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9
레벨업 속도는 9.8m/s^2 139화
에어포스는 아직 도착하지 않았지만 마스크맨을 도우러 가야 한다.
김성인을 대표로 한 정예 헌터들은 본진에 일부를 남겨두고 원정을 나섰다.
대부분은 백마 길드였다. 대표 혼자 싸우도록 둘 수 없다는 의견이 합치되어 있었다.
“다들 항상 목숨을 걸어왔겠지만 이번 싸움은 특히 더 위험합니다.”
김성인이 말했다.
“우리 쪽이 별 준비가 안 되어 있다는 점에서 일산 때보다 더 위험하다고 봐야 해요. 마족 보스의 전투력은 엘리지아 성체 이상이라 봐야 하고.”
“알고 있습니다.”
헌터들이 전의를 다지며 말했다.
“출발하죠.”
김성인이 손을 들었다.
비타민을 잃어버려서 단검과 마법으로 전투법을 바꾼 차예빈과 최수혁. 그리고 코르소, 카다시안, 홍창민, 신차민 등 A급 최상위권 헌터 20여 명.
그러나 그들이 백마 길드 앞에 도착한 순간이었다.
콰아앙!
무언가가 굉장한 기세로 지면에 떨어졌다.
그것은 랜더의 코트로 체중을 보정한 마스크맨이었다.
“대표님!”
“마스크맨!”
깜짝 놀란 헌터들에게 윤성이 소리쳤다.
“헉, 헉. 다들 비켜!”
헌터들을 옆으로 몰아낸 순간, 윤성의 랜딩과 6초 정도의 차이를 두고 그것이 추락했다.
콰아아앙!
사람 형체의 그것은 지면과 닿는 순간 박살이 나면서 사방에 피가 튀어 올랐다.
가슴을 뚫고 솟아오른 갈비뼈. 부서진 척추와 목뼈.
“크헉.”
그룬헤잘드가 입에서 울컥 피를 토했다.
“마, 맙소사…….”
헌터들이 공포에 질린 채 그룬헤잘드의 마지막을 지켜보고 있었다.
탁!
테라스에 있던 바토리가 바닥으로 훌쩍 뛰어내렸다.
“마족!”
이번에는 조금도 변장하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에 헌터들은 전부 깜짝 놀랐다.
이번 그룬헤잘드의 침공에서 워낙 많이 긴장하고 겁을 먹었었기 때문에 마족 뿔만 봐도 질겁하는 것이다.
하지만 더 혼란이 커지기 전에 윤성이 정리했다.
“아군입니다. 그리고 일산 때도 우릴 도왔던 사람이에요.”
“뭐라고요?”
“이제 보니 전에 그 사람 같기도…….”
김성인이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
“그 바토리가 맞습니다. 자세한 설명은 나중에 하죠. 힘들어서 더는 아무것도 못 해 먹겠어요.”
윤성이 바닥에 풀썩 주저앉았다.
44. 인계의 관리자
“이건…… 마족들의 보스입니까?”
김성인이 그룬헤잘드를 보고 물었다.
그를 비롯한 헌터들 입장에서는 게이트를 열고 나타난 마족들의 지휘관이었으니 일반적 개념의 ‘보스’가 맞다.
하지만 윤성에겐 그 단어가 어색하다. 마왕의 존재에 대해서 알고 있으니까.
“분명 이번 게이트의 보스가 맞긴 한데 뭐랄까……. 중간 보스 같은 거?”
헌터들은 어리둥절한 표정이다.
“수고했다.”
바토리가 윤성에게 말했다.
그녀는 차분한 눈빛으로 그룬헤잘드를 내려다보았다.
“큭, 하…… 하하.”
그룬헤잘드가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그는 마계 언어로 윤성에게 말했다. 다른 헌터들은 들을 수가 없었고 윤성과 바토리만이 이해할 수 있었다.
“콜로라를 꼭 막고 싶었는데. 결국엔 이렇게 되는구나.”
“또다시 얘기하는 거지만, 난 콜로라가 아냐.”
윤성이 말했다. 그의 유창한 마계 언어에 김성인과 헌터들이 깜짝 놀란 표정이 되었다.
“마지막까지 거짓말이냐?”
그룬헤잘드가 빙긋 웃으며 말했다.
“진짜래도.”
