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7
레벨업 속도는 9.8m/s^2 137화
“사실 인형술사님이 주입해 준 마력이 거의 절반은 사라졌죠. 하지만 바로크 하나 제압하기엔 충분합니다.”
아리가 손바닥의 광자포에서 마력을 끌어올렸다.
그룬헤잘드가 장검을 겨누고 아리를 향해 달려드는 바로 그 순간이었다.
콰장창!
창문이 박살 났다. 블라인드를 부수고 무언가가 대표실 안으로 난입했다.
차희가 입을 딱 벌렸다. 그룬헤잘드도 마찬가지다. 아리만이 태연히 장난기 어린 말을 던졌다.
“주인님, 조금만 일찍 오시지 그랬습니까. 제가 카운트할 때 오셨으면 정말 멋졌을 텐데.”
“휴우.”
마스크맨의 몸에서 물이 뚝뚝 떨어졌다. 윤성은 답답한 듯 마스크를 만지작거렸다.
“물비린내 때문에 질식사하는 줄 알았네.”
벗어던지고 싶지만 인계니까 조심해야지.
“어떻게 살아 있는 거지?”
그룬헤잘드가 믿을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살아 있다 뿐이냐? 이 마력은 안 느껴지고?”
윤성이 손가락을 들어 올렸다.
<빛의 탄환 발동!>
팡! 파팡!
연속으로 발사된 여덟 줄기의 섬광이 기사 셋과 병사 다섯을 맞추었다.
그들의 가슴에 주먹만 한 구멍이 뻥뻥 뚫렸다.
“크억.”
“으윽.”
적들은 저항도 한 번 못 하고 바닥에 풀썩풀썩 쓰러지고 말았다.
그룬헤잘드의 얼굴에 당혹감이 비쳤다.
“어떻게 그만한 힘을?”
샘에 들어가더니 죽기는커녕 훨씬 더 강해져서 나타났다. 어떻게 된 거지?
이젠 그룬헤잘드 자신과 거의 비슷한 마력이 느껴질 정도다.
“으아악!”
갑자기 대표실 바깥, 빌딩 로비 방향에서 비명 소리가 울려 퍼졌다.
“무슨 일이냐?”
깜짝 놀란 그룬헤잘드가 대표실 문 밖을 힐끔거렸다. 윤성이 빙긋 웃으며 답했다.
“바토리가 네 부하들을 싹 쓸어버리는 소리야.”
“바토리도 살아 있단 말이냐?”
“물론이지.”
“하지만 바토리의 힘이 그 정도일 리가 없다.”
“나도 파워업 했잖아? 지금은 그 정도야. 아리의 과충전 엔진 같은 걸 하나 들고 있거든. 역시 극과 극은 통한다고 그렇게 둘이 싸우더니 하는 짓은 똑같더라고.”
윤성이 단검을 빙글빙글 돌리며 그룬헤잘드 앞에 섰다.
“늦어서 미안해, 차희.”
차희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왜 이제 왔어. 난 네가 죽은 줄 알고…….”
“미안. 하지만 꼭 해결해야 하는 게 하나 있었어.”
“해결해야 할 것?”
바로 그룬헤잘드의 고유 스킬, ‘버프 제거’에 대한 방어 수단.
윤성의 눈이 반짝였다.
그룬헤잘드가 고유 스킬을 쓸 듯 손을 집어 드는 순간, 갑자기 윤성이 엉뚱한 소리를 내뱉기 시작했다.
“내가 콜로라 군대를 소집해서 네 영지를 침공하게 했다.”
“뭐라?”
“콜로라 최고의 길드인 꺼삐딴의 우리 전사들은 탑에서 트레이닝하고 있었다. 난 너와 싸우면서 마계의 위치를 파악했고, 그 정보를 본대에 전송해 줬지.”
“무슨…….”
“그 증거로 아직도 네 2군이 도착하지 않았잖아? 이상하지 않아? 게이트가 충분히 다시 열리고 추가 병력이 증원되어야 할 시간 아닌가?”
