얘기하고 움직여야 했는데.”
“……. 기억은 어떻게 회복했지?”
“네가 나서면서 포천 사건이 다시 떠올랐잖아? 쯔위민한테 들었어. 조사해 보니 시기가 내가 마안을 잃은 시점과 딱 맞아떨어지더군. 혹시 이거 아닐까 했어.”
“그냥 도박수를 던진 거군.”
“잃을 거 없는 도박수였지. 널 인터뷰한다고 만나서 몰래 마안 공명을 시도했어. 그리고 당첨!”
씀푸가 윤성의 마스크를 톡톡 두드렸다.
“네가 포천의 그 괴물이란 뜻이었지. 그리고 그 괴물만큼 강한 힘을 보여준 X등급 마스크맨도 동일인물이란 뜻이고.”
당했다.
전혀 상상도 못했던 걸림돌이다.
수 싸움에서 완전히 밀렸다.
‘옌뚜르는 이미 내 정체를 알고 있었던 건가?’
다 알고서 차희를 잡기 위해 박자를 맞춰주는 척. 이쪽의 계획을 따라주는 척.
차희를 밖으로 끌어낸 다음 쯔위민을 보내 낚아챈 거다.
“젠장…….”
바깥에 서있던 옌뚜르가 이쪽을 힐끔 쳐다보았다.
“대표님이 기다리기 지겨우신 거 같은데. 우리 슬슬 다음 막으로 넘어갈까?”
“다음 막이라니?”
“정체도 알았으니 네가 버프 발동하기 전에 죽여 버렸으면 그만인데 이렇게 뜸 들이는 이유가 뭔지 모르겠어? 설명도 주절주절 해주고?”
윤성이 혼란스러운 듯 씀푸를 바라보았다. 이젠 정말 뭐가 뭔지 모르겠다.
대체 뭘 원하는 거지?
씀푸가 피식 웃었다.
“우리는 평화적인 지배를 원해. 인계를 손상 없이 삼키고 싶다고. 천계에서 그랬듯이.”
그녀가 윤성에게 고개를 기울였다.
“바깥에는 자경단 헌터들이 집결해있어. 핏빛야수 강윤성이 민차희를 해칠까봐 몰려든 이들이지.”
씀푸가 말했다.
“그런데 민차희는 이미 당해버렸네? 어쩜 좋아? 자경단은 화가 나서 강윤성을 공격하려고 할 거야. 넌 그들에게 당할 수밖에 없어. 인계 관리자가 인간을 해칠 순 없잖아? 게다가 인질도 잡혀 있으니.”
“본론을 말해.”
“시나리오를 짜 줄게. 콜로라 전사 강윤성은 마스크맨을 살해했고 마스크를 쓴 채 연기하며 인계를 지배하려고 했다.”
그녀가 말했다.
“그리고 그걸 위해서, 마스크맨 연기를 간파할 수 있는, 마스크맨의 유일한 측근 민차희를 제거한 거야.”
씀푸의 입꼬리가 사악하게 올라갔다.
“하지만 자경단에게 다행히 붙잡히는 거고.”
“나쁜 새끼들…….”
“옌뚜르 대표님의 뜻이야. 넌 인계의 헌터들에게 체포될 거고, 감옥에 갇힐 거야. 모든 장비를 빼앗기고. 반신불수로 만들어야겠지.”
“…….”
“그리고 인계의 몇몇 간부급 헌터로 폴리모프한 꺼삐딴이 백마 길드를 통해 인계를 지배한다.”
씀푸가 윤성의 어깨를 탁 쳤다.
“자. 움직여. 우리는 두 번째, 세 번째 인질도 데리고 있다.”
“뭐라고?”
“대전사 한 명을 보냈지. 사회 초년생 민간인 여자와 중학생 하나 납치하는 덴 그거면 충분하잖아?”
“이…….”
윤성의 주먹이 파르르 떨렸다.
“놔줘라. 그 애들은 상관없어!”
“네가 이 일을 성공적으로 해내면 인질들의 생환을 보장하겠어. 꺼삐딴은 약속은 지키거든. 물론 세 사람의 기억의 조작 정도는 있을 수 있어. 허튼 소리 하면 안 되니까.”
“…….”
“머리 굴려도 소용없어. 외통수야.”
“클리앙과 베아트리체를 주지.”
“인질 교환?”
씀푸가 웃음을 터뜨렸다.
“클리앙과 베아트리체는 죽을 각오가 되어 있는 역전의 전사다. 이 기회를 놓치고 교환해서 두 사람을 살려내면 수치스럽다고 자살할걸?”
그녀가 말했다.
“넌 거래를 제시할 입장에 있는 게 아냐. 움직여!”
“……알겠다.”
윤성이 정문 쪽으로 몸을 돌렸다.
옌뚜르가 그를 보며 빙긋 웃었다.
“마스크맨이다!”
자경단이 호텔에서 나오는 윤성을 보고 소리쳤다.
“대표님!”
“마스크맨!”
“큰일 났습니다! 차희 씨가 지금…….”
“전원!”
갑자기 헌터들 가운데 누군가가 소리를 질렀다.
“저 자는 마스크맨이 아닙니다!”
놀랍게도 목소리의 주인공은 고제하였다.
‘그래. 역시 바꿔치기 된 상태였군. 클리앙, 베아트리체와 전투가 한참일 때 일이 진행된 건가?’
