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2
레벨업 속도는 9.8m/s^2 182화
쿠우우우우!
분화구의 폭발음은 꼭 세상이 무너지는 것 같은 굉음이었다. 천사들은 귀를 움켜쥐었다 겁에 질리거나 망연자실한 표정들.
그들은 건물 본관을 삼켜버린 막대한 용암을 바라보았다. 뜨거운 폭염이 분수처럼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크윽!”
튄 용암이 날개에 닿자 실렌티가 기겁을 하며 몸을 틀었다. 드래곤에게조차 위협적이다.
실렌티는 황급히 날갯짓을 해서 건물로부터 떨어져 나왔다.
끔찍한 화염 속에서 불타면서, 카엘룩스는 주머니를 뒤지고 있었다.
‘큰일이다.’
마안에 당한 데미지가 너무 컸던 탓에 순간 정신을 잃었었다. 용암에 몸이 파묻히면서 초고온의 끔찍한 고통에 눈을 떴지만 이미 치명적이다.
‘순간이동석. 순간이동석!’
그는 필사적으로 인벤토리를 뒤진 끝에 간신히 순간이동석을 빼냈지만.
‘집중이 안 된다.’
순간이동석을 발동시키기 위한 최소한의 마력 발동이 안 되었다.
‘이럴 수가.’
그 애송이의 마안이 이 정도였단 말인가? 주고받은 정신 공격에, 내 마력 컨트롤 능력이 제로가 될 정도?
‘가장 위협적인 적이다.’
마제스티엘의 부활 따위는 이미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는다.
콜로라 최대의 걸림돌은 그의 예상보다 훨씬 강력했다. 옌뚜르의 계산도 아득히 뛰어넘는다.
정체불명의 남자.
인계의 관리자로 알려져 있지만 활화산을 만들어 폭발시키는 기이한 마법을 가진 남자.
알려진 스킬들만 해도 어떤가. 빛의 탄환에 인페르노에 지자기 폭풍.
모조리 콜로라가 계획했던 지구의 전력의 범위외다.
게다가 그는 마안을 쓸 수 있었다.
‘어쩌면 콜로라 전사인지도 모른다.’
최악이다.
쯔위민 이상으로 강한 전사가 인계에 붙었다면? 그 정도의 실력자라면 분명히 콜로라에서도 꽤 높은 직위일 것이다.
‘옌뚜르. 제발.’
카엘룩스가 클로를 세웠다. 이젠 녹아버린 자신의 허벅지 뼈를 칼끝으로 긁었다. 그의 수명이 다할 때까지 그가 남길 수 있는 문자는 겨우 세 글자뿐.
<마스크>
콜로라의 손아귀에 들어온 천계의 지휘부를 파멸시킨 장본인.
이 화산 폭발이 그의 소행임을 옌뚜르가 알아주길 빌었다.
카일란 길드의 지도자, 콜로라의 SSS급 전사 카일란의 숨이 멎는 순간이었다.
***
“흐악!”
윤성은 악몽을 꾸다가 벌떡 일어났다. 온 몸이 땀에 흠뻑 젖어 있었다.
“뭐야 여긴?”
어마어마한 크기의 동굴 속.
바닥에 자욱하게 깔린 것은 황금과 보석들이다.
“보너스 스테이지 같은 건가? 카일란을 처치해서?”
옛날에 아케이드 게임 같은 걸 하면 이런 상황이 연출되곤 했는데.
제한 시간 안에 되도록 많은 보석을 수집해서 점수를 올릴 수 있는 스테이지.
“그럴 리가 있냐?”
뒤에서 누군가가 빈정거렸다.
새까만 피부에 새까만 흑발의 남자가 황금더미 위에 앉아서 발을 까딱거리고 있었다.
“뭐야 너?”
인계에서 흑인들은 많이 보아왔다. 중동에서도 활동했었으니까. 그리고 최상급 헌터 중에도 흑인은 꽤 많다.
