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2
레벨업 속도는 9.8m/s^2 162화
51. 한 차원을 정복한 남자
“아니, 자, 잠깐만요.”
앤더슨이 황당한 듯 끼어들었다.
“그렇게 담담하게 남의 나라 최상급을 빼가려고 하시다니. 제다이? 설마?”
“대부분의 시간은 자율적으로 쓸 수 있도록 해드리죠. 그리고 UN 본부 건물에 들어갈 백마 지부에서 일하시게 될 겁니다.”
윤성이 제다이에게 말했다.
“좋다. 계약서 줘.”
뜻밖에 제다이가 단번에 수락했다. 앤더슨은 충격받은 표정으로 아무 말도 못 했다.
여태껏 제다이가 길드에 들지 않았던 이유는 자신보다 강한 대표를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본인이 길드를 관리할 성격은 아니었고.
확실히 마스크맨은 최상급 헌터들 중에서도 이례적인 클래스인 데다 인계의 관리자라는 얘기도 지금 돌긴 했지만.
그렇다고 그 오만한 제다이가 이렇게 간단히 마스크맨을 따르겠다니.
“국제 연합 길드를 만들려는 거군요.”
에어포스가 말했다.
“바로 그래요. 앞으로 다가올 싸움들은 국가 수준의 문제가 아니게 될 겁니다. 이번에도 만약 뉴욕이 무너졌다면 한 달 안에 인도와 유럽까지 전부 엘리지아의 손 안에 들어갔을 거고요.”
윤성이 대답했다.
“앞으로 백마 길드는 기존에 존재하던 길드들과는 완전 다른 조직이 될 거예요.”
“어떻게 다른가?”
티엔이 관심을 보였다.
“우리는 기본적으로 소속 헌터들의 일상과 그들이 기존에 소속된 조직이나 그들의 업무를 존중할 겁니다. 평소엔 살아오던 대로 지내도 좋아요. 하지만.”
윤성이 헌터들을 둘러보며 힘 있게 말했다.
“이번 엘리지아 던전 이상으로 강력한, 10,000sY의 마력 반응이 나온다면 전부 제 지휘 아래 움직여야 합니다.”
“가입해서 생기는 의무는 그게 전부인가요?”
일렉트로닉스가 물었다.
“유일하고 중요한 의무입니다. 그렇게 제가 집합 요청을 하면, 그 어떤 국가적 분쟁이나 법적 마찰이나 개인적인 문제들이 있다 해도 모여야 해요.”
“이번에 미 국방부에서 중동 헌터들을 부른 것처럼 말이죠?”
에어포스가 물었다.
“네.”
“저도 할게요.”
일렉트로닉스가 손을 들었다.
“좋습니다.”
“저도 하겠습니다.”
에어포스가 손을 들었다.
“나도 들어간다.”
가만히 듣던 샌드맨이 끼어들었다. 앤더슨은 입을 딱 벌렸다.
‘5분 만에 SS급을 네 명 영입했어?’
“아마 슬렌더맨이랑 테쿰세도 들어갈 거야. 그렇지?”
샌드맨이 테쿰세를 보며 물었다.
“그러고 싶지만 일단은 지위가 미국 연방 헌터국의 수장이라. 이런 결정은 쉽게 내릴 수가 없군.”
테쿰세가 말했다.
“또 남들 눈치나 보는군. 치킨 같은 놈.”
“기자회견 때도 그 얘길 할 생각인가?”
중국의 SS급 티엔이 물었다.
“그렇습니다.”
“난 그 기자회견을 들어보고 결정하겠네.”
티엔은 이미 중국의 최대 길드인 ‘용호’를 이끄는 두 명의 대표 중 하나였다.
다른 한 사람인 SS급 헌터 라오후는 성격이 난폭하고 잔인하기 때문에 사실상 중국 헌터계는 티엔을 중심으로 돌아간다.
그리고 그들의 서열에 대한 엄격함과 티엔에 대한 존경심을 고려해 봤을 때, 티엔이 백마 길드에 들어간다면…….
