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1
레벨업 속도는 9.8m/s^2 161화
“해냈다.”
윤성이 양손을 꽉 쥐었다. 전율이 부르르 인다.
엘리지아의 퀸을 쓰러뜨렸다.
헌터들의 충격에 빠진 표정.
“크윽.”
구석에서 신음 소리가 들렸다. 제다이다.
켄지와 셩 지에가 그의 상처를 회복시키려고 했지만 쉽지 않았다. 엘리지아 퀸의 마력이 환부를 침식한 상태다.
“안 돼! 전혀 치료되지 않아요.”
셩 지에가 탄식을 뱉었다.
“셩 지에. 내가 얼리비에이션 쓸 테니 디톡싱으로 독을 빼요.”
켄지가 지시했다.
그의 손에서 연녹색 빛이 흘러나오면서 제다이의 환부 주위의 부식이 잦아들었다.
<디톡싱 발동!>
그러나 셩 지에의 스킬은 먹히지 않았다. 독성 제거로는 최고 스킬인 디톡싱에도 퀸의 마력은 꿈쩍도 하지 않은 것이다.
<토탈 리제너레이션 발동!>
정상 세포의 재생을 촉진하는 최상급 스킬이다. 켄지가 디톡싱의 효과를 높이기 위해서 썼지만 역시 먹히지 않았다.
“으으윽.”
제다이가 다시 고통스럽게 신음했다.
“잠깐. 제가 볼게요.”
의료 계열의 두 톱 헌터 사이를 비집고 가까이 다가간 윤성이 제다이의 상처에 손을 가져다 댔다.
<힐링 발동!>
‘힐링’이라고 하면 분명 상급에서도 자주 쓰는 스킬이긴 하지만 그건 마력 소모가 적기 때문이다. 기본적으로는 하급 마법. 큰 부상이나 심한 중독을 치유하기엔 효율이 떨어진다.
그러나 어팝토시스로 퀸의 마지막 핵을 파괴할 때 윤성의 지능은 매섭게 치솟아 약 50만 점에 근접했었다.
빛의 강체의 출력을 높인 그의 능력치 총합은 거의 80만 점. 그 마력의 총량은 이미 스킬 자체의 효율을 무시할 정도로 막대하다.
“독이 빠진다…….”
디톡싱이라는 독성 제거 전문 스킬로도 없애지 못했던 퀸의 마력이 서서히 증발했다.
환부 근처를 물들였던 새까만 반점들이 희미해졌다.
독이 사라짐에 따라 상처는 빠르게 아물었다.
경이로울 정도로 신비한 장면.
“이제 다 끝났어요.”
윤성이 말했다.
“퀸은 죽었습니다. 방금 슬렌더맨 가슴에서 없애 버린 핵이 퀸의 마지막 핵이었죠.”
“UN 본부 앞의 본체도 없앴습니까?”
앤더슨이 물었다.
“네.”
앤더슨의 몸에 전율이 흘렀다.
메탈로이드 통합 던전에서 돌아왔을 때 마스크맨이 뿜어내던 마력이 워낙 막강했기 때문에 어쩌면 퀸을 제압할 수 있을 거라 기대했던 게 사실이다.
하지만 정말로 그 괴물을 혼자서 처치했다니.
“감사합니다.”
앤더슨이 말했다.
“헌터국은, 아니, 세계는 당신에게 엄청난 걸 빚졌어요. 정말 고맙습니다.”
“근데 싸우다가 거기 지하 터널 무너지고 근처 빌딩들도 좀 파손됐는데…….”
“걱정 마세요. 전부 헌터국에서 처리하겠습니다. 당연히 그래야죠.”
“아, 그리고 이것들.”
윤성이 자신의 모자와 마스크, 선글라스를 톡톡 두드렸다.
“전투 중에 제 마스크가 파손돼서 급한 대로 근처 건물에서 가져온 건데.”
“협찬받은 거라 생각하시죠. 제가 처리하겠습니다.”
“메탈로이드는 어떻게 됐죠?”
일렉트로닉스가 물었다.
“일단 그 던전에서 나온 애들은 봐서 아시겠지만 인간에게 적대적이지 않습니다. 우리 편이니 걱정 마세요.”
