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3
레벨업 속도는 9.8m/s^2 173화
임수향은 다음 날 오후에 퇴원했다. 윤성이 어디로 사라졌는지, 그리고 어떻게 천계에 가려고 하는지를 궁금해하는 그녀에게 차희는 적당히 둘러댔다.
“옛날에 북한에서 데려온 헌터가 있는데 아마 그분 통해서 허천읍의 비석을 찾아갔을 거예요.”
임수향은 믿을 수 있는 사람이지만 그래도 윤성은 순간이동석에 대해 주위에 알리는 걸 원치 않을 것이었기 때문이다.
차희는 회사의 중요한 일들을 처리하면서 하루 종일을 보냈다. 윤성이 하다 말고 팽개치고 간 대표 업무들을 하나씩 해치웠다.
예속 신청과 외국인 신분의 가입 신청서가 잔뜩 불어났다.
오늘 아침에 새로 들어온 서류 중에는 김성인의 세인트 길드도 있다.
‘김성인 대표님도 백마에 예속되려고 하시는군.’
백마 길드가 헌터계의 공룡으로 거듭나려는 현재로선 매우 현명한 선택이다. 이제 예속되지 않는 길드들은 최상급 던전 클리어나, 앞으로 또 나올지 모르는 10,000sY 던전의 처리에 어려움이 생길지도 모르니까.
그리고 세인트가 예속되면 대한민국에서는 그야말로 백마 길드의 독식 체제나 다름없는 상황이 될 것이다.
업무를 마쳤을 때는 오후 여섯 시 반.
차희는 차를 몰고 윤성의 아파트로 향했다. 다윤이와 소윤이를 좀 돌봐줄 생각이었다.
띵-
벨을 울리고 잠깐 기다리자, 인터폰 모니터로 얼굴을 확인한 소윤이 뛰쳐나왔다.
“언니!”
소윤이 반색했다.
“잘 지냈어? 오랜만이네.”
“네!”
“다윤이는?”
“우리 언니 요새 아르바이트해요.”
“정말? 왜? 용돈 없어?”
“아뇨. 돈은 오빠가 저희한테 옛날에 카드 준 게 있어서 괜찮은데 그냥 자기가 돈 벌어보고 싶대요.”
기특한데? 나쁘지 않은 생각이다. 수능도 쳤고, 학기 시작까지는 시간도 꽤 많으니까.
돈 때문이 아니라 사회 경험을 위해서라도 한 번쯤 아르바이트를 해보는 건 괜찮지.
“무슨 아르바이트 하는데? 언제부터?”
“카페 알바요. 2주 정도 됐어요.”
“어디서?”
“여기 역 앞에 헌터커피.”
영국의 S급 헌터 조쉬 그레이가 운영하는 대형 커피 체인점이다. 조쉬는 모델 같은 외모 덕에 세계적으로 인기가 많다.
커피 역시 조쉬가 직접 에티오피아와 케냐에 둔 지역 거래소를 통해 공수해 오는 고급 원두다.
게다가 카페 내의 디자인 테마가 훌륭해서 브랜드 가치가 오래전부터 급속도로 성장했다. 지금은 커피계의 백마 길드 같은 존재가 되어가는 중이다.
‘헌터커피라면 어디 이상한 데서 아르바이트하는 건 아닌 것 같네.’
차희는 살짝 마음을 놓았다.
“아르바이트 저녁에 해?”
“다섯 시부터 해서 밤에 와요.”
“이따 가봐야겠네. 너 저녁만 챙겨주고.”
차희가 소윤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
헌터커피 가게 도어가 열렸다.
“어서 오세요! 헌터커피입니다.”
다윤이 반사적으로 힘차게 인사했다.
2주 정도 일하면서 이제 상당수의 음료를 제조하는 법을 익혔다. 스무디나 생과일주스 종류는 다 만들 수 있다.
커피는 좀 더 섬세한 테크닉이 필요하기 때문에 아직 혼자서 못하지만 카운터에서 손님 맞는 것이 웬만큼 적응은 된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아직도 누가 들어오면 바짝 긴장했다.
약간 얼은 얼굴에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주문을 받으려던 다윤이 갑자기 풋, 웃음을 터뜨렸다.
눈앞에 나타난 사람이 장난기 어린 표정을 지은 신차민이었기 때문이다.
“퇴근하고 왔어?”
