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1
레벨업 속도는 9.8m/s^2 171화
54. 작전명 엔젤 스톤
게이트 안으로 들어선 고제하 팀은 내부의 상황을 목도하고 충격에 빠졌다.
수많은 천사들이 치명상을 입은 채 바닥에 쓰러져 있거나 죽어 있었다.
살아남은 몇몇은 고제하 팀을 발견하고 공격해 왔지만 조금도 위협적이지 않다.
<중금속 폭우 발동!>
백마중의 마법이 현장에 쏟아져 내렸다. 고제하는 팀을 이끌고 게이트 내부 깊숙이 진입했다.
보스는 숨이 간당간당한 상태의 천사장이었다.
빛의 날개가 세 쌍. 머리에는 금관. 은으로 만들어진 갑옷은 너덜너덜하다.
그는 고제하를 보고는 몇 걸음 다가오다가 건드리지도 않았는데 저 혼자 풀썩 쓰러지고 말았다.
“도대체 뭔 상황일까요, 이게?”
신중석이 황당한 듯 고제하에게 물었다.
“내 평생 이런 광경은 처음이군.”
고제하가 팔짱을 끼며 생각에 잠겼다.
“보스는 어떡하죠?”
신민수가 물었다.
“일단 숨을 끊어야 해. 게이트를 닫아야 하니까.”
“알겠습니다.”
신민수가 창을 들어 천사의 목을 겨누었다.
레이드가 진행되는 짧은 시간 동안, 임수향은 지루한 표정으로 게이트 밖에서 헌터들의 소지품을 지키고 있었다.
그녀의 눈에 조그만 여자아이가 들어온 것은 그 무렵이었다.
눈처럼 새하얀 백발과 창백한 피부. 크고 동그란 눈동자.
그녀는 마치 얼음 나라에서 온 요정 같았다. 또는 천국에서 내려온 아기 천사.
하지만 입은 옷은 지저분하고 못 먹어서 비쩍 말라 있었다.
“이름이 뭐니?”
아이가 겁도 없이 임수향에게 가까이 다가오자 임수향이 물었다.
“…….”
그녀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 대신 손을 들어 임수향의 등 뒤를 가리켰다.
“헉!”
고개를 돌린 임수향이 놀라서 벌떡 일어났다. 뒤에 천사 하나가 서 있었다.
한 쌍의 날개를 가진 천사는 창으로 땅을 짚은 채 간신히 버티고 있었다.
그는 가만히 임수향을 쳐다보다가 그 앞에 풀썩 무릎을 꿇었다.
“무슨…….”
공격하려던 임수향은 마력을 가라앉히며 약간 물러났다. 아이를 보호하면서.
그러나 소녀는 조금도 겁먹지 않았다. 그녀는 무언가에 홀린 것처럼 천사를 향해 성큼성큼 다가갔다.
"Est. phanaa. reliarious."
소녀가 천사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임수향은 넋이 나간 표정으로 그 모습을 멍하니 지켜보다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민간인이 위험하다. 강력한 마수가 코앞에 있지 않은가.
“이리 와!”
임수향은 황급히 달려들어 아이를 껴안고 떨어져 나왔다.
천사의 놀란 표정. 그는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콰앙!
때마침 날아온 창이 천사의 가슴을 파괴했다. 신민수의 공격이었다.
치지직.
게이트에서는 잔파가 방출되고 있었다. 던전이 클리어되었다.
“그 애는 누구야?”
신중석이 이쪽으로 걸어오면서 물었다.
“나도 잘 몰라. 이 동네 아이 같은데.”
“알비노인가?”
백마중이 고개를 갸웃하며 아이를 들여다보았다.
“한, 네 살 정도 됐겠군.”
고제하가 말했다.
“부모 없이 혼자 돌아다닐 나이는 아닌 것 같은데. 특히 게이트 근처라면.”
김성인이 말했다.
갑자기 어른들이 잔뜩 나타났음에도 소녀는 조금도 겁먹거나 긴장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는 그들 사이를 당당하게 지나쳐 천사의 사체 앞으로 다가갔고 쪼그려 앉았다.
"Est. rosalline."
그녀가 천사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뭐라고 한 거야?”
김성인이 백마중의 가슴께를 발꿈치로 쿡 치며 물었다.