‘중국 헌터계가 백마 길드 아래 들어가는 것과 다름없다.’
앤더슨은 식은땀이 흐르는 걸 느꼈다.
백마 길드를 국제 연합 길드로 키우고 대대적으로 헌터를 영입하는 건 오래전부터 계획했던 것이다.
만약 콜로라가 윤성을 감시하기 위해 폴리모프한 전사를 백마에 심는다면 그걸 막을 방법은 없다. 인간인지 콜로라성인인지 가려낼 수 없으니까.
어차피 스파이를 차단할 수가 없고, 전쟁에서 정보가 샐 수밖에 없다면 차라리 헌터들을 닥치는 대로 죄다 받아서 조직의 크기를 훨씬 키우고 힘 싸움이라도 유리하게 하는 게 낫다.
그리고 윤성의 충격적인 인재 영입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추가로 국제 헌터법을 좀 개정했으면 싶은데요.”
윤성이 말했다.
“개정이요?”
“인간이 아닌 다른 종족들도 길드에 가입할 수 있도록 했으면 좋겠어요.”
윤성이 바토리와 아리를 쳐다보았다. 머릿속엔 미들로드를 떠올리면서.
그의 시선을 읽은 앤더슨이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마스크맨? 설마 이들을?”
“바토리와 아리를 영입할 겁니다. 그 휘하의 군대들도.”
“나를?”
바토리가 깜짝 놀랐다.
“저는 이미 백마 길드 일원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주인님.”
“바토리는 싫어?”
“어? 아니. 싫은 건 아닌데. 좀 갑작스럽구나.”
“엘리지아는 너무 노답이라 함께할 수 없었지만 앞으로는 가능하면 일곱 차원의 힘을 합치고 싶어.”
“걱정 마십시오. 주인님, 바토리한테 마정석을 받는 순간 저는 메탈로이드계를 절반쯤 먹는 위치가 됩니다. 최강의 로봇들을 끌고 가서 주인님의 적들을 다 짓밟아버리겠습니다.”
“좋아. 바토리는?”
문득 마왕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바토리가 그대의 적은 자신의 적이라더군.
그러나 바토리는 그런 말을 본인 앞에선 못하는 성격이었다. 속이 간질간질해진 그녀는 대충 둘러댔다.
“내, 내 힘이 필요하면 도와는 주마. 마계의 도움이 없으면 네가 뭘 어쩌겠느냐.”
“고마워.”
앤더슨은 골치 아픈 표정으로 의자에 앉아서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었다.
“갑자기 헌터들의 세계가 반세기 정도 진보해 버린 느낌입니다. 국제 연합을 넘어서 마수들과 연합 길드라니…….”
“개정 되겠죠? 이들이 없었다면 이번 엘리지아 게이트도 못 막았을 거예요.”
“하루아침에 되는 건 아니에요. 국제 협회 총회의를 소집해서 최대한 빨리 처리는 해보겠습니다만.”
“그걸로 충분해요. 기다리겠습니다.”
***
윤성은 헌터들과 인사를 나누고는, 바토리, 아리와 함께 다시 UN 본부 앞으로 돌아왔다.
그곳에는 이미 헌터국 소속의 A급 이하 헌터들, 그리고 건설 인부들이 몰려와 있었다.
그들은 바쁘게 작업에 들어갔다. 건물들의 손상 정도를 재고 복구 계획을 세우고 자재를 나르는 중이다.
“미들로드는 어디 갔지?”
윤성이 고개를 갸웃하는데 갑자기 어디선가 크게 다친 검은색 고양이 한 마리가 윤성의 앞에 나타났다.
고양이는 비틀거리며 윤성을 지나쳐 몇 미터를 절뚝절뚝 걷더니 그를 힐끔 돌아보았다.
마치 따라오라는 듯.
“저놈이 미들로드 같지?”
“네. 따라가 보시죠, 주인님.”
윤성은 아리, 바토리와 함께 그를 뒤따라 좁고 어두운 골목 안으로 들어갔다.
