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4
레벨업 속도는 9.8m/s^2 144화
윤성과 에어포스는 헌터용 리무진을 탔다.
목적지는 뉴욕시, 맨해튼 섬 5번가와 34블록의 모퉁이에 있는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
이동하는 길에 윤성은 어마어마한 마력을 느끼고 소름이 쫙 돋았다.
“대체 뭡니까?”
그가 리무진 창문을 내리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하늘이 붉은색이다.
“엘리지아 차원 게이트가 열리려는 겁니다.”
테쿰세가 설명했다.
“샌드맨이 얘기해 줬죠. 엘리지아 퀸이 뉴욕에 엘리지아 차원 게이트를 열려고 한다고. 우린 저게 바로 그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붉은 하늘.
게이트가 생성되려고 하면 마력 파장이 대기 중에 산란하는 가시광선 파장에 간섭하여 붉은빛이 나긴 한다.
하지만 원래는 눈알 빠질 정도로 뚫어지게 쳐다보면 간신히 구별할 수 있을 정도다.
붉은색 파스텔을 살짝 훑은 것처럼 매우 연하게 불그스름한 거다.
당연히 노을이 지는 것처럼 하늘이 붉어지는 것은 처음 보는 기현상이다.
‘도대체 어떤 게이트가 출몰할지 짐작도 안 되는군.’
윤성의 주먹이 저절로 꼭 쥐어졌다.
***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의 단체 회의실에는 약 20여 명의 헌터가 모여 있었다.
그 면면들은 그야말로 어마어마하다.
중국에서 온 최상급 헌터들, 쥔 차이, 러 씬, 셩 지에, 티엔 메이.
러시아에서 온 세르게이와 나탈랴.
독일의 프리드리히 야스퍼스, 한나 아렌트. 막스.
프랑스의 루이 알튀세르, 파스칼, 프랑수아 마르셀.
이탈리아의 안토니오 디 나탈레.
그밖에도 하나같이 자기가 살던 나라에서 최고라고 평을 받던 인물들이다.
마치 세계 헌터 협회의 정규 세미나라도 열어놓은 것 같다. 각 국가의 정점에 있는 헌터들이 모조리 모여 있으니.
물론 이만한 인물들이 한자리에 얌전히 앉아 있는 것은 기적에 가깝다. 샌드맨 같이 제멋대로인 이들도 있으니까.
하지만 안건이 안건인 만큼 분위기가 꽤 무겁다. 지금의 회의는 긴급하게 소집된 것이다.
철컥.
문이 열리며 테쿰세가 들어섰다.
원래는 몇 시간 전에 시작되었어야 할 회의였으나 에어포스가 도착한다는 얘기에 시간을 조정했던 것이다.
회의장에 들어선 윤성은 마스크 겉면으로 따가운 시선이 잔뜩 쏠리는 걸 느꼈다.
모두가 그를 보고 있었다.
질식할 것 같은 위압감이다.
“저들이군. 한국의 에어포스와 마스크맨.”
“저 남자가 올해 가장 주목받는 신인이야.”
“이집트에서 그 난리를 쳤으니.”
“히어로 놀이 한다는 그 관심병자인가?”
헌터들이 저마다의 언어로 수군댔다.
그들의 시선은 에어포스에게도 노골적으로 날아가 꽂혔다.
하지만 에어포스는 담담히 걸어가 자신의 자리에 앉았다. 윤성에게 그 모습은 감탄스러웠다.
‘에어포스는 이런 자리가 익숙한가? 어떻게 저렇게 태연한 거지?’
맞은편에서 안토니오가 에어포스에게 윙크를 했지만 그녀는 무시했다.
“마스크맨의 자리는 이쪽입니다.”
테쿰세가 그를 자리로 안내했다. 앤더슨과 메이까지 모두 자리에 앉은 다음, 테쿰세는 회의 테이블의 의장석으로 이동했다.
“다들 바쁘신 와중에 짬을 내어 회의에 참여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잠깐만.”
