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8
레벨업 속도는 9.8m/s^2 188화
옌뚜르를 만나는 것은 물론 용계에서 나올 때 계획된 것이었다.
하지만 쯔위민을 비롯한 다른 간부들까지 만날 생각은 없었는데.
‘간부들이 득실대는 회의실에 불려갈 줄이야.’
꺼삐딴 행정 직원들의 안내를 받아 회의실 앞에 도착한 윤성은 숨을 훅 들이마셨다.
다시 한번 자신의 옷차림을 점검했다.
디스가이징 스킬을 발동시켜서 겉모습을 완전히 콜로라 전투복에 맞추었다.
랜더의 팔찌에 스킬 몇 개를 넣었다. 예를 들면 마스크맨으로 활동할 때 많이 사용했던 빛의 탄환 같은 스킬들을 팔찌에 넣어 숨긴 것이다.
철컥.
문을 열고 회의실 내에 들어서자 전신에 찌릿찌릿한 마력압이 느껴진다.
앉아 있는 면면들은 하나같이 관리자급.
퀸 여덟 명이 앉아 있는 셈이라 생각하니 새삼 소름이 돋는다.
“안녕하세요. 신입 강윤성입니다.”
“앉아요.”
옌뚜르가 자리 하나를 가리키며 말했다.
윤성이 자리에 앉자 옌뚜르가 그를 신중한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꺼삐딴의 지도자 옌뚜르는 고민에 잠겨 있었다.
‘이자에 대해 알려진 정보는 거의 없다. 롬펠 출신의 불법 이민자였다는 것 외엔.’
왠지 느낌이 안 좋다.
“강윤성. 혹시 무관 학교 시험을 보셨습니까?”
옌뚜르가 물었다.
“무관 학교 시험이요?”
“모르십니까?”
윤성이 하하 웃었다.
“제가 롬펠 오지에서 와서…….”
“콜로라 본국에서 전사를 꿈꾸는 이들은 모두 무관 학교에 입학합니다. 거기서 실력을 쌓아 B급 전사 이상의 전투력을 가지면 졸업할 수 있죠.”
옌뚜르가 말했다.
“클리앙보다 어리시다고 했는데, 롬펠 출신이라 해도 무관 학교 시험은 볼 수 있을 겁니다. 당신은 이미 꺼삐딴 소속이지만 무관 학교 졸업장이 없으면 임무상 불이익이 생기니 그걸 하셔야 합니다.”
“아, 그런 거라면 하죠.”
옌뚜르가 수상쩍은 표정으로 윤성을 쏘아보았다.
“혹시 당신 레벨이 어떻게 됩니까?”
윤성은 상태창을 힐끔 쳐다보았다.
<강윤성>
<칭호 : 엘리지아의 정복자>
<힘 : 5,000, 순발력 : 5,000 감각 능력 : 5,000, 지능 : 5,000>
<버프 : 없음>
<디버프 : 없음>
<분배 가능한 능력치 : 7,200>
<스킬 : 힐링(사용 가능), 폴리모프(사용 가능) 수중 호흡(사용 가능), 마력 주입(사용 가능), 중금속 폭우(사용 가능), 인페르노(사용 가능) 마안(사용 가능)>
“920입니다.”
“마력을 힘껏 발산해 보세요.”
옌뚜르의 명령에 윤성의 몸에서 강력한 마력이 뿜어져 나왔다.
옌뚜르는 그걸 가만히 지켜보았다. 절제 없이 분출하는 마력이다. 파장을 보면 알 수 있다. 정말로 이게 최대 위력인 듯 보인다.
‘920레벨이라는 말이 맞을 것 같군.’
클리앙과 이전에 접촉했을 때 640 정도라고 했다. 클리앙의 성장 속도와 비교해 보면 훨씬 낮고, 일반적인 콜로라 전사의 수준이다.
잠깐 동안 이 남자가 마스크맨이 아닐까 하는 의심을 했었다.
척루인을 구출해 올 수 있다는 갑작스럽고 절묘한 타이밍의 정보도 수상하고, 신원이 전혀 밝혀지지 않았다는 점도 수상해서다.
‘쓸데없는 생각이었겠지? 겨우 이 정도의 전투력인데. 마스크맨은 퀸이나 카일란도 죽일 수 있는 정도였으니.’
