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
레벨업 속도는 9.8m/s^2 201화
마계.
라센 북부의 조그만 펍. 젊은 귀족과 청년들이 모여서 술을 마시고 있었다.
아직 대낮인데도 몸을 가누기 힘들 정도로 마신 귀족 하나가 품격 없이 주정을 부려댔다.
“다 몰락한 집안 계집년이 말이야.”
그가 화가 나서 테이블을 쾅 내리쳤다.
“내 아버님 영지를 그년이 받을 때부터 맘에 안 들었지만 따라줬다고. 그런데!”
그가 술을 왈칵 들이마셨다.
“라센 북부의 지배자에 이어 이제는 마왕의 후계?”
“고, 고정하십시오. 도련님.”
술집 안의 시선들을 의식한 일행이 귀족 청년을 진정시켰다.
하지만 그의 분노와 주정은 쉽게 사그라지지 않는다.
시민들이 쳐다보자 그가 소리를 질렀다.
“뭘 쳐다봐! 이 X새끼들아!”
시민들은 재빨리 시선을 돌렸다.
“내가 왕위에 오르면 니들 모가지 다 따버릴 거야 X발!”
“거 내버려 뒀다간 큰일 날 소리도 하겠군.”
바로 뒤. 나사 빠진 테이블에 앉아있던 기사 중 하나가 빈정댔다.
“마왕께서 누굴 후계로 지목하시든 큰 뜻이 있어 계획하시는 일일 텐데, 마왕님께 반역이라도 들 기세 아닌가?”
“못 할 것도 없지.”
“하하하!”
테이블의 기사들이 조롱 섞인 웃음을 터뜨렸다.
“제 아버지 반의반도 못 따라가는 게 마왕님께? 글로디안. 이제 정신 좀 차릴 때 되지 않았는가?”
“닥쳐!”
그룬헤잘드의 아들 글로디안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검을 뽑아 들었다.
“내 아버님에 대해서 네놈들이 뭘 알아? 지금 마왕, 그 영악한 새끼가 콜로라와 수호자 사이에서 줄타기나 하고 있을 때, 내 아버님은 콜로라에 용감하게 대적하셨다!”
“마왕이 되겠답시고 인계를 침공하는 헛짓거리를 하다 돌아가셨지만 말이야.”
“뭐라? 감히 네놈들이 내 아버님을 모욕해? 예전 같았으면 내게 눈도 못 맞췄을 것들이!”
“오? 솔직히 누가 모욕하는 건데, 지금? 제 아버지 발끝에도 못 따라가서 영지도 바토리 님께 뺏긴 반푼이?”
글로디안이 이를 뿌득 갈았다. 기사들은 비웃음 섞인 미소를 지으며 칼집을 톡톡 두드렸다.
“더 할 말은 없는 것 같은데. 검으로 얘기할 용기가 있는 게 아니라면 입 닥치시지. 글로디안.”
“좋아. 나가자고.”
글로디안이 성큼 앞장서며 술집 문을 열고 나섰다.
“도, 도련님!”
글로디안 패거리의 청년들이 그를 뒤쫓으려 하자 글로디안이 제지했다.
“한 놈도 따라오지 마라. 내 알아서 처리할 테니까.”
글로디안은 기사 네 명과 함께 술집 뒤의 어두컴컴한 골목으로 이동했다.
“글로디안, 아무리 네가 망가졌다고 해도 그룬헤잘드 후작의 아들이니 기사 대접은 해주겠다.”
기사들이 말했다.
“이쪽에서도 한 명만 나서지. 지는 쪽이 깨끗이 인정하고 사과하고 떠나는 걸로.”
“하하하.”
다른 기사들이 비웃었다.
“귀족 대접 해줄 거면 여럿이 덤벼야 할걸. 그래야 글로디안한테 패배한 구실이라도 만들어주지.”
“닥치고 아무나 빨리 덤벼라.”
글로디안이 눈빛을 이글거리며 말했다.
기사 중 하나가 검을 빼 들고 앞으로 나섰다.
“나는 바토리 님의 본대에 속한 기사, 로잘린드다.”
그가 글로디안에게 검을 겨누었다.
“글로디안, 네게 기사의 예법을 가르쳐주마. 들어와라.”
글로디안은 곧바로 사납게 달려들어 로잘린드에게 일격을 날렸지만 로잘린드는 가뿐히 피했다.
글로디안은 실전에서 너무 오래 떨어져 있었다. 반면 로잘린드는 최근까지도 인계에서 마이어, 마더의 군대와 전투를 벌였던 정예다.
깡! 캉!
몇 차례 검을 주고받은 후 로잘린드가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형편없는 수준까지 전락했구나. 글로디안.”
티잉!
로잘린드가 글로디안의 검을 쳐냈다.
퍽!
로잘린드의 신발 끝이 글로디안의 명치를 억세게 후려쳤다.