“앗. 좁습니다.”
골목 입구에 아리의 어깨가 끼었다.
“못 들어오겠어?”
윤성이 묻자 아리는 몸을 옆으로 돌렸다.
“물론 가능합니다.”
그는 옆으로 돌아서 게걸음으로 한 발짝씩, 골목 안으로 거대한 강철 몸뚱이를 쑤셔 넣었다.
“정말이지 끔찍하고 품격 떨어지는 자세구나.”
바토리가 빈정거렸다.
“지금 약간 스트레스받으니까 건들지 마십쇼.”
파아악!
고양이의 몸에서 검은 연기가 치솟으면서 미들로드가 나타났다.
그는 여전히 심각한 부상을 입은 상태. 일어나자마자 바닥에 풀썩 주저앉고 말았다.
“고양이로 변신하면 체중이 가벼워져서 조금 움직일 수는 있지만 회복되진 않는다.”
“내가 치료해 줄까?”
윤성이 가까이 다가갔다.
<힐링 발동!>
“으악!”
미들로드가 비명을 지르며 손을 내저었다.
“나 같은 언데드에게 그 마법은 치명적이다. 조심해!”
“그럼 어떡하면 좋지?”
“무언가를 먹어야지.”
미들로드는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때마침 담벽 틈에서 쥐 한 마리가 고개를 쓱 내밀었다.
콰악!
번개처럼 낚아챈 미들로드는 한입에 그걸 몽땅 집어넣고 우적우적 씹었다.
입가에 뚝뚝 떨어지는 피. 입술 사이로 삐져나온 쥐의 꼬리가 마치 머리를 밟힌 뱀처럼 꿈틀거렸다.
“우윽.”
바토리는 토할 것 같은 기분을 느끼며 고개를 돌렸다.
“그걸로 된 거냐?”
윤성이 묻자 미들로드는 고개를 저었다.
“아직 한참 모자란다.”
뭐 도움 될 만한 것 없을까?
인벤토리를 열어본 윤성은 순간이동석과 잡다한 물건들 사이에서 옛날에 획득한 후 잊어버렸던 것을 발견했다.
<알약(트랜스폼 투 구울)>
옛날에 탑에서 씀푸라는 핏빛야수와 함께 브리트마라는 보스를 죽이고 얻었던 물건이다.
브리트마는 마이어계의 간부라고 했고.
“너 혹시 이거 먹으면 회복할 수 있냐?”
윤성이 알약을 내밀었다. 그걸 유심히 살펴본 미들로드는 고개를 저었다.
“이건 아직 살아 있는 녀석들이 마이어의 힘을 얻고 싶을 때 먹는 약일 뿐이다. 이미 언데드인 내겐 소용없어.”
“그래?”
“그런데 이걸 어떻게 얻은 거지?”
“음. 얘기하려면 복잡한데. 혹시 브리트마라고 알아?”
“브리트마!”
갑자기 미들로드가 주먹을 불끈 쥐었다.
“내 군단에 소속되어 있는 놈이었다. 날 배신했고.”
미들로드의 눈에서 검은 연기가 부글부글 피어올랐다.
그가 증오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반드시 몸을 회복하고 마이어계로 돌아갈 거다. 그리고 브리트마의 척추를 뽑아서 옷걸이로 쓰겠다. 내장은 모두 동네 고양이들의 간식으로 주고.”
“어……. 어어.”
“쉽게 소멸시키진 않을 것이다. 내가 느낀 고통과 분노가 모두 풀릴 때까지는 놈도 눈을 감을 수 없다. 가죽을 모두 벗겨내고 근육 위에 빵을 뿌려서 죽음의 까마귀들이 뜯어 먹게 하겠다.”
“마이어계가 원래 그렇게 살벌한 거야? 아니면 네가 잔인한 거야?”
“주인님. 원래 마이어계의 모든 존재들은 잔혹하고 폭력과 고통을 즐깁니다.”
아리가 말했다.
