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0
레벨업 속도는 9.8m/s^2 140화
“윤성.”
바토리가 말했다.
“나는 이 녀석에게 콜로라의 문자를 알려준 후 바로 마계로 갈 것이다. 아르동의 영지가 이젠 내 것이 되었다. 그 땅을 다시 안정시켜야 한다.”
바토리는 무덤덤하게 말했지만 사실 쉽지 않은 일일 거다. 오랫동안 그룬헤잘드를 섬겨온 영지니까.
아무리 마계가 승자독식의 룰이라고 해도 글로디안 같은 기사들이 하루아침에 바토리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것은 상상하기가 어려웠다.
‘한동안 바토리를 만나거나 그녀의 도움을 받긴 어렵겠군.’
하지만 바토리는 뜻밖의 말을 했다.
“나는 이번에도 네 빚을 크게 졌다. 네 덕분에 살아남았을 뿐만 아니라 그룬헤잘드를 쳐내고 바토리의 옛 영광을 회복했지.”
“뭐, 그렇게 되나?”
“이걸 주마.”
바토리는 갑자기 허리춤에서 검은 천 하나를 꺼내 내밀었다.
“이게 뭐야?”
“천 까마귀라는 것이다. 직접 보여주지.”
그녀는 검은 천을 집어 들고는 가볍게 마력을 불어넣었다.
가아악!
그러자 갑자기 천이 까마귀의 모양으로 변해 버렸다. 눈까지 깜빡거리면서.
윤성의 당혹감이 채 가시기도 전에,
딱!
바토리가 손가락을 가볍게 튕겼다. 그러자 파르륵, 하고 책장이 넘어가는 듯한 소리와 함께 까마귀가 사라져 버렸다.
“어디로 갔지?”
“이제 곧, 네 머리 위에 나타날 거다.”
말 끝나기 무섭게 천 하나가 윤성의 머리 위에 떨어져 내렸다.
“정말 신기하군.”
천을 집어 들면서 윤성이 말했다.
“원래 알고 있는 마법이었지만 내 마력이 부족해서 쓰지 못했었다. 하지만 이젠 가능하다. 내가 방금 했던 걸 흉내 낼 수 있겠느냐?”
윤성은 똑같이 행동해서 한 번에 성공시켰다. 이번엔 천이 바토리의 머리 위로 떨어졌다.
“훌륭하다.”
바토리가 천을 다시 내밀면서 말했다.
“까마귀를 만든 다음, 그 발목에 내게 전할 편지를 써서 붙여라. 이 까마귀는 차원을 이동할 수 있으니 네가 필요할 때 날 부르면 곧바로 도우러 가마.”
“고맙다.”
“필요하면 군대를 동원해서 갈 수도 있으니, 언제든 말만 해라.”
바토리는 순간이동석을 품속에서 꺼내 들었다.
“난 이만 가보마.”
“수고했어.”
팍!
바토리의 몸이 바람 소리와 함께 사라졌다.
윤성은 인벤토리에 검은 천을 집어넣었다. 굉장히 쓸모가 있어 보인다. 그룬헤잘드의 마력을 얻은 바토리를 쓸 수 있다니.
게다가 그 바토리가 군대를 끌고 온다면?
어쩌면 일산 정도의 던전 범람을 초토화시킬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타이밍이 좀 아쉽군. 뉴욕이 난리가 난 지금이 가장 도움이 절실한 때인데.’
바토리가 떠난 자리를 가만히 쳐다보고 있는 윤성.
그 어깨를 누가 톡톡 두드렸다.
아리였다.
“주인님, 제가 다음에 반드시 그 천 쪼가리를 뛰어넘는 차원 간 통신 체계를 구축해 오겠습니다.”
“아냐……. 안 그래도 돼.”
아리의 눈이 이글거렸다.
“근데 너 오늘따라…… 바토리가 파워 업해서 분하냐?”
“언제든 제가 바토리를 억누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여차하면 그 여자를 제압하고 주인님의 안전을 확보할 수 있죠.”
“바토리는 위험한 애 아냐.”
윤성은 아리의 강철 가슴을 톡톡 두드렸다.
그러고 보니 그룬헤잘드를 잡았는데, 과연 얼마나 성장했을까?
“자가 진단.”
윤성의 눈앞에 충격적인 상태창이 펼쳐졌다.