하지만 이 남자는 그야말로 블랙홀 같이 모든 빛을 삼켜 버리는 듯한 피부색이다. 약간의 광도 없는. 이런 색깔을 윤성은 단 한 번 본 적 있다.
“실렌티냐?”
말하고 보니 인간과는 모습이 좀 다르다. 크고 뾰족한 귀와 날카로운 치아, 코끝도 동물들의 코와 같은 모양으로 되어있다.
게다가 그 강력한 블랙 드래곤 특유의 묘한 마력이 느껴지는 듯싶었다.
“그래. 이곳은 나의 네스트다. 얌전히 있어.”
“네스트라고?”
“넌 혼절했고, 난 조금밖에 회복되지 않은 상태였다. 헬라엘은 애초에 전력 외였고.”
“그래서?”
“플라멘 새끼들이 떼거지로 몰려와서 레이드 한답시고 공격을 퍼붓는데 그럼 어쩌겠냐? 차원문 열고 튀었지.”
“차원문을 열었다면……. 여기가 용계라는 건가?”
“바로 그렇다.”
“이런! 안 돼. 난 인계로 돌아가야 해.”
“네가 카엘룩스 그 미친 새끼를 처치해버린 덕분에 용제께서 매우 흡족해하시는데. 뵙지 않을 거냐?”
“용제?”
“너에게 큰 상을 내리겠다고 했다.”
“상은 됐으니 나중에 우리 길드에 가입이나 하라고 전해.”
“길드?”
“인계에서 차원 연합 길드를 만들 거다. 그걸로 콜로라의 침공을 막을 거야.”
“오호. 마제스티엘이 생각나는 얘기군. 연합은 한 번 실패했었는데, 용제께서 과연 협력하실지.”
“얘기해봐야지. 하지만 지금은 아냐. 내가 좀 급한 일이 있어서 먼저 가봐야겠어. 너희 관리자한테 그냥 그렇게만 전해줘. 난 지금 인계에서 빨리 처리해야 하는 일이 있어서.”
“무슨 일인데?”
“마이어가 보낸 사자 브리트마가 오기로 되어 있었다. 연합 길드 합류 건에 대해서 얘길 좀 할 생각이었거든.”
“마이어? 그 배신자 새끼는 이미 콜로라의 시종이 된 지 오래다.”
“배신?”
“그래. 그러고 보니, 우리 첩보에 따르면 그놈이 엘리지아인지 메탈로이드인지하고 편 먹고 다른 차원 하나를 털어서 꺼삐딴에 넘긴다는 얘기도 있었는데.”
“정말이냐?”
“아무튼 마이어를 포섭하는 건 관두는 게 좋아. 그 놈들은 이미 완벽하게 콜로라의 종이 되어버렸으니까. 마제스티엘이 죽고 카엘룩스가 지배하게 되었던 시점부터 쫄아서 꼬리 내렸거든. 이젠 수호자를 만나러 가지도 않지.”
확실히 마이어는 굉장히 수상쩍긴 했다. 마치 콜로라에 자주 가본 것처럼, 폴리모프나 탑에 대해서 아는 척 거짓말도 했었으니까.
“그럼 더 빨리 가야겠군. 지금 간다.”
윤성이 인벤토리에서 순간이동석을 꺼냈다. 그러나 실렌티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급한 일이라면 이미 글렀을걸.”
“뭐?”
“네가 여기 온 후로, 눈을 뜰 때까지 일주일이 지났다.”
툭.
순간이동석이 윤성의 손에서 떨어져 데굴데굴 굴렀다.
“일주일? 지금 일주일이라고 했냐?”
“그래.”
마이어가 보낸 브리트마는 물론이고 옌뚜르가 쯔위민까지 보냈을 시간이다.
망할!
“인계에 대해서 뭐 소식 들은 것 없어? 무슨 싸움이 났다거나.”
“인계는 싸움이 항상 나는 곳이지. 인종이나 계급이나 종교 같은 걸로 나눠서 맨날 치고받지 않나.”
