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
레벨업 속도는 9.8m/s^2 202화
강다윤은 이제 제법 카페 카운터에 익숙해졌다.
커피 만드는 법도 배웠다.
라떼 위에 하트 그릴 줄도 안다. 절반 확률로 찌그러지지만.
차희가 한 번 뒤집어버린 후에는 점장도 그녀에게 고분고분해졌다.
“후후.”
그날 일을 생각하면 지금도 입가에 웃음이 그려진다.
당시 차희의 힘을 고려하면, 그녀는 점장이 세 들어 있는 이 건물을 사버린 다음 협박하는 것도 가능했다.
하지만 소란을 크게 만들지 않고 그 정도로만 해준 것이 다윤은 고마웠다.
오빠나 차희의 힘에 지나치게 기대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도 성인인데 이제 한 사람 몫을 해야지.’
오랜 시간 연락 두절되어 한 때 원망했던 오빠는 누구보다 열심히 사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지금 그는 세간의 최고 화제인 마스크맨이 되어 있다.
하지만 오빠처럼 강한 힘을 가진 사람만이 대단한 일을 해낼 수 있는 건 아니다.
차희는 헌터도 아닌 일반인인데 마스크맨의 전투 외의 모든 일을 대신 해내고 백마를 키운 인물이니까.
끝없이 삶에 부딪히고 투쟁해온 그녀의 끈기가 지금의 위치를 만들어냈다.
마스크맨과의 친분은 그것을 거들어준 행운에 불과할 것이다.
다윤은 차희처럼 되고 싶었다.
초대형 길드의 실권자 같은 것을 원하는 게 아니다.
혼자 힘으로 자신의 삶에 부딪혀서 독립하고 자신의 자리를 만들 힘을 원했다.
잘나가는 오빠의 권력과 재력에 기대어 살아간다면 얼마나 꼴불견이겠는가.
띵동.
가게 현관 벨이 울리면서 손님 둘이 들어왔다.
“어서 오세요! 헌터커피입니……. 앗!”
다윤이 깜짝 놀랐다.
윤성과 소윤이다.
“오빠? 소윤아?”
“한 집에서 살면서 이런 말 하는 게 이상하긴 한데, 잘 지냈어?”
윤성이 묻자 다윤이 피식 웃었다.
“잘 지내고 있지!”
“근데 네가 알바를 다 하다니……. 혹시 용돈 부족하니?”
“아냐. 그냥. 나 혼자 돈 벌어보고 싶어서 그런 거야.”
“아이구, 다윤이 다 컸네.”
“후후. 나 스무살이라구. 이십대 된지 벌써 두 달인데.”
윤성이 빙긋 웃었다.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부터 동생들에 대한 책임감이 막중해졌지만, 지금 돌아보면 오빠 역할을 제대로 해낸 적이 없는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혼자서 잘 자라주어서 돈도 벌다니.
“이따 잠깐 시간 되냐?”
“5분만. 나 곧 있으면 휴식 타임이야.”
“요즘은 카페에서 알바한테 휴식 타임도 줘?”
“원래 없었는데……. 뭐, 아무튼. 이따 봐. 뭐 마실래? 만들어줄게.”
“아이스아메리카노.”
윤성은 소윤을 힐끔 돌아보았다.
“소윤이는 뭐 마실래?”
“난 바닐라라떼.”
윤성은 카드를 긁고 위층으로 올라갔다.
진동벨이 울리길 기다리면서 소윤이와 잡담을 나눴다.
“오빠 그거 알아?”
소윤이 말을 걸었다.
“언니 다음 주 새터야.”
“새터가 뭐야?”
“대학생들 입학생들이 놀러가는 거래. 새내기 배움터.”
“오티 말하는 거야?”
“응. 아무튼 가면 술 먹고 그런다고 하더라. 언니 이제 진짜 어른이고 대학생인가봐.”
“그러게. 넌 언제 클래?”
웃으며 대수롭지 않게 대꾸했지만 속으로 철렁했다.
곧 입학이라고?
날짜 흐르는 속도 실화인가…….
그러고 보니 대학교 들어가면 선물로 노트북을 주기로 했었는데.
전자상가에서 사두고 아직까지 전해주질 못했다.
예쁘게 선물 포장도 해두었었는데.
<인벤토리>
-포장된 노트북
윤성은 인벤토리를 열고 노트북을 꺼냈다.
“와! 뭐야? 어떻게 한 거야?”
테이블 아래에서 갑자기 튀어나온 거대한 선물에 소윤이 깜짝 놀랐다.
“마술이다. 신기하지? 네 언니 줄 거야.”
“뭔데 이거?”
“노트북.”
“와.”
“소윤이도 졸업하면 선물 사줄게.”
잠깐 기다리자 다윤이 음료 두 잔을 가지고 직접 올라왔다.
“휴식 시간!”
그녀가 환하게 웃으며 테이블에 앉았다.
“다윤아 이거.”
윤성은 곧장 노트북을 내밀었다.
“뭐야 이거?”
“대학교 입학 선물.”