“어떻게 메탈로이드가 우리 편이 된 건가요?”
“좀 사정이 복잡한데, 제가 아는 녀석이 그놈들 대장 같은 게 되어서…….”
윤성의 말이 뚝 멈추었다.
그의 감각 능력에 복도 밖에서 이는 미세한 소란이 감지되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익숙한 둘의 발소리와 목소리였다.
-내가 엘리지아계를 전멸시키는 동안 로봇 한 대 처치한 게 전부란 말이냐? 네 실력이 하등한 줄은 알았다만 이 정도였을 줄이야.
-그 로봇이 그룬헤잘드 뺨칠, 아니, 턱주가리도 돌려놓을 정도로 강한 놈이었다니까요.
-그게 말이 되느냐. 그룬헤잘드는 마계의 패왕이었다.
-그놈은 마더의 분신이었죠. 4할의 마력을 가진. 이젠 제가 그 힘을 가졌고요.
-그래. 네 하찮은 마력이 약간이나마 상승한 것 같긴 하다. 여전히 하등하지만 말이다.
-하등하다고요? 당신이 아무리 실력이 떨어져도 기감 하나만큼은 괜찮은 줄 알았는데 그 능력조차 잃어버린 건가요? 이젠 정말 무쓸모가 됐네요. 그냥 마왕한테 영지 반납하고 은퇴하시길.
-뭐라고?
-아니면 글로디안인가 뭔가 그룬헤잘드 아들내미한테 줘도 되고요. 마계 사람 누구한테 줘도 당신보단 낫겠네요.
-내가 막 전투를 치르고 온 참이라 아직 몸의 열기가 뜨겁다. 가능하면 감당 못 할 도발은 하지 말아라.
-이마에 열이 난다는 뜻이죠? 하긴 어디 아픈 게 아닌 이상 그런 정신 나간 소리 쉽게 못 하죠. 쾌유를 빕니다.
“그만 떠들고 냉큼 들어와.”
고개를 내밀며 윤성이 말했다.
안으로 성큼성큼 들어서는, 소름 끼칠 정도로 막강한 마력의 로봇 한 대와 마족.
헌터들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제 친구들입니다. 샌드맨은 알아보시려나?”
윤성이 말했다.
“뭐, 아리 쪽은 몸체가 많이 바뀌었고. 바토리 쪽은 일산에선 변장하고 있었지만.”
“메탈로이드와 마족인가?”
티엔이 물었다.
“그래요. 그리고 이번 뉴욕 전투에서 절 도와주었죠.”
윤성이 말했다.
그는 두 사람 곁으로 바짝 다가가 나지막이 속삭였다.
“미들로드는 어쩌고 둘 다 여기 왔어?”
“어차피 그놈 지금 움직이지도 못한다. 걱정 마라.”
바토리가 목소리를 낮춰 답했다.
“그래서 여긴 왜 온 거야?”
“퀸의 마지막 파편이 있댔으니 주인님 전투를 도우러 왔죠.”
“나는 그 때문에 온 게 아니다.”
바토리가 말했다.
“그럼?”
“엘리지아계를 전멸시키면서 굉장한 마정석 수입을 올렸다. 마계가 그냥 써도 좋지만. 솔직히 이 싸움은 인계와 협력 전선을 펼쳤던 것이니 그 몫을 인계와 나누는 게 명예롭다고 생각한다.”
“나한테 상급 마정석 잔뜩 빌려줬잖아. 그거 값이라고 생각해.”
“그걸 고려해도 많이 남으니 하는 얘기다.”
“정말입니까?”
아리가 끼어들었다.
“주인님. 이건 반드시 받아야 합니다.”
“뭐, 받으면 좋긴 좋은데.”
“주인님이 지자기 폭풍으로 전멸시킨 놈들 있잖습니까. 마정석만 교체하면 부활시켜서 제가 통제할 수 있습니다. 레지스탕스까지 1,000기 이상의 S급 로봇 군단을 이끌 수 있다고요.”
“정말이냐?”
“잠깐, 잠깐만요.”
앤더슨이 대화에 들어왔다.
“도대체 대화를 따라갈 수가 없군요. 대체 무슨 얘깁니까? 메탈로이드 1,000기요?”