“나도 몰라. 처음 듣는 언어인데.”
“저 천사가 아이한테 무릎을 꿇었어요. 무슨 충성 맹세라도 하는 것처럼.”
임수향이 끼어들었다.
“충성 맹세?”
고제하가 황당한 듯 천사와 소녀를 번갈아 가며 쳐다보았다.
“뭘 잘못 보셨겠죠. 마수가 인간한테 그런 걸 할 리가…….”
신민수가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아까 천사들의 언어 같은 걸 썼잖아?”
백마중이 임수향 편을 들었다.
“그건 모르는 거죠. 그냥 애가 혼자 옹알이한 걸 우리가 못 알아들은 건지.”
“애 집 찾아주고 갑시다. 멀리까지 와서 레이드 했더니 피곤하네요. 가서 뜨끈한 거나 먹고 쉽시다.”
김성인이 말했다.
고제하는 임수향, 신중석과 함께 소녀를 데리고 마을 회관으로 이동했다.
나머지 헌터들은 먼저 숙소로 돌아가 휴식을 취했다.
그러나 마을 회관에 도착한 헌터들은 뜻밖의 얘길 들었다.
“거 아 새끼 고거 애미 없습네다.”
마을 주민들이 말했다.
보호자가 없다.
이 동네에는 오래전부터 정신 나간 여자가 한 명 있었는데, 그녀가 강가에서 갓난아기를 주워다가 키웠고, 그게 이 소녀라고 했다.
그리고 여자는 몇 주 전부터 보이지 않았다. 소녀는 마을을 돌아다니며 동네 주민들로부터 남은 음식을 받아서 연명했던 것이다.
“우리가 데려가죠.”
마을 회관을 나오면서 임수향이 말했다.
“미쳤어? 북한 주민인데 애를 무슨 수로 데려가?”
“주민 등록도 안 됐을 것 같던데요, 뭘. 그리고 마른 것 보세요. 여기 뒀다간 죽을지도 몰라요.”
“임수향. 자네 얼마 전에 안 좋은 일 있었던 건 알지만…….”
“유산이요? 그것 때문이 아니에요.”
임수향이 말했다.
“모르시겠어요? 이 애 보통 애가 아니에요. 전 알 수 있어요. 마력이 있다고요. 자라면 각성할 거예요. 어쩌면 신민수 헌터보다도 더 강해질지도 몰라요.”
“음.”
“천사와 대화도 나눴고요. 최상급 헌터들 중에는 마수들의 언어를 할 줄 아는 사람들도 있대요. 어쩌면 한국 최초의 SS급 헌터가 될지도 모른다고요.”
“하지만 방법이 없어. 우리가 무슨 수로 애를 데려가?”
신중석이 반대했다.
“이번 게이트 소탕 작전으로 북한 당국이 우리한테 약간 빚을 졌잖아. 이 정도는 들어줄 거야.”
“임수향 헌터 말대로 하지.”
고제하가 말했다.
“정말이십니까?”
신중석이 황당한 듯 물었다. 고제하가 고개를 끄덕이자 신중석은 다시 임수향을 쳐다보았다.
“그럼 애를 데려가면 누가 키우려고?”
“우리가.”
임수향이 대답했다.
한 번의 유산 이후, 신중석, 임수향 부부는 입양도 생각하고 있긴 했다. 하지만 이렇게 갑자기라니. 신중석은 떨떠름한 표정이 되었지만 반대하진 않았다.
소녀의 보호 본능을 자극하는 조그만 몸집과 힘없는 눈동자가 자꾸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리고 각성자가 될 거라면 A급 헌터 부부인 그들보다 더 좋은 양부모는 찾기가 쉽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두 사람은 소녀를 키울 수가 없었다.
국내의 입양 관련법 탓이었다.
이런 상황의 입양 법률은 북한에 보호자가 존재할 가능성을 중요하게 따진다.
정신병을 앓던 동네의 여자, 혹은 친부모가 살아 있을 수 있다. 게다가 소녀를 찾고 있을지도 모른다.
수소문할 방법조차 없는 그 보호자들의 동의를 받지 못했기 때문에 소녀의 입양이 불가하다는 것이다.
소녀는 보육원에 맡겨졌다.
초등학교에 입학할 무렵부터 각성 조짐을 슬금슬금 보이기 시작했다.
