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8
레벨업 속도는 9.8m/s^2 198화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거예요?”
콜로라 전사들과 용제, 마왕의 대화를 알아들을 수 없었던 차희가 바토리에게 물었다.
바토리는 심각한 표정으로 상황을 요약해서 설명해 주었다.
베아트리체가 말했다.
“어서 선택해라, 마왕. 시간을 많이 주진 않아.”
모두가 마왕의 입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오랫동안 고민한 끝에 마침내 결단을 내렸다.
“좋다. 베아트리체. 나는 이 전장에서 빠지겠다.”
“안 돼!”
갑자기 바토리가 뛰쳐나왔다.
클리앙의 주먹에 맞아서 다친 그녀의 얼굴에서 피가 흐르고 있었다.
“바토리.”
마왕이 그 얼굴을 안쓰러운 듯 쳐다보았다.
“놈들에게 굴복해선 안 됩니다. 마왕님!”
“내겐 어느 세력이 이기느냐보다 마계가, 네가, 내 백성들이 안전한 게 우선이다.”
바토리가 괴로운 표정으로 마왕을 바라보았다.
“제겐 명예와 긍지가 우선입니다.”
“천사처럼 말하지 마라. 우리는 마이어처럼 비열하지 않지만 천사처럼 미련하지도 않다.”
마왕이 말했다.
“내가 기대를 걸었던 마제스티엘은 죽었고, 우리는 우리 힘만으로 살아남을 길을 모색해야 한다.”
“제 친구들을 팔아넘기고 살아남는 게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내게는 그것이 의미가 있는 것이다. 나는 마계의 관리자이고, 넌 내가 지켜야 할 백성이니까.”
바토리가 주먹을 꽉 쥐었다.
“그렇다면…….”
그녀가 말했다.
“저는 이제 당신의 백성으로 남지 않겠습니다.”
마왕이 당황한 표정이 되었다. 베아트리체가 끼어들었다.
“부녀간에 연이라도 끊는 것 같군. 드라마 찍는 줄 알았네. 재밌긴 한데 우리가 시간이 없어서 말이야. 되도록 빨리 해주겠어? 꺼삐딴에 투항할 거라면 저 여자를 이쪽에 넘겨.”
위이잉!
기계 소리와 함께 바토리 뒤편에서 무언가가 비틀거리며 걸어왔다.
아리였다.
그가 눈을 노란색으로 반짝이면서 차희의 앞에 섰다.
“마왕이든, 콜로라든, 수호자든 안주인님은 못 데려갑니다.”
그가 손을 휘휘 내저었다.
“이미 품절녀거든요. 다들 탐내지 말고 다른 짝 찾아보세요.”
“다 찌그러진 게 허세는.”
베아트리체가 비웃으며 다시 라이플을 겨누었다.
“클리앙, 마이어 폭주시켜.”
“알겠습니다.”
클리앙은 마이어를 살펴보았다. 팔 하나가 잘려 나갔고 가슴과 다리에 심각한 부상을 잔뜩 입은 상태였다.
‘마왕이 관리자 중에서도 센 편이라곤 하던데 이 정도일 줄이야.’
클리앙은 새삼 마왕의 힘을 느끼며 혀를 내둘렀다.
이만한 적이 콜로라에는 꼼짝도 못 한다니 놀랍기도 하다.
‘아무튼 지금은 마이어를 폭주시키기만 하면 게임 끝이다.’
<마력 주입 발동!>
클리앙의 마력이 마이어의 머릿속으로 스며들었다.
“싸움은 끝났다. 이제 전부 포기해.”
베아트리체가 말했다.
“안 된다, 마왕!”
쓰러진 용제가 소리쳤다.
“마스크맨이 돌아올 거다. 그 녀석을 믿고 버텨라!”
“네 차원에서 봤던 마스크맨의 힘은 그리 대단치 않았다.”
마왕이 말했다.
“내가 그의 무얼 보고 믿어야 하지?”
“…….”
“바토리, 네 생각은 존중한단다.”
마왕이 바토리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너는 네 뜻대로 해라. 나는 내 차원을 지키겠다.”
“마왕님!”
마왕이 칼집에 검을 꽂아 넣었다.
“여자를 넘겨야지.”
베아트리체가 차희를 가리켰다.
“그건 내키지 않는군. 나는 콜로라에 저항하지 않을 뿐, 콜로라의 명령을 듣는 게 아니다. 원래 그랬듯 중립으로 남겠다.”
마왕이 베아트리체와 클리앙의 앞을 열어주었다.
“곧 대표님이 돌아오실 거야.”
차희가 말했다.
“그리고 너희를 전부 쓸어버리실 거다.”
“그것참 겁나네.”
베아트리체가 코웃음을 쳤다.
“하지만 우린 한참 전부터 모든 준비가 다 끝나 있었어. 언제든 너희에게 외통수를 던질 수 있다고. 예를 들면 이런 것도 가능하지.”
그녀가 전투 통신기를 들고 말했다.
