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0
레벨업 속도는 9.8m/s^2 210화
67. 꺼삐딴 최고 지략가 옌뚜르
헌터리 호텔.
윤성은 식사 테이블을 예약해 두고 차희를 기다리고 있었다.
물론 그녀가 올 때까지 여기 있을 생각은 없다.
모든 것은 연기일 뿐.
차희는 오지도 않을 것이다. 옌뚜르가 대신 오겠지.
윤성이 기다리는 것 역시 옌뚜르다.
뚜르르르!
휴대폰이 울려 꺼내보니 처음 보는 번호다.
“여보세요?”
-강윤성 씨?
“누구시죠?”
-옌뚜르입니다. 헌터리 호텔 근처로 와서 시민들에게 휴대폰을 빌렸습니다.
“아. 도착하셨군요.”
-소란을 크게 만들고 싶진 않습니다. 민차희는 언제 옵니까?
“제가 약속 잡아둔 시간이 여덟 시입니다. 이제 곧 오겠죠.”
윤성이 대답했다.
“대표님 지금 어디에 계신가요? 제가 마중 가겠습니다.”
-윤성 씨는 민차희를 기다려야죠.
“하하. 여기까지 오지도 못할 겁니다. 이 앞에서 대표님이 메신저를 차단하면 곧바로 그 애를 데리고 순간이동할 거잖아요? 이젠 더 이상 연기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렇군요. 나는 지금 헌터리 호텔 정문 앞입니다. 조금 아래에는 택시들이 들어오고 있고요.
“아, 어딘지 알겠어요. 지금 내려가겠습니다.”
-네. 저는 이제 휴대폰을 주인에게 돌려줄 겁니다. 내려오십시오.
윤성은 전화를 끊고 테이블에서 일어났다.
멀리 양화 대교 쪽에서 붉은빛이 번쩍였다.
‘게이트가 열렸군.’
작전대로 되어가고 있다. 일이 끝날 때까지 차희는 아리가 보호할 거다.
윤성은 레스토랑을 빠져나왔다. 복도에는 아무도 없다.
<디스가이징 발동!>
멀끔한 정장 복장이 순식간에 전투복과 랜더의 코트, 전투화와 손목시계로 바뀌었다.
윤성은 인벤토리에서 마스크를 꺼내어 썼다.
이 싸움의 전반을 오늘 끝낸다.
옌뚜르를 잡고 나면 이제 남은 위협은 X등급 하나뿐.
‘지구를 침공하려 했던 건 큰 실수였다. 멍청이들.’
윤성은 엘리베이터에 탔다. 창밖으로 뛰어내리는 건 안 된다. 버프가 리셋되니까.
옌뚜르와 충분히 가까운 거리에 들어간 다음 유성 랜딩을 발동시켜야 한다.
버프가 너무 커서 마력 파장 간섭 때문에 옌뚜르는 순간이동석을 쓰지 못하겠지.
30분 안에 옌뚜르를 죽이고 모든 관리자를 소집한 후 꺼삐딴으로 이동한다.
<수호자가 통신을 요청합니다.>
뭐야?
바빠 죽겠는데 이 꼬맹이가 갑자기 안 하던 통신을?
그냥 일을 끝낸 후에 연결할까?
윤성은 잠깐 망설이다가 연결 버튼을 눌렀다. 그만큼 급한 일이겠거니 싶었다.
-강윤성?
<무슨 일이야?>
-랜딩 시스템에 문제가 있다.
<문제라니?>
-네가 재개발 지역에서 카멜리들 사이에 뛰어들어 랜딩할 때. Joker로 각성하던 순간 기억하냐?
<당연하지.>
-네가 왜 그때 Joker가 되었는지도 기억하지?
<헌터 활동 기간 대비 던전 클리어 수가 가장 많고, 정의롭고 뭐 어쩌고? 그런 조건이었잖아?>
-그래. 근데 이상하지 않냐? 포천 사건 이후 1년 동안 너는 던전 임무를 나가지 않았지만 에어포스는 최전방에서 계속 굴렀다.
<어…….>
-당연히 그 시점의 던전 클리어 수는 너보다 에어포스가 더 많겠지. 근데 네가 Joker가 되는 게 맞는 걸까?
<뭐라는 거야? 지금 무슨 소리 하는 거야?>
-시스템이 왜 그렇게 작동했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계속 트러블 슈팅과 디버깅을 반복하고 있었지. 지금 이유를 알았어.
<이유가 뭔데?>
-네가 Joker가 된 시점은 카멜리 던전 범람 때가 아니다.
띵!
엘리베이터가 1층에 도착했다.
문이 열리면서 정문 바깥에 서 있는 중년의 신사가 눈에 들어왔다.
옌뚜르다.
<잠깐만. 무슨 문제가 있었단 건 알겠어. 자세한 건 나중에 해. 나 지금 바쁘거든. 일단 그래도 지금 당장은 랜딩 버프를 쓸 수 있는 거지?>
-쓸 수는 있는데…….
<그럼 이따 통신해. 나 지금 전투해야 하니까.>
-전투한다고? 누구랑?