“그렇긴 한데 그런 것 말고……. 젠장. 아무튼 지금 가봐야겠어.”
쿠우우웅!
순간이동석을 집어 들려는데 갑자기 동굴이 소란스럽게 울리면서 순간이동석이 데굴데굴 굴렀다.
“실렌티 있느냐?”
동굴을 우렁차게 울리는 목소리.햇빛에 비친 거대한 그림자가 순식간에 조그맣게 수축해서 사람 모양으로 변했다.
“있습니다.”
실렌티가 안에서 소리쳤다.
“들어가도 되겠는가?”
“들어오시지요.”
곧 동굴 입구에서부터 꼬장꼬장하고 융통성 없게 생긴 중년의 남자가 나타났다. 그의 피부는 번쩍이는 금색이었다.
“인간이 일어났군.”
“당신이 용제인가?”
“그렇다. 그대가 인계의 관리자인가?”
“맞아. 그리고 미안하지만 지금 대화 나눌 때가 아니군. 난 빨리 인계로 가봐야 한다. 내 길드가 잘 있는지 먼저 확인해봐야겠으니.”
“백마 길드를 일컫는 것이겠지?”
“알고 있어?”
“그대가 카일란을 꺾은 후에 따로 좀 조사를 해보았지.”
“그렇군.”
“그대의 길드는 아직까지는 무사하니 걱정하지 마라.”
“정말이냐? 근데 아직까지는 이라는 건 또 무슨 뜻이야?”
“잠깐 앉지. 얘길 좀 해보아야겠다.”
용제가 황금 더미에 걸터앉으며 말했다. 자르륵 소릴 내며 금화들이 흘러내렸다.
***
윤성이 정신을 차리기 한참 전, 월요일 밤.
차희는 골머리를 썩이는 중이었다.
‘무슨 사고가 난 게 분명하군.’
당장 내일 브리트마가 찾아오는데 아직까지 윤성이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큰 부상을 입었거나 죽었을 거라고 생각하진 않는다. 이제는 윤성의 전투 능력과 위험에 대한 대응법들을 믿는다.
하지만 내일 약속된 시간까지 돌아올 수 있으리라는 기대도 안 든다.
그녀는 조바심에 밤늦게까지 대표 사무실에 앉아서 퇴근하지 못했다.
똑똑똑.
갑자기 누군가 대표 사무실의 문을 두드렸다.
윤성인가?
차희가 반색하며 튀어나갔다. 얼른 문을 열었지만 밖에 서 있는 것은 윤성이 아니었다.
“오랜만입니다. 안주인님.”
아리가 눈을 반짝 빛내며 말했다.
“너였냐. 들어와.”
“큰주인님은요?”
“지금 자리에 없어. 천계에 갔거든.”
“오우. 카엘룸 정당을 박살 내러 가셨군요?”
“카엘룸?”
“후후. 큰주인님께서 옛날에 제게 맡기신 일이 하나 있었죠.”
아리가 어깨의 수납공간에서 편지 한 장을 꺼내었다.
그것은 바로 먼 옛날 윤성이 코르소, 카다시안 킴 등과 함께 구스타프 던전을 레이드하던 중, 우연히 만난 핏빛야수를 죽이고 강탈한 물건이었다.
암호화되어 있어서 해독하는 데 어려움을 겪다가 아리에게 맡겼던 물건.
“해독 끝났습니다. 아주 그냥 어마어마하더군요.”
“무슨 내용인데?”
“읽어드릴까요?”
“응.”
“이 편지는 영국에서 최초로 시작되어 일 년에 한 바퀴 돌면서 받는 사람에게 행운을 주었습니다. 지금은 당신에게로 옮겨진 이 편지는 4일 안에 당신 곁을 떠나야 합니다. 이 편지를 포함해서 7통을 행운이 필요한 사람에게 보내 주셔야 합니다. 복사를 해도 좋습…….”