“데리고 와.”
짧은 명령이 전해지고 몇 분이 지난 후, 충격적인 장면이 펼쳐졌다.
본관 쪽에서 비명 소리와 함께 헌터들이 우르르 도망쳐 나왔다.
그 안에서 나타난 것은 또 하나의 핏빛야수.
꺼삐딴이 심어놓은 전사 쭈코였다.
“최, 최근 입사한 힐러가 갑자기 변했습니다!”
헌터들이 차희에게 소리쳤다.
더 안 좋은 것은 쭈코가 에어포스를 어깨에 들쳐 메고 있었다는 것이다.
에어포스는 고비는 넘긴 듯 보였지만 아직 의식을 차리진 못한 상태.
“데려왔습니다. 베아트리체 님.”
쭈코가 베아트리체 옆으로 이동하면서 말했다.
손대면 벨 것처럼 날카로운 침묵이 현장에 무겁게 내려앉았다.
차희는 주먹을 꾹 쥐며 베아트리체를 노려보았다.
“마스크맨이 돌아온다고 해서 이 상황을 역전시킬 수 있을 것 같나?”
베아트리체가 물었다.
“그 남자의 실력은 우리도 대충 가늠하고 있어. 퀸보다 조금 높은 정도지. 아무리 높아봤자 옛날 마제스티엘 정도?”
베아트리체가 클리앙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하지만 그때로부터 시간이 한참 흘렀다. 우린 가장 마정석이 풍부했던 천계를 삼켰고, 모두 폭발적으로 성장했어. 이런 천재 신입도 있고.”
“…….”
“클리앙. 마스크맨의 비서는 인질로 잡아둘 필요가 있다. 데리고 와.”
“알겠습니다.”
클리앙이 차희를 향해 다가갔다.
앞선 헌터들이 그 기세에 움찔하자 베아트리체가 협박했다.
“막아서는 놈이 있으면 에어포스를 죽이겠어.”
헌터들이 차희를 힐끔 돌아보더니 무기를 꽉 쥐었다.
“우린 마스크맨 때문에 이 길드에 입단한 거지, 에어포스 때문이 아니야.”
“오, 좋아. 쭈코. 처리해버려.”
“잠깐만.”
차희가 나섰다.
어차피 핏빛야수가 하나 더 참전하고 드래곤이 다운된 시점부터 승산은 희박해졌다.
게다가 마왕도 전장에서 이탈했다. 바토리와 마족 언어로 대화한 걸 알아듣진 못했지만 표정과 행동을 보면 그 정도는 알 수 있다.
아리와 바토리가 아직 클리앙의 앞을 버티고 서있었지만 막아낼 가능성은 전무하다.
“내가 직접 그리로 가겠다.”
차희가 움직이자 아리가 막아 세웠다.
“안 됩니다, 안주인님. 가봤자 의미가 없어요. 결국 우릴 다 죽이려고 할 텐데요.”
“하지만…….”
“어이, 너희들.”
누군가의 목소리가 모두의 주의를 환기했다. 미들로드였다.
그가 하늘을 가리키고 있었다.
“저기 뭐가 떨어지는 것 같지 않나?”
바토리가 고개를 들었다.
마력이 느껴졌다.
새파란 불빛에 휘감긴 채 누군가가 어마어마한 속도로 떨어지고 있었다.
“주인님!”
갑자기 아리가 소리를 질렀다.
“주인?”
클리앙이 움찔했다. 차희가 번쩍 고개를 들었다.
윤성이 돌아온다!
차희의 입가에 환하게 미소가 번졌다.
***
그것의 추락은 작은 유성 같았다.
기이한 마력의 반투명한 구체에 감싸인 채 광활한 우주 공간과 대기를 가로질러 지면을 향해 수직 낙하하고 있었다.
구체의 표면에서 마치 별똥별의 꼬리처럼 푸른 불꽃이 휘날렸다.
아리의 말이 맞았다.
구체에 들어있는 것은 바로 마스크맨이었다.
콰아아아앙!
묵직한 소음과 함께 차희의 바로 앞에 랜딩한 마스크맨.
모두가 숨 한 번을 제대로 쉬지 못했다.
여러 차원의 패자들과 콜로라의 최상급 전사들이 참전한 이 전투에 주인공이 등장했다.
전 세계의 방송국 기자들이 현장을 리포트하면서 숨을 헐떡였다.
마스크맨이 떨어진 순간부터 어쩐지 숨을 쉬기가 어려웠다.
“공기가 무거워졌다.”
마왕이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작게 중얼거렸다.
마족의 기감은 일곱 차원 중 최고다. 그러나 마왕조차도 마스크맨의 힘을 바로 알아채지 못했다.
다만 대기 중 마력의 농도가 변했음을 눈치챘을 뿐이다.
만약 어떤 사람이 천장이 열린 하얀 방 안에 있는데 검은색 공이 밖에서 날아들었다고 생각해 보자.
‘검은 공’이라는 물체는 간단히 인식될 것이다.