시작하기도 전에 제다이가 끊어버렸다.
그가 불쾌한 표정으로 마스크맨을 쳐다보고 있었다.
“이자가 입고 있는 것. 샌프란시스코 아닌가?”
“맞습니다.”
테쿰세가 대답했다.
“퍽! 이 국보를 신원도 알 수 없는 외국인에게 줘버린 거냐? 어떤 멍청이가 기획한 거야?”
“제가 했습니다.”
앤더슨이 손을 들었다.
“마스크맨에게 대여해 드린 상태입니다. 돌아가실 때 반납하실 겁니다.”
“그건 모르는 거지! 이게 어떤 물건인데 외부인에게 함부로 내줘?”
“네놈도 썼었는데 뭐 어떠냐?”
샌드맨이 옆에서 빈정거렸다.
“아무리 우리 집 똥개가 예뻐도 가시 목걸이 같은 건 경찰견한테 줘야 하지 않겠냐?”
“뭐라고?”
“난 제다이 네놈보단 마스크맨이 저걸 쓰는 게 훨씬 어울리는 것 같은데.”
“아. 네가 있을 곳으로 빌딩 회의실보다 무덤 속이 어울리는 것처럼?”
“하하하, 그 하찮은 실력으로 날 위협하니 웃음밖에 안 나오는군.”
“그만!”
테쿰세가 두 사람을 멈추었다.
“대체 둘이 내가 오기 전까지는 어떻게 안 싸우고 기다리고 있었던 거야?”
제다이가 인상을 찌푸렸다.
“샌드맨이 방금 들어왔거든. 네가 오기 직전에 말이야. 뭐, 샌드맨이 샌드맨한 거지. 원래 지각 잘 하잖아.”
말을 마치고 그는 다시 위협적인 표정으로 윤성을 쏘아보았다.
“아무튼 난 이거 인정 못 해. 전투복이 필요하다면 다른 걸 내주라고. 저 X같은 마스크도 좀 벗으라고 하고. 테러리스트냐? 대체 저딴 걸 왜 쓰고 있는 거야?”
“만약 마스크맨이 벗으면 그걸 네가 썼으면 좋겠다. 제다이. 엘리지아가 토해놓은 것처럼 생긴 네 면상 볼 때마다 꿈에 나올까 겁나거든.”
샌드맨이 다시 빈정댔다.
그들의 말싸움을 보면서 중국의 SS급 헌터 티엔 메이가 빙그레 웃었다.
그는 턱수염을 쓰다듬으며 옆자리에 앉은 셩 지에에게 속삭였다.
“참으로 옹졸한 소인배들이구나. 그렇지 않으냐?”
“정말 그렇군요.”
셩 지에가 피식 웃었다.
“제다이, 샌드맨. 그만하시죠.”
에어포스가 말했다.
그녀의 몸에서 희미한 빛이 새어 나왔다.
“우린 뉴욕의 안전을 위해 마수와 싸우러 먼 길을 왔습니다. 의미 없는 말싸움으로 시간 낭비하지 맙시다.”
그녀는 제다이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제다이. 마스크맨은 샌프란시스코를 정당하게 빌렸습니다. 이 이상의 모욕은 참아줄 수 없습니다.”
“쳇.”
제다이는 짜증 난다는 듯 주먹으로 책상을 가볍게 쿵 쳤다.
“알았다. 회의를 해야 하니 샌프란시스코 얘긴 나중에 다시 해보자고. 시작해. 테쿰세.”
테쿰세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놈들 언제 철들지.
“다들 아시다시피 뉴욕에는 지금 총 열한 개의 S급 던전이 있습니다. 모두 메탈로이드로 추측됩니다.”
테쿰세가 얘길 시작했다.
“새로운 던전들이 계속 생기고 있습니다. 기존의 것들을 정리해도 말이죠. 이런 페이스라면 던전들을 완전 클리어하기 전에.”