쩍!
그리고는 팔꿈치로 글로디안의 뒤통수를 가격해서 바닥에 주저앉혔다.
“한심해서 어디 가서 이겼다고 자랑할 기분도 안 난다.”
로잘린드가 몸을 휙 돌렸다.
“그룬헤잘드 후작께서 살아계셨어도 널 보셨으면 창피해서 돌아가셨겠어.”
“하하하!”
귀족들이 골목을 떠나려던 참이었다. 바닥에 쓰러진 채 분노를 삭이던 글로디안의 눈에 무언가가 들어왔다.
그것은 바로 기사 네 명이 무언가의 공격을 받고 몇 초 만에 갈기갈기 찢어지는 장면이었다.
“크헉!”
로잘린드가 발차기를 맞고 바닥에 주저앉았다.
붉은 머리의 젊은 마족 하나가 골목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사, 살려…….”
로잘린드가 애원했지만 그는 대꾸 한 번 없이 그의 목을 꺾어서 부러뜨렸다.
“누, 누구냐?”
글로디안이 떨리는 몸을 간신히 가누면서 일어났다. 검을 집어 들었지만 이미 싸울 생각은 없었다.
상대는 너무나 압도적이다.
평민 중에 이런 실력자는 없다.
하지만 귀족 중엔 이런 얼굴이 없다.
“꺼삐딴의 간부 카이야쓰다.”
카이야쓰가 글로디안의 앞으로 다가왔다.
“검을 내려라. 죽일 생각 없으니.”
“제, 제겐 무슨, 무슨 일입니까?”
“마스크맨과 싸우고도 살아있는 이들 중에서 그에게 적대적인 인물은 너 하나뿐인 것 같아서.”
카이야쓰가 말했다.
“마스크맨과 싸워보니 어땠나? 그에 대한 정보를 아는 대로 넘겨라.”
“마, 마스크맨이요?”
“귀가 먹었냐? 두 번 묻게 하지 마라. 내가 아니라 쯔위민 선배였다면 넌 지금 머리가 떨어졌을 수도 있다.”
카이야쓰가 주먹을 꽉 쥐었다.
“우리 모두 지금 미치기 직전이거든. 아는 게 있으면 빨리 말해.”
“그, 그자는…….”
글로디안은 뭔가 얘기하고 싶었지만 공포로 머릿속이 하얘졌다.
카이야쓰가 그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생각만큼 강하지 않습니다!”
글로디안이 간신히 짜낸 문장이었다.
“생각만큼 강하지 않다.”
카이야쓰가 피식 웃었다.
“장난하나? 마이어와 클리앙과 베아트리체를 동시에 꺾은 남자다. 그의 실력에 대해 바른 대로 불어.”
“정말입니다! 저와 싸울 땐 정말로 그저 그랬습니다. 저, 저보다는 강했습니다만 적어도 제 아버님을 상대할 만한 자는 아니었습니다!”
“…….”
카이야쓰는 잠깐 고민에 잠겼다.
글로디안을 꺾었을 때 그룬헤잘드와 엎치락뒤치락할 만한 그런 레벨이 아니었다?
보고된 바로는 마스크맨은 마계에 들어와서 글로디안과 전투를 벌이고 바토리를 구출했고, 함께 그룬헤잘드와 싸웠지만 패배했다.
여기까진 글로디안의 설명과 얼추 맞아떨어진다.
그러나 그 후 곧바로 인계로 돌아온 마스크맨은 그룬헤잘드를 꺾었다.
그사이의 시간이 너무 짧다.
클리앙 같은 성장형 최고 천재에게도 그만한 파워업을 할 수 있는 시간은 아니었을 것이다.
“아, 마, 맞아!”
글로디안이 뭔가 떠오른 듯 소리쳤다.
“아버님께서 처형인의 샘에서 마스크맨과 겨루셨습니다.”
“처형인의 샘?”
“그리고 곧바로 인계를 침공하셨어요.”
“그건 우리도 알고 있다.”
“그때 마스크맨이 콜로라 전사라는 얘길 하셨었습니다.”
“그 부분도 우리가 알고 있는 내용이다. 척루인이 그렇게 주장했었지. 마안을 사용했다고.”
“…….”
“더 내놓을 정보는 없는 모양이군.”
카이야쓰의 몸에서 마력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잠깐만요!”
글로디안이 소리쳤다.
“아, 아버님께서……. 마스크맨, 그자가.”
글로디안이 침을 꼴깍 삼켰다.
“강력한 버프를 이용해서 파워업하는 스타일인 것 같다고 하셨었습니다.”
“버프?”
카이야쓰의 눈이 반짝였다.
“네. 버, 버프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아버님의 스킬 중 하나인 버프 제거를 걸었을 때 매우 무력해졌었다고요.”
“정말이냐?”
“정말입니다!”
카이야쓰는 다시 고민에 잠겼다.