<옌뚜르.>
“어머!”
갑자기 옆에서 누군가 튀어나와 윤성에게 말을 걸었다.
“당신은?”
“안녕하세요, 마스크맨. 김이나 기자입니다.”
기자가 방긋 웃으며 안경을 고쳐 썼다.
“여기 곧 전투 현장이 됩니다. 피하시죠.”
“전투 현장이 된다고요?”
김이나가 고개를 갸웃했다.
“사람들한테 피해가 가게는 안 할 테지만. 일단 빠지세요.”
“옌뚜르와 싸우시려고요?”
김이나가 정문 밖의 옌뚜르를 가리켰다.
윤성의 몸이 굳었다.
“뭐라고요?”
“왜요? 제가 우리 길드 대표님 이름 아는 게 신기한가요?”
김이나가 쿡쿡 웃었다.
“이걸 보세요.”
그녀가 휴대폰을 내밀었다. MMS 메시지로 날아온 사진 한 장이 떠 있었다.
그것은 바로 포박된 차희와 함께 셀피를 찍은 쯔위민이었다.
“…….”
“놀라서 말을 못 하네?”
김이나가 빙그레 웃었다.
“뭐야? 어떻게 된 거야?”
“마스크맨을 소환할 수 있는 메신저에 대한 거짓말은 그럴싸했어. 그 거짓말이 간파된 건 아냐. 우리가 간파한 건, 네 정체.”
김이나가 윤성의 마스크를 손가락으로 쿡 찔렀다.
“대체…… 어떻게……?”
“실망이군. 강윤성. 내가 누군지 아직도 모르겠어?”
김이나는 가까이 다가오더니 폴리모프를 살짝 풀었다.
그녀의 몸은 인간 그대로지만 얼굴 안쪽만은 짧은 순간 핏빛 야수로 변했다. 그 얼굴은…….
“씀푸?”
윤성의 목소리에 곤혹감이 묻어났다.
“맞아. 너와 탑에서 함께 레이드를 했던 씀푸. 그리고 한 가지 더.”
그녀가 말했다.
“난 포천 던전 전멸 사건을 일으킨 그 핏빛야수다.”
“이, 이럴 수가.”
“워낙 경황이 없어서 얼굴을 정확히 기억 못 했던 모양이지? 이해해. 그리고 포천 때 너는 콜로라 성인을 처음 보는 거였으니까. 얼굴을 분간할 눈은 안 됐겠지.”
“네가……. 네가 감히!”
윤성의 주먹이 번쩍 올라오자 씀푸가 뒤로 성큼 물러났다. 그녀가 휴대폰을 내밀었다.
“어어, 조심해야지. 네 뒷바라지를 몇 년 해온 여자인데 죽일 거야?”
“이……. 개 같은…….”
윤성의 주먹이 파르르 떨렸다.
“포천 사건은 나한테도 충격적인 경험이었어. 그 당시에 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정확히 기억해?”
김이나가 끔찍한 기억이라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무슨 일이 있었지……?”
윤성이 물었다.
***
포천 던전 전멸 사건 당일.
쿵!
벽에 부딪힌 윤성은 땅을 짚으며 착지했다.
왼손과 두 발이 땅에 닿았다.
오른팔을 45도 각도로 펼친 3점 착지였다.
다음 순간, 핏빛야수의 눈이 빨갛게 빛나기 시작했다. 갑자기 윤성은 세상이 뒤집어지는 듯한 기분을 느끼며 무너져 내렸다.
정신계 공격이다. 독한 양주를 원샷 해버린 것처럼 어지럽다.
때문에 그는 시야 아래에 떠 있는 메시지창들을 읽을 수가 없었다.
<랜딩 능력 각성!>
<최종 속력=5.37㎧, 낙하 거리=1.48m, 낙하 시간=0.55s>
<랜딩 성공!>
<경고! 시스템 에러>
<헌터 등급 상승 : J등급>
<에러 코드 : SH431B>
<등급 조정 실패.>
<각성 중 마안에 시스템이 오염되었습니다. 랜딩 시스템을 재부팅하십시오.>
<랜딩 버프 : 일시적으로 능력치가 상승합니다. 힘과 순발력, 감각 능력, 지능에 각각 1.48E+9.8077점. 남은 시간 60초. 일시적 랜덤 스킬이 개방되었습니다 : 마력 폭주, 남은 시간 60초>
<경고! 마력 수준이 너무 높습니다.>
<경고! 시스템 에러. 랜딩 시스템을 재부팅 하십시오.>
<경고! 시스템…….>
“흑……. 흑흑.”
안은실의 울음소리. 핏빛야수는 그쪽을 힐끔 쳐다보더니 그녀의 목을 그었다.
“안…… 안 돼…….”
윤성은 주먹을 불끈 쥐었지만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아예 몸을 움직일 수도 없었다. 핏빛야수의 전투력은 너무 압도적이었다.
윤성에겐 아직 투지가 남아 있었지만 힘도 체력도 없었다.
핏빛야수는 그의 옆을 지나가면서 다시 한번 눈에서 기이한 마법을 쏘았다.