“잠깐만, 잠깐만! 뭐라는 거야 지금?”
“행운의 편지. 조크였습니다. 어땠나요?”
“이런 건 앞으로 윤성이한테나 해.”
“미안합니다. 이 편지는 카일란 길드에서 꺼삐딴 길드로 보내는 편지였습니다.”
“카일란?”
“지금 천계의 지배를 맡은 콜로라의 길드입니다. 대충 중요한 정보만 얘기하면, 일단 천계에 대한 카일란의 지배는 이제 굳건해져서 거의 모든 천계의 간부들이 콜로라를 섬길 준비가 됐다는 것.”
“맙소사…….”
“둘째는, 마이어가 콜로라 측에 붙을 것으로 보인다는 내용입니다. 그 증거로 그들은 카엘룸 문양을 사용하기로 했고, 매달 S급 마정석 100개와 A급 이하 마정석 5,000개를 바치기로 했습니다. 메탈로이드 데이터베이스를 찾아봤는데 문양은 이것이었고요.”
아리의 눈에서 빔이 나와 벽면에 프로젝터 스크린을 띄웠다. 카엘룸 문양이 나타났다.
“세상에.”
“그 대신 마이어는 인계를 점령하게 되면 그 지배권을 자신에게 달라고 부탁했다고 합니다. 이 점에 대해서 옌뚜르의 의견을 묻는 편지였습니다.”
“인계를 점령한다고?”
“카일란이 천계에서 했던 것처럼, 인계에 관리자가 존재하지 않으니까 허수아비를 하나 세워두고 통치하겠답니다. 그리고 인간을 좀비화시키는 영약을 개발했다고 했거든요.”
“좀비화?”
“그건 콜로라에도 보내 준 적 있는 모양입니다. 무슨 탑을 만드는 데 스테이지 중 하나로 썼다고 하던데요.”
“잠깐만.”
옛날에 윤성과 수다를 떨다가 분명히 그런 얘길 들은 적이 있다.
“그걸로 인간들을 좀비화해서 지배하겠다는 거야?”
“마정석은 전부 콜로라에 넘기고요.”
“이 미친 새끼들이…….”
뚜르르르
갑자기 사무실 전화가 울렸다.
“여보세요?”
-아. 안녕하세요. 저는 브리트마라고 합니다.
“백마 길드 대표 사무실 민차희입니다.”
-제가 지금 통역 스킬 사용중인데 인계 한국어는 이렇게 쓰는 게 맞는 것인지?
“맞습니다.”
-좋아요. 마스크맨을 바꿔줄 수 있습니까?
“미안하지만 지금 자리에 없습니다. 제게 얘기하시죠. 전해드릴 테니.”
-제가 너무 늦게 전화를 걸었나요? 미안합니다. 인계에서는 비즈니스 통화를 밤에 하면 실례라고 하더군요. 마이어계와 문화가 달라서 몰랐습니다.
“괜찮아요.”
-내일 오후 두 시 반에 찾아뵈려고 하는데 괜찮을까요?
차희가 잠깐 고민에 잠겼다.
“죄송한데, 대표님이 지금 좀 아프세요. 모레 저녁에 오실 수 있을까요?”
-모레 저녁?
“네.”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죠.
뚝.
전화를 끊자 아리가 기겁했다.
“무슨 생각이에요? 저 놈이 들어와서 무슨 사고를 칠 줄 아시고? 물론 제가 있으니 어지간한 놈은 때려잡을 수 있겠지만.”
“아니. 넌 나설 필요도 없어.”
차희의 눈이 이글거렸다.
“아니…… 지금 큰 주인님도 안 계신데 무슨 일을 하시려고?”
“윤성이는 앞으로 콜로라와 싸우는 남자가 될 거야.”
차희가 말했다.
“마이어계 관리자 하나쯤. 내 선에서 처리해야지. 안 그래도 바쁜 우리 대표를 번거롭게 할 순 없잖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