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2
레벨업 속도는 9.8m/s^2 172화
“전화 누군데?”
윤성이 메시지창을 보면서 차희에게 물었다.
“콜로라 행성 꺼삐딴 길드 대표 옌뚜르라고 하는데요.”
윤성은 잠깐 고민하다가 마이어의 통신을 먼저 받기로 했다.
“화장실 갔다고 10분 후에 다시 걸라고 해줘.”
윤성이 차희에게 말하면서 후다닥 복도로 뛰쳐나갔다.
복도 끝의 직원 휴게실로 달려갔다.
텅 비어 있었다.
윤성은 메시지창을 눌러 통신을 연결했다.
“마이어?”
-반갑다. 마스크맨.
“미들로드 때문에 연락했나?”
-그래. 그를 넘겨받을 날을 정했으면 싶다.
윤성은 잠깐 머리를 굴렸다.
천계에 가는 것은 미룰 수 없다. 신중석은 한시가 급한 상태일 테니.
꺼삐딴 길드에서 온 연락은 아마 목적이 둘 중 하나다.
첫째는 인계를 넘겨받으려는 것이다. 복종을 맹세하면 파괴하지 않겠다는 식으로 나오겠지.
콜로라의 무력을 과시하거나 천계를 어떻게 파괴했는지 얘기할 수도 있다. 아니면 X등급 핏빛야수에 대해서 얘기해 줄 수도 있고.
만약 이쪽이라면 괜찮다. 생각해 보겠다는 식으로 적당히 둘러대고 얻을 수 있는 정보만 쪽쪽 빼먹을 수 있으니까.
하지만 전화를 건 목적이 두 번째라면 경우가 좀 다르다.
옌뚜르는 척루인에 대해서 물어볼 수 있다.
척루인도 옌뚜르도 같은 꺼삐딴 길드 소속이니까.
옌뚜르는 인계에서 일어난 사고랍시고 척루인의 실종에 대해 윤성에게 따질 수 있다. 그걸 빌미로 인계를 공격하겠다고 협박할 수도 있고.
하지만 책임을 모면할 수 있는 방법이 하나 있긴 하다.
바로 마이어에게 화살을 돌리는 것.
윤성이 현장에 도착해서 척루인을 체포하기 전, 그곳에는 핏빛야수가 하나 더 있었다.
테쿰세에게 전해 들었던 내용이다.
척루인보다 한 체급 아래의 핏빛야수가 제다이와 싸우다 치명상을 입고 순간이동해서 후퇴했다고.
그렇다면 그의 기억 속에는 현장에 있었던 미들로드가 강하게 박혔을 것이다. 미들로드는 척루인과 막상막하의 전투를 벌였으니 전투력이 인상적이겠지.
그걸 빌미로 옌뚜르에게, 마이어 계에서 척루인을 공격했을 거라고 얘기하고 나머지는 모른다고 잡아뗄 수 있다.
그러나 이렇게 책임을 떠넘길 경우, 만약 마이어가 정말로 콜로라에게 적대적이었다면 그와의 동맹 전선 구축에 문제가 생길 수 있다.
‘마이어가 내게 거짓말한 건 수상하지만 서로간의 신뢰 부족 때문에 생긴 오해일 수도 있으니.’
만약 아군이 될 수 있다면 관리자 하나를 잃는 것은 뼈아픈 손실이니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다음 주 화요일. 백마 길드로 올 수 있나?”
윤성이 마이어에게 물었다.
-그렇게 늦게? 이미 꽤 오래 기다렸는데.
“급한 일이 하나 생겼거든.”
-……좋다. 어쩔 수 없지.
“네가 직접 올 건가?”
-아니, 브리트마를 보내지.
“알겠어. 미들로드는 숨만 붙어 있는 상태니 데려가서 너희가 알아서 요리하라고.”
-고맙다. 나도 네게 줄 훌륭한 선물을 준비했다. 아마 마음에 들 것이다.
“그럼 다음에 봐.”
윤성이 통신을 끊었다.
***
다시 방으로 돌아오자 에어포스, 임수향, 신차민, 차희가 윤성을 일제히 쳐다보았다.
“다시 전화 왔어?”