“오늘 칼퇴 오졌지. 나 뭐 하나 만들어주라.”
“뭐?”
“음. 에스프레소.”
“그거 엄청 써.”
“쯔쯔. 우리 다윤이가 아직 사회생활을 2주밖에 안 해서 뭘 모르는구만. 인생에 비하면 커피는 쓴 게 아냐.”
“너도 사회생활 몇 달 안 됐잖아.”
다윤이 킥킥 웃었다.
“그리고 전에 아메리카노 가지고도 쓰다고 난리 치고 안 먹었으면서.”
“그땐 컨디션이 별로였어.”
“알았어. 근데 에스프레소 난 못 만들어. 커피는 아직 모르거든. 오빠가 만들어주실 거야.”
그녀는 옆자리에 서 있던 남자 아르바이트생을 가리켰다.
<김세형>
명찰을 읽은 신차민의 표정이 약간 어두워졌다.
요즘 같이 알바하는 오빠라면서 이 남자 얘길 많이 했다. 세형 오빠, 세형 오빠, 하면서.
‘잘생겼네.’
그래서 더 기분 나쁘다. 신차민은 묘한 표정으로 김세형을 쏘아보다가 말했다.
“그럼 나 사과 주스.”
“좋아. 자리에 앉아 있어.”
다윤이 계산한 후 진동벨을 내밀면서 말했다.
“앉을 자리 없는데?”
신차민이 주위를 두리번거리자 다윤이 계단을 가리켰다.
“위층에 자리 많을 거야.”
신차민이 계단을 올라간 후, 다윤은 껍질이 벗겨진 사과를 꺼내 믹서에 넣고 갈았다.
“남자친구야?”
김세형이 물었다.
“네.”
“지금 시간엔 손님도 별로 없고 카운터 나 혼자서도 충분한데 잠깐 쉴래?”
“네? 아니에요! 어떻게 그래요? 괜찮아요.”
다윤이 황급히 거절했지만 김세형은 빙긋 웃으면서 호의를 베풀었다.
“괜찮으니까 가서 남자친구랑 좀 놀다가 와. 카운터는 내가 잠깐 볼게.”
“정말요?”
“그럼.”
“헤. 그럼 5분만 놀아주고 올게요.”
다윤은 신차민의 진동벨을 울리는 대신 완성된 사과 주스를 가지고 직접 위층으로 올라갔다.
신차민은 계단 옆, 화장실 벽 맞은편의 테이블에 앉아 있었다.
A급 헌터의 감각 능력으로 그는 진즉에 계단을 올라오는 다윤을 눈치챘다. 특유의 걸음 속도와 무게감을 통해서.
하지만 내색하지 않고 고개를 숙인 채 휴대폰을 만지며 기다렸다.
“짠!”
다윤이 그의 눈앞에 사과 주스를 내밀었다.
“직접 가져다주는 특별 서비스.”
“고객 맞춤 친절함 오졌습니다. 헌터커피에서 만든 새 서비스인가요?”
다윤이는 방긋 웃으며 그의 맞은편에 앉았다.
“앉아 있어도 돼?”
“세형 오빠가 잠깐 봐준대. 5분만 놀다가 내려갈 거야.”
“생각보다 좋은 사람이었네.”
“원래 네 생각 속에선 나쁜 사람이었어?”
“약간. 아르바이트 할 만해?”
신차민이 물었다.
“어우. 말도 마. 힘들어 죽겠어. 원래 돈 버는 게 이렇게 어려운 거야?”
“솔직히 난 별로 힘들게 안 벌어서 모르겠어. 우리 회사 거의 나가리야. 요즘 S급 쏟아져 들어와서 인력이란 게 폭발해버렸거든.”
신차민이 말했다.
“거기다 이번에 미국에 초대형 게이트 두 개나 생기면서 마력 기후에 뭐가 변동이 생겼는지 자잘한 게이트는 잘 안 터져서 할 일이 없네.”
“좋겠다.”
“넌 커피 못 만들어서 힘든 거야? 누가 갈구나? 선배들이?”
“아냐. 다들 친절해. 근데 점장님이 나만 보면 잡아먹으려고 그래.”
“왜?”
“몰라! 좀 이상해 그 사람. 자꾸 막말하고.”
“뭐라고?”