“세계 정복이라도 하려는 겁니까?”
일렉트로닉스가 침을 꿀꺽 삼키며 물었다.
“하하하.”
아리가 눈을 노랗게 빛내며 소리 내어 웃었다.
“주인님은 인계의 주인이고 관리자인데 본인 소유의 세계를 상대로 정복 전쟁을 펼친다고요?”
“관리자요?”
“본인 소유?”
헌터들 사이에 혼란이 번졌다.
“그만해. 아리. 그런 거 아니니까.”
윤성이 중재했다.
때마침 복도에서 헌터 세 명이 방 안으로 들어왔다. 테쿰세와 제임스, 스티븐이었다.
“들어오는 길에 얼핏 듣기로 관리자가 어쩌고 하던데.”
테쿰세가 말했다.
“그 관리자라는 게 내가 아는 그 관리자인가요?”
“아시는 게 무엇이죠?”
에어포스가 물었다.
“차원을 지배하는 종족의 대표를 관리자라고 부르죠.”
“테쿰세. 또 그 수호자 전설인가 뭔가를 떠들려고 하는 겁니까?”
메이가 눈살을 찌푸렸다.
“전설이 아니다. 수호자, 관리자. 모두 실제로 존재하는 것들이다. 이번에 엘리지아의 퀸도 카메라에다 대고 그 얘길 했잖아.”
“맞습니다. 그들은 실제로 존재합니다. 한국의 S급 헌터 고제하 협회장님도 수호자를 만나셨죠.”
에어포스가 말했다.
“테쿰세도 그를 보셨나요?”
“물론. 관리자에 대해 여러 번 얘기하셨습니다. 머지않아 인계에 관리자가 나타날지도 모르는데, 그를 발견하면 정체를 숨겨주고 지켜주라고 하셨죠.”
“정체를 왜 숨겨요?”
메이가 물었다.
“그건 기밀 사항이다. 헌터국에도 알리지 않은 거야. 나와 몇몇, 각국 헌터 협회의 수장들만 아는 정보가 있거든.”
그것은 바로 폴리모프를 배울 수 있다면 콜로라와의 전쟁에서 키플레이어가 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다른 모든 관리자들은 이미 콜로라 쪽에 신원이 알려져 있으니까.
헌터국에도 비밀로 한 것은 테쿰세 역시 헌터국의 간부들을 믿지 못한다는 뜻이었다.
그러나 그런 사정을 모르는 헌터들은 눈살을 찌푸렸다. 이게 뭔 개소리야 하는 표정들.
어쩐지 폴리모프를 한 번 보여주고 싶은 생각이 들었지만 윤성은 꾹 참았다.
“아무래도 그 힘을 볼 때, 마스크맨이 인계의 관리자인 것 같군.”
테쿰세가 윤성을 보며 말했다.
헌터들의 시선이 윤성에게 집중되었다.
“음.”
윤성이 머리를 긁적였다.
“맞을 겁니다. 사실 저 자신도 아직 얼떨떨합니다만.”
“맙소사.”
“오우, 싯…….”
“콜로라에 대해서는 조만간 기자회견을 열어서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윤성이 말했다.
“그리고 앤더슨.”
“네, 넷?”
“바토리한테 마정석을 받으면 그중 일부를 드릴 테니 UN 본부 재건설하고 도로랑 근처 건물들 복구하는 데 써요.”
“저, 정말입니까?”
“제가 가져온 모자랑 선글라스값도 그걸로 내주시고.”
“……고맙습니다.”
대화 중에 바토리가 끼어들었다.
“마정석은 내 휘하의 병사들이 오늘 중으로 모두 수집해 둘 것이다. 네가 다음에 마계에 들린다면 네 몫을 주마.”
“고마워.”
윤성은 아리에게 고개를 돌렸다.
“아리. 레지스탕스들은 어쩌고 있지?”
“일단 에이비의 도시로 돌아가라고 했습니다. 그곳 시설들을 재가동해서 요새화할 생각입니다. 바토리한테 마정석을 받으면 주인님이 죽인 시체들을 부활시켜서 병력도 증강하고요.”
“그걸 하는데 다니엘이 필요하냐? 그러고 보니 다니엘은 어딨어?”