윤성이 묻자 차희가 고개를 저었다.
“아직 연결되어 있어요.”
윤성이 휴대폰을 건네받았다. 이번엔 마이어와 통화할 때보다 약간 더 긴장된다.
꺼삐딴의 대표 옌뚜르.
척루인은 그가 혼자서 인계를 멸망시킬 정도의 힘을 갖고 있다고 했다.
물론 엘리지아 퀸이나 메탈로이드 군단도 그만한 전력을 가지고 있었다. 마스크맨이라는 변수가 없었다면 그랬을 거다.
하지만 옌뚜르에 대한 척루인의 평가에는 마스크맨이 이미 고려되어 있다.
퀸을 쓰러트릴 당시의 윤성의 힘을 콜로라도 알고 있을 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옌뚜르가 인계를 멸망시킬 수 있다는 건가?
‘하긴, 이미 천계를 멸망시켰다고 했지.’
일곱 차원 중에서 가장 융성했던 곳이라고 했다. 그걸 파괴할 정도니 아마 인계도 관리자를 포함해서 모두 쓸어버릴 수 있을 거다.
일단 시간을 좀 만들어보자.
“인계의 관리자, 마스크맨입니다.”
윤성이 휴대폰을 들고 말했다.
-반갑습니다. 마스크맨. 콜로라 행성 꺼삐딴 길드의 대표 옌뚜르라고 합니다.
“무슨 용건이죠?”
-인계에서 우리 길드의 대전사 척루인이 실종되었습니다.
이 문제를 먼저 따지는군.
-척루인은 인계에서 당해낼 수 있는 헌터가 없습니다. 관리자인 당신을 제외하면 말이죠.
“제가 척루인을 납치했다는 건가요?”
-당신이 했든 안 했든, 인계의 관리자는 당신이고, 이곳에서 사고가 났습니다.
“제가 책임지라는 거죠?”
-그렇죠.
방 안의 모든 헌터들이 숨소리까지 죽이고 긴장하고 있었다.
사방이 조용한 덕에, 에어포스는 높은 청력으로 수화기 너머에서 들리는 옌뚜르의 목소리까지 작게나마 들을 수 있었다.
윤성은 잠깐 고민에 잠겨 있다가 대답했다.
“제가 어떻게 책임지면 좋으실까요?”
-척루인을 찾아주십시오.
“노력 중입니다. 사실 단서를 하나 가지고 있기는 합니다.”
-단서를 가지고 있다고요?
“네.”
-그게 뭐죠?
“알려드리기 전에, 저도 대표님께 부탁 하나 드려도 될까요?”
-뭡니까?
“인계의 헌터 중 두 사람이 천계에 갔다가 사고에 휘말렸습니다. 한 사람은 큰 부상을 입고 인계로 귀환했지만 다른 한 분은 천계에 남아 있습니다. 신중석이라는 헌터입니다.”
-그래서요?
“천계는 콜로라의 손아귀에 있는 곳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하하하. 이젠 저한테 책임을 물으시는 겁니까?
윤성이 주먹을 꽉 쥐었다. 약간 위험한 도발이긴 하다. 하지만 신중석의 안전을 위해서 지금 얘기하는 게 낫다.
“혹시 아시는 바가 있습니까?”
-그 헌터는 현재 천계에서 추적 중입니다.
“그 헌터를 다친 데 없이 무사히 인계로 생환시켜 주세요. 그걸 약속해주시면 저도 척루인 전사에 대한 단서를 내드리죠.”
-마스크맨. 그 헌터는 천계에서 마제스티엘의 마력 스톤을 탐색하고 있었습니다. 대역 중죄에요.
“척루인 전사님도 테쿰세 헌터를 죽이려 했던 걸로 알고 있습니다만.”
-…….
잠깐 옌뚜르의 말이 멎었다.
-후우.
그가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천계가 어떻게 멸망했는지 아십니까?
“네?”
-콜로라와 맞먹으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동등한 지위에서 거래하려고 했죠. 마스크맨.
옌뚜르가 말했다.
-당신과 내가 체급이 맞습니까?
“그래서 신중석 헌터님을 죽이겠단 겁니까?”