물론 그것은 거짓말이었다.
충원되지 않는 이유는, 바토리와 함께 인계로 돌아온 후 바토리가 게이트를 닫아버렸기 때문이다.
물론 루비에 담긴 엄청난 마력을 쓴다고 해도 그만한 게이트를 닫는 것은 사실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그룬헤잘드가 통과한 이후 그 게이트는 이미 불안정한 상태가 되어 있었다.
그리고 바토리가 게이트를 닫아버렸다는 사실을 모르는 그룬헤잘드는 윤성의 거짓말에 잠깐 현혹되었다.
곧바로 정신을 다잡았지만 이미 늦었다.
‘스킬이……. 발동되지 않는다…….’
스킬 <버프 제거>를 써서 윤성을 제압하려던 그룬헤잘드가 충격으로 얼어붙었다.
분명히 놈은 강력한 버프를 사용하는 타입이다. 그룬헤잘드 정도의 기감이면 그걸 한눈에 알아볼 수 있다.
때문에 영지 남부 쓰레기 처리장 근처의 전투에서도 버프 제거를 바로 써서 놈을 제압할 수 있었다.
‘설마 버프가 아니라 순수 능력치가 그 정도로 치솟은 것인가?’
그룬헤잘드는 잠깐 혼란에 빠졌지만 곧 진짜 이유를 알아내고 말았다.
“이럴 수가…….”
그룬헤잘드의 상태창에 떠오른 메시지.
<디버프 : 스킬 봉쇄(버프 제거 4,219초>
랜딩으로 얻은 버프 스킬이다.
저걸 먹으려고 9,400미터에서 랜딩을 일곱 번 했다. 처형인의 샘에 담긴 마력을 거의 다 고갈시키면서. 사실상 남은 건 이제 바토리가 루비에 들고 있는 게 전부다.
“바토리가 그랬지. 혹할 만한 말을 던져서 의식에 빈틈을 만들고 그 사이에 디버프를 걸면 잘 들어간다고.”
윤성이 주먹을 불끈 쥐었다.
“네 영지가 침공받고 있다는 소식이 꽤 충격이었나 보지? 미안. 그건 거짓말이었어.”
“감히 콜로라 따위가 날 농락해?”
그룬헤잘드의 눈에서 광기가 튀었다.
‘온다.’
윤성이 긴장감을 바짝 끌어올렸다.
“아리! 차희 지켜!”
“네!”
달려드는 그룬헤잘드를 정면에서 윤성이 몸으로 막아섰다. 엄청난 마력이 충돌하면서 사방에 끔찍한 압력이 퍼져나갔다.
아리가 재빨리 몸으로 차희를 감싸 마력의 풍압에서부터 보호했다.
검을 쥔 그룬헤잘드의 손이 파르르 떨렸다. 단검 하나로 막아선 놈이 조금도 밀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히려 반격까지 날렸다.
콰앙!
윤성의 발차기에 나가떨어진 그룬헤잘드가 바닥을 굴렀다.
“여기서 탈출해라! 차희를 안전한 데 데려다줘!”
윤성이 아리를 향해 소리쳤다.
“알겠습니다! 탈출하시죠. 안주인님.”
“아, 안주인?”
아리는 차희를 번쩍 안아 들고는 창문을 깨고 그대로 튀어나갔다. 5층 아래의 테라스에 착지했다.
“앗!”
그곳에 바토리가 있었다. 피가 뚝뚝 떨어지는 장검 한 자루를 든 채. 기사 하나를 죽이고 빼앗은 것이었다.
“바로크! 이 아래는 전부 정리했습니까?”
아리가 물었다.
“전부 처리했다, 철덩이야. 그룬헤잘드의 병력 중 이 아래에 살아 있는 놈은 더 이상 없다.”
“좋아요. 그럼 올라가서 큰 주인님을 도와주시죠.”
“물론이다. 넌 어딜 가는 길이냐?”
“저는 안주인님을 안전한 곳으로 피신시켜야 합니다.”
“아냐, 나 혼자 갈게!”