그가 침을 꿀꺽 삼켰다.
“엘리지아 차원 게이트가 열립니다.”
회의 테이블에 잠깐 침묵이 돌았다. 그렇게 오만한 최상급 헌터들도 이 얘기 앞에서는 자신감을 보일 수가 없다.
이번 엘리지아 차원 게이트의 마력 파장이 어느 정도인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10,000sY.
파장대 미터기가 측정 가능한 최대 범위에 가뿐히 도달했다.
그룬헤잘드가 나왔던 던전의 게이트가 생성 직전에 5,720sY를 기록했었다.
그 두 배에 이르는 값.
게다가 미터기 한계값이므로 실제 마력 파장의 세기는 더 클 수도 있다.
‘과연 저 안에서 뭐가 나오려는 걸까?’
모두가 궁금해했지만 입 밖으로 꺼내지 못했다.
누구에게든 그걸 물어보는 순간 재앙이 현실이 되어버릴 것 같은 기분이다.
아직 게이트가 생성되지 않았기 때문에 이쪽에서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다만 이미 만들어진 메탈로이드 게이트들을 빠르게 정리할 뿐이다. 엘리지아 차원 게이트가 열리면 그것에만 모든 전력을 부을 수 있도록.
그게 지금까지 뉴욕 던전 범람 사태에 대처하는 헌터국의 행동 강령이었다.
‘하지만 이젠 그게 어렵게 되었다.’
파괴한 던전의 수만큼 새로운 던전이 자꾸 생기고 있다.
이런 기세면 엘리지아가 나오기 전에 메탈로이드를 완전히 막아내는 것은 불가하다.
“처음 뉴욕에 열린 메탈로이드 던전은 열다섯 개. 그중 둘이 범람했고 우린 방어에 성공했습니다. 하지만 남은 열세 개는 아무리 파괴해도 던전이 새로 생깁니다.”
“지금은 열한 개라면서요?”
독일 SS급 헌터 프리드리히가 물었다.
“무려 여섯 개나 클리어하고 열한 개가 되었죠. 가만 내버려 두면 두 개가 더 생길 겁니다.”
“진짜 최악이군.”
“저희의 분석에 따르면 저 던전들은 서로 파장대가 연결되어 있어서 한 번에 전부 클리어해 버리지 않는 이상 계속 복구되는 모양입니다.”
“그럼 어떡하죠?”
메이가 물었다.
“지금까지 우리는 S급 이상 헌터 다섯 명을 한 팀으로 하여 던전 하나에 투입하여 클리어하는 방식을 취했습니다.”
테쿰세가 말했다.
“이 방식을 바꿔야 합니다. 방안은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 A급 헌터들까지 투입시킨다. 둘째, S급 이상 헌터들이 하루에 던전을 두 개나 세 개씩 돈다.”
“둘 다 미친 소리군.”
샌드맨이 정색했다.
“A급 헌터들이 죽든 말든 그거야 내 알 바 아니지만 그놈들을 아무리 던져 넣어봤자 계란으로 바위 치는 꼴이다. 아무 효과도 없어.”
“그럼 S급 이상이 하루에 두 번 이상 도는 걸로?”
“S급 던전 하나를 레이드하는 데 열한 시간이 꼬박 걸린다. 그리고 모두 녹초가 되어버려.”
“하지만 그 외에 다른 방법은 없습니다.”
“그렇게 하시죠.”
에어포스가 말했다.
“저는 하루에 두 번 돌 수 있습니다. 다들 괜찮죠?”
그녀는 동의를 구하듯 헌터들을 돌아보았지만 다들 시선을 피할 뿐이었다.
“정신력이나 의지의 문제 같은 게 아니에요.”
셩 지에가 말했다.
“S급 던전을 소탕하면서 소모한 마력을 충분히 회복시키지 않고 다른 던전에 다시 들어가는 건 위험할 수 있다고요.”