-척루인에 대한 정보를 제게 넘기십시오. 이건 부탁이 아니라 명령입니다.
옌뚜르가 말했다.
-그리고 제게 신중석 헌터를 죽이지 말라고 부탁하십시오.
“……부탁드립니다.”
-좋아요. 고려해 보죠. 이제 정보를 넘겨요. 단서가 뭡니까?
“말로 설명할 수 있는 건 아닙니다. 직접 보시는 게 빨라요. 다음 주 수요일쯤 백마 길드로 방문해 주실 수 있을까요?”
윤성이 말했다.
-그렇게 늦게?
“제가 처리해야 할 급한 일들이 있습니다.”
-차원 간 연합 길드를 창설한다는 기자회견 말인가요?
“음.”
-우리 정보력을 무시하지 마십시오. 이미 다 알고 있으니. 당신이 우리에게 반항적이라는 것도 말입니다.
옌뚜르가 말했다.
-그럼에도 당신에게 내가 기회를 주려는 건 X등급이 이곳에 왔을 때 파멸 당하는 것들을 조금이라도 살려내려는 노력입니다. 잘 생각하십시오.
“알겠습니다. 다음 주 수요일로 말씀드린 건 기자회견 때문은 아닙니다.”
-흠. 좋습니다. 하지만 그 날짜는 제가 안 됩니다.
“그럼 언제가 좋으시죠?”
-날짜를 바꿀 필요는 없습니다. 간부를 한 명 보내죠. 저 대신이라 생각하십시오.
“간부요?”
-쯔위민 최고 전사입니다. 제 오랜 친구이기도 하고, 꺼삐딴의 부대표이기도 합니다.
“알겠습니다.”
-그를 보내는 이유는 한 가지가 더 있습니다.
“한 가지 더?”
-최근에 쯔위민의 동생이 실종되었거든요. 인계는 아닙니다. 마이어계에서 훈련을 하던 중 사라졌죠.
“그런가요?”
-씀푸라는 어린 전사입니다.
씀푸!
윤성의 눈이 동그래졌다.
옛날 윤성이 탑에서 처음 활동을 같이했던 핏빛야수다. 그녀가 꺼삐딴 소속이었군.
-쯔위민은 인계에 가는 김에 마이어 계에도 갈 겁니다. 혹시 아는 게 있다면 쯔위민에게 알려주시길.
“알겠습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쯔위민이 백마 길드에 가게 되면 대표님과 함께 비즈니스 얘길 좀 할 수 있습니다.
옌뚜르가 말했다.
-원래는 이 논의를 더 나중에 할 생각이었지만, 대표님을 이왕 만나게 될 거라면 굳이 이 안건을 피할 이유가 없으니까요.
“콜로라가 이 땅을 관리하고 싶다는 것이죠?”
-역시 연합 길드 같은 걸 생각했던 분답게 잘 아시는군요.
“콜로라의 힘은 관리자들 사이에 꽤 유명하니까요.”
-다시 말씀드리지만, 우리의 관리 아래 들어오는 게 명맥을 잇는 유일한 길입니다. X등급 전사께서 오시면 그 무엇도 살아남을 수 없으니까요.
“알겠습니다. 다음에 만나 뵙고 얘기하죠.”
윤성은 전화를 끊었다.
그가 헌터들과 차희를 돌아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며칠 시간을 벌었어요.”
그가 말했다.
“제 남편 얘길 하시는 것 같던데, 어떻게 된 건가요?”
“통화 상대는 콜로라의 높은 사람입니다. 신중석 헌터를 잡더라도 다치게 하지 말라고 했어요. 인계로 돌려보내 달라고.”
“그럼 여기서 기다리는 건가요?”
“아니요. 믿을 수 없는 상대에요. 다음 주까지는 시간이 있으니까 그 전에 천계에 다녀올 겁니다.”
“언제 출발하실 건가요?”
“당장 갈 겁니다.”
“좋아요. 갑시다.”
임수향이 끙 소릴 내며 침대에서 내려오려고 했다.
“저 혼자 갑니다.”
윤성이 말했다.
“하지만 북한에 있는 순간이동 비석 위치를 모르시잖아요?”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신중석 헌터님이 천계의 어디에 계신지만 알려주세요.”