그룬헤잘드가 피를 울컥 토하더니 상체를 일으켜 세웠다. 그는 떨리는 팔로 기어가 벽에 몸을 기댔다.
“그렇다면 믿어지지 않지만 네가 경계 밖에 있다는 뜻인데, 인계 입장에선 축하할 일이구나. 드디어 인계에도 관리자가 생겼다는 거니까.”
“관리자?”
“마계에는 마왕, 엘리지아에겐 퀸. 모든 차원에는 그 차원을 보호하는 강력한 지배자들이 있다. 인계에는 그게 없을 것 같으냐?”
“무슨 소리야? 그게 나라는 거야?”
“하하, 정말 우습구나. 자신의 숙명을 이해도 못 하는 관리자라니. 게다가 그 약해빠진 전투력은. 큭, 쿨럭!”
그룬헤잘드가 피를 왈칵 토했다.
“나한테 엄청 터졌으면서 약해빠지긴 무슨.”
“내가 마왕이나 퀸과 싸웠다면 쓰레기 처리장 앞에서 이미 죽었을 것이다. 관리자가 자신의 힘 외의 것에 의존하는 꼴이라니.”
“…….”
“순수한 전투력도, 정신력도, 모든 게 모자란다. 그 정도론 콜로라를 절대 막을 수 없다. 대체 수호자는 무슨 생각…… 크헉!”
“말 그만해. 너 숨넘어가겠다.”
“인간. 천계로 가라. 그곳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살펴보아라. 그러면 진정한 위협이 무엇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무슨 일이 있었는데?”
그룬헤잘드는 약간 비참한 표정이 되었다.
“말로 설명하기엔……. 역사가 너무 길군……. 네가 직접 보는 수밖에 없다. 그곳은 일곱 차원 중에서 가장 융성했던 곳이고 지금은 멸망한 곳이니.”
그룬헤잘드는 바토리에게 고개를 돌렸다.
“후우.”
그가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바토리, 나는 평생을 전쟁터 속에서 살아온 남자다. 이렇게 수다나 떨면서 숨이 멎는 미지근한 죽음은 내게 어울리지 않는다.”
“무슨…….”
“네가 인계의 관리자와 동료가 된 것도. 수호자의 뜻이 있을 거라 생각한다.”
그룬헤잘드가 말했다. 그는 떨리는 손으로 자신의 장검을 내밀었다.
“날 죽이고 내 영지를 네가 가져라.”
얼떨결에 장검을 받아든 바토리가 화들짝 놀랐다.
“뭐라고?”
“그리고 이것을.”
콰직!
그룬헤잘드가 갑자기 자신의 가슴 속에 주먹을 쑤셔 박았다. 피가 꿀렁꿀렁 흘러나왔다.
추우욱.
그가 안에서 꺼낸 것은 손톱만 한 크기의 루비 한 조각이다.
“내 힘의 정수가 담긴 루비다. 너는 긍지 높은 귀족이니 그 힘을 바른 데 쓸 거라 믿는다.”
그룬헤잘드가 천천히 눈을 감았다.
“난 이제 좀 쉬어야겠군. 가급적 빨리 끝내라.”
바토리는 그룬헤잘드의 루비와 장검을 꽉 쥐었다.
손이 떨리지만 큰 남자가 맡긴 마지막 결심이었다.
“오랜 세월 수고하셨습니다. 편히 쉬십시오.”
쫘악!
바토리의 검이 그룬헤잘드의 목을 쳤다.
<마계의 패왕 그룬헤잘드를 죽였습니다.>
갑자기 메시지창이 떠올랐다.
‘이럴 수가!’
여태껏 어떤 적을 죽였다고 메시지창이 떠오르는 경우는 단 하나밖에 없었다.
탑에서 레이드 보스를 죽였을 때.
게다가 사실 엄밀히 따지면 죽인 건 바토리인데?
“엄청난 힘이군.”
루비를 든 바토리의 손이 덜덜 떨렸다. 그룬헤잘드가 죽으면서 루비가 본격적으로 활성화된 것이다.
“그리고 이건 아르동과 다른 타입이다.”
갑자기 바토리가 루비를 한입에 삼켜 버렸다.
화아아악!