여덟 살 된 꼬마 아이가 초등학교 5, 6학년들보다 달리기를 잘한다든가. 일기예보보다 더 높은 정확도로 날씨를 맞춘다든가.
임수향과 신중석은 일주일에 세 번씩 보육원을 찾아가며 소녀에게 애정을 쏟았다.
그들은 소녀에게 자신들을 선생님이라고 부르게 했다. 보육원에 유모가 계시니 혼란을 주지 않으려 했던 것이다.
세 사람의 만남은 신차민이 태어난 후에도 계속되었다.
임수향은 신차민이 세 살이 될 때까지는 소녀를 만날 때 그를 데려가곤 했다.
그러나 소녀는 그때에도 이미 막대한 각성 잠재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언제부턴가 임수향은 소녀를 만날 때 어린 신차민을 데려가지 않았다.
A급 헌터 부부의 아들로서 신차민 역시 각성자가 될 게 분명했다.
임수향은 신차민이 친하게 지내던 누나와의 실력의 갭을 느끼고 열등감에 빠지길 원하지 않았다.
소녀는 건강하고 행복하게 자라 헌터 학교에 진학했다.
신입생이 된 그녀는 이미 당장 각성해도 대한민국 헌터 역사를 새로 쓸 정도의 실력자로 랭크될 게 분명했다.
아무리 낮게 잡아도 신민수 이상.
다행히도 임수향은 그녀가 어릴 때부터 인성 교육에 힘을 쏟았다. 아마 A급이 될 신차민에게 하던 것과 똑같은 걸 가르쳤던 것이다.
“넌 높은 등급의 헌터가 될 거야. 하지만 자만하면 안 돼. 진짜로 세상을 지키는 건 네가 아니야.”
“그럼요?”
“E급 헌터들이지.”
“E급?”
“E급 헌터들이 E급 던전을 처리해 주지 못하면 상급 헌터들이 결국 하급 던전들까지 다루어야 해.”
임수향이 말했다.
“그럼 헌터 협회는 인력난에 시달리게 될 거고, 던전 범람을 못 막을 거고, 결국 인류는 멸망하겠지. 그러니까 세상을 지키는 건 헌터들 중 대부분을 차지하는 E급 헌터들이야.”
“그럼 저는 뭘 해요?”
“너는 그들을 지켜주는 헌터가 되어야지.”
임수향이 빙그레 웃었다.
“앞으로 네 도움을 바라는 사람들이 수없이 많이 나타날 거야.”
“내 도움을 바라는 사람들…….”
“그들 모두를 구해내야 한다는 강박을 가질 필요는 없어. 하지만.”
임수향이 말했다.
“그들이 위기에 처해 있을 때, 그들과 마수 사이에 뛰어들 수 있는 용기는 꼭 가져야 한단다.”
다행히 그녀는 임수향의 가르침을 스펀지처럼 흡수했다.
임수향 자신이 A급 헌터였기에 상급 헌터라는 지위가 얼마나 중한 것인지를 잘 알고 있었다.
실전 경험에서 녹아 나오는 그녀의 교육은 소녀의 머릿속에 깊이 스며들었다.
헌터 스쿨의 교육은 더 이상 그녀에게 필요 없었다. 입학할 당시에 이미 실력도 도덕도 모든 것이 완성되어 있었으니까.
감염된 신민수가 서울을 향해 진격할 때, 고제하는 그녀에게 각성을 권유했고 임수향은 두려워하는 그녀에게 용기를 북돋워 주었다.
완벽한 인성.
막강한 실력.
올곧은 책임감.
한국 최고의 헌터 에어포스는 임수향이 만들어낸 작품이었다.
***
병실에서 이야기를 듣던 사람들 모두 굳은 표정이 되었다.
“넌 뭐 좀 기억나냐?”
윤성이 신차민에게 물었다. 그는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는 임수향에게 물었다.
“엄마? 왜 나 계속 안 데려갔어? 나 에어포스 광팬인데. 엄마 아들 그렇게 쉽게 기죽진 않잖아?”
“그래도 혹시나 했지.”
“와, 안 그랬으면 나 지금 에어포스 헌터님하고 누나 동생 하는 사이였는데. 리얼 오질 뻔했는데 개아깝.”