다윤은 눈이 동그래져서 포장을 뜯어보더니 목소리 톤까지 바뀌어서 좋아했다.
“나 월급 모아서 이거 사려고 했었는데!”
“정말?”
“응! 너무 고마워!”
다윤은 노트북을 켜고 괜히 바탕화면을 긁어보고 계산기, MS워드 따위를 켜보면서 장난쳤다.
소윤이 그림판을 열어서 낙서를 하기 시작했다.
“나도 오빠 줄 거 있는데.”
다윤이 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냈다.
“뭐야 이게?”
“지난달 월급으로 샀어.”
다윤이 내민 것은 향수였다.
“네가 뭔 돈이 있어서 이런 걸 샀어?”
“별로 비싼 거 아냐. 그냥. 오빠가 그동안 고생했으니까.”
너무 예상치 못했던 선물이라 감동을 세게 맞았다.
윤성은 놀라서 말을 잇지 못했다.
“차희 언니랑 데이트할 때 써.”
“걔가 좋아할까?”
“사실 차희 언니가 골라준 건데.”
다윤이 까르르 웃었다. 윤성도 따라 미소 지었다.
“아, 근데 오빠.”
다윤이 화제를 바꾸었다.
“어제 우리 매장에 기자 왔었다?”
“기자?”
“헌터 일보 송이나 기자인가? 뭐 그런 이름이었는데. 잠깐만. 이 사람이야.”
다윤이 카운터에서 미리 챙겨서 올라온 명함을 꺼내어 내밀었다.
정말로 기자의 명함이었다.
“기자가 왜?”
“오빠 찾더라고.”
“날 왜?”
“나도 모르지. 근데 이번에 핏빛야수가 잡혔잖아. 그것 때문 아닐까?”
윤성이 움찔했다.
그는 주위를 한 번 두리번거린 후에 목소리를 낮추었다.
“나 마스크맨인 거 아무도 몰라. 너희도 어디 가서 얘기한 거 아니지?”
“얘기 안 했지.”
다윤이 고개를 저었다.
“근데 그게 아니라도 오빠는 핏빛야수랑 엮인 게 있잖아.”
“엥?”
“포천 사건.”
윤성이 눈살을 찌푸렸다.
맞아. 그런 게 있었지.
그 후 삶이 하루하루 롤러코스터 타듯이 다이내믹하게 움직여서 잠깐 잊어버렸다.
윤성이 아메리카노를 빨대로 마시다가 답답해져서 뚜껑을 열고 왈칵 들이켰다.
갑자기 그 일이 날 또 귀찮게 하는 건 아니겠지?
윤성이 고민에 잠겨있는데 아래층에서 누군가가 에스프레소 한 잔을 들고 위로 올라왔다.
젊은 여기자였다.
“어머! 어머! 윤성 씨!”
그녀가 윤성의 얼굴을 보고 호들갑을 떨면서 다가왔다.
“안녕하세요? 저는 헌터 일보 김이나 기자라고 합니다.”
김이나가 생글거렸다. 허락하지도 않았는데 의자를 빼고 테이블에 합석해버렸다.
“혹시 인터뷰 가능하실까요? 아하하, 미리 연락을 드렸어야했는데. 죄송해요. 제가 헌터님 연락처를 백방으로 수소문했는데 못 알아내서요.”
“근데 제 동생은 어떻게?”
“헌터님 행적을 조사하다 보니까 에어포스 헌터 스쿨에서 강연하셨던 기록이 있더라구요.”
그녀가 말했다.
“거기서 찾다보니 동생분 연락처까지 알게 되어서 전화하고 매장까지 찾아왔었죠.”
“전 할 얘기 없다니까요.”
다윤이 불편한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어머! 네! 괜찮아요. 이제 헌터님께 직접 여쭤보면 되니까요.”
“무슨 인터뷰를 하시려는 거예요?”
윤성이 물었다.
“핏빛야수가 체포되었잖아요? 4년 전, 포천 던전 전멸 사건 때를 아직도 국민들은 모두 기억하고 있어요.”
김이나가 말했다.
“그리고 이젠 핏빛야수의 존재가 확인된 만큼, 강윤성 헌터님이 당시에 결백했음이 확실하다는 걸 모두 알게 되었을 거예요.”
“뭐, 그렇겠죠. 하지만 저는 그 전에도 무죄 판결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일감이 끊기셨더라고요?”
대체 뭘 얼마나 조사한 거야?
윤성이 아메리카노를 마시면서 시선을 피했다.
인터뷰에 응하는 것 자체는 안될 것 없지만 지금 시점에 세간의 주목을 받는 것은 원치 않는다.
강윤성이라는 인물은 그냥 D급 헌터로 헌터계의 구석진 어딘가에 파묻혀있는 게 좋다.
이 신분은 앞으로 백마 길드의 신입으로 입사한 후, 옌뚜르의 신임을 얻어서 다가올 전쟁을 뒤집을 정보 공급지가 되어야 한다.
“인터뷰는 하지 않겠습니다.”
윤성이 단호하게 말했다.
“아니, 왜요?”