“이걸.”
임수향이 조그만 구슬 하나를 내밀었다. 구슬 안에는 구형의 모든 방향으로 돌아가는 나침반 하나가 있었다.
“마법 나침반입니다. 제 남편과 마법 연결된 물건이에요. 이게 가리키는 방향으로 가면 남편을 찾을 수 있습니다.”
지금은 힘없이 축 처져서 빙글빙글 돌고 있었다.
천계와 차원이 나누어져 있기 때문에 방향을 잡지 못하는 모양이다.
“알겠습니다.”
윤성은 마법 나침반을 주머니에 넣었다.
“떠나기 전에 차희. 에어포스. 얘기할 게 있어요. 잠깐 이리로.”
윤성은 두 사람을 데리고 휴게실로 이동했다.
“마이어가 보낸 사자가 다음 주 화요일에 백마 길드에 옵니다.”
윤성이 말했다.
“그리고 콜로라의 간부가 수요일에 와요.”
“마이어의 사자와 콜로라의 간부요?”
에어포스가 물었다.
“전자는 미들로드를 찾으러 오는 것이고, 후자는 척루인에 대해 물으려고 오는 겁니다.”
윤성이 설명했다.
“아마 그들이 오기 전에 제가 돌아올 텐데, 그때까지 주의해야 할 게 있습니다.”
“어떤 거?”
차희가 물었다.
“일단 백마 길드에도 꺼삐딴 첩자가 폴리모프해서 숨어 있다고 생각해야 해요.”
윤성이 말했다.
“그러니까 척루인을 들키면 안 되는 것은 당연한 거고, 미들로드도 걸리면 안 돼요.”
“미들로드는 지금 어쩌고 있죠?”
에어포스가 물었다.
“고양이 상태로 길드 안을 돌아다니고 있을 겁니다. 고양이 상태일 때는 마력이 거의 느껴지지 않으니까 아마 놈들이 마주쳐도 눈치채지 못할 거예요.”
“척루인은 어디에 있어?”
이번엔 차희가 물었다.
“길드 지하에 감금해 놨어. 나중에 위치를 알려줄게. 그리고 차희. 이걸 가지고 있어.”
윤성이 건넨 것은 검은색 천이었다.
바토리가 주었던 천까마귀.
아무래도 어수선한 시기에 자리를 비우려니까 영 마음이 쓰였다. 이걸 맡겨둬야지.
“마력을 불어넣으면 까마귀로 변신해서 바토리한테 날아가. 그때 까마귀 발목에다가 편지를 써서 붙이면 메시지를 전할 수 있어.”
“하지만 난 마력 불어넣을 줄 모르는걸.”
“편지만 준비해서 아무나 시켜. 신차민 시켜. 나 없을 때 뭔가 위험하다 싶으면 바토리 불러서 길드 지켜달라고 해.”
“걱정 마십시오.”
에어포스가 끼어들었다.
“무슨 일 있으면 제가 지켜드리겠습니다. 맘 놓고 천계에 다녀오십시오.”
“고마워요. 그리고 차희. 부탁 한 개만 더하자.”
“뭔데?”
“내 동생들 좀 봐주라.”
차희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건 상관없는데, 천계 갔다 오면 동생들하고 좀 놀아줘. 애들 너 얼굴 까먹겠다.”
“미안.”
“미안할 건 없지. 사람 목숨 달린 일인데 어쩔 수 없으니까. 그리고 미안해도 나 말고 동생들한테 미안해야지.”
“갔다 오면 애들 데리고 놀이공원이라도 가야겠어.”
“나도 데려가.”
차희가 얼른 말했다.
“좋아.”
옆에서 에어포스가 묘한 표정으로 두 사람을 쳐다보고 있었다.
“에어포스도 가고 싶어요?”
“네에? 무슨 소립니까?”
에어포스의 얼굴이 약간 붉어지며 질색했다.
“제가 롤러코스터 같은 걸 탄다고 재밌을 리 있겠습니까? 매일 항공기 옆에서 날아다니는데요.”
“하긴. 그렇죠. 그냥 얘기해 봤어요.”
윤성이 해맑게 웃으면서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