“정말이냐?”
이놈 길드로 영입하는 거, 다시 생각해 봐야 하는 것 아냐? 핏빛야수보다 더 위험해 보이는데.
윤성이 팔짱을 끼고 고민에 잠기자 미들로드가 말했다.
“내게 살아 있는 생물을 몇 마리만 구해줄 수 있나? 그 은혜는 절대 잊지 않겠다.”
“너 혹시 인간도 해치거나 잡아먹냐?”
“왜? 못 할 것 같나?”
미들로드가 자신의 가슴을 툭툭 두드렸다.
“우리는 죽음의 신자다. 우리에게 살아있는 모든 것은 죽지 못한 미성숙한 것들일 뿐이다. 지능이나 문명 같은 건 아무런 의미가 없지. 한낱 먹이일 뿐.”
“안 돼!”
윤성이 소리쳤다.
이 새끼 진짜 위험한 놈이잖아?
“넌 인계에 있으면 안 되겠다. 마이어로 돌아가.”
“뭣?”
“너무 위험해.”
“대체 뭐가 문제냐?”
“뭐가 문제냐니, 진심으로 몰라서 묻는 거야?”
“나는 마이어와 브리트마에게 복수하고 싶을 뿐이다. 인계 관리자. 네 힘이 엄청난 듯하니 날 좀 도와줬으면 좋겠다.”
이건 또 골 때리는 캐릭터일세. 뻔뻔함도 그렇고 살인과 식인을 자랑스럽게 떠드는 것도 그렇고.
문화가 달라도 너무 다르잖아. 이런 놈들의 힘을 정말 콜로라와 싸우는 데 쓸 수 있을까?
분명 회복되기만 한다면 지금의 아리나 바토리만큼 강할 것 같긴 한데.
“근데 만약 네가 마이어를 죽인다면 마이어계에는 관리자가 없어지는 건가?”
윤성이 물었다.
만약 그렇다면 그냥 미들로드를 죽여 버리고 마이어의 협력을 받아내는 편이 더 나을 수도 있다.
“그렇지 않다. 마이어계의 관리 시스템은 다른 차원과 좀 다르다. 우리는 죽음에 가장 근접한 신자가 관리자가 된다. 마이어를 죽인다면 내가 관리자의 힘을 갖게 되지. 내가 마이어가 되는 거다.”
“음.”
마계로 치면 마왕이 죽었을 때 그룬헤잘드가 마왕의 힘을 저절로 물려받는 것과 비슷한 건가.
“때문에 마이어는 나를 계속 감시해왔다. 자신이 죽었을 때 가장 큰 이득을 보는 게 나니까. 그리고 죽음과의 친화도 역시 내 쪽이 마이어와 별로 차이가 나지 않았거든.”
“친화도?”
“그게 높으면 마이어에서 관리자가 될 수 있다. 한마디로 그놈은 나한테 겁을 먹었던 거야. 브리트마도 지금 생각해 보면 감시자로 그놈이 심어둔 거였고.”
윤성은 팔짱을 끼고 고민에 잠겼다.
그는 마이어의 성격이나 생각을 전혀 모른다. 퀸이나 마더는 자꾸 인계를 침공하려 했으니 속 시원히 박살 낼 수 있었지만 그놈은 다르다.
마이어는 옛날 중동의 S급 헌터 ‘알리야’에게 군대를 지원했던 걸로 보인다.
마이어계에서 나온다는 구울을 알리야가 부렸으니까. 그리고 알리야 본인 입으로 마이어계를 여행했다고 했으니.
하지만 그것이 전부다. 그 외에 마이어가 인계에 관여한 바는 전혀 없다.
미들로드에게 마이어가 어떤 놈인지 물어봤자 욕만 나올 테고.
객관적인 평을 하려면 역시 그놈을 직접 만나는 수밖에 없나?
고민에 잠겨있는데 갑자기 메시지창 하나가 튀어 올랐다.
<마이어계의 관리자가 통신을 요청합니다. Y/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