바토리의 몸에서 뜨거운 열기와 김이 뿜어져 나왔다. 놀란 김성인과 헌터들이 뒷걸음질을 쳐서 거리를 만들었다.
“괜찮아?”
윤성이 물었다.
“아주 좋다.”
바토리가 약간 흥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 무엇에게도 패배할 것 같은 기분이 안 드는구나.”
바토리가 그룬헤잘드의 장검을 꽉 쥐었다.
“대단하군.”
윤성이 손뼉을 쳤다. 그리고 아리를 힐끔 쳐다보았다.
“너 이제 쟤한테 까불면 안 되겠다.”
“조금만 기다려주십시오, 주인님. 메탈로이드계에 가서 엔진 터지기 직전까지 과충전해서 돌아오겠습니다. 진짜 강자가 누군지 보여드릴…….”
“됐어, 인마. 농담이야.”
윤성이 아리의 이마를 톡 쳤다.
“마스크맨, 잠깐 따로 얘기할 수 있겠느냐?”
바토리가 헌터들을 힐끔거리며 윤성에게 말했다.
윤성은 김성인에게 양해를 구하고 바토리와 함께 자리를 옮겼다.
아리가 졸졸 따라왔지만 바토리는 개의치 않았다.
“저 하등한 철덩이는 얘길 들어도 상관없다. 어차피 이해 못 할 테니.”
“주인님께 해를 끼치지는 않을까 염려되어서 따라온 것뿐입니다. 당신 얘긴 관심도 없으니 걱정 마시길.”
이윽고 백마 길드의 박살 난 광장 앞 폐허 더미 근처.
바토리는 잠깐 뜸을 들이더니 얘길 시작했다.
“그룬헤잘드는 본래 마계의 군주였다.”
어쩐지 그녀는 쓸쓸한 표정이다.
“하지만 현 마왕이 나타나자 그에게 공손히 자리를 내주고 물러났다. 고향이었던 라센 북부로 돌아와 제후가 되었지.”
“그래?”
“하지만 아직도 그룬헤잘드가 진정한 군주라고 믿는 이들이 많이 있다.”
윤성은 약간 관심이 생겼다.
“그래서 마왕과 권좌를 놓고 결투를 한 건가?”
“아니. 마왕과 결투를 벌인 건 마왕의 정책에 반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어떤 정책?”
“다른 차원을 침공하지 않는 것.”
“정말이지 전쟁광이군.”
“글쎄.”
바토리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사실 나도 잘 모르겠다. 하나 겉으로 비치는 것처럼 그저 전쟁을 좋아하기만 하는 남자는 아니다. 싸워야 할 때 물러나지 않을 뿐.”
“그룬헤잘드와 친했냐?”
“존경했지. 한때.”
“죽어서 슬퍼?”
바토리가 약간 인상을 썼다.
“내가 그런 말랑한 감정을 느낄 것 같으냐? 내 주인은 마왕 한 분뿐이다. 그룬헤잘드는 마왕의 정책을 어겼고 죗값을 치렀을 뿐이다. 다만…….”
그녀의 입술이 머뭇거리며 몇 번 달싹였다.
“동해에서 있었던 일을 기억하느냐?”
“물론이지. 얼마나 개고생을 했는데.”
“난 그것에 대해서 그룬헤잘드에게 따졌었다. 왜 마왕의 뜻에 반하고 인계를 건드리냐고. 마왕께 전부 고하겠다고 말이야.”
“그런데?”
“그룬헤잘드는 나와 말다툼을 잠깐 벌이고는 날 가둬 버렸다. 그룬헤잘드답지 않은 짓이었지. 자신의 뜻에 설득되지 않는다고 귀족을 가두다니.”
바토리가 고개를 저었다.
“그때 그룬헤잘드는 너무 초조해 보였어.”
“너한테 뭐라고 했었는데?”
“그 때문에 지금 널 불러낸 거다. 그룬헤잘드는 당시에 이해할 수 없는 얘기를 계속 했다.”
바토리가 말했다.
“하지만 네가 처형인의 샘 앞에서 변신했던 것과 그걸 본 그룬헤잘드의 반응을 고려하면 지금은 약간 알 것 같기도 하군.”
윤성이 고개를 갸웃했다.
바토리가 그를 향해 고개를 똑바로 들었다.