윤성이 고개를 떨구었다.
“클리앙, 베아트리체는 이미 저 자가 해방시켰습니다! 대신 날 가두었죠!”
고제하가 소리를 질렀다.
“저 남자는, 강윤성이고 핏빛야수입니다!”
헌터들이 경악한 얼굴이 되었다.
“정말인가?”
테쿰세가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만약 대표님이라면 마력을 보여주십시오. 어떤 스킬이든, 당신임을 증명할 수 있는 스킬을.”
“그 막강한 힐링 스킬을 써주세요.”
켄지가 말했다.
“용조를 보여주십시오.”
티엔이 말했다.
“빛의 탄환을 보여주시오.”
세르게이가 말했다.
“저는…….”
윤성은 천천히 마스크로 두 손을 올렸다.
“강윤성입니다.”
그가 마스크를 벗었다.
안에서 드러나는 것은 흉측한 핏빛야수의 얼굴이었다.
“당신이 민차희를 습격했습니까?”
옌뚜르가 물었다.
“네.”
“이 개자식!”
슬렌더맨이 가장 먼저 돌진했다. 그의 몸에서 솟아나온 촉수가 윤성의 몸을 제압해 옥죄었다.
어느새 거대한 덩치의 불곰으로 변신한 세르게이가 윤성을 향해 달려들었다.
콰앙!
그의 묵직한 일격이 윤성의 머리에 적중했다.
“죽여버려!”
헌터들이 소리를 질렀다.
“안 됩니다!”
옌뚜르가 소리쳤다.
“다들 진정하십시오. 우리는 저 자에게 마스크맨에 대해 물어볼 게 많습니다.”
“댁은 누굽니까?”
프랑수아가 물었다.
“처음 보는 얼굴인데.”
“전 쿠바에서 온 SS급 헌터, 옌데르입니다.”
“쿠바에 SS급 헌터가 있나?”
“국가 기밀이라 그 동안 잠적해 있었을 뿐입니다. 하지만 인류의 미래를 위해 백마 길드에 합류하려고 왔더니 이 모양이군요.”
“…….”
옌뚜르가 헌터들 가운데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왔다.
“우선 이 자의 무장을 모두 해제시킵시다. 그리고 포박해서 백마 길드의 지하로 끌고 가는 겁니다.”
옌뚜르가 말했다.
“제가 직접 심문하지요. 쿠바 정보부에서 이런 걸 많이 배웠거든요.”
그가 어깨를 으쓱했다.
“마스크맨을 대체 어떻게 죽였는지. 지금은 왜 이렇게 무력하게 체포되는 건지. 핏빛야수의 정체는 무엇인지. 하나하나 캐보겠습니다.”
“무장 해제시켜.”
테쿰세가 명령했다.
헌터들이 와르르 달려들어 윤성의 장비들을 하나씩 벗겨내기 시작했다.
윤성은 손목에서 떨어져 나가는 랜더의 시계를 보았다.
다윤이는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을 시간이다.
신차민은 요즘 업무 시간에도 몰래 나가서 다윤이네 카페에서 노닥거리는 것 같던데.
‘제발. 이 놈팽아. 한 번만 일 좀 해줘! 지금은 너밖에 없다.’
헌터들에게 포박당하면서 윤성이 기도했다.
***
역 앞 헌터커피.
다윤은 2층 홀을 청소하고 있었다.
어떤 손님이 정서불안이 있는지 책상 위에다가 휴지를 1밀리미터 간격으로 갈기갈기 찢어 놨다.
“대체 왜……?”
다윤은 한숨을 내쉬며 쓰레기들을 버리고 트레이를 정리했다.
쨍그랑!
아래층에서 갑자기 날카로운 소음이 울려 퍼졌다.
“뭐야?”
다윤이 움직이는 순간, 누가 그녀의 팔을 붙잡아 세웠다.
놀러 온 신차민이었다.
2층에서 하루 종일 빈둥거리던 그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왜 그래?”
다윤이 놀라서 물었다.
항상 장난질만 치던 애가 전에 없이 사나운 눈빛이다.
그의 눈 아래로 공기가 얼어붙는 것 같다.
“움직이지 마.”
“뭐?”
신차민이 허리춤에서 장검을 스르르 뽑았다.
“왜, 왜그래……?”
“마력이 느껴져. 굉장히 흉흉하고 공격적…….”
콰앙!
갑자기 계단 아래에서 마력 광선이 날아들었다.
난간과 바닥 일부를 박살내면서 치솟은 광선포.
정확히 신차민을 노렸지만 차민의 반응 속도는 매우 좋았다.
키이잉!
그의 장검 양쪽으로 마력이 갈라졌다.
동시에 차민은 직감했다.
‘이건 내가 상대할 수 있는 적이 아니다.’
“다윤아!”
“어……?”
갑자기 차민이 장검을 칼집에 집어넣더니 다윤을 와락 껴안았다.
“뭐 하는 거야?”
“꽉 붙들어!”
“어?”
쾅! 쾅! 쾅! 쨍그랑!
신차민은 그대로 달려가 어깨로 창문을 깨고 2층 밖으로 뛰쳐나갔다.
쿵!
한 팔로 다윤을 안아들고 다른 손과 두 발로 착지했다.
그건 마치 마스크맨을 연상시키는 자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