버프는 천사들의 주력이다.
먼 옛날 천계와의 전투 당시 마제스티엘은 <빛의 강체>라는 말도 안 되는 버프를 사용했었다.
자신의 모든 능력치를 증폭시키고 그것을 자유롭게 재분배하기까지 하는 스킬.
모든 콜로라 전사들이 그 능력에 크게 애를 먹었다.
그보단 수준이 낮았지만 헬라엘이나 카엘룩스 같은 플라멘들도 막강한 버프를 사용하곤 했었다.
‘마스크맨은 퀸과 싸울 때 <빛의 강체>를 사용했다는 보고가 있었다.’
만약 그가 X등급 수준의 버프를 다룰 수 있는 콜로라 전사라면?
그의 들쭉날쭉한 전투력도 설명이 된다. 어떻게 그가 빛의 강체를 썼는가, 정말 콜로라 전사가 맞는가 등의 의문들은 남아 있지만.
“좋다. 넌 살려주마.”
카이야쓰가 골목 밖으로 휙 빠져나갔다.
글로디안은 와들와들 한참을 떨다가 조심스럽게 움직였다.
입구에 쓰러진 네 구의 시체들이 처참한 몰골을 하고 있었다.
피비린내가 물씬 풍겨 구역질이 난다. 글로디안은 황급히 골목을 빠져나왔다.
카이야쓰는 벌써 어디로 사라졌는지 보이지 않았다.
***
집이다.
‘와, 대체 얼마 만이야.’
저질러놓은 일이 워낙 거대해서 인터뷰 요청이 30분에 한 건씩 들어오고 있지만 차희가 알아서 잘 거절하고 있을 거다.
하룻밤만 좀 쉬자.
집에 들어온 윤성은 곧장 방에 들어가 침대에 퍼질러 누웠지만 금방 일어났다.
동생들을 너무 방치했다.
천계에 가기 전에 동생들 좀 봐주겠다고 차희와 약속했었는데.
그때로부터도 시간이 꽤 흘렀다.
윤성은 거실로 나와 동생들의 방으로 이동했다.
그러나 노크를 해보니 둘 다 방에 없었다.
‘보호자로서 실격이군. 애들이 집에 있는지 없는지 어떻게 사는지 아무것도 모르고 있으니.’
밥은 제대로 챙겨 먹을까?
부엌으로 나온 윤성은 냉장고를 열었다가 뜻밖에 먹을 것이 가득한 걸 발견했다.
그냥 식재료가 아니라 조그만 플라스틱 락앤락 15개에 빼곡히 들어 있는 음식들이었다.
“뭐야, 이게?”
황당한 표정으로 하나씩 꺼내 살펴보니 영양 균형을 맞춘 식단이 락앤락 하나하나마다 꼼꼼히 들어 있었다.
철컥! 삐리릭!
현관에서 잠금장치가 열리는 소리가 나더니 누군가 들어왔다.
소윤이다.
“엇, 오빠?”
소윤은 못 볼 사람을 본 것처럼 놀라더니 가방을 놓고 부엌으로 다가왔다.
“언제 왔어?”
“좀 전에. 다윤이는 어디 갔어?”
“알바하러 갔어.”
“걔가 알바도 하냐?”
“한 지 오래됐어. 저기 역 앞에 헌터 커피.”
“이건 다 뭐야?”
윤성이 냉장고 안의 락앤락들을 가리켰다.
“차희 언니가 해준 거야.”
“차희가?”
“나랑 언니랑 맨날 냉동식품 먹으니까 그러지 말라고 주말에 와서 이것저것 해줬어. 언니 알바 가기 전에 먹고 가라고 도시락으로 만들어놓은 거고.”
“차희는 다윤이 알바하는 거 알아?”
“차희 언니 이제 우리 집 젓가락 몇 개인지도 알걸?”
“지금 당장 길드로 돌아가서 차희한테 절이라도 해야 할 것 같은 기분이네.”
소윤이 킥킥 웃었다.
“차희 언니는?”
“걘 아직 비서 잡무 몇 개 처리한다고 남아 있는데, 내가 대신하고 퇴근시킬까…….”
“아냐. 오빠도 이래저래 바빴을 거 아냐? 차희 언니가 설명해 줬어. 천국도 가고 지옥도 가고 그랬다고.”
“그런 곳은 간 적 없다만.”
“아리는 어디 갔어?”
“메탈로이드계에 부품 수집하러 갔어. 다니엘이랑 같이 갔다. 지구용사 선가드 정도로 파워업해서 돌아오겠다더라.”
“선가드가 뭐야?”
“너보다 좀 전 세대에 그런 게 있어. 아무튼 나 다윤이 알바하는 데나 한번 가봐야겠다. 같이 갈래? 저녁 사줄게.”
“응!”
소윤이 방에다 가방을 집어 던지면서 명랑하게 대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