“그룬헤잘드는 내게 콜로라성인이 이 땅을 침공하려고 한다고 했다. 지구의 일곱 차원 전체가 위기에 처해 있다고 했지.”
“음.”
“그리고 그 누구도 그걸 막을 수 없을 거라고 했다. 마왕조차도. 오직 이 세계에는 멸망뿐이라고 했지.”
그렇게 얘기했군.
에어포스와 논의했던 최악의 시나리오가 맞아떨어지는 순간이다.
핏빛야수가 단순히 던전이나 몇 개 털고 마정석이나 주우려는 외계의 헌터가 아니라 지구를 침공하려 한다는 것.
그리고 엘리지아 이상의 위협을 줄 수 있는 강력한 무리라는 것.
후자의 경우에는 그룬헤잘드는 핏빛야수의 능력에 대해 훨씬 더 높이 평가했다.
뉴욕에서 퀸과 마더가 보낸 군대들을 막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거 어쩌면 진짜 큰불은 뒤에서 활활 타고 있었던 것 아닐까?
‘그놈들은 폴리모프를 할 수 있다.’
침공이라는 게 그룬헤잘드나 퀸, 마더처럼 단순히 힘으로 이 땅을 짓밟는 게 아니라 변신하고 이 사회에 들어와 있다면?
윤성의 팔에 오싹 소름이 돋았다.
바토리가 물었다.
“그래서 네게 궁금한 게 생겼다. 처형인의 샘 앞에서 네가 변신했던 것이 콜로라성인이라면, 넌 콜로라성인에 대해서 뭘 얼마나 알고 있는 거지? 아니면 네가 정말 콜로라성인인가?”
“여러 번 얘기했지만 난 인간이야. 변신은 우연히 얻게 된 스킬일 뿐이고.”
“널 믿겠다.”
“그래도 좋아.”
윤성은 인벤토리를 열었다.
“바토리, 이걸 좀 조사해 줄 수 있냐?”
“이게 뭔데? 편지?”
“옛날에 내가 콜로라성인 하나를 죽이고 얻은 거다. 암호문 같은데 읽을 수가 없어.”
바토리는 편지를 펼쳐 들었다.
콜로라의 문자들은 이미 통역 스킬에 포함되어 있는 것이었지만 그녀는 생전 처음 보는 것이었다.
낯설다는 것을 느끼는 순간 그녀의 패시브 통역 스킬이 발동했다.
글자 하나하나의 의미가 한 박자씩 간격으로, 머릿속에 실시간 입력되었다.
바토리의 입이 약간 벌어졌다.
“놀랍군.”
그녀가 감탄했다.
“이런 언어가 존재했다니. 그리고 마계의 통역 마법이 이에 대해서 다루고 있었다는 것은……. 이미 마계는 이들과 접촉한 적이 있는 건가?”
“얘기가 그렇게 될 수도 있겠네.”
“난 처음 보는 글자들이었다. 하지만 이건 암호문 같구나.”
“암호요?”
갑자기 아리가 눈을 빛내면서 끼어들었다.
“우리 얘기엔 관심 없는 것 아니었느냐? 뭐, 네 천박함이야 하루이틀 일이 아니니 난 상관없다만.”
“바토리 얘기에 관심 없었을 뿐이고 주인님 얘기엔 항상 귀를 기울이고 있죠.”
아리가 자신의 가슴을 탕 쳤다.
“그리고 암호 해독은 제 전문입니다. 제가 한 번 살펴볼까요?”
“이 언어를 아느냐?”
바토리가 물었다. 아리는 고개를 저었다.
“제 데이터에는 없는 문자군요.”
“내가 이 문자의 의미들을 알려주마. 그걸 토대로 분석해 보아라.”
“좋습니다.”
“좋아.”
윤성이 손뼉을 짝 쳤다.
“난 나대로 콜로라성인에 대해 조사해 보겠어.”
“무슨 수로?”
바토리가 물었다.
윤성이 빙긋 웃었다.
그는 롬펠 행성 출신, 콜로라의 꺼삐딴 신입 전사의 신분을 가지고 있었다.
‘꺼삐딴 길드 본사에 가봐야겠군.’
굉장한 모험이 되겠지만 그밖에 할 사람이 없었다.
하지만 그 전에 할 일이 하나 더 있다.
‘뉴욕.’
그쪽을 해결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