<강윤성>
<칭호 : 없음>
<힘 : 1,095(+9,427.4)
순발력 : 1,095(+9,427.4)
감각 능력 : 1,095(+9,427.4)
지능 : 1,095(+9,427.4)>
<버프 : 랜딩, 66,024초>
<디버프 : 없음>
<분배 가능한 능력치 : 200>
<스킬 : 스킬 봉쇄(사용 가능, 66,024초), 힐링(사용 가능), 폴리모프(사용 가능) 빛의 탄환(사용 가능), 급속냉각(사용 가능), 중금속 폭우(사용 가능), 용조(사용 가능)>
10레벨이 올랐다.
그룬헤잘드 하나를 잡고.
‘X발 소름 돋네. 딱 한 놈 잡고 10레벨 상승이라니. 내가 진짜 그걸 이겼단 말이야?’
새삼 마계의 옛 패왕이란 게 얼마나 강한 존재였는지 실감했다.
‘아니지, 잠깐만.’
이것도 이상하잖아? 버프 점수가 환산된 레벨이 2,100이 넘었는데.
옛날에는 두 자릿수 레벨의 염력으로 건물 하나를 떠받치고도 레벨이 하나씩 올랐는데, 2,100레벨의 전투를 벌이고도 겨우 10밖에 안 올랐다고?
성장 한계 같은 게 있는 걸까?
윤성은 잠깐 고민하다가 고개를 저으며 쓸데없는 생각들을 지웠다.
“마스크맨!”
김성인이 이쪽으로 달려왔다.
“네.”
“에어포스가 왔습니다. 만나보실래요?”
“좋아요.”
윤성은 곧바로 김성인과 함께 에어포스를 만나러 갔다.
그녀는 동해 근처에서부터 제트기에서 뛰어내려 <비행>으로 날아왔다.
마스크맨이 적과 싸우고 있다는 얘길 들었을 때 이미 약간 마음을 놓았지만 그래도 만약을 대비해 최고속으로 날아온 것이다.
“마스크맨!”
작전 통제실 앞. 그녀가 환한 미소로 윤성을 반겼다.
하지만 윤성은 인사도 하기 전에 에어포스의 손목을 잡아당겼다.
“잠깐 따라와요.”
“네?”
“할 얘기가 있습니다.”
윤성은 에어포스를 데리고 통제실 밖으로 빠져나갔다.
헌터들의 눈과 귀가 미치지 않는 조용한 곳.
윤성은 주위 인기척을 확인한 후, 에어포스에게 그가 겪은 정보를 전부 전해주었다.
그룬헤잘드와, 그가 핏빛야수에 대해 얘기했던 것들 모두.
“휴우.”
에어포스가 한숨을 내쉬었다.
“갈수록 태산이군요.”
“정말 그래요. 어쩌면 엘리지아나 메탈로이드 같은 것보다 훨씬 위협적일 수도 있겠어요.”
“윤성 씨는 지금 핏빛야수의 길드에 들어간 상태죠?”
“네.”
에어포스는 잠깐 망설이다가 말했다.
“사실 고제하 협회장님이 당신의 정체를 숨겨두었습니다.”
“네?”
갑자기 또 뭔 소리야?
윤성이 고개를 갸웃했다.
에어포스가 말했다.
“제가 옛날에 황동수와 차태식이 실종되었다고 했었죠? 그건 사실…… 고제하 협회장님이 하신 일입니다.”
윤성이 경악했다.
“협회장님이 두 분을 엘리지아로 만들었다고요?”
“그건 아닐 겁니다. 저도 한때는 그걸 의심했었죠. 협회장님이 엘리지아와 뭔가가 있는 게 아닐까 하고요.”
에어포스가 미간을 찌푸렸다.
“하지만 협회장님은 엘리지아와 싸우다가 아직도 의식 불명입니다. 엘리지아에 붙었다거나 한 건 아니겠죠. 그리고 협회장님은 제게 ‘황동수와 차태식을 수호자에게 맡겼다’라고 하셨었습니다.”
“수호자요?”
“네. 협회장님은 수호자에 대해서 알고 계셨습니다. 의식을 잃으시기 직전, 엘리지아 던전에서 제게 수호자를 만나는 방법을 일러주셨죠.”
“그런 방법이 있다고요?”
“나중에 알려드리죠. 들어보세요. 지금까지의 제 추리는 이렇습니다.”
에어포스가 그간 정리된 생각을 얘기했다.
“당신은 구스타프 던전에서 핏빛야수 하나를 사살했습니다. 마스크맨 신분으로요. 그렇죠? 코르소가 극비 보고를 올린 걸 저와 협회장님이 보았습니다.”
“맞아요.”