차희가 얼른 아리의 품에서 빠져나왔다. 분명 이 아래는 전부 정리되었다고 했다. 윤성에게 더 많은 전력을 보충해 주고 싶었다.
“안 됩니다. 안전한 데로 제가 직접 모셔다 드리겠습니다.”
“나도 네 주인이라며? 내 말 들어! 올라가서 윤성이 도와줘.”
“그 명령은 처리할 수 없습니다. 큰 주인님의 명령이 저한텐 최우선 순위거든요.”
아리는 다시 차희를 안아 들고는 무시무시한 속도로 바깥 도로를 질주했다.
그의 데이터베이스에는 김성인과 헌터들이 모여 있는 곳의 위치 정보가 있었다.
***
김성인, 차예빈, 최수혁을 중심으로 다수의 A급 헌터들은 비상 대책 위원회를 열었다.
그들은 에어포스와 영상 통화를 연결하여 회의를 진행하는 중이었다.
“병사들 하나하나는 둘째 치고 마족들의 보스가 너무 강합니다. SS급 이상이에요!”
김성인이 소리쳤다.
“지금 가는 길입니다.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에어포스가 말했다.
비행 스킬을 사용하면 한국까지 더 빨리 갈 수 있지만 마력과 체력이 거의 고갈될 것이다.
에어포스는 어쩔 수 없이 국내로 가는 제트기에 몸을 실었던 것이다.
마정석 특수 통신기에 대고 에어포스가 말했다.
“마스크맨은 아직 나타나지 않았습니까?”
“아직입니다.”
“일단 제가 갈 때까지 모든 피해를 최소화해야 합니다. 마족들의 보스를 제가 처리할 테니, 모든 헌터들을 서울에서 대피시키세요.”
“알겠습니다.”
“백마 길드 사정은 지금 어떻습니까?”
“지휘부가 붕괴되었으니 상태가 말이 아닙니다. 홍창민 헌터님이 대신 지휘를 맡고 있지만.”
“홍창민 헌터님 거기 있습니까?”
에어포스가 물었다.
홍창민이 통신기를 넘겨받았다.
“네. 홍창민입니다.”
“홍창민 헌터님. 마스크맨은 반드시 돌아올 겁니다.”
“네? 뭔가 아시는 게 있습니까?”
“아뇨. 하지만 블라디보스토크 때도 그랬잖아요? 그 사람은 쉽게 꺾이거나 무너지지 않을 겁니다. 반드시 돌아올 거예요.”
“네…….”
“그때 그의 전력에 보탬이 되려면 지금 낙담하고 있어선 안 됩니다. 헌터들을 재정비하고 전투 준비를 해요.”
말 끝나기 무섭게 갑자기 대책 위원회 회의실 밖에서 비명이 울려 퍼졌다.
“으악!”
“메탈로이드!”
“아냐! 이거 아까 그 로봇이잖아.”
“우리 편이야?”
“그렇다고. 진정해, 다들!”
“아니, 차희 씨 아닙니까?”
혼란한 헌터들이 웅성거렸다. 아리는 차희를 데리고 곧바로 회의실에 난입했다.
“여기 얌전히 계세요.”
아리가 차희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뭐, 뭔데?”
최수혁이 황당한 듯 아리와 차희를 번갈아 가며 쳐다보았다.
갑자기 엄청난 관심을 받게 된 차희는 귀가 약간 붉어졌다.
그녀는 회의실의 헌터들을 쓱 둘러보고는 말했다.
“마스크맨이 왔어요.”
윤성과 그룬헤잘드의 전투는 막상막하였다. 스킬 돌풍으로 치솟았던 높이는 9,427미터.
순수 능력치와 합쳐서 전반적으로 10,000점을 넘었다.
소문으로는 에어포스가 빛의 강체를 썼을 때 각 능력치가 10,000점 정도라고 했지.
SS급 헌터 수준의 전투력을 갖추게 되었지만 그럼에도 그룬헤잘드는 넘기 힘든 벽이다.