“제가 인계로 나올 때 함께 나왔는데, 집에 간다고 했습니다. 주인님하고 같이 며칠 일하면서 수명이 절반은 준 것 같다고. 안정이 필요하대요. 그리고 메탈로이드를 부활시키는 건 그냥 저희끼리도 할 순 있지만 다니엘이 도와주면 훨씬 쉽죠.”
“좋아. 내가 영입해 볼게.”
“영입이요?”
“백마 길드로. 앞으로도 도움 많이 받을 것 같으니까. 그 사람이 박사 때 쓴 논문이 순간이동석의 역학 어쩌고랬는데. 관심이 좀 생겼거든.”
“알겠습니다.”
“다들 들었죠?”
윤성이 헌터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이제 긴장들 풀고 좀 쉬어요. 나중에 콜로라 관련해서 제가 발표하면 그때는 좀 귀 기울여 주시고.”
워낙 빠르게 전개된 딴 세상 이야기에 헌터들 모두가 어안이 벙벙했다.
테쿰세나 에어포스처럼 어느 정도 알고 있었거나 눈치챘던 이들을 제외하고는.
“마스크맨.”
잠깐의 침묵 끝. 제다이가 벽에 기대어 앉은 채로 나지막이 그를 불렀다.
“……고맙다. 뉴욕을 지켜줘서.”
“아까 얘기했듯, 저는 여기 관리자니까 당연한 겁니다.”
앤더슨이 끼어들었다. 그는 윤성의 전투복을 가리키며 말했다.
“근데 마스크뿐만 아니라 전투복도 다 찢어졌군요.”
마치 빈티지 청바지처럼 시원스럽게 쫙쫙 찢어진 전투복.
윤성이 헤진 끝을 매만졌다.
“샌프란시스코를 드리겠습니다. 대여가 아니라 그냥 기증하죠. 당신은 뉴욕을 구했어요. 미국의 SS급 헌터도 두 명이나 살려줬고요.”
앤더슨이 의식을 못 차린 슬렌더맨의 어깨를 짚으며 말했다.
“당신은 그걸 받을 자격이 있습니다.”
제다이는 고개를 숙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윤성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됐어요.”
“네가 써도 좋다. 전엔 심한 말을 해서 미안하군. 사과하지.”
제다이가 말했다.
윤성은 잠깐 고민에 잠겼다.
그 전투복이 아무리 뛰어나도 80만 점 마력의 빛펀치 같은 것을 견뎌낼 수는 없을 듯했다.
아직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마이어계나 용계를 간다면 퀸 이상의 강적들과 전투가 벌어질지도 모른다.
또는 콜로라 성인들과 본격적인 전쟁이 일어난다면?
그 보물은 순식간에 걸레 조각이 되어 버려질 것이다.
어차피 소모품처럼 쓰게 될 거라면 그냥 단가 낮은 보급 전투복이나 입는 게 더 낫지 않을까? 에어포스도 그렇게 행동하고 있고.
‘아니면 그냥 못 이기는 척 받아다가 차희 줄까?’
잠깐 고민하던 윤성은 붉은빛 감도는 드래곤 가죽 전투복을 입은 차희를 떠올리고는 풋 웃었다.
너무 안 어울리네.
신차민이나 홍창민에게 입히는 건 괜찮은 선택일 수도 있지만, 그보다 더 좋은 방법도 있다.
“좋습니다. 샌프란시스코를 받죠. 그리고 제가 부탁하고 싶은 게 있는데요.”
“그게 뭐죠?”
“백마 길드를 미국에 진출시켜 주십시오. UN 본부를 재건하면 그 안에 백마 길드 지부를 설립해 주세요.”
윤성이 말했다.
앤더슨은 고개를 끄덕였다. 강력한 길드는 존재 자체가 국력이기도 하다. 이번처럼 대형 게이트가 또 나올 가능성을 생각해 보면 금방 답이 나온다.
마스크맨의 길드가 맨해튼에 온다면 그의 사업으로 미국의 길드들이 얼마를 손해 보든, 국가 차원에선 무조건 이득이다.
하지만 다음에 이어지는 윤성의 말은 충격적이었다.
“그리고 제다이. 소속 길드 없죠? 샌프란시스코 줄 테니 백마로 오는 건 어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