그건 안전장치가 해제된 핵탄두를 점화하는 것과 비슷한 일이었다.
콰아앙!
갑자기 윤성의 몸에서 폭발적인 마력이 분출했다.
놀란 씀푸는 재빨리 물러나 거리를 만들었다.
“뭐, 뭐야?”
그녀가 황급히 전투 자세를 잡았으나 이 E급 헌터의 마력은 예사롭지 않다.
“뭐야 이게? 이런 게 있을 수가 있는 건가?”
X등급 이상이다. 정말이지 무지막지한 마력이다.
씀푸는 바짝 긴장한 채 클로를 세웠다.
쉬이익!
그녀가 빠른 속도로 달려들어 선공을 날렸다.
쩡!
그러나 놀랍게도 클로가 윤성의 피부를 가르지 못하고 부러지고 말았다.
<랜덤 코드 : 금강불괴>
<랜덤 코드 : 버닝 아이즈>
파아앙!
윤성의 눈에서 새빨간 레이저 빔이 발사되었다. 씀푸는 황급히 몸을 돌려 피했지만 레이저는 그녀의 옆구리를 찢어버렸다.
“크아악!”
씀푸가 상처를 쥐고 고통스러워했다.
윤성이 그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눈에 초점이 없다.
“뭐, 뭐야 이 괴물은……?”
<랜덤 코드 : 티타늄 펀치>
윤성의 주먹이 광이 나는 흑색으로 변하더니 씀푸를 향해 매섭게 날아들었다.
콰앙!
간신히 피했다. 주먹은 씀푸의 머리 바로 뒤, 암반을 박살 내버렸다.
이 상대는 위험하다. 정말 안 좋다. 씀푸는 품 안에서 순간이동석을 꺼냈다.
촉수 괴물의 사체에서 흘러나온 마정석이 눈에 들어왔다.
‘어쩔 수 없지.’
콜로라 전사가 레이드에서 마정석을 챙기지 못하고 도망친다니.
꺼삐딴 선배들이 들으면, 특히 쯔위민이 들으면 며칠은 놀려댈 거다.
하지만 지금은 이 괴물 같은 헌터를 피하는 게 우선이다.
<순간이동석 발동!>
치지직!
순간이동석에서 잔파가 튀었다.
“파장, ……파장 간섭?”
이젠 놀라서 말도 제대로 안 나온다.
‘도망쳐야 해!’
온몸의 신경이 얘기하고 있었다. 몇 초만 더 시간을 끌면 죽는다.
씀푸는 전투 통신기를 켜서 긴급 구조 요청을 보내면서 동굴 밖을 향해 달렸다.
쾅! 쾅! 쾅!
헌터가 그녀를 뒤쫓기 시작했다.
‘으으으!’
공포로 심장이 너무 빠르게 뛴다. 오한에 온몸의 털이 곤두서는 기분.
씀푸는 뒤를 힐끔 돌아보았다.
헌터는 자신의 힘과 마력을 제대로 감당하지 못하는 모양새다. 스텝이 엉키고 호흡이 흐트러져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이길 가능성은 제로.
“어……?”
별안간 헌터의 눈에서 붉은빛이 번쩍였다.
<랜덤 코드 : 마안>
찌이잉!
씀푸의 머릿속에 날카로운 통증이 울려 퍼졌다. 마치 자동차 워셔액을 두개골에 주입한 느낌이다.
“끄아악!”
그녀는 고통스러운 듯 울부짖으면서 도망쳤다. 눈앞이 잘 보이지도 않는다.
적이 아직도 자신을 쫓고 있는지는 알 수 없다. 그저 발소리만 들릴 뿐.
탁탁탁탁!
발이 푹푹 빠지는 잿더미 속을 달리는 기분이다. 거대한 마력의 수렁 속으로 점점 침잠하는 듯하다.
악마가 그녀의 육신과 정신을 삼켜 버렸다.
파앗!
게이트 밖으로 뛰쳐나온 씀푸는 마지막 힘을 짜내어 순간이동석을 작동시켰다.
쉬이이이익!
천만 다행히도 순간이동석은 제대로 기능했다. 그녀는 흰빛에 몸이 휘감기는 걸 보면서 의식을 잃었다.
씀푸가 깨어난 곳은 꺼삐딴 중환자실. 의무실의 전사들이 우르르 달려들어 치유 마법을 퍼부었다.
상처는 치료되었지만 문제가 생겼다.
<마안 발동!>
푸쉬이이이
마안을 쓰자 씀푸의 눈에서 연분홍 연기가 올라왔다.
스킬이 발동되지 않는다.
그녀의 마안은 정신계를 망가뜨리고 그 안으로 침투하는 능력.
꺼삐딴 내에서도 상당히 유니크한 기술이다.
“대체 어떤 놈한테 당한 거야?”
쯔위민이 그 꼴을 보며 혀를 찼다.
“모르겠어요.”
“모르겠어?”
“정말. 아무것도 기억이 안 나요.”
윤성의 마지막 마안은 콜로라 전사, 쯔위민의 동생 씀푸의 정신계를 박살 내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