일단 윤성이 그만한 전투력을 발휘할 만큼의 경험치가 부족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룬헤잘드는 차원 게이트를 열 때 써버린 마력을 아직 보충하지 못한 상태다.
게다가 마정석 폭탄을 방어할 때 펼쳤던 장막 역시 큰 힘을 소모시켰다.
남은 체력과 능력치만을 따진다면 윤성이 근소하게 더 우위다.
그러나 그룬헤잘드에게는 수없이 긴 세월 동안 수많은 전쟁터를 누벼온 경험치가 있다.
특히 검술에 있어서는 아예 상대가 안 되었다. 윤성은 급속 냉각과 빛의 탄환, 단검 투척을 주력으로 한 원거리 전투로 방향을 잡았지만 쉽지 않았다.
“헉. 헉.”
전투가 거듭됨에 따라 윤성의 호흡이 거칠어졌다.
정말이지 소름 돋게 강한 적이다. 이 정도의 버프를 갖고 있는데도 처리하기가 어렵다니.
신민수나 일호도 말도 안 되는 전투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이놈이 더 까다롭다.
그룬헤잘드는 딱딱하게 굳은 표정 그대로 조금의 지친 기색도 없었다.
그가 장검으로 바닥을 쿡 찔렀다.
“내 영지에서 네가 바토리와 함께 달아날 때, 왜 바로 뒤쫓지 않았는지 아느냐?”
쓰레기 처리장 앞에서의 전투를 얘기하는 것이었다.
당시 랜더의 손목시계로 버프를 재생한 윤성은 바토리와 함께 온 힘을 다해 달아났고 그룬헤잘드는 뒤쫓지 않았다.
“왜지?”
“마계의 최상위에 있는 귀족들은 자신에게 제약을 걸어서 강력한 스킬을 얻곤 한다. 네게 썼던 버프 제거도 그중 하나였지.”
그룬헤잘드가 말했다.
“버프 제거는 천계와의 전쟁 때 쓰던 스킬이다. 천사들은 대개 막강한 버프로 무장하고 전투에 나서니까 말이다.”
“그랬군.”
“그 제약 조건으로 나는 버프 제거를 사용한 후 장거리를 달릴 수 없다.”
“그래서 못 쫓았던 거라고?”
“그래. 하지만 버프 제거는 엘리지아와 싸울 때는 별 도움이 안 되지. 내가 퀸의 침공을 방어할 때는 무슨 스킬을 썼는지 아느냐?”
그룬헤잘드의 몸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어마어마한 마력이 들끓었다.
그의 장검이 찔러놓은 바닥에서부터 붉은 피가 흘러 번지기 시작했다.
개굴개굴-
마계의 독 개구리들이 핏물 사이에서 올라와 울었다.
붉은 피는 바닥 면에서부터 스멀스멀 벽을 침식하여 천장까지 덮어버렸다.
대표 사무실의 사방이 완전히 핏물로 도배되어버린 셈이다.
“스스스.”
바닥에 뱀 한 마리가 기어 다니고 있었다.
그룬헤잘드는 약간 피곤해 보였지만 눈빛은 그대로였다.
“블러드 스페이스. 내가 가진 최고의 스킬이다.”
그룬헤잘드가 윤성을 검으로 겨누었다.
이 공간은 엘리지아의 재생을 막고 그들끼리의 정신 교감을 차단한다.
쿠구구구.
핏물 한 부분이 소용돌이치며 일어나기 시작했다. 바닥에서 헤엄치던 뱀이 그 안에 들어가 있었다.
핏물은 거대한 뱀의 모양으로 변하더니 윤성의 앞으로 위협적으로 접근했다.
쉬이이익.
뱀의 입에서 쇳소리가 난다.
<급속 냉각 발동!>
핏물이니 얼려버릴 수 있을 거라 생각했지만 오산이었다. 손에서 뿜어진 냉기는 허공에서 흩어져 버렸고 뱀이 윤성에게 달려들었다.
쾅!
거대한 아가리에 물린 윤성은 그대로 벽에 처박혔다.