신차민이 에어포스의 눈치를 힐끔 보며 물었다.
“어, 어떻게. 지금이라도……. 일단 번호부터……. 누나?”
차희가 신차민의 옆구리를 쿡 찔러서 말을 끊었다.
에어포스는 아직 충격에서 헤어나오지 못한 상태였다. 그녀가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제가…… 제가 북한에서 왔다고요? 전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데요…….”
“어렸으니까. 그리고 그런 개인 정보는 원래 비밀이라서 아무한테도 알려주지 않아. 보육원에서 널 키워주신 유모님도 모르셔.”
임수향이 말했다.
“이젠 아는 사람이 나와 우리 남편, 협회장님, 김성인 대표님뿐이군. 나머진 다 돌아가셨으니…….”
신차민이 끼어들었다.
“그래서 아빠는 어떻게 됐어? 지금 무사하긴 한 거야?”
“네 아빠 쉽게 안 죽는다. 그 인간하고 30년 가까이 살면서 죽을 듯 말 듯 하는 거 많이 봤는데, 안 가더라고.”
임수향이 말했다.
“하지만 오래 버틸 순 없을 거야. 상당히 위험해. 한시가 급하니 당장 다시 돌아가서 구해야 해.”
“천계에 남아계신다고 했습니까?”
윤성이 물었다.
“그래요. 관리자님께서 도와주신다면…….”
“제가 가겠습니다.”
에어포스가 말했다. 그녀의 몸에서 흰색 빛의 마력이 스멀스멀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미안하지만 너는 안 된다.”
임수향이 단호하게 막았다.
“네? 어째서죠?”
에어포스가 뜻밖이라는 듯 눈을 크게 떴다.
“널 노리는 이들이 있어. 천계에서 너는 중요한 표적이야.”
임수향이 말했다.
“협회는 네가 천계의 관리자의 힘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찾던 마력 스톤은 그 힘을 각성시킬 수 있는 성물이고.”
“천계의 관리자…….”
에어포스가 중얼거렸다.
“그리고 지금 천계엔 콜로라가 득실대. 그들은 눈에 핏대를 세우고 널 죽이려고 하고 있어. 이유는 모르겠지만.”
“하지만 그렇다면 인계로 쳐들어와서 절 죽일 수도 있잖아요? 여기에 있다고 해서 안전한 건 아니에요.”
“여기엔 인계의 관리자가 계시지.”
임수향이 마스크맨을 가리켰다.
“콜로라는 아직 관리자님의 눈치를 보고 있어. 인계를 평화롭게 접수하고 싶어하거든. 그런데 관리자님이 너와 친분이 있으니까 함부로 널 공격하지 못하는 거야.”
“그럼 제가 갈게요!”
신차민이 소리쳤다.
“넌 절대 안 돼!”
임수향이 질색했다.
“대체 무슨 싸움에 끼려고 그러니? 에어포스가 가도 위험한 곳이라고.”
“헌터에게 중요한 것은 위험에 처한 사람을 위해 마수 앞에 뛰어들 수 있는 용기 아니겠습니까?”
신차민이 웃으면서 말했다.
“네가 네 아버지 앞에 뛰어들 필요는 없다. 그 포지션은 나야. 넌 얌전히 집에 있어.”
임수향이 딱 잘랐다. 그리고는 윤성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관리자님께서 도와주신다면 훨씬 일이 수월할 것 같은데요.”
윤성은 마스크 안에서 눈살을 찌푸렸다. 정말 난처하게 되었다.
인계에 며칠은 더 있어야 하는데. 저쪽도 한시가 시급해 보인다.
‘이를 어쩐다.’
뚜르르르-
갑자기 차희의 휴대폰이 울렸다.
“대표 사무실에서 외부 전화로 연결된 거예요.”
차희가 윤성에게 설명하며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안녕하세요.
수화기 너머에서 남자 목소리가 울렸다.
-백마 길드 대표 마스크맨과 얘기하고 싶습니다.
“누구시죠?”
-콜로라의 꺼삐딴 길드 대표 옌뚜르라고 전해주시죠.
“대표님. 전화 왔는데.”
“잠깐만.”
윤성이 손을 내저었다. 눈앞에 메시지가 떠올랐다.
<마이어계의 관리자가 통신을 요청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