“아마 협회장님은 그때부터 당신에 대해 조사하셨을 겁니다. 그리고 그룬헤잘드가 얘기했다는 ‘경계 밖의 존재’에 대해 수호자에게 들으셨겠죠.”
“……?”
“경계 밖의 존재는 폴리모프를 써서 핏빛야수로 변신할 수 있다. 맞습니까?”
“그룬헤잘드 말로는 그래요.”
“보세요. 윤성 씨. 당신은 SS급 헌터 뺨치는 전투력을 가지고 있지만.”
에어포스가 윤성의 가슴을 손가락으로 톡 쳤다.
“공식적인 신분은 D급 헌터 강윤성입니다. 그리고 경계 밖의 존재이고, 핏빛야수로 변신할 수 있죠. 기막히게도 콜로라로 가는 순간이동석까지 가지고 있고요. 이게 무슨 뜻인지 아시겠습니까?”
“네?”
“협회장님은 당신이 콜로라에서 이중 스파이로 활동하길 바라세요.”
“네에에?”
윤성의 얼굴에 경악이 번졌지만 마스크 때문에 보이지 않았다. 윤성은 마스크를 벗어서 자기 얼굴을 보여주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이중 스파이? 잠깐. 그럼. 마스크맨 신분으로 핏빛야수를 때려 패고 강윤성 신분으론 핏빛야수인 척하며 정보를 모으란 거예요?”
“바로 그겁니다.”
에어포스가 계속 말했다.
“물론 순간이동석까지 협회장님이 아셨을 것 같진 않지만. 아무튼 그걸 노리고 회장님은 마스크맨의 정체가 오픈되는 것을 기를 쓰고 막아버리신 것 같습니다.”
“아니, 잠깐만요. 하지만 그 정도로 협회장님이 핏빛야수에 대해 아신다면, 그냥 그 정보를 오픈할 수도 있는 거 아니에요?”
“그렇죠. 왜 그렇게 안 하셨을까요?”
에어포스의 손끝이 파르르 떨렸다.
“윤성 씨. 난…… 이걸 생각하다 보면……. 소름이 돋아서 참을 수가 없어요.”
“네?”
“제게 수호자를 만나는 법을 알려주셨을 때…….”
에어포스의 눈에서 눈물이 툭툭 떨어졌다.
에어포스가 울고 있었다.
“협회장님은……. 아무도 믿지 말라고 하셨어요. 핏빛야수를 조심하라고. 협회는…… 이미 그들의 손아귀에 있다고…….”
그녀가 말했다.
“전 핏빛야수가…… 협회장님의 목젖 아래에 클로를 갖다 대고…… 협박하는 그림이 자꾸 머릿속에 떠올라요.”
“자, 잠깐만요. 이건 말이 안 돼요. 에어포스! 당신이 협회에 있잖아요? 그런데도?”
“제게 기대지 못하실 정도로 핏빛야수들이 강했던 거죠. 오픈하는 순간 진실을 아는 모두를 삽시간에 전멸시켜 버릴 정도로.”
“그 정도로 강한 자가 협회에 있다면 에어포스가 아셨겠죠!”
“그래요. 그리고 기감이 저보다도 뛰어난 백마중 헌터님도 협회를 들락거리셨는데, 이상하죠?”
에어포스가 피식 웃었다.
“협회엔 감시자가 있는 거예요. 언제든 콜로라의 킬러를 부를 수 있는 감시자.”
“이럴 수가…….”
에어포스가 고통스러운 표정이 되었다.
“누가 감시자인지 모르셨던 겁니다. 어쩌면 김성인. 어쩌면 코르소, 어쩌면 카다시안. 어쩌면 이유정. 그분이, 헌터들의 정점에서 협회를 이끌면서. 도대체 어떤 고독에 시달리셨을지.”
소름이 쫙 돋는다.
“그분은 마수 같은 것과 싸워온 게 아니에요. 이미 이 세계를 안에서부터 파먹어버린 침략자들과 싸워오신 겁니다.”
에어포스가 분함을 억누르며 눈물을 삼켰다.
“우리는 힘도 모자라고, 정보력도 모자라요. 아무것도 모르기 때문에 어떤 것도 하실 수가 없었던 거예요. 티끌 같은 희망을 갖고 마스크맨의 정체를 숨겨놓는 것밖엔. 어쩌면 인류는 이미 그들에게 패배하기 직전인 상태일지도 몰라요.”
아.
갑자기 신민수가 했던 말이 떠올라버렸다.