“여자분인데 몸매 관리에 약간 강박 같은 게 있으신가 봐. 되게 날씬하신데 자꾸 살 빼야 한다고 칭얼대거든? 근데 그럴 때마다 날 자꾸 끌고 들어가.”
“뭐라고?”
“살 빼야 되는데 다윤이처럼 마르긴 싫다, 비실비실해서 보기 싫다, 병 걸릴 것 같다, 이런 식으로.”
신차민의 입이 떡 벌어졌다.
“뭔 개소리야? 우리 다윤이 딱 보기 좋게 날씬한데. 리얼 개 에바이신데.”
“들어 봐. 요샌 더 심한 것도 있어. 헌터커피 본사에서 아르바이트하는 대학생들 대상으로 장학금 주는 이벤트 하고 있거든?”
“응.”
“그게 지원서를 써서 내면 헌터커피 근무 경력이랑은 상관없이 추첨해서 등록금의 절반만큼 장학금을 지원하는 건데 내가 지원서 써서 그거 됐거든?”
“오졌다……. 너 의대라서 등록금 많이 나오잖아?”
“근데 점장님이 뭐라는 줄 알아? 그거 여기 직원들하고 N분의 1로 나누래.”
“뭔 소리야 그게?”
“내가 그 장학금 받게 된 것도 여기 매장에서 일했기 때문에 그런 거 아니냐, 매장 직원들하고는 다 공동체다. 그러니까 돈 나누는 게 맞는 거다, 뭐 이런 식으로.”
“와.”
“어이없지?”
“아야어여오요우유으이 다 없어.”
“누가 그런 거 가르쳐줬어?”
“회사에서 내 옆자리 앉는 형.”
“앞으로 그분하고 놀지 말자.”
“좋은 사람인데.”
“네 유머 감각에 해로워. 아무튼 그래서 내가 싫다고, 이건 제가 지원해서 따낸 돈 아닌가요? 하니까 그때부터 시도 때도 없이 전화 와서 왜 그렇게 이기적이냐, 왜 넌 너밖에 생각을 못 하냐.”
“미친.”
“계속 괴롭혀서 너무 스트레스받아. 사실 세형 오빠는 좋은 사람이기도 하고, 내가 너무 힘들어서 그냥 나눠줄까 생각도 했는데.”
“안 돼! 네가 따낸 건데 왜 나눠줘?”
“그 N명의 사람들 중에 점장도 들어 있어서 얄미워서 하기 싫어.”
“자기한테도 달래?”
“진짜 미쳤지? 게다가 세형 오빠 말고 직원 셋 더 있는데 점장님 친동생이랑 사촌 동생이랑 가끔 카운터 보는 남편분이야. 그냥 자기네 가족이 먹으려는 거야.”
“충격적이야.”
다윤이 더 넋두리를 쏟아놓으려는데 아래층 카운터 쪽에서 작은 소란이 일었다.
신차민은 예리한 촉으로 불길한 일이 일어날 듯한 예감을 느꼈다.
아니나 다를까, 잠시 후 키 크고 늘씬한 여자 한 명이 계단을 또박또박 올라왔다.
“점장님이다.”
다윤이 바싹 긴장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점장은 매우 아니꼬운 듯한 표정으로 다윤을 쏘아보았다.
“세형 씨 혼자 카운터 보더라.”
“아. 죄송해요. 잠깐 얘기 좀 해도 된다고 해서.”
“남자친구니?”
“네…….”
“다윤이는 매장에 놀러 오나 봐?”
“죄송합니다.”
다윤이 고개를 숙였다. 신차민이 끼어들었다.
“카운터에 남자분이 잠깐 맡아준다고 해서 5분만 올라왔던 것뿐이에요.”
“네. 알아요. 저도 그렇게 들었어요.”
점장이 말했다.
“하지만 다윤아. 그런다고 냉큼 올라와? 네가 그럴 짬이야? 가장 열심히 일해야 할 때 아니야? 커피도 못 만들면서.”
“죄송합니다. 나 내려가 봐야겠다. 미안. 이따 봐.”
다윤이 신차민에게 속삭이고는 후다닥 움직였다.
하지만 계단 앞에서 점장이 그녀의 팔을 콱 붙들었다.
“잠깐 따라와.”
점장은 다윤을 끌고 2층 벽면의 직원용 다용도실로 이동했다.
꽤 난폭한 동작이어서 신차민은 좀 놀랐지만 그녀를 막아 세우거나 하진 못했다.