“만약 그렇게 무리하게 레이드를 하다가 여기 있는 전력 중 일부를 잃게 된다면 그야말로 큰일입니다.”
쥔 차이가 말했다.
“엘리지아 게이트가 열렸을 때 누가 그걸 막을 겁니까?”
“어이. 마스크맨.”
샌드맨이 윤성을 불렀다.
“전에 한국에서 엘리지아 던전을 클리어할 때 말이야. 당신 아는 사람이라던 S급 헌터는 어느 국적인가? 처음 보는 얼굴이었는데 아는 인맥 있으면 좀 써주시지.”
“내가 아는 인맥은 중동뿐이야.”
윤성이 대답했다.
“그리고 그들이 미국 땅까지 와서 뉴욕을 구하려고 목숨 걸고 싸울 것 같진 않군.”
“파리츠는 옵니다.”
앤더슨이 말했다.
“사우디와 미국은 우호적인 관계거든요. 내일 비행기를 탄다고 했습니다.”
“그건 다행이군요.”
“후. 일단 다들 더 좋은 방법이 있을지 한 번 생각들 해보세요.”
테쿰세가 말했다.
“잠깐 쉬죠.”
헌터들이 우르르 자리에서 일어났다.
더 좋은 방법이 있을지 생각해 보라고 했지만 솔직히 이런 상황에 답이 있을 리가 없다.
일부 헌터들은 이미 뉴욕을 포기하는 상황을 고려하고 있었다.
세미나실을 나와서 빌딩의 휴게실.
전날부터 이어진 그룬헤잘드와의 전투와 장거리 비행으로 피로가 잔뜩 쌓여 있었다. 윤성은 소파에 누워서 휴식을 취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이동하는 길에 누군가 그의 어깨를 잡아당겼다.
제다이였다.
“이봐.”
윤성이 돌아보았다. 제다이는 몹시 아니꼽다는 표정이다.
“내 고향은 샌프란시스코다.”
“그래?”
“내 부모님이 그 던전 범람 때 돌아가셨어.”
“안됐군.”
“난 샌프란시스코 전투복을 오랫동안 입었지만 문제가 생겨서 헌터국에 기증했었다.”
“이 옷에 어떤 애착이 있는진 알겠어. 레이드 끝나고 돌려줄 테니 걱정하지 마.”
“혹시 만약, 네가 레이드 중에 잃어버렸다거나 하는 식으로 둘러대고 그걸 가져가려 한다면 절대 용서하지 않겠어.”
뭐야 이건?
기분 나쁜데?
“도둑 취급하는 건가?”
“동양인들은 다 좀도둑 기질이 있지. 너도 알다시피.”
마스크 안에서 윤성의 표정이 구겨졌다.
“절대 그럴 일 없을 테니까 걱정하지 마.”
윤성이 차갑게 쏘아붙였다. 여기까지 와서 만난 SS급 헌터란 놈이 인종차별이라니.
“내가 지금 참아주는 건 네 쓰레기 같은 레이시즘 때문에 뉴욕이 멸망하는 걸 보고 싶지 않아서야. 하지만 한 번만 더 그따위 말을 하면 여기 있는 아시아 팀들에게 알려주고 에어포스와 함께 귀국해 버리겠어.”
윤성이 주먹을 꽉 쥐었다. 제다이는 못마땅한 표정이다.
더 퍼부어주고 싶지만 국제 협력 레이드를 앞두고 싸움질을 벌이고 싶진 않다.
윤성은 치미는 분노를 삭이면서 휴게실로 이동했다.
휴게실에는 고객들을 위한 잡지가 비치되어 있었다.
원래 잡지를 보는 취미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기분 전환할 거리가 필요했다.
그리고 이런 고급 빌딩에서 비즈니스를 하는 사업가들은 어떤 잡지를 보는지도 궁금했다.
패션과 정치, 시사.
잡지 페이지들을 쭉쭉 넘기던 윤성은 한 홍보글에서 손이 우뚝 멈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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