게다가 콜로라 전사가 인계의 관리자일 리가.
옌뚜르가 피식 웃었다.
‘너무 예민해졌나 보군.’
그는 경계심을 좀 내려놓았다.
“무관 시험을 치면 업적 등록을 해야 합니다.”
옌뚜르가 말했다.
“만약 당신이 척루인을 구출해 올 수 있다면 에이스는 당신이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클리앙이 깜짝 놀란 표정이 되었다. 다른 간부들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그 누구도 반박하지 못했다.
행방불명된 대전사를 구출해 온다는데 누가 그 업적을 뛰어넘을 수 있겠는가.
“하지만 신중하게 선택해야 합니다. 업적 평가는 성공한 임무만이 아니라 실패한 임무에 대해서도 고려되니까요.”
옌뚜르가 말했다.
“행방불명된 아군 구출 같은 중요한 일은 실패하면 이미지에 타격이 커요.”
“실패하지 않을 겁니다.”
윤성이 말했다.
“어떻게 그렇게 자신하지?”
쯔위민이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마이어계의 간부들을 거의 다 죽였지만 아직도 찾지 못했다. 대체 어떻게 네가 척루인이 감금된 곳을 안다는 거지?”
‘그놈을 감금한 게 나다.’
윤성은 속으로 말을 삼키면서 빙그레 웃었다.
“최근에 우연히 알게 된 것입니다.”
윤성이 말했다.
“그보다 이 임무를 하기 전에 옌뚜르 대표님을 찾아온 이유가 있습니다.”
“뭐죠?”
“제게 용안을 주십시오.”
“뭐라고?”
“뭣?”
간부들이 깜짝 놀랐다. 옌뚜르는 다시 고민에 잠겼다.
“저한테 용안이 있다는 것은 또 어떻게 아셨습니까?”
“저는 최근에 용계와 마이어계에서 레벨업을 하고 있었습니다. 용계에 있을 때 고위급 드래곤 하나를 알게 됐는데, 그 녀석이 그런 얘기를 하더군요. 대표님께 용안이 있다고.”
“그 드래곤 이름이?”
“실렌티라고 합니다.”
옌뚜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용제의 오른팔이다. 그 정도 되는 드래곤이라면 그만한 정보를 알 수도 있다.
“근데 용안은 왜?”
“제가 마이어계에서 조사해 본 결과, 척루인 전사님은 마이어계의 지하 감옥에 매장돼 있습니다. 마법 차단이 완벽히 이루어져서 외부에서는 찾을 수 없죠.”
“그래요?”
“하지만 용안을 쓰면 길을 찾을 수 있다고 합니다. 제게 주시면 척루인 전사님을 데려오겠습니다.”
“씀푸도 그곳에 있나?”
쯔위민이 물었다.
“모릅니다. 하지만 확인 가능하면 구출해 오겠습니다.”
“용안은 용제를 회유할 미끼입니다. 사용 후에 반납할 수 있습니까?”
옌뚜르가 물었다.
“확신할 수 없습니다. 사용하고 나서 소실될 수도 있기 때문에요.”
“좋습니다. 용안을 내어드리죠. 소실되어도 좋으니 척루인을 구출해 오십시오.”
“괜찮겠어요?”
카이야쓰가 옌뚜르에게 귓속말을 했다.
“용제를 회유할 중요한 수단인데.”
“꺼삐딴의 말단 직원이라도 나한텐 용제보다 소중해.”
옌뚜르가 단호하게 말했다.
그는 곧바로 인벤토리를 열어서 용안을 꺼냈다.
커다란 유리병 안에 들어있는 눈알이었다. 눈동자가 금색이다.
“받으십시오.”
윤성은 용안을 받아 인벤토리에 넣었다.
“사람은 몇이나 필요합니까?”
옌뚜르가 물었다.
“용안으로 길을 찾아내는 게 아마 많은 사람이 쓸 수 있는 건 아닐 겁니다. 저 혼자 가겠습니다. 하지만 필요한 게 하나 더 있긴 한데요.”
“그게 뭐죠?”
“저한테 순간이동석이 하나뿐인데, 척루인 전사님은 아마 빈손일 테니까요.”
“지금 주인 설정이 안 되어 있는 순간이동석 갖고 있는 사람?”