-마스크맨, 엘리지아 세력으로 합류해라. 행성 차원의 위기가 코앞에 도래했다.
-에어포스는 엘리지아 품으로 와야 할 인재다. 그래서 살려뒀지.
-엘리지아는 힘을 키워 그들을 물리칠 거다.
콜로라를 막을 힘을 얻기 위해서?
그리고 비슷한 얘기를 그룬헤잘드도 했다.
그는 윤성이 콜로라성인으로 변신한 것을 보고 눈이 뒤집혀서 달려들었다.
그 냉철한 남자가 증오로 불타는 눈을 하고 백마 길드를 파괴하기 위해 몸소 인계를 침탈했다.
인계의 힘을 흡수하여 콜로라를 막으려고 그걸 하지 않는 마왕에게 결투를 신청해 가면서.
“이, 이럴 수가…….”
윤성의 호흡이 거칠어졌다.
갑자기 모든 퍼즐이 맞추어지면서 극도의 공포가 몰려온다.
심장이 거세게 쿵쿵 뛰었다.
“헉.”
윤성이 숨을 거칠게 들이마셨다.
“아직. 아직 괜찮습니다. 윤성 씨. 숨을 천천히 쉬세요.”
에어포스가 윤성을 토닥이며 진정시켰다.
“제가 협회에 들어간 지 얼마 안 되었을 때 협회장님과 카드 게임을 자주 했습니다.”
그녀가 말했다.
“어린 저와 놀아주시는 거였죠. 하지만 아무리 열심히 수를 짜서 협회장님을 몰아세워도 그분은…….”
에어포스가 피식 웃었다.
“어디서 났는지 조커 카드를 꺼내시더군요. 와일드카드였죠. 불리한 게임을 뒤집는.”
쿵.
심장이 내려앉는 기분.
갑자기 랜딩 능력을 각성한 이후 지금까지의 모든 것이 어떤 거대한 각본 위에서 이루어진 일만 같다.
에어포스가 말했다.
“윤성 씨, 우리는 정말로 많이 불리하지만, 아직 조커 카드가 있어요. 바로 마스크맨입니다.”
정체불명의 SS급 헌터.
핏빛야수로 변신할 수 있는 경계 밖의 남자.
콜로라를 자유롭게 오갈 수 있는 꺼삐딴의 신입 단원.
게임을 뒤집는 일발 역전의 조커.
에어포스는 모르고 한 소리지만 윤성에게는 송곳에 찔린 것처럼 뜨끔했다.
실제로 그는 Joker 등급이었으니까.
윤성이 진정하기까지는 몇 분 시간이 걸렸다.
“후우우.”
윤성이 숨을 푹 내쉬었다.
“좋아요. 해보죠. 이중 스파이.”
“힘든 결정 고맙습니다.”
“하지만 강윤성 신분으론 동생들이 있는데요?”
“옛날, 일산 대범람 당시 흩어졌다가 재합류한 동생들이죠. 윤성 씨는 바로 헌터 학교에 가서 이후 거의 만나지 않았고요.”
“어떻게 그렇게 잘 아세요?”
“좀 조사를 해봤습니다. 미안해요. 아무튼 그 긴 세월 사이에 핏빛야수가 죽은 강윤성을 연기했다고 해도 어색하지 않을 겁니다.”
“……잘될지 모르겠지만. 일단 콜로라 녀석들 눈치 봐서 어떻게든 해보죠. 것보다 뉴욕은 어때요?”
“다행히도 약간 진정되었습니다. S급 던전이 총 두 개 범람했는데 둘 다 정리했죠.”
“남은 던전이 잔뜩 있다고 들었던 것 같은데요.”
“맞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일반형인 듯 보입니다. 헌터들이 들어가서 클리어할 겁니다.”
“그 정도의 전력이 되나요?”
“최상급 헌터들이 힘을 모아서 빠르게 클리어해야죠.”
에어포스가 윤성을 힐끔 쳐다보았다.
도움을 청하고 싶은데 핏빛야수 이중스파이 같은 말도 안 되는 막대한 임무를 맡긴 후라서 눈치를 보는 표정이다.
천하의 에어포스가 다른 사람 눈치를 다 보다니…….
“저도 가죠.”
“고맙습니다. 미국에서는 절대 마스크맨의 은혜를 잊지 않을 겁니다.”
“은혜까지야. 그럼 언제 가시죠?”
“지금 당장요.”
에어포스의 눈에서 광기가 튀었다.
진짜 대단한 사람이야……. 방금 미국에서 제트기 타고 귀국했는데 바로 돌아간다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