점장은 다윤을 다용도실 안으로 던지다시피 집어넣고는 따라 들어갔다.
쾅!
문을 억세게 닫고는 사나운 표정으로 다윤을 쏘아보았다.
“자.”
점장이 가방에서 서류 한 장을 꺼내어 내밀었다.
“뭐예요?”
“너 장학금 나눈다는 서류야. 사인해.”
일종의 각서 같은 거였다. 다윤은 서류를 받아들고 황당한 표정으로 점장을 바라보았다.
“너 말고 다른 사원들이 그 지원금 따냈어도 나누라고 했을 거야. 네가 우리 매장 식구가 아니었으면 애초에 그 돈 받을 방법도 없었어. 알아? 우리 매장 덕에 생긴 공돈인데 왜 그걸 혼자 먹으려고 하니. 못돼 먹어가지고.”
“하지만…….”
“내가 맘에 안 들면 그냥 알바 그만둬. 대신 지금 그만두면 어차피 그 장학금 못 받는다. 알지?”
다윤이 우물쭈물하는데 문고리가 덜컥 소릴 냈다.
신차민이 문고리를 돌리고 있었다. 잠금장치가 걸려 있었지만 상관없다.
A급 헌터의 마력이 주먹에 실렸다.
와지직! 뚝!
철이 부러지는 소리와 함께 잠금 장치가 파괴되었다. 문을 열어젖힌 신차민이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점장을 쏘아보았다.
“뭐 하시는 거예요, 지금?”
신차민이 따졌다.
“차민아, 내 일이니까 나가 있어.”
다윤이 말했다. 이런 모습 보이는 게 창피하고 자존심 상했다. 차민의 도움은 고맙지만 받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신차민은 물러나지 않았다.
“그 돈 사장님이 주시는 거 아니고 본사에서 주는 거잖아요. 다윤이가 지원서 잘 써서 장학금 받은 건데 왜 그걸 사장님이 뺏어가요?”
“뺏어가다뇨? 누가 갈취라도 하는 것처럼 얘기하네. 우리 지점 규칙이 그래요.”
“그런 규칙이 어딨어요?”
“우리 매장은 그런데요. 맘에 안 들면 다윤이보고 다른 데서 아르바이트하라고 하지 그래요?”
점장이 다시 다윤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다윤이. 우리 매장 식대 5천 원인데, 너 지난주에 6천 원짜리 샌드위치 먹었더라? 그거 법으로 처벌 가능해. 알아?”
“…….”
“절도나 횡령이라고. 고소 안 하는 걸 다행으로 알아야지. 내가 그걸 아직까지 내버려 둔 건, 이제 막 사회생활 시작한 초년생이 먹은 거고, 네가 우리 매장 식구고 하니까 봐준 거야.”
점장이 말했다.
“규칙 좀 어겨도 액수가 크지 않으니까 그냥 넘어가 준 거란 말이야. 알겠어? 하지만 이건 경우가 다르잖아? 너보다 먼저 여기서 오래 일하면서 지원서 쓰고 탈락했던 다른 학생들은 어떻게 되니?”
“그런 분 없는데……. 다들 그런 제도 모르시던데…….”
점장이 휴대폰을 꺼냈다.
“뭐 네가 정말 끝장 보고 싶으면 얘기해. 나도 너 횡령으로 고소해 줄 테니까. 지금 경찰에 신고할래?”
그녀가 112 버튼을 눌러놓고 휴대폰을 다윤에게 내밀었다.
다윤과 신차민 모두 말문이 막혔다. 절도, 횡령, 고소 같은 용어들은 사회 초년생들에겐 너무 버거웠다.
“점장님?”
계단 아래에서 김세형이 올라왔다.
“누가 다윤이 찾는데요.”
“인기도 많네. 얼른 사인하고 내려가.”
점장이 다윤에게 서류를 내밀면서 말했다.
그 모습을 본 세형이 떨떠름한 목소리로 물었다.
“혹시 오래 걸릴 것 같으면 기다리시라고 할까요?”
“아냐. 다윤이 바로 내려갈 거야.”
그런데 말이 끝나기 무섭게 김세형의 등 뒤에서 여자 목소리가 울렸다.
“괜찮아요. 급한 일 있으면 이따가 봐도 돼요. 좀 기다려줄 수 있으니까.”
차희가 다용도실 쪽으로 걸어오며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