옌뚜르가 묻자 간부들이 고개를 저었다.
“대신 이걸 주지.”
쯔위민이 무언가를 내밀었다. 그것은 꺼삐딴 문양이 박힌 펜던트였다.
“꺼삐딴 본사로 차원 이동 위치가 설정되어 있는 순간이동석이다. 펜던트 안에 박혀 있지. 아무나 쓸 수 있다.”
윤성은 펜던트를 받아 인벤토리에 넣었다.
“감사합니다.”
옌뚜르가 다시 물었다.
“척루인을 구출하는 데 며칠이나 시간이 필요합니까?”
“사흘이면 됩니다.”
윤성이 인사하고 나가면서 말했다.
사실은 하루면 충분하지만 약간 넉넉하게 기간을 잡았다.
***
인계, 백마 길드 대표 사무실.
출근한 차희는 사무실에 마스크맨이 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언제 온 거야?”
그녀가 환하게 웃으면서 다가왔다.
“아침에 왔어, 차희. 중요한 일이 있어.”
“뭔데?”
“우리 지하실에 감금해 놓은 척루인을 다시 빼내야 해. 꺼삐딴 길드에 돌려줄 거야.”
“왜 그래?”
“살을 주고 뼈를 취하기 위해서지. 일단 용제를 아군으로 만들고 무관 시험에서 에이스가 되고, 놈들의 신뢰를 얻어서 정보를 빼낸다.”
“뭘 계획 중인 건지는 모르겠는데 천계 일은 잘 마무리된 거야?”
“아. 뭐, 상당히 좋아졌지. 혹시 에어포스 봤어? 선물 가져왔는데.”
“지금 미국에 있어. 내일 귀국할 거야.”
“다음에 줘야겠네.”
“뭐기에 천계까지 가서 에어포스 선물을 가져왔대?”
차희가 약간 뾰로통한 표정으로 물었다. 목소리에 노골적으로 ‘내 건?’ 하는 질문이 묻어 있다.
“에어포스를 천계 관리자로 각성시켜줄 물건이야. 앞으로 전력에 큰 보탬이 될 거거든.”
“흠.”
“네 것도 있어.”
윤성이 인벤토리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황금 반지였다.
차희가 화들짝 놀랐다.
“프, 프러포즈?”
“……그건 나중에. 미안. 이건 다른 거야.”
윤성이 차희의 손바닥에 반지를 올려주었다.
“니드호그의 반지라는 거야. 아주 아주 막강한 드래곤을 한 마리 뽑을 수 있는 물건이지. 일반인도 쓸 수 있댔어. 명령만 내리면.”
“어떻게 쓰는 건데?”
“드래곤의 언어를 써야 하는데, 넌 통역 마법이 없으니까 문장을 알려줄게.”
윤성은 정확한 발음으로 ‘니드호그’의 이름을 부르는 용언을 알려주었다.
“반지를 낀 상태에서 그 말을 외치면 드래곤이 나온대. 나도 써본 적은 없어.”
“위험한 상황이 오면 이걸 쓰라는 뜻이지?”
“그렇지.”
“고마워.”
차희가 반지를 손가락에 끼면서 싱긋 웃었다.
“근데 척루인은 어떻게 빼갈 거야? 그냥 풀어주면 돼?”
“아, 그게 중요한 부분인데 지금 척루인이 갇혀 있는 곳 근처를 마이어계처럼 꾸며야 해.”
“어떻게?”
“그건 미들로드한테 물어봐야지. 마이어계의 숨겨진 지하실 같은 게 있는 것처럼 만들어 놓자고.”
“좋아. 한 번 해보자.”
작업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마이어가 갇혀 있는 지하 감옥 바로 앞 복도에 차희와 윤성, 아리, 미들로드가 몰려들어 직접 작업을 했다.
테쿰세와 제다이도 거들었다. 중요한 작업이니 다른 헌터들에게 맡길 수 없었다.
이만한 직위와 힘을 가진 이들이 복도에 닭 피나 뿌리고 생고기나 늘어놓는 모습은 꽤 웃겼다.
차희는 피 냄새와 썩어가는 생고기들을 보고 몇 번 토했지만 작업은 무사히 진행됐다.
그리고 준비가 끝나는 밤.
오랜 감금 생활로 피폐해진 척루인은 문밖에서 굉음이 울리는 것을 들었다.