김이나가 황당한 듯 눈을 크게 떴다.
“인터뷰 하시면 그 사건에 대해, 그리고 윤성 헌터님에 대해, 세상이 평가하는 게 달라질 텐데요. 제가 크게 써드릴게요.”
“됐어요. 동생들하고 같이 있고 싶으니까 가주세요.”
김이나는 어이가 없다는 듯 고개를 갸웃하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떠나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고 있자니 어쩐지 불길하고 찝찝한 기분이 든다.
‘예감이 안 좋은데.’
윤성이 머리를 긁적였다.
“아무래도 나 또 한 동안 자리 좀 비워야겠다.”
윤성이 동생들에게 속삭였다.
“또?”
“적어도 이 일을 끝낼 때까지는 이렇게 살아야 할 거야.”
윤성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 지나고 나면 신차민이랑 차희랑 다 같이 놀러나 가자고.”
윤성이 동생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는 빠르게 건물 밖으로 나가면서 휴대폰을 꺼냈다.
차희에게 전화를 할 생각이었는데 그녀에게서 부재중 전화가 일곱 통이나 와 있었다.
‘뭐야?’
재빨리 전화를 걸자 신호가 한 번 울리자마자 차희가 받았다.
-여보세요? 윤성이?
“어. 난데. 지금 회사로 갈 건데 무슨 일 있어?”
-너 지금 어디 있어? 왜 전화 안 받아!
“왜?”
-고제하 협회장님 일어나셨어!
***
고제하 협회장은 테쿰세와 제다이가 숨어 있는 별관 지하의 비밀 병실에 있었다.
천계로 가려던 에어포스는 차원문을 열기 직전에 모든 계획을 캔슬 했다.
다섯쌍의 빛의 날개를 퍼덕이며 에어포스는 순식간에 별관 지하로 달려갔고 차희의 안내를 받아 비밀 병실까지 들어갔다.
“협회장님!”
그녀가 병실 문을 열면서 소리쳤다.
정말 고제하가 깨어났다.
자리에 앉아 있었다.
에어포스의 눈에 눈물이 글썽였다.
철컥!
비밀문이 열리면서 또 한 사람이 안으로 들어섰다. 쉬지 않고 달려온 마스크맨이었다.
“협회장님 상태 어때?”
윤성이 차희에게 물었다.
고제하는 침대에 앉은 채 멍한 표정으로 허공을 바라보고 있었다.
“깨어나셨는데 아직 정신 오락가락하셔. 치매 환자처럼.”
에어포스가 그에게 바짝 다가갔다.
“협회장님. 괜찮으세요?”
“누구여?”
고제하가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
“접니다. 에어포스.”
“으응.”
고제하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엘리지아가 오니까 도망가.”
“엘리지아는 이미 모두 막았어요.”
에어포스가 웃으면서 말했다.
“퀸도 처치했죠.”
윤성이 침대로 다가갔다.
고제하는 그의 마스크를 보더니 눈이 커졌다.
“마스크맨이 있네! 여기에 있어.”
고제하가 손뼉을 치며 좋아했다.
“에어포스! 마스크맨을 잘 지켜야 해. 마스크맨은 콜로라를 막을 카드야!”
“걱정하지 마십시오.”
윤성이 자신감 넘치는 목소리로 답했다.
“제가 막겠습니다.”
윤성의 말에 고제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야지! 난 언제 협회로 복귀할 수 있나?”
“좀 더 안정을 취하시죠.”
에어포스가 말했다.
“그래? 그럴까?”
“협회장님. 혹시 수호자에 대해서 뭔가 아시는 게 있습니까?”
윤성이 물었다.
“으응?”
고제하가 눈살을 찌푸렸다.
“난 모르겠는데. 허허.”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윤성은 에어포스의 팔꿈치를 슬쩍 잡아당겼다.
그는 고제하에게 간단히 인사하고 에어포스, 차희와 함께 밖으로 나왔다.
복도를 이동하면서 윤성이 말했다.
“고제하 협회장님 못 나가게 막아주세요.”
“막아달라고요?”
에어포스가 깜짝 놀랐다.
“일어나신 것도 한동안 외부에 새어나가지 않게 해주세요.”
“뭔가 이상하지?”
차희가 물었다.
“어. 느낌이 안 좋아.”
윤성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차희에게 물었다.
“마이어와 싸우다가 에어포스가 기절하고 베아트리체가 왔을 때. 콜로라 전사 중 하나가 본부에 숨어 있다가 에어포스를 인질 잡아서 나왔다고 했지?”
“맞아. S급 힐러로 변신해 있었지. 적어도 신원 확인된 힐러들만 협회장님 치료에 투입시켰지만 그 정도로 콜로라를 완전히 걸러낼 순 없어. 그 녀석도 만약 이 별관에 왔었다면…….”
“잠깐만요. 두 분 지금 무슨 얘길 하는 겁니까?”
에어포스가 황당한 표정으로 끼어들었다.
“협회장님이 콜로라 전사일 수도 있다는 건가요?”
“가능성을 얘기하는 거예요.”
윤성이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