그러나 만약 인간의 시야각으로 한 번에 볼 수 없는 크기의 검은 공이 나타났다면?
방 안에 있는 사람은 그 물체의 정체를 단번에 알아챌 수 없다.
단지 하늘이 어두워졌음을 느낄 뿐.
대기 중 고밀도의 마력.
이 기현상의 위화감이 어디서 유래한 것인가 눈치챈 마왕의 등골이 서늘해졌다.
‘설…… 마……?’
마왕의 인생을 통틀어 이런 현상을 겪은 것은 이번이 두 번째다.
첫 번째는 바로 콜로라의 X등급 전사를 마주했을 때였다.
“쿨럭!”
랜딩한 마스크맨이 갑자기 심하게 기침을 하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부상을 입은 것 같군요.”
클리앙이 눈을 번득였다.
“제가 처리하겠습니다.”
콰악!
땅을 박차고 튀어 나가려는 클리앙을 베아트리체가 가까스로 붙잡았다.
“잠깐만.”
클리앙의 팔을 잡아당기는 그녀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있었다.
“이건……. 이건 말이 안 돼. 이럴 수가. 정말인가?”
“네?”
베아트리체가 중얼거리자 클리앙이 혼란스러운 듯 고개를 갸웃했다.
“대, 대표님……?”
차희가 쓰러진 마스크맨에게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아, 괜찮아.”
마스크맨이 비틀거리면서 일어났다.
“후우우.”
그가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좀 늦었지? 미안하다. 다들.”
윤성은 천천히 한 걸음씩, 베아트리체를 향해 다가가기 시작했다.
“클리앙! 순간이동한다!”
베아트리체가 황급히 소리를 질렀다. 그녀는 어리둥절한 표정의 클리앙의 앞에서 재빨리 순간이동석을 빼 들었다.
‘작동이 안 돼?’
베아트리체의 손이 파르르 떨렸다.
“왜 그러십니까? 선배님?”
“파장 간섭이다. 이럴 수가. 정말이잖아. X등급이야…….”
“뭐라고요?”
<콜로라 스나이핑 라이플 발동!>
베아트리체가 윤성을 저격했다.
피잉!
용제를 격추시켰던 그 마력 탄환이 윤성을 향해 날아들었다.
윤성은 주먹을 꽉 쥐었다.
신경을 곤두세우자 시간이 느리게 흐르는 듯한 느낌이다.
날아오는 탄환이 슬로 모션처럼 보인다.
윤성은 마치 펀칭 머신을 때리는 것 같은 모양새로, 탄환을 주먹으로 후려쳤다.
꽈아아앙!
사방으로 퍼져 나가는 마력압에 헌터들이 나뒹굴었고 마왕조차 중심을 잃고 한 손으로 땅을 짚었다.
‘이건 좀 과했군. 조절해야겠어.’
뒤에서 몸을 가누며 아이고 소릴 내는 헌터들을 보며 윤성이 짧게 반성했다.
차희는 아리가 지켜주어서 넘어지는 것으로 그쳤지만 마력압을 정면으로 받은 아리는 건물 벽에 처박히고 말았다.
“미안하다.”
윤성이 말하자 아리가 벽에서 빠져나오며 눈을 반짝였다.
“괜찮습니다. 다 박살 내주세요, 주인님.”
“움직이지 마라!”
베아트리체가 소리를 질렀다.
“다가오면 에어포스를 죽이겠어!”
“좋아. 움직이지 않겠다.”
윤성이 자리에 우뚝 섰다.
“이렇게 하자. 내가 콜로라 측에 줄 선물이 하나 있거든. 지금 그걸 던져줄 테니 대신 너희는 에어포스를 놔주는 걸로.”
“뭐라고?”
혼란스러운 베아트리체를 뒤로하고 윤성이 몸을 돌렸다.
그는 베아트리체와 클리앙, 쭈코에게 보이지 않도록 인벤토리를 열어서 무언가를 꺼냈다.
“받아라.”
탁!
윤성이 던진 것을 엉겁결에 받아든 쭈코의 표정이 싸늘하게 변했다.
“버, 버려!”
베아트리체가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스톤은 쭈코가 안아 든 에어포스와 충분한 거리에 들어갔다.
마력스톤에서 강렬한 빛이 뿜어져 나오더니 에어포스의 몸이 그에 공명하듯 천천히 떠올랐다.
“이런!”
놀란 쭈코가 뒤로 물러났고 베아트리체는 공포에 몸을 떨었다.
클리앙은 상황을 전혀 이해하지 못해 혼란스러운 얼굴로 에어포스만 쳐다보고 있었다.
에어포스의 전신에서 태양과 같은 빛이 발산되었다.
그녀의 등 뒤에서 마치 나무뿌리가 자라는 것처럼 새파란 빛의 날개가 올라왔다.
다섯 쌍이었다.
“너흰 다 뒈졌어.”
윤성의 몸에서 스멀스멀, 기이한 깊이의 마력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