콰앙!
“아악!”
마이어계 전사의 비명 소리.
이윽고 창문 밖으로 피가 쫙 튀는 것이 보였다.
철컥!
누군가가 문고리를 힘껏 잡아당겨 뜯어버렸다. 밖에서 나타난 것은 젊은 콜로라 전사였다.
“척루인 대전사님 되십니까?”
“누구지?”
“꺼삐딴 신입 강윤성이라고 합니다. 당신을 구출하러 왔습니다.”
와지직!
윤성이 척루인의 손발을 묶어놓은 사슬을 파괴하자 척루인이 비틀거리면서 문밖으로 나왔다.
복도에 피가 흥건하다. 지저분한 마이어계의 구울들이 뜯어먹은 살점들이 곳곳에 즐비하다.
“우욱…….”
먹은 것도 없는데 욕지기가 올라왔다. 척루인이 입을 틀어막자 뒤에서 윤성이 그의 어깨를 잡아당겼다.
“갑시다. 순간이동석을 가져왔습니다.”
“여기서 작동되나?”
“제가 용안으로 차단막을 모두 파괴했습니다.”
“용안?”
“그런 게 있습니다. 어서 꺼삐딴으로 이동하시죠.”
저벅저벅저벅.
복도 바깥에서 걸음 소리가 울렸다. 윤성의 얼굴이 굳었다.
“적들이 몰려오는군요. 쯔위민 최고 전사님이 마이어계를 쓸어버렸지만 여긴 아직 좀 남아 있거든요.”
“쯔위민 선배님이 뭐라고?”
“대전사님께선 많은 부상을 입으시고 마력도 고갈된 것 같으니 꺼삐딴으로 귀환하는 것만 생각하십시오.”
윤성이 척루인을 감옥 안으로 도로 밀어 넣고는 밖으로 나가서 문을 닫았다.
“제가 잠깐은 맡을 수 있습니다. 어서 꺼삐딴으로 워프하십시오! 피하신 걸 확인하면 저도 곧장 뒤따라가겠습니다!”
윤성이 척루인의 시야 밖, 오른쪽으로 달려나갔다.
이윽고 요란한 마법의 불빛이 창문 너머로 번쩍였다.
콰아앙!
무언가가 폭발하는 소리.
“끄아아악!”
마이어계의 전사가 내는 걸걸한 비명 소리와 벽면에 튀는 핏방울.
식겁한 척루인은 재빨리 순간이동 펜던트를 발동시켰다.
“갔네요.”
감옥에 설치된 CCTV를 원격으로 재생하던 아리가 말했다.
복도에 몰려와 있던 차희와 미들로드가 CCTV 화면을 보고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좋았어. 수고했어, 다들. 연말 인센티브 기대하라고. 테쿰세랑 제다이한테도 전해주고.”
윤성이 웃으며 말했다.
“다시 갈 거야?”
차희가 물었다.
“어. 동생들 조금만 더 봐주라.”
“……알았어.”
“진짜 중요한 상황이라 그래.”
“누가 뭐랬니.”
윤성은 순간이동석을 발동시켜 콜로라로 귀환했다.
***
꺼삐딴 본사.
수백 명의 콜로라 전사들이 모두 쏟아져나왔다. 업무가 마비됐다.
실종되었던 것으로 알려진 대전사 척루인이 살아 돌아왔다.
“비켜!”
회의실에서 한달음에 달려온 쯔위민이 전사들을 좌우로 물려냈다.
“척루인! 괜찮으냐?”
그가 척루인의 어깨를 콱 붙들었다.
“살 만합니다.”
“정말 다행이다. 그런데 씀푸는?”
“전 모르겠습니다.”
“그래…….”
쯔위민이 실망한 표정이 되었다.
“와아!”
갑자기 본관 밖에서부터 전사들의 함성이 들렸다.
대전사를 구출한 신인 강윤성이 들어오고 있었다.
클리앙이 넋 놓고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쯔위민조차 실패했던 임무였다.
실낱같은 희망으로 그에게 임무를 맡겼지만 그 누구도 레벨 900대의 신입이 단독으로 척루인을 찾아내 구출할 수 있을 거라 예상치 못했다.
“강윤성…….”
클리앙이 그의 이름을 되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